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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어로 만화 속으로 나 강림-155화 (155/236)

155화

가족(5)

간만에 내 오른손에서 뿜어져 나간 흑염룡이 좁은 골목길을 휩쓸었다.

화르르륵!

골목길의 구석구석이 흑염의 색으로 물든다.

“으으으억… 어어어억!”

내 예상대로 놈들이 입고 있는 철갑옷은 순식간에 붉게 달아올랐다.

“불… 불이다 불! 불이야! 도…도, 도망쳐!! 도망쳐!!”

그런데… 반응이 조금 이상한데…?

놈들은 입고 있던 갑옷을 순식간에 집어 던지고 바깥으로 모두 뛰쳐나갔다.

내가 갑자기 흑염을 뿌려버렸던 것은, 놈들의 갑옷을 뚫고 피해를 줄 자신이 있어서 그랬던 것은 아니다.

놈들의 갑옷까지 뚫고 녹여버릴 정도의 화력은, 아마 퀘이사 정도가 아니면 할 수 있는 사람이 거의 없을걸.

내가 흑염을 뿌렸던 이유는, 뜨거운 태양이 나그네의 외투를 벗겼던 것처럼 놈들의 갑옷을 뜨겁게 달궈 벗겨버리려고 했던 것뿐이다.

하지만… 고작 그 정도 흑염 한 번에 이렇게 다 소스라치게 놀라서 도망친다고?

내가 현재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던 바로 그때.

“힉… 히이이익! 히이이이이이익!”

유일하게 갑옷을 입고 있지 않던, 조그만 녀석이 사색이 되어 자신의 웃옷을 벗어 바닥에 집어 던진다.

웃옷을 벗은 놈의 몸에는, 알 수 없는 모양의 상자가 칭칭 감겨져 있다.

[“…마스터! 폭탄! 폭탄입니다! 폭탄이에요!”]

그 말을 들음과 동시에, 시간이 천천히 흘러가기 시작했다.

가끔씩 내가 정말 절체절명의 위기일 때마다 나온 적 있는, 느려지는 시간.

놈이 서 있는 바닥에는, 내가 방금 뿌린 흑염이 아직도 불타오르고 있었다.

흑염도 결국은 불꽃의 일종이다.

용케 흑염을 뿌렸을 때에는 덩치큰 브루트들이 앞을 막아선 바람에 용케 폭탄에 불이 붙지 않았던 모양이지만, 흑염은 분명 뜨겁다.

이미 흑염의 열에 달궈진 폭탄은 언제 터져도 이상하지 않을 터였다.

그리고 폭탄이 터지게 되면 최소한 쓰레기통 안에 숨어있는 아이만큼은 구할 방법이 없었다.

천천히 흐르던 시간이 서서히 돌아오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이 이상의 생각은 부족한 시간을 낭비할 뿐이다.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내 몸이 마음대로 움직이기 시작한다.

생각보다 놈과 나 사이의 거리가 멀다.

내가 명령하지 않아도 마치 내 생각을 읽은 것처럼, 저절로 몸의 슈트가 스피드 모드로 변화한다.

화륵.

두 다리에 흑염이 맺힌다.

그대로 발을 디뎌 앞으로 뛰쳐나간다.

휘이잉!

귓가에 바람소리가 들리며, 내 예상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놈의 앞까지 도달한다.

“끄아아아아악! 살려… 살려주세요! 살… 살려주세요!”

죽을 각오로 폭탄을 입고 있던 것은 아닌 모양이었다.

아니면, 죽을 때가 오니 죽고 싶지 않아졌던지.

폭탄이 터질까 놀라 엉겨 붙으며 발버둥 치는 브루트의 모습을 보며, 나는 이 브루트를 구해주기로 결심했다.

영웅심리나 공명심 같은 건 아니었다. 누군가 죽을 위기에 처해 구조를 요청한다면, 구하는 게 맞다고 생각했을 뿐이다.

놈을 살리기 위해선, 폭탄을 벗겨내야 한다. 나는 폭탄을 벗겨내기 위해 폭탄을 살펴보았다.

어쩌면, 아직까지 터지지 않은 폭탄이 불발일 수도 있겠다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건… 곧 폭발하겠군.”】

복잡하게 얽혀있는 폭탄의 디스플레이에는, 알 수 없는 오류창들이 떠올라 있었다.

마음 같아서는 그대로 몸에 묶여 있는 폭탄을 뜯어내 버리고 싶지만… 생각보다 몸에 묶여 있는 폭탄의 모양이 복잡하다.

그리고 폭탄에 대해 문외한인 나도, 이렇게 복잡하게 묶여 있는 폭탄을 함부로 건드려선 안 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내가 잠시 당황하는 사이, 내 눈 위로 홀로그램이 덧씌워지기 시작한다.

[“마스터! 붉은색으로 표시된 선들만 잘라내면 폭탄을 떼어낼 수 있어요!”]

이미 이해했어!

제인과 하루 이틀 일해보는 것도 아니고, 제인의 목소리가 들려 오기 전부터 이미 내 손은 움직이고 있었다.

…됐다!

폭탄을 떼어내는 데 성공하자마자 놈과 쓰레기통을 골목 밖으로 집어 던진다.

최대한, 멀리멀리 떨어지는 편이 안전할 테니까.

폭탄은 아직 터지지 않았다.

흑염이 완전한 불이 아니기 때문인가? 아니면 레드래빗 때처럼, 폭탄이 불발인가?

불발은 아니야.

분명, 이 폭탄은 터진다.

내 손안에 쥐어지고 있는 폭탄이, 점점 따뜻해져 오는 것이 느껴졌기 때문에 나는 확신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이 폭탄으로 일어나는 피해를 막을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바로 하늘. 하늘이다.

날개를 펴고 하늘 위로 날아오른다면 폭탄을 더 높이 띄울 수 있겠지만, 날개는 비행을 도와줄 뿐, 빠르게 추진력을 얻을 수 있게 해주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이번에도 마찬가지로 내가 명령하지 않았는데도 몸의 슈트가 파워 모드로 변형하기 시작했다.

맨 처음, 이 세계에 왔을 때 내겐 날개도 없고, 스피드 모드도 없었다.

그때의 나는, 그저 파워 슈트의 양다리 힘만으로 건물 위를 뛰어다니곤 했었다.

나는 그대로 무릎을 굽혔다.

화륵.

양다리에 흑염이 맺힌다.

꽈아아악.

파워모드의 슈트가 근육을 쥐어짜는 것이 느껴진다.

나는 그대로 양다리를 박차고 허공으로 뛰어올랐다.

순식간에 내 양옆으로 건물이 빠르게 스쳐 지나간다.

아니, 내가 허공으로 날아오르고 있는 것일 터였다.

튕겨져 나간 내 몸은 도시의 건물을 위로 올라오는 데 성공했지만….

아직은… 너무 낮아.

이대로 터진다면 주변의 건물에 영향이 가고 말 거다. 그럼 건물 안에 있는 사람들이 다치겠지.

화륵.

이번에는 두 팔에 흑염이 맺힌다.

꽈악.

파워모드로 변한 슈트가 근육을 쥐어짜는 것이 느껴진다.

나는 그대로 들고 있던 폭탄을, 최대한 아무것도 없는 방향의 허공을 향해 집어 던졌다.

슈우우욱….

내가 집어던진 폭탄은 순식간에 허공을 가르고 날아올랐고,

내 생각보다 훨씬 더 먼 허공에서 큰소리를 내며 폭발했다.

풀썩!

온 힘을 다한 나머지 착지할 힘이 없었던 나는, 잔뜩 쌓여있는 쓰레기 더미 위로 떨어지고 말았다.

“사… 살았다….”

우르르르르!

허공에서 폭발한 폭탄의 먼지가 주변으로 우두두두 떨어지는 소리가 들려 온다.

그제야 멍했던 정신이 서서히 돌아오는 것이 느껴진다.

등허리에 땀이 주륵 흘러내린다.

만약 저 폭발에 휘말렸다면, 이 주변 사람들은 물론 나조차도 살아남기 힘들었을 것이다.

“!!!”

그런 생각을 하고 있던 와중, 정신이 확 들었다.

지금의 폭발은 막아내는 데 성공했지만, 이곳에서 총기난사를 저지른 브루트들은 아직 막아내질 못했다.

그대로 내버려 뒀다간, 언젠가 또다시 비슷한 일을 벌이고 말겠지.

놈들이 이런 일을 저지른 이유를 알기 위해선, 놈들을 꼭 잡아야만 한다.

나는 놈들을 잡아내기 위해 쓰레기 더미 위에서 몸을 일으켰다.

아니, 일으키려고 했다.

“어?”

팔과 다리에, 힘이 전혀 들어가지 않았다. 아니, 힘이 들어가지 않는 것이 아니라….

“끄…으으으윽… 크으으윽….”

팔과 다리에서 엄청난 고통이 밀려오기 시작했다.

한번 겪어본 적 있는 고통이었다.

마치….

[“마스터. 억지로 움직이려 하지 마세요! 방금 일로 팔다리가 모두 골절되었어요.”]

그래… 골절된 것처럼….

뭐? 골절?

[“방금 슈트가 육체의 능력을 한계까지 쥐어짜 사용한 모양이에요. 팔다리의 근육이 완전히 골절되었습니다.”]

어… 어쩐지… 내 예상보다 훨씬 더 높이 허공 위로 뛰어오른다 싶었다.

고통 때문인지 점점 정신이 흐려지기 시작한다.

제인! 지금 놈들은 어딨어?

[“이 주변에 이미 차량을 준비해뒀던 모양입니다. 이미 차량을 타고 시외로 향하고 있어요.”]

뭐? 핍박받는 브루트들을 위해 싸운다고? 그런 놈들이 부하 몸에 폭탄을 입힌 채 자폭시키려고 해? 그래놓고 자기들은 도망가?

완전히 정신적으로 비틀려있는 집단이다. 이런 집단을 내버려 뒀다가는 분명 이 이상의 사건을 일으키고 말 거다.

지금 도망치는 놈들을 잡아야만 놈들의 실체를 더 확실하게 알 수 있다.

나는 팔다리의 고통을 참으며 쓰레기 더미에서 내려와 바닥에 섰다.

[“마스터! 움직이지 마세요! 마스터!”]

지금 잡아야 해.

[“마스터!”]

큰 길가로 나가기 위해 한 발, 내 딛는다.

다행히 폭발로 다친 사람은 없지만, 결국 폭탄이 터지게 된 것은 전적으로 나 때문이다.

다시 한번, 두 번째 발걸음을 내디딘다.

총기난사 같은 테러를 저지른 놈들이 폭탄은 품고 있지 못하리란 법은 없는 거였는데….

분명 처리할 수 있는 일이었는데도 불구하고, 나는 또다시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다.

세 번째, 네 번째, 다섯 번째.

나는 부러진 발을 이끌고 계속해서 걷는다.

그러니까, 나는 지금 도망치는 놈들을 막아내야할 의무가 있다.

나는… 놈들을… 막아내야 한다.

막아내야 하는데… 점점 정신이 흐려진다.

눈앞이 잘 보이지 않는다.

그때, 익숙한 실루엣의 누군가가 내 눈앞을 가로막고 선다.

“비… 키세요… 막아…내야… 내 실수… 안돼….”

그런 나를 안아주는 내 앞의 익숙한 실루엣.

“강림아… 잘했어… 충분히 잘했어… 괜찮아… 괜찮아….”

따뜻한, 품… 자주 느껴본 적 있는….

나는 익숙한 따뜻함을 느끼며 정신을 잃었다.

*    *    *

소희는 강림이 떠나간 후로도 계속해서 식당에 숨어있었다.

눈을 꼭 감고, 귀를 막은 채 아무것도 듣지 않고 보지 않았다.

모든 일이 끝나고, 다시 자신의 조카가 돌아 올거라고 믿으며, 소희는 눈을 꼭 감은 채 식당안에서 그저 버티고만 있었다.

하지만….

DUDUDUDUDU!

소희가 아무리 귀를 꽉 막아도 들려오는 총소리를 무시할 방도는 없었다.

소희는 그때서야 깨닫고 말았다.

귀를 막고, 눈을 감는다고 해서 외면할 수 없는 것들이 있다는 사실을.

소희는 지금까지 모른 척, 아닌 척 외면하며 살아왔다.

직면하고 싶지 않은 것은 항상 회피하며 살아왔다.

강림이가 히어로 활동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어도. 당장 강림이가 필요한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더라도.

항상 강림이의 생각이 더 중요하다. 강림이가 원하는 대로 살아야 한다. 그런 말을 입에 붙이고 살았음에도.

자신의 욕심이 더 중요해서, 강림이를 놓아주고 싶지 않아서 모르는 척 외면하며 살아왔다.

이젠 피할 수 있는 상황을 넘어서고야 말았다.

적어도 이번만큼은, 자신의 조카가 어떤 일을 하고 있는지 소희는 알아야 할 필요가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소희는 식당의 문을 열고 바깥으로 나섰다.

바로 그때.

BOOOOM!

“꺄아아아악!”

“으아아아악!”

갑작스럽게 허공에서 일어나는 폭발.

후두두둑!

허공의 폭발을 피하기 위해 고개를 숙이는 사람들 사이에서, 소희는 두 눈을 부릅 뜬 채 허공의 폭발을 노려보았다.

그래서 소희는 볼 수 있었다.

허공의 폭발 밑에서, 천천히 떨어지고 있는 자신의 조카의 모습을.

소희는 자신의 조카를 찾기 위해 정신없이 골목길을 향해 뛰었다.

털썩!

골목길에 보이는 쓰레기통으로 무언가가 떨어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소희는 구불구불한 골목길을 타고 조카가 떨어진 곳을 향해 달렸다.

그리고 소희는 보고야 말았다.

저 높은 곳에서 떨어졌기 때문인지, 온몸이 상처투성이가 된 자신의 조카가 쓰레기더미에서 기어 나오는 모습을.

“지금… 잡아야 해….”

한 발.

“지금 막아야… 더 많은 사람이 다치지 않아….”

다시 한 발.

누구에게 하는지도 모를 말을 중얼거리며, 다친 몸을 질질 끌면서도 또다시 누군가를 구하러 가기 위해 필사적으로 걸어가려는 모습을.

소희는 그런 자신의 조카의 앞을 가로 막았다.

“비… 키세요… 막아… 내야… 내 실수… 안돼….”

왜 저렇게 필사적인지, 또 무슨 실수를 했다는 것인지, 소희는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 필사적인 몸짓을 보며, 소희는 자신이 지금 해줘야 할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소희는, 필사적으로 걸으려고 하는 조카를 품에 안았다.

“강림아… 잘했어… 충분히 잘했어… 괜찮아… 괜찮아….”

소희의 얼굴이, 눈물 젖은 얼굴이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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