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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어로 만화 속으로 나 강림-195화 (195/236)
  • 195화

    불곰파(1)

    “여기면 당분간은 안전할 거예요. 탐색 능력자들이 제대로 찾기 시작하면 금방 노출될지도 모르겠지만.”

    “그 전에 빨리 상황을 어떻게 정리해야 할지 생각하는 게 좋겠군.”

    우리가 빌런들의 협공을 뚫고 도착한 곳은 밀키웨이가 아는 사람이 마련해 두었다던 안전 가옥이었다.

    비밀 통로를 통해야만 들어갈 수 있는 이 건물을 찾아내려면, 놈들도 고생을 꽤나 해야 할 터였다.

    레드 래빗은 안전한 곳에 도착하고 나서야 밀키웨이에게 제대로 치료를 받을 수 있었다.

    “뼈가 어긋나서 맞춰야겠네. 아파도 조금만 참아요.”

    뚜둑 뚝 뚜두둑!

    소름끼치는 소리가 방안을 매웠다.

    “으음….”

    레드 래빗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신음.

    “많이 아파요?”

    “…참을만하군. 괜찮다.”

    거짓말이다!

    저게 얼마나 아픈지는 나도 잘 알고 있다.

    히어로 활동하다 보면 뼈 부러지고 어긋나는 거야 익숙하게 일어나는 일이니까.

    그래도 매번 그 고통은 익숙해지지 않는다.

    [“그렇다고 저렇게 덩치 큰 사람이 고통스럽다고 비명을 지르기도 뭐하잖아요?”]

    거… 생각해보니 미안하네. 밀키웨이를 돕고 있었단걸 알았다면 손속에 사정을 좀 뒀을텐데….

    【“…그걸 알았다면 때리지 않는 게 맞지 않나?”】

    나는 잠시 변화한 레드 래빗의 모습을 살펴보았다.

    예전에 나를 죽이겠다고 나설 때보다 훨씬 더 압도적인 느낌의 덩치였다.

    원래도 뚱뚱해서 덩치가 큰편이었는데, 살을 빼고 근육을 찌우니까 예전보다 훨씬 더 커다랗게 보이네.

    잠깐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사이, 치료가 끝난 레드 래빗이 나를 향해 입을 열었다.

    “…미안하군. 말재주가 없어서 오해를 빨리 풀지 못했다.”

    거… 갑자기 그렇게 먼저 사과하면 내가 조금 더 곤란한데….

    나는 고개를 빠르게 흔들었다.

    “아니. 괜찮소. 나도 손속에 사정을 두지 못해서 미안하군.”

    “괜찮다. 오해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으니… 나라도 그렇게 했을거다.”

    레드 래빗의 담담한 반응에 더 할말이 없어졌다.

    그렇다고 여기서 더 누가 더 미안하네 따지고 있는 것도 시간 낭비였다.

    [“그냥 미안하다는 말 자꾸 하기 민망해서 그런 거 아니구요?”]

    【“숙적이나 마찬가지 아니었나? 아무래도 어색할 만도 하지.”】

    나는 제인과 벨제뷔트의 말을 무시한 채 입을 꾹 다물었다.

    “근데 언니. 이런 곳은 대체 어떻게 알고 있었던 거야?”

    “옛날 동료 중에 돈이 많았던 동료가 한 명 있었거든.”

    “와. 그런 히어로가 있었어? 그럼 지금 같은 때 도움을 좀 받을 수 있지 않나?”

    “죽은 지 몇 년 됐어. 그래서 여기도 혹시 이미 철거돼서 사라졌으면 어쩌나 싶었는데, 다행히 아직 있네.”

    이런. 안 그래도 상황이 좋지 않은데 분위기마저 어두워지겠네.

    나는 재빨리 입을 열었다.

    “그런 이야기보단… 일단 상황을 정리해보는 게 좋겠군.”

    내 말에 나를 향해 집중되는 시선.

    음… 조금 부담스럽지만….

    “일단 가장 먼저, 레드 래빗이 우릴 찾아온 이유부터 듣는 게 좋겠군. 아까 그랬지. 동맹을 맺으러 왔다고.”

    “그래요. 레드 래빗님이 제안한 동맹에 관한 이야기부터 해보는 게 좋겠어요.”

    동맹. 동맹이라.

    사실, 레드 래빗과 동맹을 맺는 것이 맘 편히 선택할 수 있는 사항은 아니었다.

    지금껏 누구도 크게 다치게 하진 않았다지만, 레드 래빗은 테러만 3번 이상 계획했던 중범죄자.

    대체 무엇을 원해서 우리와의 동맹을 생각하는지, 그 저의를 파악하지 않고서는 동맹 같은 걸 섣부르게 선택할 수 없는 것이다.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은 나 뿐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동맹? 누구랑? 너랑?”

    레드 래빗의 제안에 어처구니 없어하는 퀘이사의 목소리가 들려왔으니까.

    퀘이사의 반응에 앞에 있던 밀키웨이도 당황해하는 것이 느껴졌다.

    “미안하군. 적절한 단어를 찾지 못해서. 서로가 원하는 것을 위해 돕는 관계가 동맹이라고 생각했다.”

    “서로가 원하는 것? 우리가 너 같은 빌런에게 원하는 게 있을 것 같아?”

    “퀘이사! 말 좀 예쁘게 해!”

    레드 래빗의 말에 오히려 더 화를 내기 시작하는 퀘이사.

    가난에도 불구하고 타협하지 않고 히어로로서 활동하는 퀘이사의 입장에서는 심히 불쾌한 제안이었던 모양이다.

    “퀘이사! 화를 좀 가라앉혀! 말은 한번 들어보자.”

    다행히 중재로 나선 밀키웨이의 말에 퀘이사는 조금 진정한 듯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미안하군. 말재주가 별로 없어서. 그래. 동맹. 동맹이라는 말은 잘못됐군. 너희는 히어로고, 나는 빌런이었으니까.”

    쿵!

    레드 래빗은 갑자기 우리를 향해 무릎을 꿇었다.

    “뭐… 뭐야? 갑자기?”

    당황해하는 퀘이사의 목소리.

    “히어로, 아스트로 스타즈님들께 부탁드립니다. 불곰파에게 고통받고 있는 브루트들을 해방시키는데 당신들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쿵.

    레드 래빗의 머리가 바닥을 찧는다.

    “도와주십시오.”

    순간적으로 조용해지는 방안.

    나는 고개를 들어 주변을 살펴보았다.

    방안에 있는 사람들 모두가 나를 쳐다보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내 결정을 따른다는 암묵적인 표시.

    나는 히어로들의 반응에 어깨가 무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나 혼자만을 생각하고 움직이던 예전과는 무게감이 다르다.

    진작 아스트로 스타즈라는 히어로 집단을 만들고, 리더로서 활동하던 스타 라이트가 새삼 한번 더 대단하게 느껴졌다.

    나는 레드 래빗의 어깨를 잡고 끌어올렸다.

    “…정말 저희를 도와주시겠습니까?”

    고개를 들어올린 레드 래빗이 나를 보며 물었다.

    레드 래빗의 그 모습에, 세상에 대한 분노에 차있던 옛 모습은 존재하지 않았다.

    나는 정해져있던 대답을 하기 위해 입을 열었다.

    “정말 그런 일이 벌어지고 있다면, 당신이 이렇게 부탁하지 않아도 우리가 당연히 해야 할 일이오.”

    그 말을 내뱉으며 고개를 들어롤렸더니, 밀키웨이와 퀘이사가 나를 보며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그래. 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 먼저 설명해주면 좋겠군. 오해의 여지가 없이, 상세하게.”

    내 말에 잠깐 생각에 빠져있던 레드 래빗이 입을 열어 자신이 겪었던 일들을 말해주기 시작했다.

    *    *    *

    불곰파의 구역으로 들어간 최민형은 가면을 벗었다. 가면을 벗고, 말을 더듬던 최민형으로 돌아갔다.

    분노에 차 이 세상에게 복수하기 위한 삶을 사려던 레드 래빗은 죽었으니까.

    과연, 소문으로 들었던 것처럼 불곰파는 일면식도 없는 최민형에게 단지 브루트라는 이유만으로 친절을 베풀어 주었다.

    불곰파가 마련해준 기숙사에서 살게 되었고, 불곰파가 알선해준 일자리를 얻게 되었다.

    최민형에게 주어진 일은, 작은 식품 공장에서 냉동 식품을 얼리는 일이었는데, 가면을 쓰지 않아도 가진 능력으로 쉽게 할 수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곳에서 일한 지 이주 만에 최민형은 불곰파의 실체를 금방 알아차릴 수 있었다.

    브루트들이 세상의 차별을 느끼며 상처 받는 것은 당연하지만, 불곰파에 소속 되어 있는 조직원들은 조금 달랐다.

    그들은 조금 비틀려 있었다.

    달팽이들(그들은 브루트가 아닌 사람들을 달팽이라고 불렀다.)을 대상으로 한 범죄에는 전혀 죄책감을 가지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을 대상으로 한 범죄가 있을 예정이라는 것을 당당히 떠들고 다니기도 했다.

    “이번에 큰 일이 하나 들어왔어.”

    “큰일 말입니까? 무슨 큰일이요?”

    “흑사자회 놈들이 제안을 해온 모양이야. 지난번에 우리 일 방해한 놈 기억나나? 대의를 방해한 놈 말이야.”

    “다크 카이저요?”

    “그래. 그놈이랑 그놈 친구들을 죽이는 데 힘을 합치자는 말을 하더군. 심지어 돈까지 쥐여주면서.”

    “잘됐습니다. 어차피 거기 히어로라는 놈들도 죄다 달팽이들 편 아닙니까? 저희랑 상관없죠.”

    최민형이 봤던 다크 카이저는 진짜 히어로였다.

    자신을 죽이겠다고 달려드는 브루트 범죄자의 목숨을 두 번이나 살려줄 만큼.

    최민형이 가족들을 죽인 세상을 저주했던 것처럼, 이 세상을 저주하느라 세상을 보는 눈이 비틀려있는 것이다.

    그들에게 있어서 자신들을 혐오하는 사람들뿐만 아니라, 자신들에게 관심조차 주지 않는 모든 사람은 죽어 마땅한 적이었다.

    결국, 이곳은 범죄자들의 소굴이었던 것이다.

    불곰파는 브루트들을 위한 보호소 같은 것이 아니었다.

    사회에서 버려진, 갈 곳 잃은 브루트들을 이용하기 위해 만들어진 곳이었을 뿐.

    점점 자신들의 사상에 물들어가게 만들거나, 그것마저 안 되면 자신들에게 신세를 진 빚을 갚아달라며 브루트들을 이용하는 것이다.

    이미 오랜 시간 불곰파가 주는 걸 받으며 살아온 브루트들에겐 거부할 수 없는 제안이었다.

    거부했다가는 삶의 터전을 잃을 지도 몰랐으니까.

    하지만 자신이 이들을 욕할 자격이 있나?

    자신도 사형을 선고받을 정도의 죄를 짓고 도망쳐 나온 사형수일진대.

    그러던 어느 날, 민형이 일하는 공장에 그들이 찾아온 적이 있었다.

    “어이 이주혁이. 이번에 큰 일이 들어와서 사람 손이 좀 필요하거든?”

    이주혁은 이 공장 안에서 가장 친절한 사람이었다.

    그리고 공장 안에서 가장 강한 빙결 능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기도 했다.

    “어? 네? 저… 아… 안 되겠는데요… 집사람이 얼마 전에 애를 낳으면서 지금 많이 아프거든요….”

    보통 이런 일이 생겼을 때, 차출되어 나간 사람은 종종 돌아오지 못했다.

    “애를 낳았으면 우리랑 일을 더 많이 해야지. 그래야 애기 분유값도 벌고 와이프 약값도 벌고 할 거 아니야? 어? 내 말 틀려?”

    “아… 아닙니다. 맞습니다… 네. 하겠습니다.”

    민형은 그 모습에서 자신을 핍박하여 범죄에 내몰던 병원장의 모습을 보았다.

    민형은 그날 밤, 숨겨두었던 가면을 꺼내 얼굴에 썼다.

    가면을 쓴 레드 래빗에게 불곰파의 하급 조직원들은 상대가 되지 못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자신의 손을 잡고 감사의 눈물을 흘리는 주혁의 아내의 모습을 보며, 레드 래빗은 뿌듯함이 아닌, 죄책감을 느꼈다.

    세상에 분노한 채 많은 사람들을 죽이기 위해 테러를 계획했던 자신이 받을만한 대우가 아니었다.

    주혁의 가족이 떠난 뒤, 민형은 길을 걸으며 생각에 잠겼다.

    자신이 구해준 것은 단지 한 가족이었다.

    자신의 힘으로는 더 많은 사람은 구할 수 없었다.

    저 공장에서 착취당하고 있는 많은 사람들을 구해내기 위해선 더 전문적인 일을 할 만한 사람이 필요하다.

    그제야 민형은 얼마 전에 들었던 이야기를 떠올렸다.

    다크 카이저와 아스트로 스타즈의 히어로들을 공격하기 위해 빌런 조직들이 연합하기 시작했다던 이야기.

    다크 카이저가 그런 빌런 집단에게 쉽게 패배하진 않을지도 모르지만, 조금은 고전할지도 모른다.

    자신이 도움이 될 수 있다면, 이곳에 있는 사람들을 도와달라는 말 정도는 꺼내 볼 수 있으리라.

    레드 래빗은 다크 카이저를 찾기 위해 길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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