< 꿩 먹고 알 먹고 3 >
주명우는 침중한 표정으로 강하진을 바라봤다.
지금 그들이 있는 곳은 폐공장 안이었다.
거성은 이제 끝났다. 부하는 다 죽거나 태산에 포섭되었고, 몇 개 있던 사업체도 다 태산 쪽으로 넘어가는 중이었다.
“그놈들이 결국 여기도 찾아낼 겁니다. 사람 쫓는 데 아주 귀신같은 놈들을 데리고 있더군요.”
주명우의 어조는 짙은 체념에 물들어 있었다.
강하진은 굳이 위로하지도 그렇다고 괜찮을 거라고도 말해주지 않았다. 그저 가만히 그가 하는 말을 듣기만 했다.
주명우도 지창기와 다를 바 하나 없는 놈이었다.
지금이야 전쟁에서 지는 바람에 비 맞은 개처럼 처량한 꼴이 되었지만, 그도 암흑가를 호령하던 조직의 보스였다.
직접, 혹은 간접적으로 죽인 사람의 수를 손가락, 발가락을 다 써도 헤아리지 못할 것이다.
그와 함께 있는 자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일말의 동정심도 생기지 않았다.
강하진이 원하는 건, 저들이 최대한 오래 살아남아 지창기를 갉아먹는 것이었다.
주명우는 그 뒤로도 한동안 신세한탄을 했다.
그렇게 속에 있는 것들을 좀 쏟아내서 그런지 조금씩 눈빛이 살아나기 시작했다.
“후우. 너무 나 혼자서만 떠든 것 같군요. 자, 이제 허심탄회하게 얘기해 봅시다. 날 왜 구했소? 뭘 원하는 거요?”
강하진은 그제야 천천히 입을 열었다.
“원하는 걸 얘기하면 다 들어주기는 할 건가?”
“뭘 원하느냐에 따라, 그리고 나한테 뭘 줄 수 있느냐에 따라 다르지 않겠소? 물론······ 날 구해준 값은 톡톡히 치르겠소.”
오히려 저렇게 나오니 얘기가 편했다. 주명우는 자신의 가치가 충분하다는 것을 증명하고 싶어했다.
“일단 구해준 값부터 먼저 치르겠소.”
주명우가 품에서 작은 USB하나를 꺼냈다.
“스위스 은행 계좌 정보요. 500만 달러가 들어있지. 그리고······ 이게 암호요.”
주명우가 메모지에 뭔가를 열심히 적어서 USB와 함께 내밀었다. 강하진은 그걸 받으며 고개를 끄덕이고는 말했다.
“여기에 더해서 거성이 보유한 던전 정보도 받고 싶다.”
“던전?”
주명우가 살짝 인상을 찡그렸다.
“진짜 원하는 건 그거였군? 뭐······ 좋소. 어차피 갖고 있어봐야 난 쓰지도 못할 텐데 아까울 거 없지.”
주명우는 또 USB하나를 꺼냈다. 아마 도망치면서 이런 식으로 정보를 챙긴 모양이었다.
“거기에는 우리가 따로 조사한 태산이나 다른 조직의 던전 정보도 좀 있으니 아마 확인해보면 제법 재미있을 거요.”
그 말에 강하진이 눈을 빛냈다. 안 그래도 던전이 더 많이 필요했는데 잘 되었다.
그러다 문득 그냥 가진 USB를 몽땅 빼앗으면 되는 거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생각을 읽기라도 하듯 주명우가 얼른 말을 덧붙였다.
“암호는 다 내 머릿속에만 있소. 날 죽이면 아무것도 얻지 못할 거요. USB도 곳곳에 감춰놨고.”
강하진의 눈빛이 다시 잠잠해진 걸 확인한 주명우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가 보기에 강하진은 보통 각성자가 아니었다. 그러니 어느 정도 힘을 찾을 때까지는 조심해야만 한다.
욱해서 주먹 한 방 내지르면 머리가 터져 죽을 수도 있을 테니까.
“자, 우리 시간도 별로 없는데 이러지 말고 빨리빨리 서로 원하는 바를 꺼내 봅시다. 선생이 진짜 원하는 게 뭐요?”
강하진은 잠시 뜸을 들이다가 대답했다.
“지창기가 엿 먹는 거.”
주명우는 예상 못했다는 듯 멍하니 강하진을 바라보다가 이내 크게 웃었다.
“으하하하! 진작 말씀해주시지 그러셨소! 으하하하! 아주 잘 찾아오셨소. 지창기 그 새끼를 엿 먹이는 데 나처럼 쓸모 있는 사람은 없지! 으하하하!”
주명우가 웃음을 뚝 그치고 날카롭게 번득이는 눈으로 강하진을 바라봤다.
그의 눈빛 속에서 욕망과 희망이 넘실거렸다.
강하진은 그 눈을 똑바로 마주보며 손에 든 USB를 흔들었다.
“고작 이거 하나로는 미래가 없다는 거, 알고 있겠지?”
주명우는 조금도 지체하지 않고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오. 그거 하나로 입 씻을 생각 없소. 그러니 도와주시오.”
“조직을 재건하고 싶은 건가?”
주명우가 고개를 저었다. 그의 눈에서 불이 뿜어져 나오는 듯했다.
“이미 조직은 끝났소. 다시 조직을 만들어 봐야 예전의 거성으로는 절대 돌아갈 수 없소. 난 싸움에서 진 개니까.”
강하진은 계속 말해보라는 듯 주명우를 가만히 쳐다봤다.
“그저 그런 조직의 보스로 빌빌거리면서 다른 조직들 눈치나 볼 바에는 그냥 화끈하게 은퇴하는 게 낫소.”
주명우는 잠시 뜸을 들였다. 3분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어금니를 꽉 물었다.
“동남아에 내가 마련해 놓은 거점이 있소. 일이 마무리 되면 거기로 보내주시오.”
강하진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주명우가 방금 3분의 고민을 통해 내린 결정을 쏟아냈다.
“그렇게 하면 한국에 있는 내 모든 걸 당신에게 주겠소.”
강하진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난 뒤통수 맞는 걸 세상에서 제일 싫어하는 사람이야. 그거 하나만 명심하도록.”
“알겠소.”
“사람을 구해주지. 물불 안 가리고 싸울 수 있는 사람들로.”
그 말을 들은 주명우의 눈이 번득였다.
* * *
꽝!
지창기의 주먹에 탁자가 반으로 쪼개졌다. 지창기의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그걸 지켜보던 부하들이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해? 놓쳐? 그것도 거성에서 제일 중요한 놈들만 골라서?”
“죄, 죄송합니다.”
지창기는 이를 악물고 숨을 골랐다. 여기서 성질을 부려봐야 남는 게 없었다. 지금은 차분히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
“사업체 병합은 어떻게 되고 있지?”
“순조롭게 진행 중입니다. 일단 조직원들 중 절반 이상이 우리 아래에 들어왔고, 보유 사업체들도 조만간 병합 작업이 마무리됩니다.”
지창기는 인상을 팍 썼다. 거성의 사업체들은 빛 좋은 개살구였다.
실속이라고는 없는 것들이 대부분이었다.
알맹이는 거성의 회장인 주명우가 다 챙긴 것이 분명했다. 그러니 도망친 그놈들을 잡아야 진짜 병합이 끝나는 것이다.
“돈이 많으니 무슨 짓을 저지를지 모르니까 확실히 찾아내. 알았어?”
“예, 형님. 너무 걱정 마십시오. 지금 샅샅이 뒤지고 있으니 금방 찾아낼 겁니다. 그놈들이 할 수 있는 일이라야 뻔하지 않겠습니까?”
“알았으니 나가 봐. 그리고 애들 좀 소집하고.”
지창기의 부하는 그가 뭘 원하는지 바로 알아듣고 고개를 숙였다.
“바로 연락 때려서 본사로 소집하겠습니다.”
지창기가 고개를 끄덕이며 손을 휘휘 내저었다. 그의 부하가 조용히 밖으로 나갔다.
지창기는 사무실에 혼자 남자, 벽에 걸린 그림을 치웠다. 그곳에 커다란 금고의 문이 있었다.
능숙하게 금고를 열고 그 안에 보관 중인 장비들을 꺼냈다.
던전에 들어갈 때 입는 장비였다. 갑옷과 무기, 악세사리를 비롯해 투명한 병에 담긴 각종 포션들도 차곡차곡 정리되어 있었다.
지창기는 장비를 모두 착용하고 필요한 소모품까지 챙긴 다음 지하주차장으로 향했다.
팀원들도 본사에 오면 바로 지하주차장으로 올 것이다.
지하주차장에 도착한 지창기는 주차장과 이어진 문을 지키는 부하들을 쳐다봤다.
“별 일 없었지?”
“예. 형님. 여긴 항상 똑같습니다.”
“그렇겠지. 그래도 방심하지 마라. 사고는 방심하는 순간 터지는 법이니까.”
“명심하겠습니다, 형님.”
“그래. 애들 오면 들여보내고.”
“예, 형님.”
지창기는 문을 열고 주차장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그대로 굳어 버렸다.
“······ 어디 갔어?”
문을 연 채 살기어린 소리로 중얼거리는 지창기의 모습에 그의 부하들이 바짝 긴장했다.
“혀, 형님. 왜 그러십니까?”
지창기가 천천히 고개를 돌려 부하들을 노려봤다.
“저 안에 있던 던전 어디 갔느냐고.”
그 말에 부하들이 화들짝 놀라 다급히 문 안으로 들어갔다. 그 안에 원래 있어야 할 던전 포탈이 보이지 않았다.
“모, 모르겠습니다. 부, 분명히 그동안 아무 일도 없었습니다!”
그러는 사이 지창기의 팀원들이 속속 도착했다. 그들은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는 걸 알아차리고는 지창기의 눈치를 살피며 조용히 서 있었다.
지창기는 한동안 씩씩 거리다가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흠칫 놀라더니 부하들을 보며 소리쳤다.
“다른 던전 다 확인해 보라고 해!”
“예?”
“우리가 보유한 던전들 멀쩡한지 확인하라고! 당장!”
“아, 알겠습니다.”
부하들은 물론이고 팀원들까지 분주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잠시 후, 상황을 모두 파악한 부하들이 속속 보고를 시작했다. 결론적으로 네 개의 던전이 추가로 사라졌다.
강하진이 주명우로부터 던전 정보를 받은 다음, 태산 쪽 던전을 추가로 정복한 것이다.
지창기는 길길이 날뛰었다. 하지만 그런다고 달라지는 건 없었다. 그저 거성을 병합하는 작업을 서두르고 주명우를 비롯한 수뇌부를 빨리 확보하라고 재촉하는 게 전부였다.
그리고 다 끝난 줄 알았던 전쟁이 다시 시작되었다.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양상의 전쟁이었다.
거성 쪽에서 어떻게 구했는지 각성자를 투입한 것이다.
태산도 각성자로 맞받아 칠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태산에는 키우고 있는 각성자들이 있어서 충분히 대응은 가능했다.
그 뒤로 거성에서 싸움을 지저분하게 몰고 가기 시작했다. 나중을 생각하지 않고 너 죽고 나 죽자 식으로 나가니 아무리 태산이라도 피해가 점점 누적될 수밖에 없었다.
지창기는 점점 초조해졌다. 그가 생각하기에 이걸 끝낼 방법은 딱 하나, 주명우를 잡는 것뿐이었다.
* * *
“고생 많았습니다.”
강하진의 말에 김지혜가 기분 좋은 미소를 지었다.
“뭘요, 저야 시키는 대로 한 것뿐인데. 이렇게 원 없이 돈을 써본 건 태어나서 처음이에요.”
김지혜가 암시장과의 모든 거래를 도맡아서 했다.
그녀는 암시장에서도 삶이 열악하거나 성격에 문제가 있어서 다른 각성자들과 제대로 어울리지 못하는 자들을 많이 알고 있었다.
그들을 막대한 돈으로 고용해서 주명우에게 넘긴 것이다.
주명우의 자금력은 정말 대단했다. 이게 끝이다 싶으면 새 계좌가 나타났다.
해외 곳곳에 자금을 은닉해 두었고, 세탁을 위한 페이퍼 컴퍼니도 여럿 보유하고 있었다.
그 모든 것들이 차근차근 강하진에게 넘어갔고, 그 중 일부가 태산과의 전쟁 준비에 쓰였다.
“그나저나 주명우 정말 대단하네요. 이렇게 돈이 많은 줄은 몰랐어요.”
“아직 가진 돈의 30%도 안 쓴 겁니다. 앞으로도 빼 먹어야 할 돈이 많으니 염두에 두세요.”
김지혜가 의아한 표정으로 강하진을 바라봤다. 돈을 빼내는 건 강하진이 할 일이고 자신은 그걸 쓰는 역할인데 왜 갑자기 저런 말을 한단 말인가.
“앞으로는 김지혜 씨가 주명우를 담당하세요. 굳이 직접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믿을 만한 사람이라면 누구든 괜찮습니다.”
“왜 갑자기······.”
“조만간 제대로 2차전이 시작되면 전 던전을 털 겁니다.”
던전이라는 말에 김지혜의 눈이 화등잔만 해졌다.
“더, 던전이요?”
그 반응에 강하진이 씨익 웃으며 그녀를 쳐다봤다.
“네. 던전이요. 왜요, 관심 있으십니까?”
김지혜가 긴장과 기대가 뒤섞인 눈으로 강하진을 바라보며 침을 꿀꺽 삼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