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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어로 만화 속으로 나 강림-202화 (202/236)
  • 202화

    암약

    “다녀왔습니다 이모.”

    “우리 조카 왔구나~ 우리 예쁜 조카 오늘도 학교에서 공부하느라 고생이 많았어~”

    학교가 끝나고 집에 돌아오자마자 나를 반기는 이모.

    “에이. 무슨… 학생이 공부하는 건 당연한 거지 뭐….”

    “얘는… 너는 다르지! 너는 공부도 하면서 밤마다 히어로 활동을 하잖니! 그게 보통 쉬운 일인가? 어른들도 하기 힘든 일인데.”

    [“어머. 우리 팔불출 이모님. 또 시작이시네요.”]

    “자. 빨리 밥 먹자. 이모가 오늘도 맛있는 거 많이 해놨어.”

    “이모… 저 옷부터 좀 갈아입고 올게요… 지금 교복 입고 있잖아요.”

    “옷 갈아입고 뭐 하고 하다 보면 밥 먹을 시간도 없을 때도 많잖니. 밥부터 먹고 해.”

    내 손을 잡아 식탁으로 끌고 가는 이모.

    나는 어쩔 수 없이 식탁에 앉아 수저를 들어올렸다.

    “아이고~ 알겠어요 이모! 먹을게. 밥부터 먹을게요. 맛있게 먹겠습니다.”

    수저를 들고 식사를 시작하던 바로 그때, 티비에서 들려오는 뉴스 소리.

    <“다음 소식입니다. 천월군에서 가장 큰 범죄조직인 불곰파의 두목, 강진웅이 사실상 불곰파의 해체를 선언했다는 소식입니다… 히어로 팀 아스트로 스타즈의 활약 때문이라고 하는데요….”>

    뉴스에서 불곰파와 관련된 뉴스를 내보내고 있었다.

    “어머. 강림아. 저것도 너희가 한거니?”

    “아… 네. 뭐….”

    “우리 강림이 너무 잘했어! 얼마 전에 기사를 봤는데, 히어로 다크 카이저가 나타난 이후로 천산시의 범죄율이 기존에 비해 70퍼센트 이상 줄어들었다지 뭐니? 내가 그 기사를 보고 얼마나 뿌듯했는지… 그리고 그전에 본 기사에는….”

    아이고. 정말… 어쩔 땐 이모가 모르던 시절이 그리울 때가 있다니까.

    [“진심이세요 마스터? 저는 그때 생각하면 아직도 힘든데요. 매일 홀로그램 만들어놓고 가면서… 혹시라도 들키진 않을까, 맘 졸이기도 하고… 이모님이 방에 들어오시면 제가 연기도 해야 하고….”]

    당연히 농담이지!

    내가 지금까지 히어로 활동을 하면서 가장 잘한 일이 뭐라고 생각하는지 알아?

    【“한소연의 마음속에서 심연의 여왕을 끌어낸 일? 히어로 래피드 스타의 인생을 구해준 일? 아니면… 도유진의 오빠, 도지훈이 살인을 저지를 뻔한 것을 막아낸 일?”】

    아니! 나는 내가 한 일 중 가장 잘한 일을 꼽으라면 이모에게 히어로 활동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밝힌 일을 꼽을 거야.

    탈도 많았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이모와 함께 살면서도 그때까지 들키지 않은 것 자체가 기적적인 일에 가까웠다.

    내가 사실을 밝히지 않고 계속해서 비밀을 유지하려고 했다면, 분명 이모와 나의 관계에 큰 악영향이 생겼을지도 모른다.

    그러면 히어로 활동을 하는 대가로 나는 내게 가장 소중한 가족을 잃게 됐을 거다.

    내가 그렇게 하지 않아서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그것도 잘한 일이긴 하지만, 나는 다크 스코프라는 히어로를 만든 일이 가장 잘한 일이지 않을까 생각이 드는군. 가끔은 다크 스코프가 너보다 나을 때가 있다.”】

    [“어느 정도는 동의하는 말이에요.”]

    이렇게 중요한 생각을 할 땐 제발 초 치지 좀 말아줬으면 좋겠다 너네….

    에휴.

    그래도… 내 머릿속에서 시끄러울 때가 많지만, 지금 와선 얘네 없으면 무슨 재미로 히어로 활동을 했을까? 과연 그 고통들을 견딜 수 있었을까? 그런 생각이 문득 들기도 한다.

    [“고마워요. 마스터. 왠지 오늘따라 감성적이시네요. 이제 끝이 얼마 안 남아서 그런가?”]

    짝짝짝!

    갑자기 내 머릿속을 울리는 박수 소리.

    내 눈 위로 떠 오르는 홀로그램 창 하나.

    [동화율 : 90.15%]

    [“어제로 동화율이 90퍼를 넘어섰어요, 마스터. 축하드려요.”]

    항상 말하지만, 끝이 아니라 시작이라니까.

    동화율 100퍼센트를 모으는 건, 결국 이모가 건강하게 새 삶을 시작할 수 있다는 의미이지, 이 세상의 범죄자들이 모두 사라졌다는 의미가 아니야. 결국 나는 계속 히어로로서 활동해야만 하는걸.

    [“멋져요 마스터. 좋은 마인드예요. 항상 그렇게 예쁘게 자라주세요.”]

    참나. 나 그만 놀려먹고 사건 목록이나 열어줘. 오늘도 할 일 해야지.

    [“불곰파가 문 닫았다는 소문이 천산시 전역에 퍼져서 그런지 오늘은 슈퍼 빌런 사건은 안 일어났는데요? 오늘은 좀 쉬시는 게 어때요?”]

    그럴 순 없지. 슈퍼 빌런들이 활동을 안 한다고 일반 범죄자들도 활동을 안 하는 것도 아니고… 순찰은 몇 번 다녀와야지.

    나는 들고 있던 수저를 식탁에 내려놓았다.

    “맛있게 잘 먹었습니다, 이모. 저 순찰 다녀올게요.”

    *    *    *

    <“불곰파의 두목 강진웅… 해체 선언… 아스트로 스타즈의 활약….”>

    “그렇지! 잘한다! 역시 내 동료들이야!”

    티비에서 나오는 이야기들을 보며, 래피드 스타, 공다혁은 두 주먹을 불끈 쥐고 흔들었다.

    자신이 없는 상황에서도 저렇게 큰 빌런 집단을 거꾸러트리는 데 성공하다니!

    오랜 세월, 많은 히어로들이 하지 못했던 일들이 점점 나아지는 것을 보며, 공다혁은 자신도 모르게 미소 지었다.

    그리고 조금 아쉬운 마음도 들었다.

    자신이 저 안에서 함께 싸울 수 있었다면, 조금 더 뿌듯함을 느낄 수 있었을 텐데….

    “그렇게 아쉬워요? 그러니까 애는 나한테 맡기고 해야 할 일 하고 오라니까 그러네….”

    다혁의 아내, 가영이 다혁의 얼굴을 보며 말했다.

    “아쉬울 게 뭐가 있어? 나 없이도 저렇게 멋진 일을 해주는 동료들이 있는데. 그리고… 뭐… 지금도 여보랑 해야 할 일 많잖아.”

    그때.

    “우애애앵! 우애애앵! 우애애애앵!”

    아이의 울음소리가 저 멀리서 들려오기 시작했다.

    공다혁은 재빨리 아이가 있는 방으로 달려 들어갔다.

    “별이 엄마! 걱정하지 마~ 좀 쉬어~”

    “어머. 뭐가 이렇게 빨라요?”

    “이래 뵈도 내가 세상에서 가장 빠른 남자잖아.”

    아이를 품에 안고 어르고 달래며, 공다혁은 마음속으로 감사의 인사를 보냈다.

    자신의 아이가 살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자신의 동료들에게.

    *    *    *

    얼마 전까지 세 명이서 회의하던 방안엔, 단 두 사람만이 남아 있었다.

    그중 한 명은 얼굴에 눈구멍조차 뚫리지 않은 밋밋한 흰색 가면을 쓰고 있었고, 나머지 한 명은 흑철로 만들어진 사자가면을 쓰고 있었다.

    천산시의 암흑가의 지배자, 미닝리스와 흑사자였다.

    “이젠 우린 빠지겠어.”

    마치 유령처럼 묘한 분위기의 흰색 가면을 쓴 남자, 미닝리스가 말했다.

    “어째서지? 우리의 공동의 적, 아스트로 스타즈를 물리치는 것이 우선이라는 점에 대해선 동의했던 거 아니었나?”

    흑철로 만들어진 사자가면을 쓴 남자, 흑사자가 입을 열어 물었다.

    “처음에는 그 말이 맞았지만… 솔직히 말해서, 불곰파가 빠지고 나면 천산시에서 당신네들과 우리, 둘밖에 안 남잖아? 그런 상황에서 당신네들이랑 손잡을 필요가 뭐가 있어? 안 그래?”

    흑사자는 미닝리스의 말에 가면 속에서 이를 악물었다.

    틀린 말이 아니었다. 이런 상황이 생길까 봐 그 바퀴벌레들 같은 브루트들까지 억지로 이 일에 끼웠던 건데….

    결국 그 더러운 바퀴벌레들이 일을 전부 망치고야 말았다.

    쓸모없는 브루트들 같으니!

    하지만,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이 이상 지체되었다가는, ‘실패’한 것으로 간주될지도 몰랐다.

    그렇다면 결국 흑사자는 파멸의 길을 걷게 될 터였다.

    흑사자는 당황한 채 입을 열었다.

    “우리의 계약을 상기하라. 미닝리스.”

    “됐어. 돈은 우리도 꽤 많으니까. 강진웅이 없어져서 이제 시외에서도 약을 팔 수 있게 됐거든.”

    “그거 말고! 우리는 네가 원하는 것을 줄 수 있다! 자금이 필요 없으면 다른 것을 요구하면 되지 않나!”

    “아.”

    그제서야 미닝리스는 계약서에 쓰여있던 조건을 떠올렸다.

    그래. 그랬지. 원래 계약서에는 원하는 것을 만들어주겠다는 조건이 달려 있었지.

    그래서 자금 융통을 부탁했었다.

    최근 다크 카이저 때문에 천산시 내에서 약을 유통하기가 어려워졌었으니까.

    하지만 천월군이라는 새로운 시장이 열린 지금은, 딱히 필요한 것이 없었다.

    “내가 원하는 것? 이제 필요한 게 없는데?”

    “영계로 가는 길! 우리는 그 길을 알고 있다! 영계로 가는 길을 열 방법을 알려주마!”

    “영계… 영계로 가는 길이라….”

    흑사자의 말에 잠시 생각에 빠진 것처럼 가면의 턱을 쓰다듬는 미닝리스.

    “됐어. 역시 내 힘으로 찾는 게 가장 뿌듯할 거 같으니까. 그쪽이 더 낭만적이기도 하고.”

    뿌듯? 낭만?

    자신을 놀리는 듯한 미닝리스의 발언에 흑사자는 머리끝까지 화가 나 손을 들어 올렸다.

    철커덕 철컥

    마치 줄에 매달려 있는 것처럼, 흑사자의 등 뒤로 떠오르는 수십 정의 총기.

    창문에서 흘러나온 달빛에 총기들이 번쩍거렸다.

    “오우. 멋진데. 그림 같아.”

    검은색 장갑을 낀 흑사자의 주먹이 쥐어지고, 동시에 미닝리스를 향해 쏟아지는 총탄.

    Dudadadada!

    dududududu!

    순식간에 온몸에 구멍이 뚫린 채 쓰러지는, 미닝리스.

    미닝리스의 얼굴에 씌워져 있던 흰 가면이 붉게 물든다.

    순식간에 고요해진 방 안.

    drrrrrring! drrrrrrring!

    그런 방 안에, 전화 벨소리가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저벅 저벅.

    쓰러진 미닝리스를 내버려 둔 채 구석에 놓인 수화기를 들어 올리는 흑사자.

    <“깜짝 놀랐잖아. 왜 말이 끝나기도 전에 사람을 쏘고 난리야?”>

    흑사자는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돌려 뒤에 있는 미닝리스의 사체를 확인했다.

    피투성이가 된 채 쓰러진 미닝리스의 시체에서 흘러나온 피가 바닥을 점점 더 넓게 적시고 있었다.

    정신계 능력자였나.

    미닝리스의 신출귀몰함이 어디서 나왔나 했더니, 이 정도 수준의 정신계열 능력자였기 때문이었던 모양이다.

    <“이 정도까지 기를 쓰고 죽이려는 거 보니까, 나는 굿이나 보고 떡이나 치면 되겠네. 잘 부탁할게. 다크 카이저 정리 좀 빨리해 줘.”>

    철커덕. 뚜 뚜 뚜.

    전화가 끊어지는 소리를 들으며, 흑사자, 정대수는 얼굴에 쓰고 있던 사자가면을 벗어 바닥에 집어 던졌다.

    바닥에 떨어진 철가면이 묵직한 비명을 내 질렀다.

    이번 계획도 어긋나고야 말았다.

    다크 카이저라는 히어로가 나타났던 바로 그 날! 그때 끝장을 내버렸어야 했는데!

    그때 그 어리숙한 히어로가 자신을 이렇게까지 코너에 몰 줄은, 그때는 상상도 못 했었다.

    이제는 사용할 수 있는 모든 수를 다 활용해야만 했다.

    정대수는 수화기를 다시 들어 올렸다.

    “어. 그래. 나 정대순데. 기자들한테 전화 돌려. 아스트로 스타즈의 어떤 히어로든 정체를 밝혀내는 놈한테 오억, 아니 십억 주겠다고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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