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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어로 만화 속으로 나 강림-167화 (167/236)
  • 167화

    킬레이븐(5)

    강림이 정신세계에서 떠난 뒤에도, 벨제뷔트는 돌아가지 않고 정신세계에서 나가지 않았다.

    제인과 맺은 계약만으론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이렇게 하기 위해 나강림과 새롭게 계약을 맺었다.

    이중계약이나 마찬가지인 상황이었다. 계약자인 제인이 알게 된 후 걸고 넘어지면, 막대한 손해를 볼지도 몰랐다.

    하지만, 벨제뷔트가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강림이 정신세계에서 돌아가자, 흰색의 공간이었던 정신세계가 서서히 허물어졌다.

    그 뒤엔 천천히 새로운 세계들이 덮어 씌워졌다.

    아니, 새로운 기억이라 해야 옳을 것이다.

    그 기억은 가끔 강림이 기억하는 과거의 세계일 때도 있었고, 혹은 강림이가 꿈꾸는 미래의 세계일 때도 있었다.

    하지만 대부분은, 강림이 지금 보고 느끼는 것들이 다채로운 색으로 빛나곤 했다.

    ‘억제력. 이 도시를 지키기 위해서는 억제력이 필요했다. 그래서 나는 오늘, 놈을 이 자리에서 죽여버릴 생각이었다.’

    강림이 지금 하는 생각이 정신세계를 강하게 울렸다.

    흰색이던 공간이 붉은색으로 물들었다.

    분노.

    벨제뷔트는 자신의 친구가 다쳤음에 분노하는 강림의 감정을 온전히 느낄 수가 있었다.

    “그래. 살인을 두려워하지 말라. 소년이여.”

    그런 강림의 정신세계에서 저벅저벅 벨제뷔트를 향해 걸어오는 인물이 하나 있었다.

    “드디어 나오는군. 평생 숨어서 나오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승산이 있는 상황에서 전투를 벌이는 게 병법의 기본 아니겠는가?”

    천천히 걸어나온 인물은, 나강림이 다크카이저의 슈트를 입은 상태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다크 카이저가 입고 있는 슈트는 평소의 슈트와는 미묘하게 달랐다.

    평소의 다크 카이저와는 다르게, 검붉은색으로 물 들은 양쪽 눈이 눈에 띄었다.

    아니, 슈트의 형태가 다른 것이 아니었다. 기세가 다르다.

    타고난 살인자의 기세.

    지금 모습을 드러낸 인물에겐 타고난 살인자의 기세가 존재했다.

    “암흑황제 살상형이라고 하던가. 썩 괜찮은 힘이로다.”

    그 모습을 보며, 벨제뷔트는 과거, 저 녀석이 슈트 안에 봉인되던 때를 떠올렸다.

    증오와 실의에 빠져 악령이 되었던 영혼이었다.

    그때, 봉인하게 내버려 두는 게 아니라 아예 소멸시켜 버려야 했는데….

    그때 힘을 잃고 잠에 빠졌다고 생각했건만, 실은 강림의 정신 한켠에 기생한 채 때를 노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얼마 전, 강림이 정신지배에 걸린 틈을 비집고 영향력을 키운 모양이었다.

    아니, 어쩌면 정신지배를 위해 들어온 힘, 그 자체를 잡아먹고 힘을 다시 키웠을지도 모르겠다.

    강림의 마음이 약해 소멸이 아닌 봉인을 택했던 것이 오늘따라 유독 원망스러웠다.

    아니, 후임자가 들어왔다고 희희낙락했던 과거의 자신이 미워지는 순간이었다.

    “그 옷 벗지. 주인도 쓰지 않고 봉인해두었던 힘인데.”

    “이렇게 강한 힘을 대체 왜 봉인해둔단 말인가? 이 힘을 제대로만 사용할 수 있다면, 이 세상에 적수가 없을진대.”

    “안 벗으면 벗기러 가겠다.”

    “벗겨? 네가?”

    지이잉-

    악령의 손아귀에 창이 하나 만들어쥐어진다.

    꿰뚫는 섬광, 다크 스피어라고 이름 붙여져있던 다크 카이저의 살상무기였다.

    “지금 그 모습으로? 네가 두 번째 지옥을 다스리는 왕이라 한들, 지금 여기선 그저 한낱 미물의 모습을 하고 있을 뿐일 터인데. 감히 내게?”

    지금까지 소멸될까 무서워 숨어만 있던 놈이, 유리해지니 혀가 길어지는군.

    퍼엉!

    바깥에서 시작된 전투가 정신세계 내부에까지 영향을 미치기 시작한다.

    분노에 가득찼던 정신세계가 여러 가지 색으로 공명하기 시작한다.

    정신세계가 슬프고 우울한 색감으로 반짝이기 시작한다.

    도움이 필요한 색깔이었다.

    그저 평범한 인간일 뿐인 강림은 혼자서 버텨내는 것을 버거워한다.

    제약이 많은 제인보다, 자신이 도움이 될 상황이 올지도 모른다.

    슬슬 기다리던 놈이 나타났으니 마무리를 하고 바깥으로 나가봐야 할 듯싶었다.

    저번 계약과는 다르게, 이번 계약에서는 벨제뷔트도 일방적으로 힘을 주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주는 힘만큼, 받은 힘도 있었다.

    지금 눈앞에서 우쭐대는 망령 한 마리 정도는 쉽게 정리할 수 있을 정도로는 충분할 정도로.

    개구리의 모습을 하고 있던 벨제뷔트의 모습이 사람의 형태로 변하기 시작한다.

    벨제뷔트가 변한 사람의 모습은,헬 카이저의 모습과 흡사했다.

    퍼엉!

    벨제뷔트의 손에서 날아간 흑염이 악령의 몸을 뒤덮었다.

    *    *    *

    PZZZZZZZZZ!

    라이트닝 스파크의 손에서 나온 번개가 내 몸에 직격으로 들어맞았다.

    [“마스터? 제 말 안들리세요? 마스터?”]

    감전의 고통속에서 나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방금까지 내가 무슨 생각을 한 거지? 죽여버린다고 했나?

    좋지 않다.

    잠시 분노에 정신을 잃을 뻔했다.

    어쩌면, 지난번에 빠져나온 정신지배가 실은 아직도 영향을 끼치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이런 생각을 하던 와중에도, 마음 속에선 생경한 감정이 느껴지기 시작한다.

    뜨거운 감정인 것 같으면서, 또 어떻게 보면 섬뜩하리만큼 차가운 감정.

    살의.

    이것이 살의라는 거구나.

    덜컥 겁이 난다.

    지금껏 경험해보지 못한 감정임과 더불어, 내 감정이 내 마음대로 통제가 되지 않고 있음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뭐? 살의?

    살의가 어때서? 진짜 죽이지만 않으면 되는 거 아니야? 아니, 죽이면 뭐 어때? 어차피 탈옥해서 범죄나 저지를, 쓰레기 인생인데. 그렇지 제인?

    [“마스터! 정신 차려요!”]

    아까부터 제인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벨제뷔트처럼 이런 타이밍에 잠에라도 들어버린 것일까?

    좋지 않네. 나 혼자 모두 이겨내야하는거잖아.

    혼자는 외로운데. 어쩔 수 없지.

    제인이 없는데도 저절로 슈트가 블래스터 모드로 변화하기 시작한다.

    PANG!PANG!PANG!PANG!

    곧바로 양손의 블래스트를 놈을 향해 난사한다.

    PZZZZZZZZZ!

    “겨우 이 정도냐?”

    PZZZZZZZZZ!

    새롭게 각성이라도 한 것일까?

    화염의 힘이 섞여 있던 과거와는 다른, 순수한 전기의 힘을 가진 라이트닝 스파크는 그 전과는 전투의 스타일이 달랐다.

    마치, 래피드 스타를 떠올리게 하는 엄청나게 빠른 속도.

    이 정도 속력을 따라붙기 위해선, 블래스트 모드만을 사용해선 안 된다.

    나는 지난번 퀘이사 구출 작전에서도 사용했던 것처럼, 슈트 모드 두 가지를 합쳐 새로운 슈트 모드를 만들어내기로 했다.

    일단… 지금 당장 놈의 속력을 따라잡을 수 있어야만 한다.

    내 몸에 있는 슈트의 근육이 천천히 크기를 줄여나가기 시작한다.

    스피드 모드로 변화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기존의 스피드 모드와 다른 점이라고 하면, 손에 달려있던 블래스터들이 사라지지 않은 채 위치하고 있었다는 점이었다.

    SUIT MOD

    The HELL Kaiser

    …아니. 그럴 필요가 있나? 어차피 죽여버릴 생각인데. 더 강한 슈트를 가져와서 죽여버리면 그만인걸.

    나는 지금껏, 누군가를 죽이고 싶지 않아서 사용하지 않았던 슈트를 꺼내기로 마음먹었다.

    다크 카이저 – 즉살모드.

    지금은 헬카이저니까 어디 보자….

    SUIT MOD

    The HELL Kaiser

    나강림의 두 눈의 안광이 검붉은 색으로 빛나기 시작했다.

    *    *    *

    SHEEEEEEEEEEEK!

    흑염을 뚫고 날아든 창날이 벨제뷔트의 머리 바로 옆을 스치고 지나간다.

    놈이 헬 카이저로 변한 벨제뷔트를 향해 들고 있던 창을 집어던진 것이다.

    파아아아아앙!

    분명히 창날을 피해내는 데 성공했지만, 창날의 뒤에 따라붙은 충격파가 벨제뷔트의 몸을 그대로 덮쳤다.

    콰아아앙!

    충격파에 휩쓸린 벨제뷔트의 몸이 뒤로 한참을 물러난다.

    아까부터 계속해서 반복되고 있는 상황이었다.

    놈이 들고 있는 다크 스피어는, 살상력이 너무 커서 사용할 수 없다고 말했던 나강림의 말을 공감하게 만들었다.

    마치 전쟁에서 사용할법한 미사일을 방불케 하는 위력이었다.

    이곳이 정신세계가 아니었다면, 그리고 자신이 지옥의 군주가 아니었다면 몇 번이고 온몸이 찢어졌을 법한 위력이었다.

    그나마 다행이라고 할 수 있는 부분은, 놈이 슈트의 사용방법을 제대로 알지 못한다는 점이었다.

    어쩌면 당연한지도 몰랐다.

    놈이 살던 세계에선 존재하지 않는 기술들로 이루어진 최첨단 슈트일 테니까.

    ‘그렇다고 해도, 창의 위력이 너무나도 강하다. 돌파할 방법이 필요해.’

    강림이 어린 나이에 만들어낸 슈트다. 분명 어딘가에 결함이 있을 확률이 높았다.

    ‘지금 가지고 있는 슈트의 능력들처럼 말이지.’

    지금에 와서야 스스로도 슈트들의 결함을 채우는 방법을 찾고 있는 모양이었지만, 모드들 제각각은 강력한 만큼 한계도 뚜렷한 편이었다.

    하지만….

    놈이 입고 있는 슈트는 그런 단점이 존재하지 않는 형태였다.

    ‘즉살 모드라고 했던가.’

    파워모드, 스피드모드, 아머모드의 장점들만을 가져와 합친 듯한 슈트.

    크게 두각을 일으키는 능력은 없다는 점이 있긴 하지만, 단점이라고 말하기에도 뭐한 수준이었다.

    “지옥의 왕이여. 잘 생각해봐라. 너도 이 세상을 계속 지켜봐 왔을 테니 알 테지. 이 세상이 얼마나 썩어빠졌는지….”

    “네가 뭘 알지? 몇백 년간 산속에 처박혀 있던 악령 주제에.”

    “이 소년의 마음 속을 들여다보면 알 수 있지. 내가 살아 숨쉬던 400년전과 지금은,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 악한 이들이 세상을 지배하고 선한 이들은 언제나 인내하며 살아가고 있지. 너도 그걸 느꼈기 때문에 이 세계에 강림하려고 했던 것이 아니던가?”

    과거, 자신이 했던 생각을 입으로 내뱉은 악령을 보며, 벨제뷔트는 피식 웃었다.

    자신도 저렇게 생각했던 적이 있었다.

    이 세계에 강림하려고 했던 그 날, 어차피 세상이 지옥처럼 변했다면 이 세계를 지옥으로 만들어버리겠다고 결심했던 적이 있었다.

    인간이라는 존재에 대해서 너무나도 모르고 있던 때의 이야기였다.

    그 생각이 바뀌게 된 것은, 레드 래빗과의 첫 번째 혈투를 벌이던 나강림의 정신을 읽게 된 후부터였다.

    자신이 이 세상의 주인공이라도 된 것마냥 날뛰던 어린아이가 자신이 저지른 일을 후회하던 바로 그때.

    그때 벨제뷔트는 인간은 변화할 수 있는 존재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리고 그것을 확인하기 위해 나강림을 도와 히어로 활동을 계속해 나가보았다.

    그리고 지금은, 벨제뷔트는, 인간은 분명 변화할 수 있는 존재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악인이라도, 변화할 수 있다.

    강림이 주었던 깨달음을 곱씹고 있던 바로 그때, 벨제뷔트는 놈이 던지고 있는 창을 파훼할 방법을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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