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2화
여행(4)
연백산의 밤은 낮과는 달랐다.
어두컴컴한 산속에선 동물의 울음소리조차 잘 들리지 않았고, 드문드문 놓인 가로등만이 길을 비출 뿐이었다.
그런 밤의 산은 공포물을 좋아하는 소연이마저도 조금 긴장하게 만들었다.
「“걱정. 필요 없다. 소연. 내가 지킨다.”」
그런 소연을 데다이트의 목소리가 위로해주었다.
처음에는 텔레파시로 가벼운 감정 표현밖에 하지 못하던 데다이트는 요 몇 개월 사이 점점 똑똑해지더니, 이젠 제법 제대로 된 단어들을 배워 말을 걸어오기 시작했다.
‘응, 그래. 고마워.’
데다이트의 위로 덕분에 마음은 조금 편해졌지만, 이젠 자신의 앞에서 걷고 있는 사람이 강림이라는 사실에 긴장되기 시작했다.
소연은 강림이가 자신과 같은 17살 동갑이라는 사실이 놀라웠다.
히어로들에게 아무런 관심을 가지고 있지 않던 소연마저도 뉴스에 나오는 다크 카이저의 모습을 종종 본 적이 있었다.
뉴스에 나오는 다크 카이저는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 정말 치열하게 싸웠다.
차에 치일 뻔한 사람이 있다면 몸을 날려 차를 막아섰고, 세찬 불이 난 건물도 겁내지 않고 뛰어들었다. 강력한 슈퍼 빌런들과의 전투도 전혀 겁내지 않았다.
밤중에 그렇게 많은 사람을 구해낸 다크 카이저는, 낮이 되면 평범한 고등학생이 되어 등교한다.
밤중에 그렇게 열심히 히어로 활동을 했음에도 수업시간에 조는 모습을 보는 것도 힘들다. 심지어 성적도 매번 가파르게 오르고있었다.
소연이가 보기에 강림은 정말 치열하게, 최선을 다해서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이었다.
소연은 그런 강림이 좋았다. 그리고 그런 강림이를 존경했다.
하지만, 최근 강림이는 다크 카이저로서 활동을 하지 않고 있다. 소연은 그런 강림이가 너무 걱정스러웠다.
단 둘이 있는 지금만이, 강림이에게 궁금한 것을 물어볼 수 있는 상황일지도 모른다.
강림아. 왜 요즘은 다크 카이저로서 활동하지 않는거야? 혹시 능력을 잃은 거야? 그래서 복싱을 배우는 거니?
그런 고민들을 하며 길을 걷던 소연은 도착한 폐가에서 얼어붙고 말았다.
폐가의 앞에서, 하얀 얼굴을 가진 스님이 자신과 강림이를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강림이의 반응을 보니 소연이 보고 있는 이 스님은 자신의 눈에만 보이는 모양이었다.
“셀카 찍어 오라고 했으니까, 이리 좀 붙어 볼래? 빨리 찍고 돌아가자.”
“어? 응….”
찰칵.
소연은 하얀 얼굴의 스님은, 자신들을 쳐다보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스님이 지키고 있는 것은 작은 틈이었다. 자신이 능력을 개방했을 때 처음으로 보았던 작은 틈.
스님은 그런 작은 틈을 온 몸으로 틀어막고 있는 것이었다.
소연은 그 틈에서 비집고 나오고 싶어 하는, 고통스러워하는 표정의 영혼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소연은 자신의 옆에 있는 강림이의 얼굴을 슬쩍 보았다.
지금 본 이 사실을, 강림이에게 말을 해야 할까?
* * *
담력훈련은 최종적으로 나와 소연이의 승리였다.
도유진과 강수아는 말만 그렇게 하고 중간에 비명을 지르며 포기하고 돌아왔으니까.
뭔가 이상한 게 튀어나와서 자신들을 놀래켰다나?
“와~ 도유진~ 그렇게 잘난 척 하더니 진짜 실망이다. 그렇게 당당한 척하더니.”
“아니. 진짜 뭐가 튀어나왔었다니까? 그게 야생 동물 같은 거면 위험하잖아. 야 강수아. 너도 봤지?”
도유진의 말에 빠른 속도로 고개를 끄덕이는 강수아.
“봤지? 나는 거짓말을 할 수 있어도 얘는 안한다니까?”
“말이나 못 하면… 알았다. 이 지지배야. 어른들 걱정하실라, 빨리 들어가자.”
그날의 마지막 일정은 그게 끝이였다. 생각보다 피곤했던 모양인지 밤새 영화를 보자고 떠들어대던 도유진이 제일 먼저 잠들어 버렸거든.
언제나 자리를 피할 수 있을지 고민하던 나에겐 오히려 좋은 상황이었다.
친구들이 편하게 쉬게 나는 내방으로 혼자 돌아와 간만에 스마트폰을 보며 시간을 때웠다.
같이 여행 온 어른들과 친구들이 모두 잠들때까진 아무래도 바깥으로 나가기 힘들테니까.
홀로그램 생성기는 제인이 만들어준 걸 그대로 쓰면 되지만, 홀로그램이라는 걸 들켰을 때의 자연스러운 대응은 제인이 아니면 힘들다.
제인은 가끔 이모에게 들킬 상황이 올 때면 녹음한 내 목소리를 재생한다든지, 아니면 자연스럽게 홀로그램을 움직인다는 식의 대응이 가능했지만, 벨제뷔트는 아무래도 제인보다는 그런 자연스러운 반응을 어려워한다.
<다크 카이저가 이 도시를 떠나있는 이유 – 한밤의 수호자, 다크 카이저>
<(단독)래피드 스타의 화재 구조영상 단독 입수 - 한밤의 수호자, 다크 카이저>
간만에 스마트폰을 보다 보니 또 내 이름을 팔아먹는 놈의 영상도 몇 개 훑어볼 수 있었다.
이제는 다크 카이저가 존재하지 않으니 천산시에서 활동하는 히어로들도 영상감으로 사용하는 모양이었다.
얼마전까진 이 채널의 과한 관심이 부담스러웠지만, 사용할 수 있는 것들을 모두 사용하기로 마음먹은 지금은 달랐다.
내가 다크 카이저로 복귀하게 되는 날, 이 채널 또한 나의 새로운 무기 중 하나가 되어줄 것이다.
슬슬 12시 반이 넘어가기 시작했다. 거실에서 와인을 한잔하시던 어른들이 방문을 열고 들어가셨던 것이 30여 분 전. 지금쯤이면 다들 주무실 준비를 하셨을 거다.
나는 오른 눈의 능력을 일으켜 조심스럽게 어른들과 친구들이 잠에서 깨어있는지를 확인했다.
“음… 냐… 음….”
“쿨… 쿨….”
2층의 친구들은 모두 이불을 뒤집어쓰고 미동이 없었고, 1층의 어른들도 잠에 든 것을 확인했다.
만약을 대비해서 30여분 정도 더 기다렸다.
슬슬, 헬 카이저로서 활동해야할 시간이다.
헬 카이저의 모습으로 변신하려던 바로 그때.
똑똑.
내 방문을 누군가가 두드렸다.
* * *
“음… 냐… 음….”
“쿨… 쿨….”
함께 방을 쓰기로 했던 친구들이 모두 잠든 시간에도 소연은 잠에 들지 못하고 깨어있었다.
폐가에서 돌아온 이후 소연은 자신이 봤던 것들에 대한 고민 때문이었다.
소연은 자신이 보았던 작은 틈을 생각했다. 소연은 그 작은 틈에서 예전 황채경과 싸울 때 느꼈던 느낌을 다시 한번 받을 수 있었다.
그 틈을, 내 손으로 열어젖힐 수 있을 것만 같다는, 바로 그 생각.
그리고 그 안에 있던, 고통스러운 표정들의 영혼들.
소연은 자신의 힘으로 그들을 구해줄 수 있겠다는 생각도 머릿속에 떠올랐다.
하지만 소연은 그와 동시에, 차디찬 표정으로 자신을 경계하던 스님의 표정 또한 떠올랐다.
자신이 무얼 하고 싶은지, 또 어떤 마음을 가지고 있는지 들여다보고 있는 듯한 그 표정.
소연은 자신이 어떤 일을 해야 맞을지 도저히 알 수 없었다.
고통스러워하는 그 영혼들을 구해주는 것이 맞을까? 아니면… 그 통로를 지키고 있는 스님을 보며 외면하는 것이 맞는 것일까?
「“소연. 소연이 원하는대로 한다. 마음이 가는대로 산다.”」
한참을 고민하고 있던 소연에게 들려오는 데다이트의 목소리.
“푸훗….”
소연은 데다이트의 목소리를 듣고 나서야 깨달을 수 있었다.
그래. 내가 원하는대로. 마음 가는대로 사는 것이 정답이었다.
소연은 잠에 든 자신의 친구들이 깨어나지 않게 조심스럽게 몸을 일으켰다.
* * *
똑똑.
나는 내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숨을 들이켰다.
지금 시간은 밤 1시가 살짝 넘어간 시간. 아까 다들 자는 걸 확인했는데…? 이 시간에 나를 찾아올 사람이…?
나는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
“강림아. 안녕. 나 너한테 하고 싶은 말이 있는데.”
내 문을 두드렸던 사람은 소연이었다.
얘 아직 안자고 있었구나.
나는 깜짝 놀라서 가슴을 쓸어내렸다.
조금 일찍 출발했으면 하마터면 큰일날뻔했다.
“어… 이 시간에? 갑자기? 할 말이 있으면 내일 해도 되지 않을까?”
“아니야. 생각해봤는데, 지금 당장 해야할 이야기야.”
【“이 시간에 여자아이가 남자아이의 방문을 두드린다? 대체 무슨 일로?”】
지금도 충분히 정신없으니까 제발 헛소리 좀 하지 마! 벨제뷔트!
“어? 그래? 그럼 잠깐 안으로 들어올….”
아차. 지금 이 방 안으로 들어오라는 말은 충분히 여자아이에게 오해의 여지를 둘 수 있는 말이었다.
“어 아니다. 할 말이 있으면 거실에 나가서….”
덜컥.
스스럼없이 내 방 안으로 들어와 문을 닫는 소연.
철컥.
심지어는 문을 잠그기까지 한다.
“아니야. 우리 둘 외에는 아무도 들어선 안될 이야기야.”
어어? 얘 진짜 왜 이래?
당황스러운 시츄에이션에 나도 모르게 심장이 쿵쾅대기 시작한다.
그와 동시에 제인과 벨제뷔트가 나를 놀려먹기 위해 했던 소리들이 내 머릿속을 잔뜩 헤집어 놓았다.
얘가 설마 정말 날 좋아하는 걸까?
【“헛소리하지 말라고 하더니, 헛된 상상은 네가 더 많이 하는 것 같다만….”】
아무 말 없이, 내 침대 위에 걸터 앉는 한소연.
소연이의 표정이 짐짓 심각해보여 당황하던 내 마음도 점점 진정이 되기 시작했다.
방금까진 시간이 시간인데다 상황이 너무 당황스러워서 쓸데 없는 상상들을 했지만, 소연의 표정은 고백을 하려는 여자아이의 표정 같은 것이 아니었다.
갑자기 불길한 생각이 들었다.
심연의 여왕을 물리친지 얼마 되지 않았다. 심연의 여왕과 관련된 어떤 일이 소연이에게 생겼을지도 모른다.
아니면….
그와 동시에 소연의 머릿속에서 봤던 소연의 아버지 이야기가 떠올랐다.
소연의 아버지가 돌아와서 해코지를 하려고 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응. 소연아. 하고 싶은 말이 뭐야? 무슨 말이든 내가 들어줄게. 딱 말해봐.”
“강림아. 나는 남들이 알지 못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어.”
나는 소연이의 입에서 나온 말을 듣고 나서야 가슴을 쓸어내릴 수 있었다.
자신이 새롭게 가지게 된 능력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거구나.
생각해보면 당연한 이야기였다.
나도 처음에 다크 카이저의 힘을 가지게 되었을 땐 입이 근질근질하고 해결한 사건들이 다 나 때문이라고 고백하고 다니고 싶었으니까.
정신연령은 이십 대 중반인 나조차 그랬을진대, 이제 17살인 소연이는 나보다 더 혼란했을 거다.
이미 소연의 능력은 제인과 함께 분석이 거의 끝났었지만, 지금 같은 상황에서는 모른 척 연기 해주는 것이 더 자연스럽겠지.
“어… 그래. 무슨 능력인데?”
“내 눈에는… 남들에게 보이지 않는 통로가 보여.”
그리고 그 안에는 네가 만들어낸 심연의 괴물이 있겠지.
“그리고 나는 그 통로들을 열 수 있어. 그 통로는 보통 어떤 공간들과 이어져 있어. 예를 들면, 바로 이렇게.”
내 눈앞을 갈라 통로를 만들어보이는 소연.
통로 너머에서 기다리고 있던 근육질의 팔이 나를 향해 수줍게 손을 흔든다.
“엇…? 이… 이게 뭐야?”
【“나강림. 좀 더 자연스럽게 연기해라!”】
“이게 바로 내 능력이야. 지금까지 내가 열 수 있던 통로는 이 하나가 끝이었어. 그런데 방금, 나는 내가 열 수 있는 또 다른 통로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어. 내가 그 통로를 정말 열어도 될지, 너와 상의하고 싶어.”
“어… 나… 나랑? 갑자기 왜?”
“너는 이 도시를 구하는 히어로, 다크 카이저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