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히어로 만화 속으로 나 강림-120화 (120/236)
  • 제120화

    여행(2)

    연백산은 천산시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유명 관광지이다.

    기본적으로 천산시에 사는 사람이라면 안 가본 게 이상할 정도로 심리적으로 가까운 산이기도 하다.

    우리가 놀러 온 펜션 또한 그런 연백산의 근처에 있는 작은 펜션이었다.

    소연의 어머니께서 아는 사람에게 소개받았다는 펜션은 좋은 위치에 작게 위치한, 잘 안 알려진 명당 같은 곳이었다.

    “생각보다 일찍 오셨네요.”

    성격 좋아 보이는 아주머니께서 우리가 쓸 방까지 안내해주셨다. 그런데 왜 이 주변을 어디서 본 적이 있는 기분이 드는 거지?

    “쓰실 방은 이곳입니다. 필요한 거 있으면 언제든지 말씀해주세요.”

    “와~ 예쁘다~”

    “와! 강이 내려다보이네.”

    “이거 봐! 2층도 있어!”

    “반대편엔 수영장도 보여!”

    펜션에 들어서자마자 신나게 달려서 여기저기를 살피는 도유진과 한소연.

    강수아도 무덤덤한 척하지만, 꽤 기분이 좋아 보인다.

    【“인간의 여행이라는 건 이런 느낌이로군….”】

    심지어는 내 머릿속에 들어있는 악마마저도 기분 좋은 목소리를 내고 있었다.

    세상에. 펜션에 놀러왔다고 즐거워하는 악마라니.

    【“네 인생이 너무 무미건조한 것이다! 나강림! 학교-일-학교-일-학교-일. 심지어 방학이 시작되어도 훈련-공부-일의 반복이지 않으냐? 매일 똑같은 꼴을 지켜보는 나는 지겨울 수밖에 없느니라! 심지어 나는 네 머릿속에서 네가 하는 짓밖에 들여다볼 수 없는데!”】

    듣고 보니 할 말이 없었다. 내가 생각해도 내 인생이 그렇게 재밌고 흥미롭기만 한 건 아니니까.

    “일단 어른들은 이 방을 쓰면 되겠고… 강림이 혼자 가장 작은 방 쓰고… 나머지 애들은 2층 방 쓰게 하면 되겠네요.”

    남자인 사람이 나밖에 없는 탓에 나는 특별취급 받았다.

    “야 나강림~ 좋겠다~ 방도 혼자 쓰고.”

    “너네가 나보다 더 재밌게 노는 거지 뭘. 이런 데선 친구들이랑 자는 게 제일 좋은 거야.”

    도유진이 놀리는 것을 아무렇지 않게 받아치며 나는 내심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방을 혼자 쓴다면 피곤해서 일찍 잔다는 핑계로 나 혼자의 시간을 가질 수 있고, 그 빈 시간을 이용해 이 산 주변을 조사할 수 있다.

    내가 이 세계에 도착해서 가장 먼저 해야 하는 일이라고 생각했던 것은 세계관의 확장을 막는 일이었다.

    지금까지 나는 세계관이 확장될만한 대부분의 일을 막아내는 데에 성공했다.

    지옥과 이 세계를 연결하려던 지옥의 군주를 봉인하는 데에 성공했고,(이 대목에서 벨제뷔트가 불편한 신음을 흘렸다.) 심연과 이 세계를 연결하려던 심연의 여왕 또한 물리치는 데 성공했다.

    나중에 흡혈증으로도 발전해 뱀파이어를 만들어내는 인휴먼증마저 막아냈다. 이제 영계와 이 세계의 연결고리를 끊어내는 데 성공한다면, 내가 봤던 부분까지의 원작만화 속 세계관 확장은 모두 막아내는 셈이다.

    슬슬 내가 알고 있던 미래 정보들이 동나기 시작하는 시점이다.

    내가 아는 미래 정보가 끝이 났다는 것은, 앞으로는 나의 힘으로만 이 세계의 일을 정리해야만 한다.

    【“지옥에서 올라온 나, 벨제뷔트의 힘도 있다.”】

    “얘들아~ 일단은 짐 정리 좀 같이 도와줄래?”

    “네. 제가 도와드릴게요.”

    “네가 수아지? 들은 대로 키도 크고 예쁘구나. 우리 소연이랑 항상 잘 지내줘서 고마워.”

    “저도 항상 소연이한테 신세 지고 있는걸요. 괜찮습니다.”

    “어머. 말이라도 고맙네.”

    나는 어른들을 돕고 있는 수아를 바라보았다.

    내가 알고 있던 원작의 내용이 끝나간다는 것은, 슬슬 내가 원작 만화를 그만 보게 만든 에피소드가 가까워졌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나는 오른쪽 눈의 힘으로 보았던, 나와 대적하는 강수아의 모습을 떠올렸다.

    그렇다면 나는 정말 퀘이사와 함께 싸우게 되는 걸까?

    “나강림. 뭘 그렇게 쳐다봐? 너도 빨리 와서 도와.”

    “어? 어. 미안.”

    누가 히어로 아니랄까 봐 귀신같이 멍 때리고 있는 나를 지적하고 오는 강수아.

    나는 수아 옆에 서서 짐 정리를 돕기 시작했다.

    “야! 강수아! 나강림! 빨리 놀러 가자!”

    짐 정리가 끝나기 무섭게 소연이 손을 잡고 2층에서 거의 뛰어내리듯 달려오는 도유진.

    “유진아! 그러다가 다친다!”

    그 모습을 본 우리 이모가 기겁할 정도였다.

    “넵! 죄송합니다! 야 강수아! 빨리 나갈 준비해! 여기까지 왔으니 물놀이하러 가야지!”

    “네가 위층에서 노는 동안 우리는 짐 정리했거든?”

    “아 몰라~ 아무튼 빨리 와! 소연인 내가 데려간다~!”

    “유진아~ 좀 천천히 가!”

    소연이를 거의 끌고 달려 나가는 도유진을 보며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놀다 오고 싶으면 놀다 오렴. 어른들은 어른들끼리 알아서 놀 테니까.”

    “그래. 우리 소연이 안 다치게 잘 부탁할게. 강림아.”

    테라스에 나가서 커피라도 한잔하실 생각인지 찻잔을 꺼내 드는 이모와 소연이 어머니.

    왜인지 모르게 소연이 어머니의 당부에 뼈가 박혀 있는 듯해 나는 재빨리 고개를 끄덕였다.

    “네. 소연이 다칠 일 없게 놀다 올게요.”

    *    *    *

    나와 수아가 대충 편한 옷으로 갈아입고 나왔을 땐, 이미 도유진과 한소연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얘넨 뭘 그렇게 서둘러서 빨리 간 거야?”

    “도유진이 최근 많이 답답해했거든. 신이 날 만도 해. 원래 공부 같은 건 절대 안 하고 놀러 다니던 애잖아.”

    강수아가 도유진을 감싸주는 말을 하는 걸 보면, 그래도 최근 붙어 다니더니 확실히 정이 붙긴 했던 모양이다.

    【“대체 저 말의 어디가 감싸주는 말이란 말이냐? 공부도 안 하고 노는 애라 어쩔 수 없다는 소리로 들린다만.”】

    “얘들 어디로 갔는지 모르겠는데?”

    “받아라, 한소연!”

    “꺄아! 유진아, 하지 마!”

    내가 말을 꺼내기가 무섭게 저편에서 목청 큰 도유진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아무래도 이미 강을 따라 계곡 쪽으로 향하고 있는 모양이다.

    “화르르륵! 퓨수우웅! 지금 여기, 나 강림!”

    그때, 시끄러운 소리를 내며 우리의 앞으로 도도도 달려오는 꼬마 아이 하나.

    검은 후드티를 뒤집어쓰고 검은 망토를 목에 매고 있는 꼬맹이였다.

    “받아라! 지옥의 흑염! 화르르륵!”

    우릴 향해 손을 뻗어오는 꼬마아이의 얼굴에는, 다크 카이저를 떠오르게 하는 까마귀 가면이 하나 씌워져있다.

    설마 저거…?

    순식간에 내 머릿속을 헤집어 놓는 창피함.

    【“오. 네 팬인가 보군. 어둠의 황제여.”】

    아니, 저런 가면 만들어서 파는 거 솔직히 나한테 수익 떼줘야 하는 거 아니야? 저 디자인의 저작권은 나에게 있다고!

    “꺄악! 으윽!”

    뭐야? 얘 갑자기 왜 이래?

    내가 잠깐 뇌정지가 와 이상한 생각이나 하고 있는 동안, 가슴을 부여잡으며 쓰러지는 강수아.

    그러면서 콕콕, 내 다리를 찌른다.

    【“너도 장단 좀 맞춰주라고 하는 것 같군.”】

    나는 그제야 눈을 빛내며 나를 바라보는 꼬마를 눈치챘다.

    사실 히어로 놀이는 내 전문 분야다. 어릴 때 혼자서 가장 많이 했던 놀이니까.

    【“무려 중학생 때까지 했지만 말이지.”】

    나는 벨제뷔트의 말을 가볍게 무시하며 혼신의 연기를 시작했다.

    “다… 다크 카이저! 내가 여기에 있는 걸 어떻게 알았지?!”

    “하하! 내 이름은 어둠의 황제 더 다크 카이저! 죄 지은 자들을 벌하고 외면 당하는 사람들을 구해내는 게 바로 내가 할 일이니까!”

    다크 카이저의 퇴장 대사를 읊으며 멋진 포즈를 취하는 꼬마 다크 카이저.

    이 세계에 왔던 초반에도 느꼈지만, 다크 카이저의 컨셉은 아무래도 아이들에게 잘 먹히는 모양이다.

    아이는 옆 건물의 계단 위로 올라가더니, 망토를 휘날리며 멋지게 발차기를 날린다.

    “받아라 다크 킥!”

    “으윽! 당했다!”

    내게 날리는 다크 킥을 맞으며 나는 바닥에 철푸덕 쓰러졌다.

    나는 쓰러진 상태에서도 강수아를 흘끔흘끔 쳐다보았다.

    “받아라! 지옥의 흑염! 버스터!”

    “꺄아아악! 너무 강하다!”

    아이의 손짓 하나에 혼신의 연기를 다 하며 바닥을 향에 몸을 날리는 강수아.

    평소의 강수아의 이미지로는 상상도 못할 일. 의외로 아이들한텐 약한 걸까?

    “지우야! 너 여기서 뭐 해!”

    잠깐 아이와 장단 맞춰주고 있었더니 아이의 엄마처럼 보이는 사람이 놀라 우리에게 달려온다.

    그리고 난 그제서야 왜 이 주변을 어디서 본 적 있는 것처럼 느껴졌는지 깨달을 수 있었다.

    “죄송합니다. 제 아이가 아직 철이 없어서.”

    놀라 달려와 아이를 안아 드는 아이 엄마는, 브루트였으니까.

    아이 엄마의 모습을 보자마자 머릿속에서 떠오르는 옛날의 기억.

    과거 해외로 인신매매될 뻔한 아이들을 잿빛 망토단에서 구출해준 적이 있었다.

    그리고 그렇게 구출된 아이들도 히어로들이 책임지고 집으로 돌려보냈다. 아이들을 경찰에게 맡기는 것보단, 구해준 히어로들이 집으로 돌려보내는 게 훨씬 더 안정감을 느낄 거라 생각한 밀키웨이의 판단이었다.

    그리고 여긴, 내가 구출한 아이들을 돌려보낸 곳이었다.

    【“그렇게 말하니 나도 이제 기억나는군. 저 아이 엄마. 분명 여기서 일하는 직원이었지 아마.”】

    “아. 아니에요. 저희도 아이랑 노느라 즐거웠어요.”

    아이의 엄마가 오자 당황해서 몸을 털며 일어나는 강수아.

    “감사합니다. 혹시 필요한 거 있으면 언제든지 저한테 말씀하세요. 지우야! 너 자꾸 손님들한테 장난치면 안 된다고 했지?”

    우리를 향해 고개를 꾸벅 숙이며 아이를 안고 사라지는 아이 엄마.

    그런 아이 엄마와 아이의 모습을 보며, 나는 또 다시 묘한 기분을 느꼈다.

    심장이 두근두근 하면서, 또 뭔가 뻐근하게 차오르는 듯한.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묘한 기분.

    【“지난번에도 말했지만, 세상은 그걸 뿌듯하다고 표현한다.”】

    아 알았어요. 거, 내 감정 읽고 감정에 훈수 좀 두지 맙시다. 예?

    실수도 많았지만, 이제는 점점 나로 인해 더 좋은 방향으로 바뀌고 있는 세상을 체감하기 시작했다.

    언젠가는 내가 없어도 이 세상이 멋지게 돌아갈 수 있는 날이 오겠지.

    “갔네.”

    “응. 갔네. 우리도 가자.”

    가자는 수아의 말에도 나는 발걸음을 옮기지 않고 가는 눈으로 강수아를 바라보았다.

    내가 뿌듯한 것도 뿌듯한 거지만, 오늘 발견한 강수아의 의외의 모습은 꼭 놀려먹어야만 한다.

    내가 따라오지 않자 그제야 뒤를 돌아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내 표정을 확인한 강수아.

    “…뭐야 나강림? 표정 왜 그래?”

    “너 뭐야? 의외로 애들이랑 엄청 잘 놀아주네?”

    “…뭐?”

    그제야 수아는 방금까지 자신이 했던 일이 얼마나 우스웠는지 깨달은 모양이다.

    강수아의 얼굴이 새빨갛게 물들었다.

    “뭐래? 그냥 애들이 장난한 거잖아. 좀 맞춰줄 수 있는 거 아니야?”

    “어? 당황하니까 말도 많아지네?”

    “야! 너! 나강림! 따라오지 마! 혼자 갈 거야!”

    “어떻게 한담? 너랑 나랑 같은 길로 가야 하는데?”

    낄낄 웃는 내 웃음소리가 계곡을 타고 멀리 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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