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화
동맹(4)
슈팅 노바가 보내준 사진은 화질이 좋지 않았다. 멀리서 찍은 사진을 강제로 확대한 것처럼.
그것마저 등 뒷모습을 겨우 찍은 거라 타투의 모양이 아니었다면 밀키웨이인지 확인하기도 힘들 정도였다.
<“지금 여기 스타 타워 옥상이거든? 내가 보통 내 구역 순찰할 때 여기서 살펴본단 말이지. 근데 갑자기 이 주변 공기가 달라지더란 말이지. 그래서 스코프를 이용해서 그 방향을 들여다보는데….”>
밀키웨이가 쫓기고 있더라. 그래서 사진을 찍어서 너희한테 보냈다.
그런 내용의 이야기였다.
<“아직은 도망치는데 여유가 있어 보여. 옆에 누군가 도와주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데… 누군지 잘 모르겠어. 얼굴에 가면을 썼다는 건 알겠는데… 히어로인가?”>
누군가 도와주고 있다?
“허… 후우….”
그 말이 나오자마자 옆에서 함께 듣고 있던 퀘이사의 입에서 안도의 한숨 소리가 나온다.
티는 잘 안 내도 많이 걱정되긴 했던 모양이다.
“슈팅 노바. 그렇다면 지금 밀키 웨이가 쫓기는 방향을 계속해서 보고 있는 건가?”
<“맞아. 계속해서 위치 확인중.”>
“그렇다면, 지금 밀키웨이의 위치와 쫓고 있는 빌런들의 위치를 확인해서 계속 전송해줄 수 있소? 어디로 움직일지 예측할 정보가 필요하오.”
<“라저. 계속 확인해서 정보 전송할게.”>
제인. 정보 오는 대로 계속 파악해서 도망갈 예측 경로 좀 확인해줘.
[“네 알겠습니다 마스터.”]
내가 이야기하고 있는 동안 쉬고만 있던 건 아닌지, 다시 금빛으로 빛나는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퀘이사가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퀘이사에게 고개를 끄덕여주곤, 흑염의 날개를 펼쳐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곧장 함께 날아올라 내 뒤로 바짝 따라붙는 퀘이사.
[“마스터. 현재 빌런들의 포위망 예측 경로입니다.”]
내 눈앞에 떠오르는 홀로그램 맵. 천산시의 지도에 빌런들의 분포가 나타나 있다.
[“그리고, 여기가 밀키웨이의 도주 경로입니다.”]
그 위로 그려지는 붉은 선.
그렇다면 지금 밀키웨이가 도망치고 있는 곳은….
여기겠군.
내가 생각한 곳에 정확하게 붉은 점이 찍힌다.
퀘이사에게 정보 전송해.
[“맞아요 마스터. 많이 익숙해지셨네요. 제가 없어도 되겠어요.”]
비상 상황이니까 농담은 자제해. 웃을 수도 없단 말이야.
[“네. 마스터.”]
* * *
예측한 위치에서 잠시 기다리자 밀키웨이가 모습을 드러냈다.
“헉… 헉….”
숨을 몰아쉬고 있긴 했지만, 다친 곳은 없이 멀쩡해보이는 모습이었다.
그리고, 그 뒤를 따라 달리고 있는 사람이 한 명.
그 사람이 누군지 확인한 순간, 순식간에 등허리를 타고 소름이 쫙 끼쳤다.
빨간색 토끼 가면을 벗고, 파란 가면을 쓴 레드 래빗이 밀키웨이를 쫓고 있었던 것이다.
가면의 색깔이 바뀌었지만, 몇 번이나 전투를 벌였던 나는 알아볼 수 있었다.
또 탈옥했나? 이번에도 나를 죽이려고?
무슨 일이 있었는지 대충 예상할 수 있었다.
흑사자회의 목적이 나를 죽이는 것이라면, 나에게 가장 원한이 깊은 빌런을 이용하는 것이 수월할 테니까.
그리고 나의 본거지라고 할 수 있는 밀키웨이의 가게를 습격하게 만든 것이다.
마음이 급해졌다.
나에게 원한을 가진 빌런에 의해, 밀키웨이가 죽는 것을 바라지 않았다.
나는 그대로 놈을 향해 뛰어 들어갔다.
“언니!! 계속 도망쳐!!!”
화르르륵!
동시에 내 뒤쪽에서 뿜어져 나가는 불꽃.
내가 공격해 들어가는 것을 보고 퀘이사도 상황을 파악한 모양이었다.
zhieeeeeee!
레드 레빗의 손에서 뿜어져나온 레이저가 퀘이사의 불꽃과 부딪힌다.
BoooM!
두 힘이 부딪히며 작은 폭발이 일어난다.
그와 동시에 나는 레드 래빗의 코앞까지 도달할 수 있었다.
꽈득-
양팔에 순간 강화를 사용한다.
슈트로 강화된 왼 주먹이 놈을 향해 날아간다.
바로 앞에 도달한 나를 막기 위해 얼음 방패를 만들어내는 레드 래빗.
하지만.
쾅!
레드 래빗이 만들어낸 얼음 방패는 순간 강화한 내 왼 주먹 앞에 순식간에 부서지고 말았다.
동시에 뻗어지는 나의 오른손.
“그만! 그만해요! 오해예요!”
밀키웨이가 무어라고 하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머리에 피가 몰린 탓인지 잘 들리지 않았다.
방패가 부서지고도 왼손을 들어 올려 나의 공격을 막아내는 레드 래빗.
쾅!
빠득-
제대로 박혔다.
내가 뻗은 주먹이 레드 래빗의 왼팔을 부러뜨린 것이 느껴진다.
부상을 입혔으니 제압하기가 더 수월해질 터.
그렇게 생각하며 재차 연속 공격을 먹이려던 바로 그때.
“뭐야? 지원이 왔는데?”
“그러게 더 빨리 서둘러야한다고 했잖아!”
우리가 전투를 벌이던 골목길 안으로 세 사람이 뛰어 들어오는 것이 느껴졌다.
[“마스터! 적입니다!”]
말해주지 않아도 알아!
당연한 일이었다. 이전에 만났던 빌런들도 팀을 꾸린 채 우리에게 덤벼왔으니까.
레드 래빗도 혼자가 아닐 수 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었어야 했다.
그렇다면, 이미 상처를 입은 레드 래빗을 빠르게 제압하고 나머지를 상대한다.
아까 했던 것처럼 만들어낸 방패를 부수고 반대편 주먹으로 결판을 내면 된다.
계산이 끝난 나는 또 다시 오른 주먹을 뻗었다.
방패를 만들어내는 것을 기다리고 있던 바로 그때.
DUDADADADADA!
놈들이 뿜어낸 총격이, 뒤편에 있는 밀키웨이를 향해 날아간다.
뻗어진 레드 래빗의 손은 방패를 만들어내는 대신 고드름을 생성해 발사했다.
이 녀석. 나를 공격하는 대신 밀키웨이를 습격할 생각이야?
그런 생각을 하며 주먹을 뻗으려했지만,
tik-tak-tik-tak
날아간 고드름은 밀키웨이에게 향하는 총격을 막아냈다.
“오해라구요! 이 사람은 제가 도망칠 수 있게 도와주고 있었어요!”
그제서야 들려오는 밀키웨이의 목소리.
나는 레드 래빗에게 뻗으려던 주먹의 궤도를 가까스로 비틀었다.
휘이이익!
레드 래빗의 얼굴로 틀어박히려던 주먹은 빗겨나가 귀를 스치고 지나갔다.
훅!
“이건 맞았으면 쓰러졌겠군.”
마치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하는 것처럼 담담한 말투.
이게 나에게 자신을 죽이라며 소리를 고래고래 지르던 레드 래빗이 맞나?
【“어둠의 황제여. 일단 지금 당장 상대해야 할 적부터 쓰러트린 뒤 생각하는 게 좋겠다.”】
그래.
나는 뻗어진 주먹을 회수하며 뒤로 돌았다.
일단 잔챙이들부터 처리하고 이야기해보자.
* * *
또다시 다크 카이저에게 패배해 감옥으로 들어간 레드 래빗, 최민형은 결국 사형선고를 받고 말았다.
히어로들의 활약으로 죽은 사람은 없지만, 세 번이나 악질적인 테러를 계획했다는 이유였다.
모두 사실이었고, 억울할 것은 없었다. 심지어는 어느 정도 홀가분하기도 했다.
먼저 저 세상으로 떠난 가족을 만나러 갈 수 있게 되었으니까.
하지만, 마지막에 다크 카이저가 자신에게 했던 말은 계속해서 마음 한 켠에 남아 있었다.
“지금 당신을 죽이면, 나는 내가 평생을 후회할 것을 알기 때문이지. 당신은 어떤가? 만약 이 테러가 성공했다고 하면, 당신은 후회하지 않을 자신이 있나?”
만약, 자신이 테러에 성공해 많은 사람들을 죽였다면, 지금의 죽음을 이렇게 홀가분하게 받아들일 수 있었을까?
과연 자신이 미워하던 것은 다크 카이저였나? 그게 아니면, 가족들을 지키지 못한 자신의 나약함이었나?
그런 생각을 하며 죽음을 기다리던 최민형은, 어느 날 간수로부터 제안을 하나 받았다.
킬레이븐. 다크 카이저를 죽이려는 팀의 일원이 되어달라고.
아마, 자신이 다크 카이저에게 가지고 있는 원한과 집착을 아는 사람이 있던 모양이었다.
최민형은 그 제안을 거절했다.
“내 일은 내가 알아서 하겠다.”
하지만, 사람들과 대화를 해본 경험이 적은 최민형의 말이 잘못 전달되었던 모양이다.
사형 집행일, 최민형은 사형집행을 받는 대신, 킬레이븐이라는 팀의 일원이 되어 다크 카이저를 죽이기 위해 투입되었다.
* * *
퍼억!
내 주먹에 얻어맞은 뿔 달린 빌런이 뒤로 쓰러지는 것으로, 전투는 마무리되었다.
“언니!”
전투가 끝나자마자 밀키웨이에게 달려가 안기는 퀘이사.
“많이 걱정했어? 내가 미안해. 호출기는 부서지고, 전화기는 가지고 나오질 못했네.”
“으응… 아니야… 언니가 다치지 않고 멀쩡하다면 그걸로 됐어.”
뭔가 보기 좋구만.
평소 쿨하고 시크한 이미지를 유지하는 강수아의 모습을 생각하니, 저런 모습이 조금은 귀엽게 느껴졌다.
[“그냥 퀘이사가 예뻐서 그런 게 아니고요?”]
떽! 어디 그런 불경한 소리를 하고 있어? 날 뭘로 보는 거야?
그냥 꾸밈없이 솔직한 지금 모습이 더 어울린다고 생각했을 뿐이야.
아무래도 강수아일 땐 주변과 거리를 두려고 하는 경향이 있으니까.
요즘은 소연이랑 유진이 때문에 좀 유해지긴 했지만.
[“저는 소연이랑 유진이 때문만은 아니라고 생각하는데요.”]
뭐, 그래. 스스로 노력하기도 했겠지.
“자리를 옮기지. 위험하니까.”
“그래요. 일단 자리를 옮겨서… 어머. 팔 괜찮아요?”
“…조금 아프군.”
“안전한 곳으로 이동하면 치료해줄게요. 걱정하지 마요.”
담담한 목소리로 밀키웨이와 대화하는 레드 래빗은 내가 알던 사람이 아닌 것만 같았다.
아니, 다시 파란 가면으로 돌아왔으니 블루 래빗이라고 불러야할까?
대체 그 동안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 * *
킬레이븐의 사건이 끝난 뒤, 최민형은 갈 곳이 없었다.
자신을 반겨줄 유일한 가족인, 어머니와 동생을 잃었으니까.
감옥으로 돌아가 다시 죗값을 치르는 것도 생각해보았지만, 그건 자신을 감옥에서 빼 온 놈들의 손아귀로 다시 돌아가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자신은 이미 서류상으로 사형을 당해 죽은 사람이 된 몸.
브루트들에게 냉정한, 천산시라는 각박한 도시 내에선 새로운 삶을 살 방법이 없었다.
신원이 보장되지 않는 브루트들을 고용해서 월급을 줄 사람은 적어도 천산시에는 없을 테니까.
그때, 예전에 함께 공장에서 근무하던 브루트들의 이야기가 머릿속에서 떠올랐다.
천산시 바깥, 천월군에 브루트들이 모여 사는 곳이 있다. 불곰파가 보호해주는 곳이라 안전하다더라.
그때는 이미 어머니가 병원에 입원해 있던 상태였다. 병원 치료가 필요한 어머니를 데리고 깡패 소굴로 들어간다는 생각은 할 수 없었다.
하지만, 홀몸이 된 지금이라면 그곳에서 새 삶을 살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하며 최민형은 불곰파를 향해 떠났다.
* * *
“레드 래빗. 아니, 블루 래빗. 대체 무슨 꿍꿍이로 우리를 돕는거지?”
자신과 마주한 다크 카이저의 모습을 보며, 최민형은 묘한 감정을 느꼈다.
지금껏 증오해왔던 사람에게 이러한 제안을 하게 될 줄은 최민형은 꿈에도 몰랐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다크 카이저, 아니 아스트로 스타즈같은 진짜 히어로들의 도움이 필요했다.
최민형은 준비했던 말을 꺼내기 위해 입을 열었다.
이번에는 짧은 말주변으로 오해를 사지 않기 위해, 최대한 조심하면서.
“아스트로 스타즈에게 동맹을 요청하러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