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화
스카 페이스
“스피드스터들은 기본적으로 자신의 속도를 조절할 수 없다. 대부분의 스피드스터들의 속도를, 사람의 정신은 따라갈 수 없거든.”
그래서 직선적인 움직임을 하는 경우가 많지.
팔짱을 낀 페이퍼백이 말했다. 페이퍼백이 입술을 달싹일 때마다 얼굴에 쓴 종이백이 부스럭거렸다.
“아무래도 곡선은 힘들지. 음음.”
부스럭부스럭.
“그러는 당신은 왜 곡선적 움직임이 가능한 거지?”
“나는 걔네들보다 훨씬 빠르니까.”
“당신의 말대로라면 빠를수록 곡선으로 움직이는 건 힘들어야 정상 아닌가?”
“나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빠르니까. 그래서 가능하다.”
아. 페이퍼백 원래 이런 컨셉이었지.
그걸 자각하고 나서야 나는 그 부분을 지적하는 것을 관뒀다.
그리고 지금.
SHEEEEEEEEK!
나는 그때의 기억을 떠올리며 스카 페이스의 공격을 피하고 있는 중이었다.
페이퍼 백의 조언은 유효하게 먹혔다.
놈이 들고 있는 미스릴 나이프가 번쩍인다.
그러면 나는 그곳부터 나까지 이어지는 일직선의 길을 예상하고 크게 뒤로 물러난다.
그런 방식으로 몇 번의 공격을 피해내는 데 성공할 수 있었다.
점점 놈의 속도에 익숙해져 가고 있다. 조금만 더 익숙해지고 나면, 공격할만한 틈도 예상할 수 있을 터였다.
번쩍.
다시 한번 빛나는 스카 페이스의 칼날을 보고, 나는 또다시 뒤로 크게 물러났다.
내가 예상한 대로라면 상처 하나 없이 이 공격을 피해낼 수 있어야 맞을 터였지만….
SHEEEEEEEK!
이번에는 내 옆구리를 스쳐 지나가는 스카페이스의 칼날.
등골이 서늘해지는 섬뜩한 감각과 동시에 알싸한 고통이 밀려왔다.
공격이 내 예상보다 더 깊은 각도로 꺾어져 들어온 것이다.
SHEEEEEEEEEEEEK!
칼날이 한 번 더 허벅지를 스치고 나서야 나는 내가 놓쳤던 부분이 무엇인지를 깨달을 수 있었다.
내가 놈의 루트를 예상하는 것처럼, 놈 또한 내가 피할 방향을 예상하고 있는 것이다.
스카 페이스는 전투 감각도 좋고 경험 또한 많은 빌런이었다는 걸 간과하고 있었다.
그다음엔, 페이퍼백이 뭐라고 했더라…? 페이퍼백 내게 힘을 줘!
나는 다시 페이퍼백이 해주었던 다음 이야기를 머릿속에서 떠올렸다.
“하지만, 스피드스터들도 자신들의 한계를 이미 알고 있기 때문에, 그것만으론 상대하기 힘들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이때의 나는 딱히 이 대화를 중요하다 여기지 않고 있었다.
사실, 내가 본 원작에서 스피드스터는 페이퍼백 외에는 나오지 않았거든.
그래서 스피드스터를 상대할 일이 없을 거라 생각했었다.
세 명이 한 번에 은퇴하는 시점에서, 인력난을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지나 고민하는 게 우선이라고 생각했으니까.
당분간 페이퍼백도 부를 수 없을지도 모르고.
“제약을 걸어야지. 장애물이 많은 곳에서 싸운다면, 놈이 공격해올 루트를 제한시킬 수 있을 거다.”
지나치게 좁은 곳은 피해라.
피할 공간이 부족한 상황에선 아무리 너라도 힘들 테니까.
페이퍼백은 거기까지 말하곤 내 어깨를 두드려주며 다시 건물 안으로 들어가 버렸었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나는 곧바로 고개를 들어 주변을 둘러보았다.
마침 우리가 싸우고 있던 곳은 학교와 운동장 사이에 있는 작은 공터. 주변엔 조각상들과 나무들이 꽤 많이 있었다.
나는 오른손의 체인을 길게 늘어트려 주변의 나무며 조각상들을 쓰러트리기 시작했다.
책 읽는 소녀도, 세종대왕의 동상도 옆으로 쓰러지며 훌륭한 장애물이 되어주었다.
죄송합니다 대왕님. 후손 한 명 살린다고 생각해주십시오.
SHEEEEEEEEK!
내 작전은 성공하는 듯했다.
쓰러진 장애물들 덕분에 평범한 공터였을 때보다 놈의 공격루트를 예상하기가 쉬워졌던 것이다.
그래도 내 몸에 상처가 나는 것을 피할 순 없었지만, 놈의 속도에 점점 익숙해지기 시작했다.
SHEEEEEEEEK!
PTANG!
됐다!
조금씩 속도가 눈에 익기 시작하더니, 이젠 놈의 칼날을 체인으로 막아내는 데까지 이르렀다.
점점 승부를 걸 상황이 다가오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나의 첫 번째 목표는 놈이 손에 쥐고 휘두르는 나이프였다.
놈의 공격을 막아낸 즉시, 놈이 손에 쥔 나이프를 빼앗는 것만으로 놈의 공격력을 급감시킬 수 있을 테니까.
번쩍.
다시 한번 칼날이 빛나는 것이 느껴졌다.
나는 곧장 놈이 오는 방향을 향해 몸을 돌렸다.
놈이 장애물들을 피해 내게 올 수 있는 직선 루트는 단 하나뿐.
SHEEEEEEEEEEK!
다시 한번 소름 끼치는 칼날의 소리를 들으며 예상했던 경로에 체인을 가져다 대 보았지만….
나는 텅 빈 허공을 쥐고 말았다.
그와 동시에 가슴팍에서 느껴지는 알싸한 고통.
야… 이씨 페이퍼백! 곡선은 아무래도 힘들 거라며!
【“불가능하다곤 안 했지. 불평할 시간에 정면을 봐라 나강림!”】
SHEEEEEEEEK!
다시 한번 내 어깨를 스치고 지나가는 칼날.
이제는 확실했다. 놈은 곡선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내가 놈의 속도에 익숙해져 가는 것처럼, 놈 또한 자신이 새로 각성한 능력에 익숙해져 가고 있던 것이다.
곡선으로 움직일 수 있는 스피드슈터는 어떻게 상대하냐고 물어봤어야 했는데.
잠깐.
나는 내가 만들었던 장애물을 둘러보며 한 가지 방법을 떠올릴 수 있었다.
‘직선으로 움직일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만들면 되는 거 아닌가?’
나는 공격을 피하며 점점 학교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마스터? 래피드 스타가 그랬잖아요! 좁은 곳에서의 싸움은 피하는 게 좋을 거라고!”]
맞아. 페이퍼백이 해준 말에 틀린 건 없어.
그런데… 지금은 승부를 걸어야 할 때야.
결국 나는 일직선으로 된 복도 안쪽까지 들어오고 말았다.
쉭-
바람 소리와 함께 나타나, 복도 저 너머에서부터 나를 바라보고 있는 스카 페이스.
“뭐지? 무슨 꿍꿍이냐?”
[“세상에… 쟤가 스카 페이스가 맞아요? 사람 바뀐 거 아니에요?”]
지금까지는 너무 빨라서 놈의 모습을 볼 수 없었지만, 모습을 드러낸 지금은 놈의 모습을 제대로 볼 수 있었다.
완전히 다 빠져버린 머리카락, 곧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을 비쩍 마른 몸, 그리고 그 몸에 입혀져 있는, 주사액이 잔뜩 들어있는 슈트, 그리고 생기를 잃은 눈.
나는 그 모습을 보고서야 놈이 어떤 강제적인 방법으로 2차 각성을 이루었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미쳤군. 여기서 끝을 볼 생각인가?
나는 그제서야 내가 하고 있던 생각이 틀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나는 지금까지, 놈이 이 학교를 목표로 삼은 이유가 나와 퀘이사에게 복수하기 위해서 일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알다시피, 나와 퀘이사는 두 번이나 놈의 계획을 방해한 전적이 있으니까.
하지만, 단지 우리에게 복수하고 싶다는 이유로 저렇게까지 자신을 몰아세운다고?
말도 안 돼.
무언가 다른 목표가 있는 것임이 틀림없었다.
“대체 뭘 위해 이렇게까지 하는 거지? 무슨 목표로 이 학교를 습격한 거야?”
“혹시, 자신의 인생을 망칠 정도의 실수를 해본 적이 있나?”
뭐?
나는 스카 페이스의 질문에 심장이 쿵 하고 떨어지는 감정을 느꼈다.
내 인생에서 있었던 크나큰 실수를 떠올릴 수밖에 없었으니까.
“내 손으로 되돌릴 수 없을 만큼 크나큰 실수. 그 실수를 되돌릴 방법이, 이 학교에 있다는 것을 알았거든.”
【“네 친구, 소연이의 이야기인 것 같군. 차원 이동의 힘이라는 것은, 잘만 사용한다면 시간을 되돌리는 방법으로도 활용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나는 그제서야 놈이 이렇게 필사적으로 자신의 모든 것을 걸며 전투를 벌이는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그런데, 좀 우습네.
[“뭐가 그렇게 우스운데요?”]
실수를 되돌리기 위해 더 큰 실수를 계속해서 저지르고 있잖아.
수많은 사람을 다치게 하고, 심지어는 자신의 몸까지 상해가며.
스스로를 더 고통 속으로만 빠트리고 있는 격이야.
이미 실수했다는 사실이 머릿속에 남아있는데, 그 시간을 되돌린다고 뭐가 달라지지? 역겨운 자기 위로일 뿐이야.
나는 결국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단지 그런 이유로 이런 짓을 벌인 건가? 역겹기 그지없군.”
“안 그래도 죽일 생각이었는데, 명을 재촉하는군.”
분노한 기색을 보이는 놈을 보며, 나는 도발하듯 손을 까딱였다.
“너 같은 놈에게 질 이유가 없군. 덤벼.”
번쩍.
내 말이 모두 끝나기도 전에 번쩍이는 빛.
나는 지금 완전히 복도 안으로 들어선 상태였다. 좁은 복도 안에선 몸을 비튼다고 해도 칼날을 완전히 피해낼 순 없을 터였다.
하지만, 놈이 공격해 들어오는 경로 또한 단순해질 수밖에 없었다.
극한의 집중을 한 탓인지, 시간이 천천히 흘러가는 것처럼 느껴졌다.
SHEEEEEEEEEEEEEEK!
아니, 아닌가. 쟨 그래도 X나 빠르네.
나만 느리고, 놈은 빠른 시간 안에서 나는 천천히 오른손을 뻗었다.
내가 뻗은 오른손에, 마치 기다렸다는 듯 놈의 단검이 빨려 들어온다.
잡았다.
미스릴 나이프를 잡은 순간, 나는 놈을 완전히 제압할 수 있을 거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나는 곧바로 왼손을 뻗어 목을 잡아 놈을 들어 올렸다.
슈트의 영향으로 가벼워진 몸이 힘없이 내 왼손에 잡혀 떠올랐다.
* * *
끝났군.
칼날이 자신의 손을 떠나는 것을 느끼며, 스카페이스는 실패를 실감했다.
아니, 사실은 이미 진작부터 실패했음을 알고 있었다. 바보 같은 미련 때문에 붙잡고 있었을 뿐.
자신이 입고 있는 이 슈트는 이미 자신의 생명력을 남김없이 빨아먹은 상태였다.
이런 몸 상태로 다크 카이저를 제압하는 데 성공하더라도, 결국 차원의 문을 여는 능력자를 제압하는 덴 실패했으리라.
실수였다.
다크 카이저를 상대하는 것이 아니라, 무시하고 목적을 달성하는 걸 우선시했어야 했다.
“실수했군… 너를 무시하고 목적을 향해 달렸어야 했는데.”
죽음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느꼈기 때문일까? 자신을 방해한 히어로인데도 자신도 모르게 입을 열고 말았다.
자신의 말을 들은 다크 카이저는 고개를 흔들며 입을 열었다.
“네 놈이 한 실수는 그것뿐만이 아니다. 자, 네가 저지른 일을 보아라. 너 때문에 아이들의 배움터가 되었어야 할 학교가 아수라장이 되었어. 네가 저지른 실수가 무엇인진 몰라도, 그게 이런 일을 벌여야 할 정도의 가치가 있었나?”
스카 페이스는 그제서야 주변을 둘러보았다.
아직 도망치지 못한 채 교실에 숨어있던 아이들이 자신을 겁먹은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스카 페이스는 그 얼굴들에서 딸의 모습을 떠올렸다.
매일 자신을 겁먹은 표정으로 떠올리던 자신의 딸을.
그제야 스카 페이스는 자신의 아내와 딸이 자신을 떠난 이유를 깨달을 수 있었다.
자신은 실수에 매몰되어 있었다.
자신의 실수로 동료가 죽고 말았다는 사실에, 실수로 가족에게 고통을 주고 말았다는 사실에 매몰된 채 그것을 되돌릴 방법을 찾기 위해 인생을 허비했다.
만약 시간을 되돌릴 수 있었다고 해도, 자신은 평생을 실수 속에 갇힌 채 살 수밖에 없었을 터였다.
점점 몸에서 힘이 빠져나가는 것을 느끼며, 스카 페이스는 눈을 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