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번엔 내 인연으로 >
유동훈은 뒤따라오는 강하진을 연신 힐끔거리며 살폈다. 다짜고짜 당장 같이 가자고 할 줄은 몰라서 좀 당황했다.
허름한 집이 다닥다닥 붙어있는 동네에 도착했다. 급격한 오르막길이라 웬만한 사람은 한 번에 오르기도 어려운 동네였다.
거의 꼭대기 가까이 올라가서야 유동훈의 집이 나왔다. 근처에 있는 다른 집들보다 더 열악했다.
아예 문짝도 달려있지 않은 대문을 통과해 좁은 마당에 들어섰다.
그나마도 한 가구가 사는 집이 아니라 여러 가구가 각각 방을 하나씩 잡고 살고 있었다.
마침 유동훈이 들어갈 때, 그의 딸인 유소희가 마당에서 세수를 한 다음, 얼굴을 수건으로 닦고 있었다.
“어? 아빠 왔어요?”
유소희는 유동훈 뒤를 따라 들어온 강하진을 발견하고는 눈이 동그래졌다. 아빠가 손님을 데려오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마지막으로 데려온 손님이 2년 전이었는데, 당시 분위기가 정말 험악했기에 기억이 아직도 생생했다.
그는 손님이 아니라 해피머니에서 협박하기 위해 따라온 사채업자였으니까.
딸이 오해해서 놀랄까봐 유동훈이 얼른 말했다.
“이상한 사람 아니니까 괜찮아.”
“저, 정말이죠?”
“정말 괜찮다니까?”
유동훈은 그렇게 말하며 강하진을 바라봤다. 뭐라고 말이라도 해보라는 눈빛을 열심히 보내면서.
“일부터 하죠. 저 방으로 들어가면 됩니까?”
앞뒤 다 잘라먹은 강하진의 말에 유동훈이 한숨과 함께 고개를 저었다.
“저 방에는 엄마 혼자 있는데, 아프세요. 그러니 할 얘기 있으시면 다른 곳에서 하시는 게 좋을 것 같네요.”
유소희가 슬그머니 움직여 강하진 앞을 막아서면서 말했다. 그녀는 경계심 가득한 표정으로 강하진을 조심스럽게 바라봤다.
강하진은 유소희에게 대꾸하는 대신 유동훈을 쳐다봤다.
“그······ 소희야, 그러니까······ 엄마 병 고치러 오신 분이야.”
그 말에 유소희의 얼굴이 사정없이 일그러졌다. 지금까지 얼토당토않은 사이비 치료사들에게 갖다 바친 돈이 얼마인데 또 이런 사람을 데려왔단 말인가.
“돈은 안 주기로 했어! 그러니까 이번엔 그냥 속는 셈치고 해보면 돼!”
“뭘 믿고 엄마를 맡겨요! 엄마한테 무슨 짓을 할 줄 알고요!”
강하진은 말 대신 손을 들어 올렸다. 그의 손에 새하얀 빛이 어렸다.
“마력 모자랄까봐 안 보여주려고 했는데 어쩔 수 없군요.”
유소희와 유동훈은 강하진의 손에서 나는 빛을 멍하니 바라봤다. 그 빛은 너무나도 따스하고 고결한 느낌을 두 사람에게 전해주었다.
“어······ 가, 각성자?”
“이제 시도나 한 번 해보게 비켜주시겠습니까?”
유소희는 퍼뜩 정신을 차리고는 옆으로 한 걸음 비켜섰다. 강하진은 그녀를 지나쳐 방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방에는 유동훈의 아내이자 유소희의 모친인 임미선이 누워 있었다. 그녀의 몸은 앙상하게 말라 거의 뼈만 남아 있었고, 생명력은 위태롭게 흔들리고 있었다.
강하진은 일단 엿보기 스킬부터 썼다. 각성자가 아니면 엿보기 스킬이 먹히지 않지만, 예외인 경우가 있었다.
[복합저주가 깃든 사람]
[쇠약, 고갈, 질병의 저주가 균형을 이룬 복합저주가 깃들어 있다. 단순한 저주해소 스킬로 풀어낼 수 없다.]
이렇게 마력 관련된 스킬이 머물고 있는 사람이 바로 그 예외였다.
역시나 예상했던 대로, 아니, 알고 있던 대로였다.
임미선은 저주 때문에 이렇게 된 거였다. 이러니 아무 치료도 먹히지 않는 것이고.
여기서 어설프게 치료 스킬을 써봐야 저주의 먹잇감이 될 뿐이었다.
“시간이 좀 걸릴 것 같으니 두 분은 나가계시죠. 집중에 방해됩니다.”
강하진이 어찌나 단호히 말했는지 유동훈은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고 방에서 나가 버렸다.
하지만 유소희는 그러지 않았다.
“지켜볼 거예요.”
강하진은 그런 유소희를 가만히 쳐다봤다. 사실 당연한 반응이긴 했다. 누군지도 모르는 처음 보는 사람을 어떻게 아픈 엄마와 단둘이 둘 수 있단 말인가.
하지만 강하진은 정말로 치료에 방해 받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티끌만큼의 변수도 허용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미련 없이 일어났다.
“치료 포기합니다.”
유소희가 깜짝 놀라 강하진을 올려다봤다.
“예? 그게 무슨······!”
“방해가 될 요소를 안고 위험을 감수할 생각은 없습니다. 이럴 때는 그냥 포기하면 서로 편하죠.”
“자, 잠깐만요!”
유소희는 밖으로 나가려는 강하진을 다급히 말렸다. 그녀는 잠시 강하진을 바라보며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다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하아. 알았어요. 나가 있을게요. 그러니까······ 그러니까 부탁드려요.”
유소희는 강하진에게 고개를 꾸벅 숙인 다음 밖으로 나갔다. 사실 하고 싶은 말은 많았지만 그냥 다 삼켰다.
솔직히 지금 찾아온 이 실낱같은 희망을 헛되이 날려 보내기가 싫었다. 그 정도로 절박하고 간절했다.
강하진은 유소희가 밖으로 나가자, 본격적으로 치료를 시작했다.
일단 저주를 푸는 스킬을 준비했다. 하나가 아니라 세 개를 동시에.
복합 저주를 푸는 방법은 사실 간단했다. 각각의 저주에 딱 맞는 해소 스킬을 동시에 써주면 된다.
‘그리고 몸이 극도로 약해졌으니 기력회복도 동시에 진행해야겠지.’
천사의 반지가 가진 능력이라면 단숨에 모든 걸 원래대로 되돌릴 수 있겠지만, 아쉽게도 그건 강하진이 아닌 다른 사람에게는 쓸 수 없었다.
스킬을 중첩하는 건 아직 쓸 수 있는 사람이 없겠지만, 나중에는 몇 개의 스킬을 중첩하느냐를 가지고 시합까지 열릴 정도로 널리 쓰이는 기법이었다.
그 중에서도 지금 강하진이 쓰는 건 최상위에 있는 기법이었다. 당시 세계에서 강하진 정도로 스킬 중첩을 쓸 수 있는 사람은 세 명뿐이었다.
동시에 세 개의 저주 해소 스킬이 누워 있는 임미선의 몸에 스며들었다.
강하진은 저주가 사라진 걸 확인하고 생명력 부여 스킬을 썼다.
임미선의 얼굴에 생기가 가볍게 돌기 시작했다.
저주를 해소했지만, 그걸로 끝이 아니었다. 진짜가 남아 있었다. 암을 치료해야 하니까.
강하진은 치료 폭탄 스킬을 썼다. 원래 암을 고칠 수 있는 스킬이 아닌데, 숙련도가 오르면서 질병 치료 효과가 추가되었다.
이것 역시 회귀 전에는 없던 일이었다.
그리고 새로 생긴 효과가 바로 강하진이 유동훈을 영입하려고 마음먹은 이유였다.
아직 숙련도가 낮아서 한 번에 낫지 않았다. 강하진은 연달아 다섯 번이나 스킬을 써야 했다.
“후우. 지치긴 하네.”
그래도 결과는 아주 잘 나왔다. 완벽하게 치료가 된 것이다.
강하진은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유동훈과 유소희가 방문을 빤히 바라보고 있다가 강하진을 보고는 긴장한 눈으로 침을 꿀꺽 삼켰다.
“어, 어떻게 됐습니까?”
“치료 끝났습니다.”
두 사람이 입을 쩍 벌렸다.
“저, 정말요?”
유소희는 믿기지가 않아 강하진을 멍하니 바라봤다. 유동훈은 후다닥 방으로 들어갔다.
병이 다 나았는지 그가 본다고 알 수 있을 리 없다. 하지만 혈색이 좋아지고, 어딘가 건강해 보이긴 했다.
그때 임미선이 천천히 눈을 떴다.
“저, 정신이 들어? 몸은 좀 어때? 괜찮아?”
임미선은 그런 유동훈을 보며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그녀의 얼굴은 어딘가 굉장히 개운해 보였다.
“힘은 없는데 몸이 가벼워요. 이런 걸 느껴본 게 대체 언제쯤인지······.”
“아, 내 정신 좀 봐. 이럴 때가 아니지. 내가 얼른 미음이라도 좀 가져올게. 일단 먹고 힘을 내. 그리고······ 병원에 가보자.”
유동훈은 병원에 가서 확인해보고 싶었다. 하지만 서두른다고 될 일이 아니다. 일단 몸부터 추슬러야 하니까.
유동훈이 그러는 사이 유소희가 방에 들어가 임미선과 한바탕 신파극을 찍었다.
유동훈은 억지로 눈물을 참으며 강하진을 바라봤다. 그리고 정중히 허리를 숙였다.
“정말······ 정말 감사합니다. 이 보답을 대체 어떻게 해야 할지······.”
강하진은 그런 유동훈에게 계약서를 내밀었다.
“약속만 지키시면 됩니다. 이건 정당한 거래였으니 약속만 이행하시면 신경 쓰실 필요도 없고요.”
어찌 보면 굉장히 냉정한 말이었지만 유동훈은 그걸 오히려 더 기분 좋게 받아들였다.
“그러는 강하진 씨야말로······ 절 신경 써주고 계시잖습니까.”
유동훈은 강하진에게 계약서와 펜을 받아 단숨에 사인을 했다.
“계약서를 읽지도 않고 서명하시는 건 좋지 않은 습관입니다. 앞으로는 반드시 고치시죠.”
유동훈이 빙긋 웃었다.
“저 원래 그런 사람 아닙니다. 이번이 특별한 경우죠.”
아니긴 뭐가 아니란 말인가. 그런 사람이 해피머니가 빠뜨린 사채의 늪에 풍덩 빠졌을 리 없다.
“예외를 두다보면 끝이 없습니다. 아무튼 나중에 연락드리죠. 처리할 일도 몇 가지 있으니. 아, 일단 이사부터 가시죠. 주변에 알리지 말고요.”
강하진은 그렇게 말하며 100만 원짜리 수표가 잔뜩 든 봉투 하나를 건넸다.
“계약금입니다.”
강하진은 그 말을 끝으로 돌아서서 휙 나가 버렸다.
유동훈은 손에 봉투를 든 채 멀어져가는 강하진의 뒷모습을 가만히 바라봤다.
* * *
해피머니의 사장인 김진철은 부하가 들고 온 소식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뭐?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해?”
“죄, 죄송합니다, 형님.”
“내가 유동훈 말고 그 딸을 감시하라고 했어, 안 했어?”
부하가 얼른 대답했다.
“딸을 감시했는데, 감시하던 놈이 당했습니다.”
“이런 병신 같은 놈. 그렇다고 죽어가는 환자까지 딸린 놈들을 못 잡아?”
“죄, 죄송합니다.”
김진철은 사납게 눈을 부라리며 어금니를 꽉 물고 말했다.
“가서 찾아내서 잡아와. 그 세 년놈들 내 앞에 무릎 꿇려. 이 새끼가 어디서 내 돈을 먹고 튀어?”
그 말에 부하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어······ 저, 형님.”
“이 새끼가, 안 튀어나가? 왜? 못 하겠어? 너 죽이고 내가 직접 할까?”
“아니, 그게 아닙니다. 빚 말입니다.”
“뭐? 빚? 무슨 빚?”
“유동훈이 졌던 빚······ 갚았습니다.”
“뭐? 그게 무슨 개소리야!”
“이, 이거······.”
부하가 건넨 종이를 받아 확인한 김진철은 얼빠진 표정을 지었다.
“입금······ 내역서?”
유동훈 이름으로 해피머니에 입금한 내역서였다.
“이런 씨발! 가서 계좌 확인해!”
“이미 했습니다. 정확히 들어왔습니다. 마지막 날 이자까지 계산해서 1원도 틀리지 않습니다.”
김진철이 허탈한 표정으로 고개를 들어 천장을 바라봤다.
“하······ 나 이 새끼들을 진짜 그냥······!”
김진철은 한숨을 내쉬고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다시 표정을 바꿔 부하를 노려보며 물었다.
“그건 그렇고 우리 애들 조지고 튄 그 새끼는 어떻게 됐어?”
“그것도 아직······.”
“너 도대체 할 수 있는 게 뭐냐? 응? 이 밥버러지 새끼야.”
김진철은 손을 휘휘 내저었다.
“나가봐. 나중에 부를 테니까. 애들 꼼짝 말고 대기하라고 해. 언제 움직여야 할지 모르니까. 알았어?”
“예, 형님.”
부하가 허리를 90도로 꾸벅 숙여 인사하고는 밖으로 나갔다.
김진철은 소파에 털썩 앉아 두 손으로 머리를 쥐어뜯었다.
“이걸 형님한테 뭐라고 보고하지? 팔 하나랑 다리 하나 부러질 각오 해야겠는데?”
김진철이 운영하는 해피머니는 지창기의 금고 역할을 하는 업체였다.
그리고 지창기는 (주)태산이라는 회사를 운영하고 있는데, 사실 태산은 회사를 가장한 폭력조직이었다.
지창기는 던전과 각성자가 등장하자마자 발 빠르게 그쪽으로 손을 뻗어 자리를 잡는 데 성공했고, 지금 그걸 이용해 빠르게 돈과 세력을 불려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 와중에 발견한 것이 바로 유동훈이었다.
김진철은 지창기의 지시로 그 일을 수행하는 중이었다.
대체 어떻게 할지 고민하고 있는데, 전화가 왔다. 발신인을 확인하니 지창기였다.
김진철의 표정이 긴장으로 딱딱하게 굳었다.
“이제 난 죽었다.”
그는 조심스럽게 전화를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