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1화
그렘린(2)
지지직- 파지지직- 펑!
“크어어어억!”
그렘린, 아니 박강수는 뻥 뚫린 배를 부여잡고 접속 장치에서 몸을 일으켰다.
사실, 뻥 뚫린 것은 박강수의 배가 아니라 로봇, 그렘린의 배였지만 박강수에게 있어선 자신의 몸이 부서진 것이나 다름없었다.
잠깐 자신의 배를 만져보며 끙끙대던 박강수는, 자신의 배가 멀쩡하다는 것을 깨닫고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아내었다.
하필이면 놈이 쏴버린 곳에 접속장치가 존재하는 탓에 접속이 끊어지고 말았다.
다음번 육체에는 조금 거추장스럽더라도 만약을 대비한 보조 접속 장치를 만들어야 할 필요가 있다.
박강수는 정신이 돌아오자마자 몸을 일으켜 자신의 장비 앞에 앉았다.
방금 싸움에서 생겼던 두 번의 에러에 대한 정보를 분석하기 위해서였다.
십여 분 동안 육체를 멈췄던 에러, 그리고 마지막에 자신을 마비시킨 5초간의 에러. 그 두 개의 에러의 정체를 파악해서 보완한 뒤, 새로운 육체를 만들어야 했다.
이 나약한 육체에 단 하루도 있고 싶지 않았으니까.
빨리 새로운 육체를 만들어 완벽한 육체로 돌아가야만 한다.
약점을 보완한 뒤 다시 싸운다면, 아니, 놈들의 초능력에 대한 제대로 된 대비까지 한 뒤 놈들을 찾아간다면, 분명 자신이 이길 거라는 확신이 있었다.
박강수에게 있어서 이 일은, 그저 그가 겪은 수많은 일들 중 하나 였을 뿐이다.
박강수는 아주 오래전, 히어로를 꿈꿨다.
그건 박강수가 오래전, 박강수가 어릴 때 활동하던 히어로 솔라버드 때문이었다.
천산시에 히어로라고 불릴 수 있는 사람이 얼마 없던 때, 솔라버드는 천산시를 수호하는 유일한 히어로였다.
수많은 전설을 만들고, 천산시를 수호하던 그는 어느 날, 영화 한 편만을 남긴 채 천산시에서 완전히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그를 동경했던 많은 사람이 놀랐다. 그가 없어진 이 도시는, 대체 누가 지킨단 말인가. 많은 이가 불안에 떨었고, 새로운 영웅이 나오길 바랐다. 그중에는, 자신이 그런 영웅이 되어야겠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었다. 박경수는 그중 하나였다.
박강수는 솔라 버드의 뒤를 잇는, 히어로가 되고 싶었다. 당당하고 멋지게, 사람들을 구해주는 히어로.
그래서 박강수는 자신의 능력을 이용해 장비들을 만들고, 히어로 슈트를 만들어 히어로로서 활동했다.
그리고 그 시도는 반쯤 성공했다. 히어로로서 사람을 구해내고, 기사까지 실리는 데 성공한 것.
“이게… 뭐야.”
다만 문제는, 세상이 그 같은 영웅을 바라지 않았다는 점이다.
<쫄쫄이 히어로의 아쉬운 대처… 정말 이게 최선이었는가.>
자신의 볼품없는 몸매와 못생긴 턱, 구질구질한 능력에 대한 신문 기사.
세상이 원하는 건 ‘번듯한’ 히어로였고, 그들이 말하는 ‘진정성’은 진심을 다하는 것만으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하… 하하….”
고작 하루의 기사로 박강수가 무너진 것은 아니었다. 스스로가 얼마나 부족한지에 대해서는 그는 이미 너무 잘 알고 있었다.
다만, 그는 그저 사람들에게 인정받는 멋진 히어로가 되고 싶을 뿐이었다. 언젠가 아무런 보상 없이 그를 구해주고, 말없이 미소를 지어주었던 히어로와 같이.
하나 세상은, 그에게 그 같은 자비를 베풀지 않았다.
박강수가 아무리 노력해도, 가지고 태어난 능력이 강한 히어로들을 따라가지 못했고, 박강수가 해결한 사건들은 단 한번도 주목을 받지 못했다.
그러던 어느 날, 자신이 구해준 사람이 자신을 오히려 피하는 모습을 보고만 그는, 그동안 붙잡아왔던 이성의 끈이 끊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열등감, 배신감… 한 마디로 설명할 수 없었던 그 감정들을 모두 삼켜낸 그는, 그날로 히어로 활동을 그만두었다.
그리고 그날 천산시에는, 한 명의 빌런이 새로 생겼다.
“흐… 흐흐.”
누가 봐도 멋진 육체를 만들었다. 누가 봐도 사악한 빌런을 흉내 냈다. 그리고 반응은, 즉각적이었다.
“제, 제발 자비를….”
더는 누구도 그를 무시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그에게 자비를 구했고, 빌런들은 그를 우러러보았다. 그는 더는 무시해도 되는 사람이 아니었다. 히어로 활동을 할 때와는 차원이 다른 쾌감을 얻게 되었다.
천산시의 고블린, 강철기사단의 지도자.
그는 그를 알아봐 주는 쾌감에 중독되어 멈추지 않았고, 끝없이 악행을 저질렀다.
그리고 이젠, 그 노력이 결실을 맺을 타이밍이었다.
얼마 남지 않았다. 조금만 더 하면 이 세상 사람들에게 보여 줄 수 있었다.
나는, 너희에게 비웃음을 당할 존재가 아니다. 너희보다 우월한, 멋진 사람이 될 수 있다. 이 실험실이 들키지 않는 이상, 나는 결코 죽지 않는다.
결코 죽지 않는 자신이 이 도시를 지배하게 된다면, 불합리한 이 세상을 모두 뒤집어엎고 새로운 세상을 만들고 말리라.
머리에 흐르는 식은땀을 훔치며 새로운 육체를 만들고 있는 박강수의 실험실 문 앞엔, 이미 누군가가 찾아와 서 있었다.
* * *
역시… 서포트는 제인이 최고라니까.
[“그렇죠? 역시 제가 없으면 안 되겠죠? 마스터?”]
그래. 역시 제인이 최고야.
【“…….”】
벨제뷔트도 지금까지 고생 많았어. 제인이 없는데도 열심히 해줬잖아.
제인이 돌아온 뒤로 급격하게 말수가 적어진 벨제뷔트에게서, 내심 섭섭해하는 감정이 느껴졌기 때문에, 나는 위로의 말을 건넸다.
【“나를 동정하지 마! 진심을 담아서 말해달란 말이다!”】
동정 아니야 진짜야.
또 투정 부리는 지옥의 대악마를 위로하며【“대악마가 아니라 군주다!”】, 나는 내가 서 있는 밑바닥을 뚫으며 뛰어내렸다.
“뭐… 뭐야? 당신? 여길 어떻게 알고 온 거야?”
새롭게 만들고 있는 로봇의 뼈대를 만들고 있던 그렘린의 본체, 박강수가 나를 보며 눈을 희번덕하게 빛났다.
나이는 마흔이 조금 넘었을까? 슬슬 머리가 벗겨지기 시작한 박강수는 내 생각보다 훨씬 초라하게 느껴졌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박강수가 만들고 있던 그렘린의 새로운 육체와 주변 장비들을 하나하나 부수기 시작했다.
“안돼! 이… 이 새끼야! 그만둬!”
그런 나를 향해 박강수가 옆에 있던 공구를 쥔 채 내게 달려들었지만,
휙-!
직접 만든 ‘육체’에 매료되어 스스로를 단련하지 않은 박강수의 반항은 내게 전혀 방해가 되지 않았다.
나는 오히려 박강수가 휘두른 공구를 뺏어 벽으로 집어 던져버렸다.
쾅!
집어던진 공구는 벽에 깊숙이 박혀 들었다.
“끄으… 끄으으윽!”
애처로운 소리를 내며 벽에 틀어박힌 공구를 뽑아내려던 박강수는 이내 포기하고 바닥에 털썩 주저앉아 내가 자신의 장비들을 모두 부숴버리는 것을 지켜만 보았다.
“네 악행은 여기서 끝났다, 그렘린. 너는 우월하지도 않고 남들보다 더 저열하고 저질인, 더러운 욕망을 가지고 있는 멍청한 범죄자일 뿐이야.”
“끄아아아아악!”
내 말에 포기한 듯 주저앉아 있던 그렘린이 다시 한번 일어나 내게 주먹을 휘둘렀지만,
휙-!
놈은 자신이 휘두르는 주먹도 제대로 겨누지 못하고 제풀에 풀썩 쓰러지고 말았다.
“너… 넌! 가지고 태어난 넌 나를 모욕할 자격이 없다!”
“가지고 태어나?”
“멋진 초능력! 멋진 몸과 잘생긴 얼굴! 그런 것들을 가진 너는 나를 모욕할 자격이 없어!”
가지고 태어나?
내게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그렘린을 보며 나는 다크 스코프 아저씨의 모습을 떠올렸다.
사실 나는 원작을 보던 시절, 그렘린이 불쌍하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히어로가 되고 싶었던 남자가, 빌런이 되기까지의 과정이 너무나도 불쌍하고 치열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진짜 이 세계에 들어와 살아가기 시작한 내가 보기에 그렘린의 그런 말들은 그저 자신의 범죄행위에 대한 치졸한 변명으로밖에 들리지 않았다.
이 세상엔, 그런 것들을 가지지 않고도 히어로 활동을 하는 멋진 사람들이 있으니까.
“틀렸어, 그렘린. 히어로들은 멋지게 태어나서 멋진 게 아니야. 그 어떤 일에도 굴복하지 않고 떳떳하게 살기 때문에 멋지게 느껴지는 거다.”
“나를!! 모욕하지!! 마라!!!”
전혀 이해하지 못한 듯, 내게 고래고래 소리 지르는 그렘린을 나는 한주먹에 기절시켰다.
언젠가 그렘린이 내가 한 이 말을 이해할 수 있는 날이 올 수 있기를.
* * *
누군가를 회복, 치료해줄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슈페리어들은 대부분 이능계열이다.
이능계열은, 자기 자신에게는 능력을 사용할 수 없다.
그러므로 치료능력을 가진 슈페리어는 자기 자신을 치료할 수가 없다.
그렇기 때문에 밀키웨이는 다른 병원을 찾아 치료를 받아야만 했다.
목숨에 큰 지장이 있을 정도의 상처는 아니었지만, 상처가 남는 것은 피하기 힘들 거라는 의사의 말에, 밀키웨이는 싱긋 웃으며 이렇게 말할 뿐이었다.
“몸에 타투를 하나 새로 새겨야겠네. 슈트도 새로 만들어야 하고.”
밀키웨이의 그 말을 끝으로, 그렘린과 강철 기사단의 사건은 끝을 맞이했다.
그렘린의 본체, 박강수는 얼굴마저 공개된 뒤 법의 심판을 받아 빌런 교도소에 수감되었고, 강철 기사단에 소속되어 있던 대부분의 빌런들도 전부 수감되거나, 그렇지 못했던 빌런들도 전부 천산시에서 떠나고 말았다.
강철 기사단은 순식간에 무너졌고, 인터넷에서는 서서히 강철 기사단을 쓰러트린 히어로들의 이름이 언급되며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퀘이사, 밀키웨이, 래피드스타, 슈팅노바.
인터넷상에서 빠르게 퍼진 이 히어로들은 그들 이름의 공통점으로 묶여, 아스트로 스타즈(Astro Stars)라고 불리게 되었다.
[“마스터. 마스터가 지시한 대로 인터넷에 소문을 퍼트리긴 했는데요. 대체 왜 마스터와 다크 스코프의 이름은 뺀 거예요?”]
다크 카이저라면 모를까, 헬 카이저는 유명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헬 카이저의 이름은 빼겠다고 했을 때, 다크 스코프 아저씨도 그렇다면 자신의 이름을 빼달라고 요청하셨었고.
이제 제인이 돌아왔으므로, 나는 더 이상 헬 카이저의 모습만을 유지해야 할 필요는 없다.
어쩌면, 이젠 다크 카이저의 모습으로 돌아가 다시 활동하는 것이 더 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이번 싸움에서 동료들이 위험에 처했을 때, 가차 없이 실탄을 사용해 빌런들을 제압하는 슈팅 노바를 보며, 조금 생각할 거리를 깨닫게 되었다.
슈팅 노바가 가차 없이 쏘아낸 그 총알의 심정을, 이해하지 못할 건 아니었기 때문이다.
만약, 거기서 슈팅 노바가 실탄을 사용하지 않았더라면, 그래서 동료들이 더 크게 다쳤더라면, 나는 거기서 나를 용서할 수 있었을까?
그렇다고 내가 빌런들을 죽이고 싶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어쩌면, 언젠가는 헬카이저는 다른 방법으로 사용할 필요가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을 뿐이다.
【“오. 헬 카이저는 그럼 더 어두운 부분을 담당하게 되는 건가? 지옥에서 올라온 히어로라는 이름에 걸맞은 행보로군.”】
그리고, 아스트로 스타즈 말고, 나만의 히어로팀을 하나 꾸려볼까 하고.
[“히어로 팀이요?”]
* * *
오늘도 히어로 활동을 마친 준석은, 살짝 열려있던 창문 사이로 동전을 던져 순간이동해 안으로 들어간 뒤, 자신의 방문을 확인했다.
다행스럽게도 자신의 방엔 아무도 들어오지 않았던 모양이다. 준석이 붙여두었던 테이프가 여전히 그대로 붙어있었다.
준석은 슈트와 헬멧을 벗은 뒤, 미리 준비해둔 물티슈와 수건으로 대충 몸을 닦은 뒤 침대 위에 누웠다.
매일 이렇게 물티슈를 이용해서 몸을 닦는 게 조금 찝찝하긴 해도 어쩔 수가 없다. 이 시간에 샤워를 하면 누나방이 바로 욕실 옆에 있기 때문에 누나가 자신이 이 새벽에 샤워를 했다는 사실을 눈치챌 테니까.
조용히 침대에 누워 오늘 하루 있었던 일을 생각하던 준석의 머릿속에, 최근 계속해서 자신을 따돌리고 중요한 사건들을 해결하고 있는 헬 카이저의 최근 행보가 떠올랐다.
아마 자신이 헬 카이저에게 아직까지 제대로 된 믿음을 주지 못했기 때문이겠지만, 준석에게 있어서 자신을 제대로 믿지 못하는 헬 카이저의 모습이, 항상 조금은 서운했다.
이미 꽤 밤이 깊은 시각, 눈을 감고 잠을 청하려 했지만 생각보다 쉽게 잠이 오지 않았다.
준석은 그냥 몸을 일으키고 컴퓨터의 전원을 켰다.
이러다가 부모님이나 누나에게 들키면, 고등학생이 되어서도 한밤중에 몰컴이나 하는 놈이라고 구박받을 테지만, 상관없었다.
어차피 부모님이든 누나든 속이고 새벽마다 히어로 활동을 하러 다니고 있지 않은가?
몰컴을 들키는 쪽이 차라리 오히려 자신의 진짜 비밀을 가릴 수 있을지도 모른다.
최근 준석은, 작은 커뮤니티에 재미를 들린 상태였다.
‘사이드킥을 위한 정보 공유 모임, 사공모’ 라는 올드한 네이밍 센스인 작은 커뮤니티였는데, 진짜 사이드킥 활동을 해 본 준석이 보기에 이 커뮤니티에서 활동하는 대부분의 이용자는 소위 말하는 ‘컨셉종자’들이었다.
진짜 사이드킥들이 사용하는 커뮤니티가 아니라, 자신들이 진짜 사이드킥인 것처럼 연기하고 있는 거다. 그냥 그런 컨셉으로 우스꽝스럽게 노는, 작은 규모의 커뮤니티였다.
그런 컨셉종자들 사이에서, 준석은 가끔 위안을 받곤 했다.
<제목 : 오늘도 우리 보스는 나만 빼고 큰 사건 해결하러 감
작성자 : 악마소년
하. 나랑은 작은 마약상들 때려잡는 일 정도 같이 하고, 난 집에 보내고 맨날 다른 히어로들이랑 큰 사건 해결하러 간다. 내가 약해서 그런 건지, 아니면 내가 못 미더운 건지… 차라리 왜 날 빼고 가는지 이유라도 알려주면 좋겠다.>
<우비소녀 : 직접 왜 그러는지 한번 대화를 해 보세요. 의외로 물어보지 않으면 자신이 왜 그러는지도 모르는 히어로들도 있답니다.>
<달고양이 : 원래 사이드킥의 생활이 그런 거 아니겠냐? 꼬우면 사표 내.>
이 새벽인데도 잠깐 기다리자마자 순식간에 달린 댓글을 훑어내리며, 준석은 낄낄 웃었다.
다들 가짜로 하는 말이라는 것은 알아도 조금은 위안이 되는 것을 느끼며, 준석은 게시판의 메인화면으로 돌아왔다.
<도착한 쪽지 : 1통>
그때, 준석의 눈에 들어온 커뮤니티의 쪽지 기능.
뭐지? 평소에 거의 써본 적 없는 기능인데.
준석은 쪽지 기능을 눌러보았다.
<안녕하십니까? 데빌 보이님. 잠간 이야기 가능하겠습니까?>
<보낸 이 : 섀도우마스터(운영자) 보낸 날짜 : 어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