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4화
우정(1)
오늘은 천산 고등학교의 방학이 끝나고 첫 등교하는 날이다.
소연의 엄마, 한오란은 아침식사가 준비되도 오지 않는 딸을 소리쳐 불렀다.
“소연아! 밥 먹고 학교 가야지! 소연아!”
몇 번이나 불러도 나오지 않는 딸, 한소연.
얘가, 아까 분명히 일어나서 씻고 들어가는 거까지 봤는데… 다시 잠들었나?
방학 동안 길게 쉰 탓에 적응이 힘들었을지도 모르겠다 생각한 한오란은 소연을 다시 한번 깨우기 위해 소연의 방문을 두 번 두드렸다.
“앗. 네~ 엄마 금방 나갈게요. 잠깐만요.”
문 너머에서 들려오는 밝은 목소리.
폭력을 사용하던 남편 밑에서 자라 통 밝은 모습을 보여주지 않던 소연.
그 영향 때문인지, 중학생때까진 학교에 등교하는 것 자체를 힘들어했던 소연의 과거를 생각하면 저 밝은 모습은, 오란에게 있어선 신이 주신 축복과도 같은 것이었다.
하느님, 앞으로도 계속해서 저 아이를 보살펴주세요.
신실한 기독교 신자인 오란이 신에게 잠깐의 기도를 하고 있던 바로 그때,
“엄… 엄마… 좀 어울려요?”
한참을 방 안에서 나오지 않던 딸이 양팔을 들어올린 채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모습은 평소의 소연이와는 달랐다.
펌해 자른 단발 머리, 엷게한 화장, 그리고 안경을 벗고 렌즈를 낀 눈.
예전의 자신 없던 모습과는 완전히 다른 모습을 하고 나타난 소연의 모습을 보며, 오란은 결국 눈물을 보이고 말았다.
“응. 정말… 정말 잘 어울려 내 딸.”
* * *
“어… 어때? 좀 어울리나…?”
소연이 수줍게 해온 질문에 강수아는 박수로 화답해주었다.
“정말 잘 어울려. 한소연.”
그렇게 말하며, 수아는 슬쩍 옆에 있는 강림이를 바라보았다.
“우와아~ 소연이 진짜 잘 어울린다~ 렌즈 끼니까 얼굴이 산다, 살아.”
소연의 바뀐 모습을 기분 좋게 바라보고 있는 나강림의 반응은 사실, 가장 좋게 봐줘도 예쁘게 꾸민 친척 여동생에게 칭찬을 해주는 그 이상으론 보이지 않았지만….
“아… 저… 정말? 그렇게 잘어울려?”
“이야~ 정말 잘어울려! 최고야!”
“아 진짜? 고마워~”
그런 반응을 보고도 너무나 좋아하는 소연을 보며, 강수아는 남 몰래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솔직하게 좋아한다는 사실을 말하지 못하는 소연이나, 그런 소연이가 자신을 좋아한다는 사실을 눈치채지 못하는 강림이나….
얘나 쟤나 둘 다 바보들이다.
“어. 저기 유진이다. 유진아! 도유진!”
마침 저 앞에서 교문을 지나는 또 다른 도유진을 보며 손을 흔드는 바보, 한소연.
네가 반갑게 손을 흔드는 그 친구가, 네 연애를 가장 힘들게 할지도 모르는데 말야….
다행히 마찬가지로 도유진 쪽도 한소연이 강림이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모르는 것 같았지만….
“어 나강림! 왔냐?”
소연의 바뀐 모습을 보며 짓는 표정을 보며 강수아는 도유진이 자신이 비밀로 하던, 그 진실을 알아버렸다는 사실을 눈치챘다.
“유진아 안녕!”
“어. 안녕.”
소연이의 인사를 받아주는 태도부터,
“나강림. 방학동안 뭐했냐? 체육관 나간다더니, 계속 운동만 다녔냐? 오~~ 팔은 쫌 두꺼워졌는데~”
“야 그치? 도유진… 나… 이제 너한테 맞고 살던 내가 아니다.”
“어쭈. 팔 쫌 두꺼워졌다고 너가 나 이길 수 있을 거 같냐?”
소연과 자신이 없는 것처럼 옆에 강림이의 옆에 찰싹 달라붙은 모습,
“아. 오랜만에 학교 오려니까 너무 싫더라. 그치 애들아?”
그리고 마지막으로, 소연의 바뀐 모습에 대해 일언반구도 없다는 점이 결정적이었다.
도유진이, 그래도 얘네 중에선 가장 덜 바보였나 보네.
소연의 외모에 대해 이런 저런 조언도 해주고, 함께 미용실을 가거나 쇼핑을 하러 가기도 하고, 화장에 대한 노하우까지 알려줬던 도유진의 성격상, 바뀐 소연의 모습에 뿌듯해하며 좋아해야 정상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도유진이 애써 소연 쪽은 바라보려고도 하지 않는 것이 느껴졌다.
내 이렇게 될 줄 알았지.
수아에게 있어서 도유진보다 소연이 훨씬 소중한 친구인 것은 맞았다.
하지만, 도유진도 이젠 분명 수아에게 있어서 친한 친구 중 한 명이 되고 말았다.
소연, 강림, 그리고 유진.
히어로 활동을 위해 강수아의 인생을 살길 거부했던 자신의 옆에, 어느새 친구들이 하나둘 늘어나기 시작했고, 수아는 그런 친구들과 함께 하는 삶이 조금, 아니 많이 즐거워지기 시작했다.
수아는 소연과 강림이 둘이 잘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항상 도와주고 싶었지만… 이젠 자신이 해줄 수 있는 부분을 떠났다는 사실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게 강림이와 소연이, 그리고 도유진에 대한 예의일 테니까.
소연아 미안… 이제부턴 내 손을 떠났어.
* * *
소연은 평소와는 자신을 대하는 태도가 다른 도유진을 보며 조금은 당황했다.
얼굴의 화장도, 머리의 모양도, 그리고 렌즈를 껴보라는 소리까지.
모두 도유진이 자신에게 알려줬던 것들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열심히 가꿔오면, 유진이도 분명 좋아해줄 거라고 생각했는데….
자신의 얼굴도 쳐다보지 않으려고 하는 도유진의 모습을 보며, 한소연은 깊은 서운함과 당황을 함께 느꼈다.
내가 유진이한테 무슨 잘못이라도 한걸까?
혹시 이제 유진이가 나를 싫어하나?
차갑게 변한 도유진의 모습을 보며, 소연은 울상을 지었다.
* * *
【“…거 이상하군.”】
응? 뭐가?
【“네 친구들의 분위기. 평소와는 다르군. 마치 전쟁을 앞둔 병사들과 비슷한 분위기야.”】
뭐? 그게 무슨 소리야?
잠깐 히어로 활동에 대한 생각 덕분에 정신을 다른 곳에 팔고 있던 나는, 옆에서 들리는 도유진과 강수아의 대화소리에 집중해보았다.
“강수아. 너 신발 높은 것 좀 신지마. 너랑 같이 다닐 때마다 내가 작아보이는 기분이란 말이야.”
“도유진… 이거 운동화야… 네가 작은 걸 나보고 어쩌란 말이니?”
“얘들아! 우리 서둘러 걷지 않으면 지각할지도 몰라! 조금만 더 빨리 걸으면 안될까?”
나는 평소와 똑같이 투닥대는 강수아와 도유진 그리고 소연이의 대화를 들으며 인상을 찌푸렸다.
무슨 뚱딴지 같은 소리야? 자꾸 헛소리 할래?
[“가만히 있어요. 이런 건 알려주면 오히려 더 큰 일로 번질지도 모르니까.”]
“수아야. 강림아. 그리고 유진아. 이따가 봐~”
“응. 소연이도 수업 잘 들어.”
알 수 없는 소리들을 하는 악마와 AI의 대화를 무시하고 나는 소연이에게 손을 흔들어주며 평소와 같이 교실 문을 열어젖히며 외쳤다.
“얘들아. 좋은 아침!”
아니 근데 교실 내부가 왜 이렇게 조용하냐?
“나강림. 시끄럽게 까불지 말고 빨리 자리에 가서 앉아라.”
“넵.”
어쩐지 조용하더라니….
다행히 지각을 하진 않았지만, 담임선생님이 평소보다 일찍 교실에 도착해 앉아계신 상태였다.
나와 수아, 그리고 도유진은 선생님에게 고개를 꾸벅꾸벅 숙여 인사하곤 자리에 들어가 앉았다.
매앰-맴-매앰-맴
여름방학은 끝났지만, 아직 여름이 끝나지 않은 탓에 창문 바깥에선 매미가 끝없이 울고 있었다.
방학이라고 해봐야 한달 조금 넘는 정도밖에 안 됐는데, 꽤 긴 시간을 보낸 기분이었다.
나는 조용해진 교실 내부를 살폈다. 준석이 왔고… 반장도 왔고….
원작에서 한 사건씩 만들어냈던 주요인물들의 표정도 나쁘진 않다. 방학동안 별 다른 일이 일어나진 않았던 모양이다.
“다들 방학 잘 보냈지?”
담임 선생님의 간단한 안부 인사, 그리고 몇 가지 주의사항, 방학 숙제의 제출과 관련된 이야기, 그리고 마지막으로 출석체크.
“강수아.”
“네.”
…
..
.
..
…
“황윤재.”
“네.”
“자… 올 사람 다 왔고… 방학때 오래 쉬고 왔다고 다들 퍼지지 말고 수업 열심히 듣고. 너네 벌써 일년의 반이 간거야. 이렇게 3번만 더하면 너희가 고3 되는 거야. 무슨 소리 하는 지 알지?”
“네~”
“쌤~ 아직 지예가 안왔는데요!”
“아, 지예는 집안 사정 때문에 며칠 학교에 못나온다고 연락 받았다. 다들 그렇게 알고 있고, 혹시 다른 선생님들이 물어보시면 그렇게 말씀드려. 알았지?”
“예~”
별다른 일이 일어나진 않았다는 말 취소.
나는 이름이 불리지 않은 서지예를 보며 약간의 불길함을 느꼈다.
그리고 이런 불길함을 느꼈을 때, 최소한 나만큼은 대체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를 알아놔야만 한다.
역시 이 세계는 내가 평화롭게 놔두지 않는다니까.
제인. 황채경 지금 제대로 수감 되어 있는지 확인해줘.
[“네 마스터…. …확인되었습니다. 별다른 일 없이 수감 되어 있어요. 아무래도 황채경 쪽에 문제가 일어난 건 아닌 거 같아요.”]
황채경 쪽에 문제가 일어난 게 아니라면, 진짜 단순히 집안 문제일까?
그걸 알아내려면, 누구에게 가야 할지 고민하던 나는, 머릿속에서 한 명의 얼굴을 떠올리며 몸을 일으켰다.
걔가 몇 반이더라?
* * *
“야. 너 뭐냐? 니가 뭔데 나를 오라가라야?”
송보라.
학기 초에 서지예와 황채경, 도유진과 함께 어울려 다니던 일진 무리 중 한 명이었던, 키 큰 여자애.
155가 조금 넘는 도유진에 비해 큰 키 때문에, 화가 난 도유진이 무릎을 꿇게 하려고 했던 적이 있는 친구였다.
내가 얠 찾아온 이유는 간단했다.
지금 상황에서 서지예의 사정을 알만한 사람은 얘 밖에 없었거든.
황채경도 없고, 도유진은 서지예와 연락하지 않은 지 오래되었고, 그러면 남은 사람은 얘밖에 없다.
“어 아니… 별 다른 일은 아니고… 혹시 지예한테 무슨 일 없나 해서. 오늘 학교 안 나왔거든.”
내 말에 눈을 치켜뜨며 성난 표정을 지어보이는 송보라.
일진 특유의 센 척하는 표정이었만, 슈퍼 빌런들과 목숨 걸고 싸우는 내게 있어선 우습게 보일 뿐이었다.
“야 뭔데? 니가 왜 그걸 궁금해 하는데?”
“아니… 그냥 반 친구니까….”
“도유진 걔가 시키더냐? 햐~~ 도유진~ 지예랑 채경이 배신해놓고 그래도 궁금하긴 하나 보지?”
“아니… 도유진이랑은 관계 없는 이야긴데….”
“웃기고 있네. 야 궁금하면 도유진 보고 직접 와서 물어보라고 해. 그럼 어떻게 할지 생각해볼 테니까.”
캬악 퉤.
복도 바닥에 침을 퉤 뱉고 자리를 떠나려는 송보라를 보며, 나는 뒷머리를 긁적거렸다.
이거 좀 골치 아프네.
그런 송보라의 앞을 갑자기 툭 가로 막는 도유진.
뭐야 쟤 언제 왔대?
“그래. X발 송보라. 내가 왔다. 그럼 말해줄 거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