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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어로 만화 속으로 나 강림-217화 (217/236)
  • 217화

    산책

    이번 공격은 왼쪽? 아니면 오른쪽인가?

    생각할 시간이 많지 않다. 나는 일단 공격을 피하기 위해 오른쪽으로 고개를 숙였다.

    퍽-!

    이게 틀리네.

    그래도 가볍게 맞은 탓에 정신은 아직 또렷하다. 오른쪽에서 공격이 날아왔으니, 다음번엔 왼쪽에서 공격이 날아오겠지.

    휘우우우웅-!

    소름 끼치는 소리와 함께 내 머리 옆을 지나치는 주먹.

    저거 맞았으면 자빠졌겠지.

    두 번 피했으니, 이번엔 내가 공격에 들어갈 차례다.

    내가 주먹을 쥐고 뻗으려던 찰나.

    다시 한번 뻗어진 상대의 오른 주먹에 얻어맞은 나는, 볼썽사납게 뒤로 넘어가고 말았다.

    나는 이번에도, 관장님에게 손 한번 제대로 대지 못하고 지고 말았다.

    사범님 밑에서 배우던 나는, 얼마 전부터 사범님 대신 관장님께 직접 배우고 있었다.

    체육관에 나오는 웬만한 애들 보다 실력이 괜찮다나 어쩐다나.

    나야 당연히 강한 사람에게 배우면 배울수록 좋지만, 확실히 관장님의 가르침은 사범님의 가르침과는 차원이 달랐다.

    진짜 사람 죽는 훈련이라는 게 뭔지 알 것 같다고 해야 하나?

    지금처럼 스파링이라도 한번 할 때조차도 관장님은 봐주는 법이 없었다.

    다행히 관장님 밑에서 배울 땐 관장님 전용 훈련실에서 훈련해서 다른 사람의 시선을 신경 쓸 필요가 없다는 장점이 있긴 했다.

    볼썽사납게 져도 창피할 필요가 없단 말이지.

    [“설지나도 관장님한테 지는 건 이해해줄거에요 마스터. 너무 걱정하실 필요 없어요.”]

    내 앞으로 뻗어지는, 관장님의 단단한 손바닥.

    나는 그 단단해보이는 손바닥을 잡고 몸을 일으켰다.

    “아코코야… 과… 관장님. 좀 살살하세요.”

    “하? 살살? 너를 살살 가르쳤다가 네가 죽었다고 뉴스에 나오면, 죄책감을 느끼라고?”

    “…네?”

    “얼마 전에 티비에 나오는 널 봤다. 가면을 쓰고 있다고 내가 못 알아볼 줄 알았느냐? 몸놀림이며 버릇까지 그대로 사용하더구나.”

    “…그것만으로도 알아보셨다구요?”

    어… 어쩐지… 최근 갑자기 트레이닝의 수준이 한참 올라갔다 싶더라니….

    내가 다크 카이저라는 사실을, 뉴스를 보고 알아차린 모양이다.

    눈썰미도 좋은 할아버지네….

    “걱정하지 마라. 어디 가서 말하진 않을 테니까. 나한테 배운 놈이 범죄자한테 두들겨 맞는 모습을 볼 수 없어서 그런 거지.”

    휘릭-

    내게 날아오는 수건 한 장.

    “오늘은 이만하지. 다음번에도 시간 맞춰 나오거라. 그땐 더 제대로 된 루틴을 만들어올 테니.”

    그대로 저벅저벅 걸어 훈련실을 빠져나가는 관장님.

    뭐… 좀 얼떨떨하네….

    【“보통 사람은 아닌 것 같군. 강력함도 그렇고, 눈썰미도 그렇고….”】

    [“자꾸 주변에 정체가 알려지는 게 전 좀 걱정이네요.”]

    이미 들켜버린 거, 어쩌겠어?

    사실 관장님이 원하신다면 진작 내 정체를 밝히실 수도 있는데 안 하시고 계시잖아. 몇 개월간 지켜본바, 관장님은 그래도 믿을만한 분인 거 같으셔. 일단은… 믿어봐야지.

    나는 관장님이 주신 수건으로 얼굴을 닦으며 몸을 일으켰다.

    *     *     *

    나는 여기저기 쑤시는 몸을 이끌고 체육관을 나섰다.

    어느새 해가 뉘엿뉘엿 지며 붉은 노을을 드리우고 있었다.

    최근의 천산시는 조금 조용해진 편이었다.

    얼마 전, 페이퍼백을 죽이겠다고 범죄집단이 경찰을 공격해온 탓이다.

    많은 경찰이 순직한 것에 경찰청은 엄청나게 화가 나버렸고, 그 결과 당분간 폭력조직 집중 단속기간이 들어서고 말았다.

    그로 인해 잠시, 천산시 내부의 범죄자 동향도 조금 조용해진 상황이다.

    당연히 오늘도 나는 슈트를 입고 천산시를 지키기 위해 활동할 테지만, 생각보다 그렇게 많은 사건이 나진 않을 가능성이 높았다.

    그러면… 오랜만에 내 취미생활이나 한번 즐겨볼까?

    나는 터덜터덜 거리를 걷기 시작했다.

    내가 새로 생긴 취미라는 것은, 사실 별건 아니다.

    그저 천산시 이곳저곳을 천천히 걸어다니면서 구경하는 것 뿐.

    내가 지켜낸 일상들이 자연스럽게 흘러가는 모습들을 산책하며 지켜보는 것이, 나에게는 일종의 취미생활이 되어버렸다.

    이렇게 생각하다 보면 괜히 잘난 척하는 건가 싶어 묘하게 수치심이 올라올 때도 있지만….

    잘난 척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겠지만, 아무한테도 말 안 하고 혼자 즐긴다면, 그건 잘난 척하는 게 아닌 거잖아? 그치?

    [“그럼요. 마스터. 꼭 그렇게 생각 안 하셔도 돼요. 마스터는 그런 상황을 누릴 자격이 있으셔요.”]

    그래. 나는 자격이 있어. 자격이 있지.

    나는 천천히 걸으며 산책을 즐기기 시작했다.

    저기 있는 은행에서 처음 스카 페이스를 상대했었지.

    그 은행은 이젠 부숴졌던 곳을 전부 고치고 정상영업을 하고 있었다.

    조금 더 걷다 보니, 예전 레온 피시방이 있던 곳이 나왔다.

    레온 피시방은 안타깝게도, 사건이 일어난 다음 달에 운영을 그만두고 나갔다.

    지금은 그 자리에 피시방 대신 당구장이 자리하고 있었다.

    천천히 도로 이곳저곳을 살피며 걸어지나가기 시작한다.

    저기는 예전에 다크 스코프 아저씨를 구해준 적 있는 뒷골목이고….

    여기는 소연이가 좋아하는 공포테마의 카페다.

    그렇게 주변을 둘러보며 산책을 즐기고 있던 바로 그때.

    나는 발견하고야 말았다.

    <다크 호신용품점

    경찰/다크 스코프 협력업체>

    수상한 이름의 가게를.

    *     *     *

    다크 스코프 협력 업체?

    [“히어로 이름을 강제로 붙여먹고 팔아먹는 사기꾼 아니에요? 그런 경우도 종종 있다던데.”]

    【“객관적으로… 다크 스코프가 그렇게 효과적인 마케팅 수단일 것 같진 않다만… 활동은 오래했지만, 인지도가 높은 히어로는 아니지 않은가?”】

    아니. 혹시 모르지. 그런 걸 노려서 가게를 만들었을지도. 오히려 애매모호한 히어로의 이름을 달고 있으면 신뢰도가 올라갈 수도 있잖아.

    [“어떤 방식으로 이용해 먹는진 모르겠지만… 주인 놈 상판대기부터 한번 확인해보죠.”]

    그래. 그러자.

    나는 수상한 이름의 호신용품점의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아 어서오세요!”

    문을 열고 들어가자마자 보이는 건, 가게 벽을 빼곡히 장식하고 있는 용도를 알 수 없는 여러 가지 기계 장치들.

    그리고, 카운터를 지키고 있는 한 아주머니.

    “어머. 젊은 학생이 왔네. 그래. 잘왔어. 요즘 세상 흉흉하잖아. 하나 구비해두면 좋지. 혹시 찾는 제품이라도 있어?”

    “어… 아니 사실 그런 건 없는데요….”

    “학생 신분인 거 같은데, 용돈 넉넉지 않지? 저가형 제품으로 몇 가지 추천해줄게. 잠시만 기다려….”

    아주머니를 어디서 본 것 같기도 하고….

    잠깐 고민하는 사이, 눈앞에 몇 가지 도구들을 올려주는 아주머니.

    “이건, 전기 충격기인데….”

    파지지직-

    눈앞에서 새파란 전기가 치솟아 오른다.

    “위력이 좀 세 보이지만, 생각보다 그렇게 강하진 않아. 슈페리어 한 명 기절시킬 수 있을 정도? 위력 조절도 가능하게 되어있고… 여기 있는 물건들, 전부 안전등급도 받아둔 상태니까 걱정할 필요 없어. 그래도 전기 충격기는 좀 무섭다구? 그럼 이건 어떠니?”

    옆에 놓여있는 스프레이를 들어올리는 아주머니.

    “왠만큼 강한 신체계열 슈페리어의 눈을 5분은 마비시킬 수 있는 스프레이란다. 그리고 이건 경찰이랑 협력해서 만든건데… 정해진 신호대로 누르면 경찰에게 바로 신고와 위치를 발송해주는 기기거든….”

    눈앞에서 물건을 이것저것 들어 올리며 설명에 열중하는 아주머니.

    그러나 내가 알고 싶은 건 그것이 아니었다.

    “저… 아주머니. 사실 제가 다크 스코프의 팬인데요… 여기 진짜 다크 스코프 협력업체 맞아요?”

    내 말에 한참 설명에 열중하던 아주머니의 두 눈이 똥그랗게 커졌다.

    “아니. 진짜 다크 스코프의 팬이에요?”

    “…네? 네… 진짜 팬인데요….”

    “어머나. 세상에. 살다보니 이런일도 다 있네. 잠시만요. 여보! 여보! 잠깐 이리 와봐요!”

    “엉? 무슨 일이야?”

    그 순간, 머리에 땀을 닦으며 가게 안으로 들어서는 한 대머리 아저씨.

    그 아저씨를 보자마자 나는 이 곳이 다크 스코프 협력 업체라는 사실을 믿을 수 있게 되었다.

    머리를 닦으며 들어오는 대머리 아저씨가, 다크 스코프 정학근 아저씨였거든.

    그 모습을 보자 나는 잊고 있었던 생각을 떠올렸다.

    정학근 아저씨가 은퇴하면 호신용품점을 만들 거라고 했던 그 말을.

    아니 근데, 호신용품점 하면서 자기 옛날 히어로 네임 도용하면 어떻게 해요. 그러다가 큰일나면 어쩌려고.

    “여기, 이 학생이 다크 스코프의 팬이래요.”

    “뭐? 다크 스코프의 팬?”

    자신의 팬이라고 하자 얼굴이 환하게 펴지는 다크 스코프 아저씨.

    다크 스코프 아저씨가 팬이 지나치게 없는 편이긴 했다.

    [“사이드킥 신세가 다 그렇죠, 뭐. 사이드킥이 인기를 얻기 위해서 하나요? 히어로를 존경해서 하는 거지.”]

    “언제부터 팬이었어? 어떻게?”

    “어… 처음으로 히어로 활동을 하시던 때부터요? 그때부터 찍혔던 영상은 제가 다 봤을걸요.”

    “그래요? 그럼 잠깐 이리 안으로 들어와 봐요.”

    갑자기 친절해지더니 나를 자신의 작업실 안으로 들여보내는 정학근 아저씨.

    작업실 내부에는 다크 스코프 아저씨의 옛 슈트들이 고스란히 전시되어 있었다.

    “우… 우와… 이거 어떻게 구하신 거예요?”

    “다크 스코프씨가 사용하던 장비를 다 저랑 만든 거거든요. 저기 저게 초기 때 만든 거고, 여기 이게 마지막 싸움 때 사용했던 것.”

    그리고 작업실 내부에는….

    히어로들끼리 찍었던 사진들도 잔뜩 놓여 있었다.

    아저씨. 이러면 누가 봐도 아저씨가 다크 스코프인 거 알게 될걸요?

    하지만, 그만큼 우리와 있었던 일들에 대해 소중하게 생각하고 있다는 사실이 느껴져서, 마음이 조금 뭉클해지기도 했다.

    이 아저씬, 히어로 활동을 그만두고도 항상 우리를 기억하고 추억해주고 있었구나.

    그것만으로도 감동이야.

    “팬이라니까 보여준 거예요. 어디 가서 말하시면 안 돼요?”

    “네. 절대 말 안 할게요. 걱정하지 마세요.”

    평생 행복했으면 좋겠다. 우리 아저씨.

    *     *     *

    아쉽군. 래피드 스타의 목숨을 완전히 끊어놨어야했는데.

    아니면 최소한 일상 생활이 힘들게 만들어버리던가.

    이도 저도 아닌 채로 흐지부지하게 사건이 마무리되고 만 것이, 흑사자 정대수는 못내 아쉬웠다.

    그놈의 배우들은 갑자기 왜 이럴 때 열애설을 터트려서 원….

    그래도 소정의 목표는 달성했다.

    다크 카이저와 한팀인, 래피드 스타의 사생활을 위협했으니까.

    이젠 정말 다음 스텝으로 갈 차례였다.

    세상의 소문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다.

    하나는, 실제로 일어난 일을 기반으로 한 소문이고.

    다른 하나는, 일어나지도 않은 일을 지어내서 떠도는 소문이다.

    정대수는 다크 카이저에게 두 번째 종류의 소문을 사용할 생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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