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히어로 만화 속으로 나 강림-123화 (123/236)
  • 제123화

    영원한 비밀은 없다(1)

    【“이미 걸렸군. 나강림. 너는 복싱이 아니라 연기를 배워야 할 시점인 듯하다.”】

    언제 들켰던 걸까?

    현장학습 때였을까?

    사건이 일어나기 직전에 갑자기 화장실에 가고, 히어로가 나타났을 때는 어디 숨었는지 보이지도 않고. 다시 나타났을 때에는 사건이 모두 해결된 이후.

    나와 함께 시간을 보냈던 친구들 입장에선 뭘 봐도 수상한 것들 뿐일거다.

    처음에는 긴가민가했을 테지만, 한번 의심이 시작되면 증거를 찾기란 참 쉬운 법이다.

    학교가 끝나고 난 뒤엔 항상 핑계를 대고 서둘러 어디론가 떠나고. 학교에서는 살갑지만, 평소 실생활에서는 연락하기도 힘들다.

    다크 카이저의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별 관심 없다는 듯 말을 피하는 것도. 히어로를 그렇게 좋아한다던 놈이 어느 순간 히어로에 대한 덕질을 완전히 끊은 것처럼 사는 것도.

    알고 나서 보면 모두 하나하나 의미를 부여할 수 있게 되기 마련이다.

    그러니까, 나는 지금 완전히 걸렸다.

    “왜 그렇게 생각하는데?”

    “예전에 황채경이 나를 죽이려고 찾아왔을 때, 너가 나를 구해줬었잖아. 그때 알아차렸어.”“…….”

    “강림아. 걱정하지 마. 난 이 사실을 누구에게도 말한 적이 없고, 앞으로도 말할 생각이 없어. 나에게 오늘 같은 변화가 생기지 않았더라면, 나는 정체를 안다는 사실을 너에게도 말하지 않았을 거야.”

    소연이의 진지한 말에 떨리던 심장이 조금은 진정되었다.

    그리고 나는, 소연이에게 이 모든 것을 인정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렇게 일찍 모든 사실을 알고 있었는데도 이제야 내 정체를 안다는 사실을 밝혔기 때문만은 아니다.

    소연이는, 내 친구니까.

    어쩌면 지금 무슨 말인지 모르는 척 잡아떼면 없던 사실인 것처럼 넘어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

    소연아. 네 말은 반만 맞아. 나는 다크 카이저가 아니라 다크 카이저를 도와주는 사람 중 한 명이야.

    이렇게 새로운 변명, 새로운 거짓말을 만들어낸다면 어쩌면 소연이를 또 속이고 넘어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들키고 난 다음의 거짓말은 지금까지 하던 거짓말과는 다르다.

    이미 눈치챈 사람에게 하는 거짓말은, 지키기 위한 거짓말이 아닌 기만을 위한 거짓말이 된다.

    그런 거짓말은 또 내 주변, 그리고 나 스스로를 상처 입게 할 뿐이다.

    “맞아. 음… 내가… 음….”

    아씨. 진짜 들키고 나선 어떻게 말해야 할지 생각해둔 적이 없는데… 들키고 나서 밝히려니까 진짜 너무 창피하다.

    “음… 내가 다크… 다크 카이저가 맞아.”

    【“음흐흐흐흐….”】

    내가 하는 꼴을 보며 실실거리기 시작하는 벨제뷔트의 목소리가 내 머릿속을 울렸다.

    “어… 어둠의 황제 더 다크 카이저가 네가 맞아?”

    【“으하하하하하!”】

    아아악! 진짜 미치도록 창피해! 중학생의 나강림! 죽어! 죽어버려!

    “응… 그래. 어둠의 황제 더 다크 카이저가 바로 나야.”

    “어… 우와… 진… 진짜였구나….”

    내가 이렇게 빨리 인정할 줄 몰랐다는 듯 입을 틀어막으며 놀란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는 한소연.

    소연이의 작은 얼굴이 점점 빨갛게 물들기 시작한다.

    좀 많이 놀란 모양이다.

    “소연아. 진정해.”

    “어 응. 진정. 진정할게.”

    내 말에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내쉬며 심호흡하는 소연. 빨갛게 물들었던 작은 얼굴이 점점 원래의 뽀얀 살색으로 돌아오기 시작했다.

    “소연아. 미안하지만 네가 아는 사실은….”

    “응. 당연하지. 평생 나 혼자만 아는 비밀로 간직할게. 나 정말 입 무거워. 걱정하지 마.”

    엄청난 비밀을 알게 되었기 때문인지 얼굴에 묘한 기대감과 흥분이 가득해있다.

    그제야 나는 소연이 아직 열일곱 어린 소녀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소연이는 착하고 좋은 아이지만, 이 비밀이 판타지적인 무언가처럼 느껴져선 안 된다.

    “소연아. 이건 그냥 너와 나만의 비밀이 아니야. 다크 카이저에겐 적이 많아. 혹시라도 네가 내 정체를 안다는 사실이 밝혀지게 되면, 너와 나뿐만 아니라 우리의 주변 사람들이 위험해져.”

    “우리의… 주변 사람들?”

    “그래. 너희 어머니, 우리 이모, 수아와 도유진. 그리고 학교 친구들까지 모두 위험해질지 몰라.”

    내 말을 듣고 나서야 기대감이 가득하던 얼굴 표정이 점점 가라앉기 시작한다.

    순간적으로 실망시킨 기분이라 미안함이 들었다.

    【“미안해하지 마라. 너와 한소연. 그리고 네 주변을 위해서 꼭 해야 했던 말이니까.”】

    “응. 무슨 말인지 이해했어. 절대 지금 이 상황을 가볍게 생각하지 않을게.”

    【“그리고, 네 친구는 네 생각만큼 어리기만 한 친구가 아닌 것 같군.”】

    “응. 그래. 고마워.”

    잠시 5초 정도 어색한 침묵이 흐른 뒤에야, 나는 내 정체를 들켰다는 사실에 놀라 소연이의 뒷말을 잊어버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까 했던 말이나 다시 해보자. 오늘 같은 변화가 뭐지? 조금 더 자세히 말해줄래?”

    “아. 응 알겠어. 그게….”

    소연이는 천천히 자신이 겪었던 일들을 말해주기 시작했다.

    낮에는 본 적 없던 스님, 그리고 스님이 지키고 있던 고통스러운 표정의 영혼들.

    나는 소연이의 말을 모두 듣고 나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하마터면 이 큰 산을 밤새 뒤져야할 뻔했네.

    지금 소연이가 내게 말해준 이야기는, 내가 막아내기 위해 조사하려 했던 영계와 깊은 관계가 있어 보인다.

    이 큰 산에서 숨어 있는 작은 절 하나 찾아서 정보를 추적해야 한다는 것이 부담이었는데, 소연이는 그 영계의 통로를 볼 줄 안다는 소리다.

    심지어는 그 영계의 통로를 열고 닫는 데까지 관여할 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

    퍼즐의 조각이 착착 맞아들어가는 듯한 상황이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몸을 일으켰다.

    “이야기 잘 들었어. 일단 네가 봤다던 그 스님을 만나러 다시 돌아가보자.”

    *    *    *

    우리는 서로가 쓰던 침대에 몰래 홀로그램을 만들어놓고 밖으로 나왔다.

    소연은 내가 만들어낸 홀로그램들을 보고 크게 신기해했다. 또 내가 어떻게 이모와 주변인물들을 속이고 히어로 활동을 하고 있었는지를 듣고 많이 놀라기도 했다.

    새벽의 연백산은 아까 전 초저녁에 왔을 때와는 또 달랐다. 아까보다 훨씬 짙게 깔린 어둠이 한 치 앞이 보이지 않게 만들었다.

    거기에 나는 귀신을 볼 수 없지만, 소연이는 귀신을 볼 수 있다는 사실도 나를 조금 무섭게 만들었다.

    다른 차원의 괴물을 다룰 줄 아는 정신 계열 슈페리어인 소연이기 때문에 가질 수 있는 능력이겠지.

    나는 소연이에게 손을 내밀었다.

    “응?”

    내가 내민 손에 놀란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는 소연.

    “너무 어둡고, 지금 상황이 많이 위험하잖아. 서로 의지하면서 가야 하지 않을까 해서.”

    “아. 응. 알… 알겠어.”

    소연이의 손이 내 손을 꼭 쥐었다.

    어두운 산길을 스마트폰 하나의 불빛에 의지해서 가려니, 손을 잡고도 서로의 몸이 조금 가까이 붙어야만 했다.

    나는 딱 붙은 소연이의 체온을 느끼며 혼자 생각하기 시작했다.

    옛날 이야기나 무서운 이야기를 보면, 자신들을 볼 수 있는 사람을 노리는 귀신들을 자주 볼 수 있지 않은가?

    나는 히어로로서 그런 상황에 대해서 소연이를 지킬 의무가 있다.

    【“무슨 말인지 알겠으니까 주절주절 변명할 필요 없다, 나강림.”】

    어두운 밤길이라 그런지 조심해서 가야 하는 탓에 이전보다 속도는 더 느렸다.

    이런 상황이 온 김에, 나는 소연이가 가지고 있는 능력에 대해서 좀 더 정확하게 파악해보기로 마음먹었다.

    “있잖아. 아까 보여줬던 그 커다란 친구.”

    “어? 우리 데다?”

    “데다? 이름이 데다야?”

    “이름은 데다이트(Deadite)인데, 귀엽게 줄여서 부르려고 데다라고 부르고 있어.”

    나는 내가 아까 잠깐 보았던 커다란 팔의 생김새를 머릿속에서 떠올렸다.

    그 괴물의 생김새도, 데다이트라는 이름도 전혀 귀엽지 않은데 말이야.

    “이런 말하게 돼서 미안한데… 그 괴물… 위험하진 않을까?”

    “어. 응. 걱정하지 마. 우리 데다 생각보다 착해. 아까 너랑 인사할 때도 수줍어서 얼굴도 못 보여주던걸?”

    팔만 있는 게 아니라 얼굴도 있어?

    나는 무시무시한 그 얼굴을 상상해보려다가 그만뒀다. 혹시 꿈에 나올라.

    “있잖아, 강림아. 나도 물어보고 싶은 게 있는데, 물어봐도 돼?”

    “어? 응. 뭔데?”

    “다크 카이저로서의 활동… 혹시 완전히 그만둔 건… 아니지?”

    그렇네. 나는 하루하루 헬 카이저로서 활동하느라 바빴는데, 내 정체를 알고 있던 소연이의 입장에서는 내가 갑자기 다크 카이저로서의 활동을 그만둔 것처럼 느껴지겠네.

    “아니야. 완전히 그만두진 않았어. 여러 가지 이유 때문에 잠시 휴식을 가지고 있는 중이야.”

    “어… 여러 가지 이유?”

    “사실 나는 아무런 능력이 없는 네추럴이거든.”

    “그런데 다크 카이저로서 어떻게 활동할 수 있는 건데?”

    이미 진실을 알게 된 소연이에게 너무 많은 거짓말을 할 필요는 없지만, 그렇다고 또 모든 걸 알려줄 필요는 없다.

    나는 절반의 사실을 알려주기로 마음 먹었다. 히어로가 존재하는, 이 세계의 나강림에 대한 사실.

    “돌아가신 우리 부모님이 남겨주신 히어로 슈트가 내게 힘을 주는거야. 우리 부모님, 유명한 과학자셨거든.”

    “아…!”

    “그런데 마지막으로 했던 전투에서 히어로 슈트가 너무 심하게 손상이 되는 바람에, 지금은 수리를 하는 중이야.”

    “아, 그렇구나.”

    “그리고 그 싸움에서 알았거든. 사실 나, 되게 약하더라고. 지금까진 부모님이 남겨준 히어로 슈트만을 이용해서 활동했으니까.”

    이상하네. 뭔가 간질간질. 처음 느끼는 이상한 기분이 들어.

    “정말 신기하다.”

    “응. 나도 슈트를 입을 때마다 신기했어.”

    “그거 말구.”

    엉? 그럼 뭐가 신기하다는 거야?

    “비밀을 공유할 수 있는 사람이 생겼다는 거, 난 지금 그게 너무 신기해.”

    소연이의 그 말에 나는 문득, 내 가슴에 얹혀 있던 무언가가 쑥, 아래로 내려가는 것을 느꼈다.

    마치 목 안에 걸려있던 가시가 물에 씻겨 내려간 기분이었다.

    지금까지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한 채 나 혼자만 알고 버티던 비밀의 무게가, 내 심장을 쿡쿡 찌르던 송곳 같은 비밀의 고통이 조금은 느슨해지는 것을 느꼈다.

    “응 그러네. 비밀을 공유할 사람이 생겼다는 거. 정말 신기한 기분이네.”

    내 말에 내가 잡은 소연이의 손가락이 수줍게 꼼지락 거리는 것이 느껴졌다.

    *    *    *

    도유진은 타는 듯한 목마름에 잠에서 깨어났다.

    아까 소희 이모가 안주로 먹던 짠 안주들을 덥석덥석 집어 먹은 탓이리라.

    파지직-

    침대에서 내려와 터벅터벅 움직이던 도유진은 순간적으로 소연이의 침대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리는 듯해 발걸음을 멈췄다.

    뭐지?

    도유진은 갑자기 생긴 이상한 현상을 확인하기 위해 천천히 소연이의 침대로 움직였다.

    자고 있는 소연이의 이불을 조금 끌어 내리려던 바로 그때.

    “어? 음… 유진아?”

    소연이가 눈을 비비며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것을 보고 깜짝 놀라 뒤로 한걸음 물러나고 말았다.

    “유진아 왜? 화장실 가게?”

    “어? 어. 응. 미안. 내가 깨웠나 보네.”

    “아니야… 어두우니까 조심히 다녀와….”

    잠결에 내가 잘못 봤나?

    도유진은 물을 마시기 위해 거실로 향했다.

    파지직….

    [역시 내가 없으면 안 된다니까.곧 돌아갈 수 있을 것 같으니까 조금만 더 버텨주세요, 마스터.]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