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2화
경한타워(3)
서늘한 총기의 느낌만이 남아있을 뿐, 그다음의 기억은 없다.
아마 죽었겠지.
그 다음에 보인 얼굴이 악마인 것으로 보아, 아마 내가 죽은 건 확실할 거다.
재희는 눈앞에 나타난 악마를 보았다.
자신을 ‘바알’이라고 소개한 이 악마는 재희에게 영계로 가기 전, 한 가지 소원을 들어줄 수 있다고 했다.
“그런데… 악마라면 대가를 받아가는 것 아니에요?”
그렇게 물은 재희의 말에.
“그렇지. 소원의 크기에 따라 대가가 다르지.”
라고 대답할 뿐, 어떤 대가를 받을 것인지에 대한 설명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재희는 고민했다.
내 아이, 강림이는 하룻밤 새에 부모 모두를 잃었다.
내가 없는 강림이의 미래를 불행하게 만들고 싶지 않다.
그래서 재희는, 소원을 빌었다.
“제 아이, 강림이의 성장을 지켜볼 수 있게 해주세요.”
하지만 돌아온 대답은 재희를 절망에 빠트리게 하기 충분했다.
“네 원수가 자비를 주지 않았더군. 네 아들을 죽여서 영혼이 성불해버렸어. 되살릴 수 있는 방법은, 다른 차원의 네 아들을 불러오는 방법밖에 없는데… 괜찮겠나?”
사대희… 이 개같은 자식.
다른 차원의 아이… 그 아이도 과연 내 아이라고 할 수 있을까?
아니, 그건 자신의 아이라고 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이미 아들은 죽었다.
고민은 길지 않았다.
“소원을 바꿀게요. 사대희에게 복수해주세요.”
돌아온 대답은 재희를 놀라게 하기에 충분했다.
“뭐… 그 두 가지 소원 다 이루어주마. 복수도, 네 아들도. 대가는….”
* * *
“이 미친놈 같으니라고!”
나를 향해 미사일을 뿌리는 사대희를 보며 나는 욕설을 내뱉었다.
사대희가 사용하고 있는 이 방은, 근접전을 하기엔 차고 넘치도록 크지만 그래도 실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놈은 나를 향해 미사일을 뿌린거다. 후폭풍은 생각하지도 않고.
자기 건물이라 막나간다 이건가?
그러면 나도 똑같이 상대해주마.
나는 그대로 흑염을 뿜어내며 날아오는 미사일들을 격추했다.
퍼퍼퍼펑!
휘이이이이잉-
건물 내부에서 일어난 폭발로 인해 전부 깨져버린 창문으로 겨울 바람이 몰아쳐 들어온다.
dudadadadadadadadadada!
그 다음으로 이어지는 것은, 나를 향해 이어지는 총탄 세례.
하지만, 이런 공격은 정말 수 없이도 많이 당해보았다.
나는 쏟아지는 총탄을 피해 건물의 기둥 뒤에 숨었다.
파파파파파파파파파팡!
순식간에 총탄 때문에 건물의 기둥 하나가 산산조각이 난다.
기둥이 박살나기 직전에 곧장 다른 기둥으로 대피한다.
응 이 건물 니꺼야. 무너지면 니 손해야.
어차피 경한 그룹의 건물이고, 내부에 있던 사람들은 대피했다.
그렇다면 놈의 화력을 이용해 부숴버리자.
그렇게 결심하고 있던 바로 그 때.
“그래. 그렇지. 너를 이런 잔챙이같은 공격으론 이길 수 있을 리가 없지.”
미사일발사대와 총기를 분리해 바닥에 던지는 사대희.
말은 그렇게 해도, 스스로도 건물이 무너지는 것이 신경쓰이는 것이 틀림없었다.
하긴. 자신의 성이라고 할 수 있는 곳이니까.
“슈트 대 슈트로. 어디 네 슈트는 어느 정도 출력을 낼 수 있는지 보자.”
사대희는 마치 코뿔소처럼 얼굴을 치켜들며 나를 향해 달려들기 시작했다.
타고난 체격 차와 더불어 슈트의 무게 차이를 감안했을 때.
저런 놈한테 부딪혔다간 교통사고라도 난 것처럼 날아갈 게 분명했다.
나는 그대로 몸을 한바퀴 돌려 피하며, 내 옆을 스쳐지나가는 사대희를 향해 주먹을 두 번 휘둘렀다.
쾅쾅!
요란한 소리와 함께 내 주먹에 얻어맞은 사대희가 옆으로 살짝 물러난다.
타격음이 꽤 컸지만, 사대희는 별다른 타격을 입지 않은 듯 재차 나를 향해 달려든다.
나는 달려오는 사대희를 향해 흑염의 불꽃을 뿜어냈다.
boooooooosh!
흑염의 불꽃을 그대로 버티며 나를 향해 주먹을 휘두르는 사대희.
뭔데 이렇게 튼튼해? 타격이 들어가긴 들어가는거야?
불평할 시간도 없다.
치이이이이익- 부웅-
기계가 움직이는 소리와 함께 내게 뻗어지는 사대희의 주먹.
슈트의 파워 때문인지 피했음에도 슈트의 겉면이 긁힌다.
아이고 어머니. 대체 무슨 괴물같은 슈트를 만들어내신 건가요?제거보다 저게 더 좋은 거 같은데요?
[“그… 그럴 리가요! 마스터! 다크 카이저 슈트는 세계 최강의 슈트라구요!”]
아 네네. 그러시겠죠. 근데 왜 네가 더 난리야?
내 전투 스타일을 비웃은 것과 별개로, 사대희의 전투 스타일은 일반적인 신체 슈페리어들과 별다르지 않았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능력에 취해 버티며 공격해오는 스타일.
원래 사대희가 가진 능력도 신체계열 슈페리어임이 분명했다.
그런 사대희를 상대하기 위해서는 타격이 덜 들어오고, 힘을 더 강하게 해주는 파워슈트와 궁합이 좋았을 터.
강하기만 따진다면 내가 가장 고전한 상대였던 매드독 도지훈 그 이상으로 강한 듯했다.
스스로 상대가 없다고 자부할만큼 강력하다고 해야 할까.
하지만.
내가 질 정도는 아니었다.
꽈아아악-
내 팔을 감싸는 익숙한 감각.
나는 그대로 강화된 팔을 뻗어 사대희가 입은 슈트의 얼굴을 두들겨 팼다.
Babababam!
사대희에게 순식간에 네 방을 꽂아넣고 뒤로 물러난다.
“바보 같으니! 네 공격은 나에게 통하지 않는다!”
babababam!
놈의 말을 무시한 채 다시 한번 네 방의 주먹을 꽂고 물러난다.
확실히 자신할만한 실력은 있다.
만약 전성기 시절의 사대희와 싸웠더라면, 내가 졌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전투를 하는 동안 느낄 수 있었다.
사대희는 늙은 호랑이다.
오랫동안 왕처럼 군림하며 부하를 부려온 탓에 실력에 녹이 슬었다.
그러니 저런 말을 하고 있겠지.
시간 문제다.
제인이 슈트만 벗긴다면, 나는 사대희를 이길 수 있을거라 자신할 수 있었다.
“으하하하하! 재빠른 놈이로구나! 내가 어렸을 때 너 같은 놈들을 많이 때려잡았었지. 이렇게 말이다.”
휘이잉-
주먹을 휘두르려다가, 갑자기 멈춰버리는 사대희.
“어… 어떻게 한 거냐? 대체 무슨 술수를 부린 거냐!”
[“마스터! 슈트를 비활성화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타이밍 좋았다 제인!
나는 그대로 사대희의 얼굴을 향해 주먹을 휘둘렀다.
퍼-석!
사대희가 슈트의 뒷부분으로 탈출한 탓에 슈트의 머리가 찌그러진다.
아깝다. 그대로 들어가 있었으면 슈트째로 기절시켜버릴 수 있었는데.
뒤로 데굴 굴러 슈트에서 탈출한 사대희는 수치심에 얼굴이 벌겋게 되어 나를 노려보았다.
생각보다 너무 쉬운데?
* * *
사대희는 머리에 송글송글 땀이 맺히는 것을 느꼈다.
패배를 직감했기 때문이었다.
‘언제 이렇게 괴물이 되어 있었지?’
놈이 나타난 걸 보고 받은지 채 일 년도 되지 않았다.
분명 올해 초의 다크 카이저는, 보잘 것 없는 수준의 자경단에 불과했다.
하지만 지금은, 자신이 손 쓸 수도 없을 정도로 강력한 히어로가 되어 있었다.
이해할 수 없는 수준의 성장 속도다.
하지만, 이렇게 끝나고 싶진 않았다.
자신에겐 아직 비장의 무기가 남아 있었다.
‘정말 그걸 사용할 셈인가? 아직 테스트도 하지 않았는데?’
사대희의 머릿속에 남아있는 이성이 자신을 말린다.
‘그냥 도망쳐서 새 시작을 하세. 그게 더 옳은 선택이야.’
그래. 테스트도 하지 않은 약물을 사용하는 것은 리스크가 크다.
그런 선택을 하는 것보단, 차라리 물러나서 다른 차원에서 새 시작을 하는 것이 나을 것이다.
하지만….
오랫동안 왕처럼 군림했던 사대희의 자존심이, 꽁무니 빼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이 내가 진다고? 머리에 피도 안마른 어린 히어로에게?
그렇게 물러날 순 없었다.
“이렇게까지 하고 싶진 않았다만, 이젠 정말 널 죽여야 속이 풀릴거 같군.”
품 안에서 꺼낸 앰플을 자신의 몸에 박아 넣는 사대희.
“오늘 밤에 살아 돌아갈 수 있을거라 생각하지마라.”
* * *
“아니요! 필요 없어요! 안 할게요!”
뒤늦게 외쳐보았지만, 악마는 이미 떠난 후였다.
악마가 대가로 바라는 것은 영웅.
‘이 세상을 지킬 수 있는 영웅을 만들어라. 그게 내가 원하는 댓가다.’
어째선지 악마는 강림이를 영웅으로 만들길 원했다.
재희는 다크 카이저의 슈트 안의 AI가 되었으며, 할 수 있는 행동에 수많은 제약이 있었다.
그 제약을 풀기 위해선 악마가 시키는 대로 동화율을 모아야만 했다.
그 때문에 처음에는 악마와 거래 따위 하지 않는 게 맞았다고 수 없이 자책했다.
그래서 다른 차원에서 온 강림에게 모질게 굴었다.
내 아이가 아니니 복수의 도구처럼 사용하겠다고 마음 먹기도 했었다.
하지만….
제인이라는 이름으로 강림을 보조하며 재희는 점점 생각이 바뀌었다.
강림과 함께 지내다 보니 함께 슬퍼하게 되었고, 함께 기뻐하게 되었다.
자신 때문에 평범하게 살던 다른 차원의 아이를 고생시키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강림이의 머릿속을 원치 않게 들여다보며 죄책감도 많이 느끼게 되었다.
성장하는 강림의 모습을 보며, 뿌듯함을 느낄 때도 많았다.
그러던 어느 날, 재희는 자신이 강림이를 아들처럼 생각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악마가 정말로 자신의 소원 두 가지를 함께 이뤄줬던 거였다.
그때부터 재희의 목표는 바뀌었다.
사대희에 대한 복수가 아닌.
강림이의 행복을 위해 싸우기로.
* * *
“슈페리어의 초능력에는 네 가지 계열이 있지. 신체계열, 자연계열, 이능계열, 그리고 정신계열.”
앰플의 영향때문인지 눈을 녹색으로 빛내며 내게 말하는 사대희.
【“슈트를 벗었는데도 아직 여유롭군. 아까 사용한 약물이 무슨 약물인지 몰라도 조심할 필요는 있어보인다. 다크 카이저여.”】
나도 알아.
아까 전보다 1.5배는 거대해진 사대희의 덩치를 보며 나는 두 주먹을 들어올리며 경계자세를 취했다.
“신체계열의 뮤턴트 인자와 이능계열의 뮤턴트 인자는 반발하기 때문에 함께 존재할 수 없지. 정신계열과 자연계열도 마찬가지야. 뮤턴트 인자는, 세 가지 이상의 계열을 가질 수 없다. 신이 인간에게 힘을 주면서도 한계를 만들어둔거다. 신의 영역까지는 침범할 수 없게.”
갑자기 뚱딴지 같이 무슨 소리야?
“그래서 신체 계열의 뮤턴트 인자를 타고난 나는, 강해지는데 한계를 겪을 수 밖에 없었다. 신이 자신의 영역을 침범할 수 없게 제약을 걸어놓았으니까.”
나는 놈이 저질렀던 인체 실험들에 대해 떠올렸다.
스스로 강해질 수 있는 한계 이상으로 강해지기 위해 인체 실험을 지속해왔던 거다.
“하지만, 나는 결국 그 한계를 벗어나는 방법을 찾아내고야 말았다.”
그래. 어쩐지 너무 쉽게 이긴다 싶었어.
지금껏 히어로 활동을 하며, 쉽다고 생각했던 일의 끝은 항상 고생으로 끝나는 경우가 많았다.
오늘도 그럴 모양이다.
사대희의 몸에서 불꽃과 전기가 피어오르기 시작한다.
동시에, 놈의 주변에서 날카로운 철조각들이 공중으로 떠오르기 시작한다.
반짝거리는 광택이 놈이 들어 올린 철조각들이 보통 금속이 아닌 것을 알려주고 있었다.
[“마스터. 전부 순정 미스릴과 오리할콘으로 만들어진 조각들이에요.”]
대체 돈이 얼마나 있길래 그런 희귀 금속들로 저렇게 많은 철조각들을 만들어둔거야? 미쳤구만.
“그래. 나는 신의 영역을 침범했다.”
미쳤군. 저 나이 먹고 저렇게 말할 수 있다니.
나는 내가 중2병에서 벗어났다는 사실에 감사하기로 했다.
나이 먹어서까지 저러니 얼마나 꼴불견인가?
“신의 손에 죽는 것을 영광으로 알라.”
불꽃과 전기가 내게 쏘아짐과 동시에, 철조각들이 뭉쳐져 만들어진 칼날이 나를 향해 휘둘러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