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5화
천월군(1)
“뭐해? 왜 정신을 빼고 있는 거요? 여긴 내가 맡을 테니 빨리 할머니를 데리고 이곳을 빠져나가시오!”
“어? 아? 앗 넵! 알겠습니다!”
내가 나타날 줄 몰랐는지 잠시 멍하니 나를 바라보고 있던 히어로가 할머니를 등에 업은 채 두두두 달려 자리를 빠져나간다.
저런 사람이야말로 진짜 히어로지. 능력이 부족한데도 누군가를 돕기 위해 생각도 하지 않고 뛰어들 수 있는 사람.
저런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내가 이 세상을 구하는 보람이 생긴다.
늦지 않아 다행이다.
저런 인재가 죽지 않아서.
천산시에서 이곳까진 내가 비행을 한다고 해도 10분은 넘게 걸리는 거리다.
천산시 내부를 관리하기도 바쁜 내가 다니기엔 어려운 거리였지만….
지도를 본 소연이가 사건 현장까지 차원의 통로를 열어준 탓에 늦지 않고 도착할 수 있었다.
“끄어어어엉!”
[“이거 키메라 맞죠? 다신 보고 싶지 않았는데.”]
그러게 말이다.
키메라는 이미 천산시 내부에서 대응책을 마련해서 거의 사용하지 못하게 된 종류의 약인데….
경찰에서 이미 키메라 약물의 해독을 위한 전용장비까지 만들어 대대적으로 대처하고 있다 보니, 시내에서는 이제 키메라 약을 사용하는 경우를 보기가 힘들었다.
아무래도 시외는 인프라도 부족하고 인구 밀집도도 멀다 보니 또다시 키메라 약물이 퍼지기 시작한 모양이었다.
그게 아니면, 해독제를 무용지물로 만들 수 있는 새로운 종류의 키메라 약물을 만들었다거나.
[“그건 아니었으면 좋겠네요. 마스터. 키메라 약물이 처음 만들어졌을 때도 강력범죄가 엄청나게 늘었었는데.”]
초능력의 존재로 인해 치안자체가 그렇게 좋지 않은 이 세계에선,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는 것이 도움이 되는 경우가 많다.
그런 상황에서 ‘누구든’ 강력한 힘을 가질 수 있게 도와주는 키메라약은 메리트가 꽤 큰 편이다.
【“지금 하는 행동을 보니, 반쯤 정신이 나간 것도 같은데… 예전과는 다른 약을 만드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드는군.”】
SWISH!
쿵!
나는 나를 향해 날아드는 키메라의 주먹을 양손으로 받아냈다.
글쎄. 예전보다 약해진 것 같기도 한데. 예전엔 이 주먹 받아칠 엄두도 못냈는데 말이지.
[“그때에 비하면 지금의 마스터는 두 배는 넘게 강해졌을 거예요. 그렇게 비교하면 안 되죠.”]
어찌 되었든 망령당이 이 주변에서 또 뭔가를 꾸미고 있는 건 분명해.
나는 내게로 뻗어진 키메라의 주먹을 보며, 그것을 그대로 밀쳐 위로 올렸다.
뻗어지는 반대편 주먹을 몸을 숙여 흘리며, 그대로 왼주먹 어퍼.
Pow!
“으억!”
짧게 들려오는 키메라의 비명.
입이 벌어지는 것이 보인다.
싸움에 익숙하진 않은 모양이다. 싸움 도중에 턱을 벌리는 게 얼마나 위험한데.
나는 그대로 벌어진 턱을 향해 몸을 힘껏 비틀며 오른 주먹을 틀어 박았다.
깡!
벌어졌던 턱이 닫히며 마치 철판끼리 부딪히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
이 정도 소리가 났으면 이빨이 몇 개는 부러져야 정상인데.
뼈의 강도까지 강화되는 건가?
이빨은 부러지지 않았지만, 놈의 눈이 풀리는 것은 느껴졌다.
뇌진탕이라도 조금 온 모양이다.뼈와 피부는 강화할 수 있을 지언정, 내장까지 강화시키진 못했다는 의미겠지.
이럴 때 필요한 건, 압도적인 파워의 공격이다.
놈의 피부를 뚫고, 내장 깊숙이까지 충격을 줄 수 있는, 압도적인 파워.
나는 그대로 주먹을 말아쥐며 무릎을 굽혔다.
까드드득- 지이익-
슈트가 내 근육을 쥐어짜는 것이 느껴진다.
쾅!
그대로 키메라의 복부를 틀어박는 보디블로!
펑!
오른손을 회수하기 무섭게 준비하고 있던 반대편 주먹도 재차 키메라의 복부에 틀어박힌다.
“컥!”
결국 버터지 못하고 배를 부여잡으며 고개를 숙이는 키메라.
그리고, 그대로 키메라의 얼굴에 틀어박히는 어퍼.
“꾸어어어엉!”
연속적으로 틀어박힌 펀치에 당황한 듯, 턱을 부여잡고 이상한 비명을 내며 키메라는 뒤로 물러났다.
나는 그런 키메라의 다리를 걷어찼다.
BOOOM!
이미 두들겨 맞은 키메라는 내 공격을 버티지 못했고, 그대로 뒤로 넘어가고 말았다.
쿵-!
뒤로 쓰러진 키메라의 몸에서 흙먼지가 일어나 시야를 가린다.
“이제 이쯤하고 항복하는 게 좋을텐데. 너에게 승산은 없다.”
“끄어엉… 우어어어어… 우어어어… 아파… 아파….”
“키메라약은 어디서 구했지? 말해!”
[“이지를 상실해버린 것 같아요. 대화가 통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에요, 마스터.”]
예전의 키메라는 약물을 사용하고서도 대화가 통하는 수준이었는데… 얘는 완전히 눈이 맛이 가 있는 상태다.
“야… 약… 약을 줘… 약… 약 줘….”
【“마약 중독자로군. 네 모습도 알아보지 못하는 모양이다.”】
내 입으로 말하긴 뭐하지만, 최근 천산시 주변의 빌런들 중에 나를 모르는 사람은 존재할 수가 없는데 말이지.
요즘은 내가 나타난 걸 보자마자 전투 의지를 상실한 채 무조건 항복을 외치는 범죄자들도 꽤 존재하는 상황이다.
천산시에 살며 나를 못 알아보는 수준이라면, 속된 말로 부모님 얼굴도 못 알아볼 정도로 정신상태가 엉망이라는 의미나 마찬가지다.
이토록 강도가 센 약은 누구도 구매해주지 않는다.
아무리 쾌감이 좋아 봐야, 몸조차 가눌 수 없다면 의미가 없으니까.
‘…거래한 게 아니라면?’
생각을 다시 해본다.
애초에 이런 불완전한 약이라면, 거래가 아닌 ‘실험’으로 유통된 약일지도 모른다.
[“여기서 임상 실험이라도 하는 모양이군요.”]
망령당이 결국 시외까지 영역확장을 시도하고 있구나.
다행히 망령당이 시외로 영역을 확장하려고 하고 있다는 사실은 이미 예상하고 있던 바였다.
잿빛망토단이 몰락했을 때, 잿빛망토단의 구역을 두고 슈퍼 빌런끼리 전쟁을 벌였을 정도였었다.
지금처럼 시외에 빈 구역이 생겼는데 가만히 내버려 둘 리가 없지.
“헉… 헉… 다… 다크 카이저… 정말 빠르구나.”
내가 빠져나온 통로에서 뒤늦게 걸어 나오는 한소연, 아니 어비스 위치.
소연이 만드는 차원의 통로는, 어떻게 보면 일종의 압축 터널을 만드는 것에 가깝다.
이동해야 하는 거리가 멀어질수록, 통로 또한 길어진다.
그렇기에 소연이가 통로를 열어줬지만, 통로를 빠르게 빠져나올 수 있는 육체를 가진 내가 훨씬 더 빠르게 도착하게 된 것이다.
“역시… 나도 운동을 좀 할까 봐….”
어?
방금 저기, 뭔가 지나갔던 거 같은데.
나는 한숨 섞인 소연의 목소리를 들으며, 눈을 감았다.
“소연아. 잠깐 경찰이 올 때까지 이 주변 좀 정리하고 있어 줄래? 난 지금 해야 할 일이 생겨서.”
* * *
“휴우… 하마터면 큰일 날 뻔했네.”
천월군, 송성면을 담당하고 있는 망령당의 마약 딜러, 손동성은 자신도 모르게 이마를 훔쳤다.
축축하게 젖은 식은땀이 손동성의 손에 묻어나왔다.
“휴우? 휴우?? 큰일 날 뻔했네? 이건 큰일이 난 거야 이 자식아! 그건 위험하니까 팔지 말자고 했잖아!”
그런 동성에게 핀잔을 주고 있는 건, 같이 마약 딜러로 일하고 있는 동료, 권재한이었다.
“야. 우리한테 아무 일도 안 일어났으면 된 거 아니야? 괜찮아. 우린 살아남았잖아. ”
두 사람은 천월군에서 나고 자란 토박이인데, 망령당이 이곳으로 진출하려고 한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곧바로 입당해 마약딜러의 직책을 맡았다.
이 작은 시골에서 큰돈을 벌 수 있는 방법은 한정되어 있는 상황이니까.
그런 그들에게 망령당의 시외 진출은 마치 꿈과 같은 기회였다.
망령당이 시외까지 발을 넓힌다는 건, 새로운 사업을 시작하려고 한다는 의미다.
그리 긴 삶을 살아온 건 아니지만, 동성과 재한은 딱 한 가지만큼은 알고 있었다.
무슨 일이든, 가장 처음 시작할 때 진입하는 사람이 가장 많은 돈을 벌 수 있다는 사실을.
언제 무너질지도 모르는 범죄 조직?
그런 건 생각보다 중요하지 않았다.
가장 돈을 벌기 좋은 타이밍에 들어가, 짧게 벌고 나온다.
동성과 재한의 목적은 단지 그것뿐이었다.
“아무 일도 없었다고? 개소리하네. x팔. 너 다크 카이저가 어떤 새낀지 몰라서 그래? 그놈이 부순 슈퍼빌런들의 이빨만으로 다크 카이저 동상도 만들 수 있을걸?”
“알지. 엄청나게 강하고 무서운 히어로인 거. 근데 그런 대단한 사람이 우리 같은 놈들을 그렇게 신경 쓰겠냐 이 말이야. 우리는 가면도 안 썼잖아! 그냥 약만 파는 거라고!”
대단한 히어로는, 대단한 초능력자들이랑 놀겠지.
“야. 됐고. 그 약이 어느 정도 위력을 만들어냈는지 보고나 하러 가자고. 생각보다 더 쏠쏠할걸.”
그런 소리를 하며 몸을 돌리려던 동성은, 순간적으로 이질적인 느낌을 받았다.
잠시 붉은색 빛이 눈앞에서 번쩍, 하는 듯한 기분을 느꼈던 것이다.
이거… 어디서 들어본 이야긴데….
동성은 순간 등 뒤로 소름이 쫙 끼치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리고 그런 기분을 느낌과 동시에, 동성은 곧장 앞으로 내달렸다.
“야 뭐야? 너 어디가?”
동성의 불길한 예감은 곧 현실이 되었다.
“끄… 끄아아아악!”
퍼억-
뒤쪽에서 들려오는 비명을 들으며, 동성은 앞으로 내달렸다.
* * *
뭐야? 저거 눈치 빠른데?
나는 동료를 버린 채 순식간에 도망가는 마약 딜러를 보며 혀를 찼다.
일단 도망가는 놈은 도망가는 거고, 한 명이라도 제대로 잡아놔야지.
나는 감고 있던 눈을 뜨고 다크 윙을 펼쳐 하늘을 활공했다.
“야 뭐야? 너 어디가?”
아직도 상황을 눈치채지 못한 듯 어리둥절한 반응을 보이는 마약딜러.
나는 그대로 그런 마약딜러의 등 뒤를 향해 발을 뻗었다.
퍼억-
“끄… 끄아아아악!”
이크.
생각보다 힘이 좀 더 들어갔네.
활공하며 다리를 뻗었기 때문인지 힘이 과하게 들어가 있던 모양이다.
앞으로 부웅 날아 떨어지는 마약 딜러.
내가 한 명을 쓰러트린 사이, 순식간에 나무가 많은 산속으로 달려 들어가는 남은 마약 딜러.
나무 사이로 숨어들어 허공을 날아서 쫓아오는 내 시야를 벗어나 보겠다는 의미인 거 같은데. 그게 가능할 거라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나는 다시 한번 눈을 감았다.
눈에서 빠져나온 붉은 기운이 순식간에 건물 사이를 빠르게 돌아다닌다.
그런 내 머릿속 정보를 보고 순식간에 주변의 지도를 만들어내는 제인.
나는 지도를 보며, 놈이 도망가고 있는 경로를 예상했다.
이런 잡범 잡는 일이 하루 이틀 벌어지는 일도 아니고, 놈들의 머릿속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는 훤하니까.
나는 그렇게 뻗어진 발을 그대로 굽혀 다시 한번 허공을 날아올랐다.
“헉… 헉….”
산속의 나무 사이로, 놈이 달려 나가는 모습이 언뜻언뜻 보이기 시작했다.
나는 그대로 허공 위에서 날개를 접으며 밑으로 떨어져 내렸다.
부웅-
“커억!”
잡았다 요놈. 나한테서 그렇게 쉽게 도망갈 수 있을 줄 알았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