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히어로 만화 속으로 나 강림-110화 (110/236)
  • 제110화

    도지훈 그리고 도유진

    도지훈은 깨어난 이후에 나의 정체도, 정신세계에서 했던 나와의 대화도,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했다.

    다만, 자신이 저지른 일들에 대한 기억은 모두 가지고 있던 모양이다.

    묶여있던 자신의 처지도 금방 받아들였고, 치료를 받아야 한다는 밀키웨이의 말에도 금방 납득하였다.

    그렇게 약물 부작용 사건은 도지훈을 마지막으로 모두 끝이 났다.

    도지훈과 환자들은 밀키웨이의 의견에 따라 천산시 내의 병원이 아닌, 다른 도시의 병원들에서 치료받기로 결정되었다.

    문제는 도지훈이 저지른 밴디저 납치 사건이었지만,

    <팀 브릴리언트 리더, 밴디저 강무영이 저지른 팀원 살해 미수 사건? - 한밤의 수호자 더 다크 카이저 독점>

    처음으로 미튜버 출신 꼬맹이가 나에게 도움이 되었다.

    【“그거 사실은 내가 보낸 건데 말이지.”】

    뭐? 네가?

    【“그래. 다른 사람들은 사건을 터트리기 전에 조기에 막아냈지만, 도지훈은 그렇게 하지 못했지 않은가? 조금이라도 형기를 줄이려면 이런 방법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렇네.

    결론적으로 벨제뷔트의 방식은 꽤 성공적이었다. 이 사건이 조명받기가 무섭게 그를 뒷받침 해줄 만한 증거와 증인들이 쏟아져나왔으니까.

    평소에도 꽤 많이 업보를 쌓아놓은 듯, 주변에서 터져 나오는 다른 사건들에 대한 제보는 끝없이 이어졌다.

    결국 강무영은 꽤 높은 형량의 실형을 선고받고 슈퍼 빌런 구치소로 수감되고 말았다.

    아무래도 정석적인 히어로상을 좋아하는 제인이었다면 쓰지 않았을 법한 방식이었다.

    그리고 그런 제인의 밑에서 히어로 활동을 한 나로서도 할 수 없는 발상이었고.

    【“그렇지. 제인은 죽어도 이런 생각 못 할걸? 나 같은 악마니까 할 수 있는 발상이다.”】

    요 작은 개구리가 항상 제인하고 비교하는 게 억울했었던 모양이다.

    그래. 이번 일은 네가 제인보다 낫다.

    그리고 우리는 지금까지 우리가 경한 병원의 뒤처리를 위해 했던 일들을 정리해 각종 언론사에 정보를 뿌렸다.

    이 사건의 진짜 배후인 경한 병원에게 타격을 주기 위해서.

    그때까지 나는 이번 사건의 마무리가 강무영 때처럼 전부 잘 풀릴 줄 알았다.

    <경한 병원 신약 부작용 사건, 성과에 눈 먼 의사의 독단….>

    <경한 병원 신약 사건 진심으로 사죄… 피해 환자들이 어떤 병원으로 가도 치료비는 완치까지 모두 지원해줄 예정….>

    현실은 제법 냉혹했다.

    경한 그룹은 의사 몇 명을 제물 삼아 꼬리 자르기를 했고, 천산시의 시민들은 모두 경한 그룹의 말을 믿었다.

    그리고 결국, 꼬리가 된 의사들만이 처벌을 받은 채 이 사건은 끝을 맺는다.

    더 마음 아픈 것은 다른 동료 히어로들의 반응이었다.

    “그래도 다행이네요. 치료비 지원까지 약속받을 수 있어서.”

    “내 생각도 그렇네. 경한 병원이 치료비 지원을 약속할 줄은 상상도 못 했군. 전부 우리가 발품 팔아 해결해야 할 줄 알았는데 말이지.”

    “돈이 얼마나 많길래 이런 말도 안 되는 사고를 치고서 돈으로 해결 보는 거람? 아 부럽다. 나도 돈 많으면 좋겠다.”

    나는 지금의 이런 상황을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치료비를 약속받았지만 과연 완치가 될지, 그리고, 이런 일을 저지른 관계자들이 모두 처벌받을 순 있는 것인지. 그런 것은 아무도 언급하지 않았다.

    사실상, 다들 외면하는 것이나 다름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나는 분노했다.

    “여기서 만족해야 할 일이 아니지 않나? 결국 경한 그룹의 꼬리 자르기로 끝나고 말았다. 진짜 이 일을 지시한 사람들은 높은 곳에 앉아서 잘 먹고 잘 살고 있다. 이 사건은 이 정도로 끝날 수 있는 규모의 사건이 아니지 않나? 더 많은 사람이 책임을 져야만 해!”

    내 분노에도 아무 말 없이 묘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는 히어로들.

    나는 히어로들이 내 얼굴을 묘한 표정으로 바라보는 것 때문에 분노에서 벗어나 머리를 조금 식힐 수 있었다.

    “저 친구 생각해보니 천산시에 온 지 얼마 안 됐던가?”

    “내 생각엔 히어로 활동을 시작한 지도 얼마 안 된 거 같은데.”

    페이퍼백과 슈팅 노바가 나를 바라보는 시선에는, 연민과 안타까움이 뒤섞여 있었다.

    지금까지 히어로 활동을 하며 받아본 적 없는 시선인지라, 나는 나도 모르게 조금 당황하고 말았다.

    “헬 카이저. 당신의 분노 모두 이해해요. 저희라고 화가 나지 않는 건 아니에요.”

    그런 나에게 제대로 된 설명을 해준 것은, 밀키웨이였다.

    “솔직하게 말할게요. 우리 같은 일개 히어로들은 경한 그룹 같은 거대한 힘을 이길 방법이 없어요. 우리가 할 수 있는 거라곤, 경한에게 조그마한 상처를 하나씩 남기는 것일 뿐이죠.”

    “그리고, 그 상처가 하나둘 많아지다 보면, 이 세상 사람들도 점점 경한 그룹의 상처 안에 숨어 있는 검은 부분들에 대해 점점 알게 될 거예요. 우리 같은 히어로들이 해야 하는 일은 바로 그것이에요. 아직 이 세상에 정의가 있다는 걸 알려주고, 이 세상의 사람들이 정의를 위해 싸울 준비가 되게 만들어주는 것. 그게 우리 같은 히어로들이 할 수 있는 일의 전부에요.”

    이 세상에서 살아본 지 몇 개월밖에 되지 않은 나였지만, 밀키웨이의 설명을 듣고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이 세상엔 초능력이 존재한다. 그리고 그런 강력한 힘이 존재하는 이 세계는, 결국 가장 강한 힘을 가진 사람이 지배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 지배자의 힘이 강력하면 강력할수록, 상대적으로 약한 일개 개인이 할 수 있는 일에는 한계가 있다.

    결국 그런 강력한 힘을 가진 사람을 끌어내기 위해선, 많은 사람의 관심과 도움이 필요하다는 이야기였다.

    완벽한 정론이었다.

    “그래도 깜깜이는 대충 이런 상황에 대해서 알고 있었던 눈치였는데, 우리 깜찍이는 몰랐나 보네.”

    나는 장난스럽게 말한 슈팅 노바의 그 말에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었다.

    다크 카이저일 때의 나는, 스스로가 한 실수들에, 내 눈앞에 있는 사건들에 시선을 뺏겨 허우적대느라 그 위를 볼 시야를 가지지 못했으니까.

    나는 이 오랜 시간 동안 그저, 내가 얻은 상처나 핥고 있던 어린애였을 뿐이었다.

    이제야 드디어 나는, 내가 어떤 곳을 목표로 해야 하는지 알 수 있게 되었다.

    내가 이 세상을 바꾸기 위해 첫 번째 목표로 해야 하는 것.

    그건, 이 천산시의 지배자, 경한그룹의 사대희를 끌어내리는 것이었다.

    *    *    *

    도지훈은 실형은 선고받지 않았지만, 결국 치료 감호는 선고받고 말았다.

    사람 하나를 납치해서, 거의 죽음 직전까지 몰고 가도록 두들겨 팼으니 당연한 결과일지도 모른다.

    도지훈의 어머니는 도지훈이 재판을 받는 동안 두 번을 혼절하고 말았고, 이모는 쓰러진 도지훈의 어머니를 보살피기 위해 함께 병원으로 향하셨다.

    그리고,

    “강림아. 은화 언니는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너는 유진이를 좀 맡아주렴. 유진이도 많이 힘들 거야.”

    언제나 그렇듯, 도유진을 진정시키는 것은 나의 몫이었다.

    *    *    *

    내가 도유진을 진정시키기 위해 한 일은 지난번에 했던 일과 별 다를 바가 없었다.

    함께 편의점에 들러 음료수와 간식거리를 사고, 지난번에 함께 시간을 보낸 적 있는 놀이터에 도착했다.

    그때와의 차이점이라면, 지난번엔 놀이기구에 앉았지만, 이번엔 놀이터의 구석에 있는 벤치에 앉아있다는 점이었다.

    아직 시간이 너무 늦지 않아서, 아직 놀이터에 놀고 있는 아이들이 남아 있었으니까.

    놀이터에 삼삼오오 모여 있는 아이들의 모습은, 도지훈과 도유진, 그리고 내가 함께 놀러 다니던 어린 시절을 떠올리게 만들었다.

    그리고 그런 생각을 하고 있던 건, 나 혼자만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우리 어렸을 때 생각난다. 그치?”

    가만히 앉아 음료수를 홀짝이던 도유진이 꽤 오랜 침묵을 깨고 먼저 입을 열었다.

    그리고 찾아온 잠시의 침묵.

    도지훈은 내게, 네 탓이 아니니 너무 미안해하지 말라고 했었다.

    하지만, 내 생각은 달랐다.

    나는 남들보다 더 많은 것을 알고 있었고, 남들보다 더 많은 힘을 가지고 있었다.

    그랬음에도 나는 도지훈을 완벽하게 구해내지 못했다.

    거기엔 분명하게도 내 책임이 존재했다.

    나는 그래서 도유진에게 쉽사리 입을 열지 못했다.

    “그러게. 우리도 어렸을 때 저렇게 많이 뛰어놀았는데.”

    잠시의 침묵 끝에 가까스로 입을 연 내가 할 수 있는 말이라곤, 이 정도 수준뿐이었다.

    “그때는 우리가 이렇게 크게 될 줄은 몰랐는데. 난 나도, 너도, 그리고 오빠도. 모두 평생 어린아이일 줄만 알았어.”

    아이들이 놀고 있는 것을 바라보는 도유진의 눈에는, 지금까지 와는 다르게 눈물이 차 있지 않았다.

    이런 일이 일어날 걸 예상했던 탓일까? 아니면 눈물마저 말라버린 탓일까?

    해가 저물며 주변을 노랗게 물들였다.

    도유진의 하얀 얼굴도 노을색으로 물들었다.

    나는 멍한 표정의 도유진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고개를 돌렸다.

    “사람으로 태어났으면, 평생 아이로 살 순 없는 거잖아.”

    “그러니까 말이야. 너도 참 어린애 같았었는데. 요즘은 나보다 훨씬 어른처럼 느껴져.”

    “으아아앙!”

    술래잡기를 하기 위해 달려 다니던 남자아이가 넘어져 눈물을 터트린다.

    멀리에 있던 여자아이가 달려와 넘어졌던 남자아이를 일으켜주고 다리를 털어준다.

    “뚝. 울면 안 돼. 울면 산타 할아버지가 선물 안 준다고 우리 엄마가 그랬어.”

    “응….”

    언제 그랬냐는 듯 배시시 웃으며 달려 나가는 두 꼬마를 보며 도유진이 다시 입을 열었다.

    “이상하지. 생각보다 힘들지 않아. 왠지, 오빠가 그렇게 될 걸 알고 있었던 것도 같아.”

    계속해서 일어난 사건들이, 도유진을 꽤 지치게 했던 모양이다. 하지만 비슷한 상황을 먼저 겪어 본 적 있는 나는 알 수 있었다.

    잦은 슬픔은 사람을 무뎌지게 한다. 그렇게 무뎌진 사람은 자신이 슬픔을 느끼지 않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결국 쌓여있던 슬픔은 새어 나올 틈이 하나 생기면 순식간에 쏟아져 나와 버리곤 한다.

    “너처럼 크면 산타할아버지가 어차피 선물 안 줘. 넌 울어도 돼.”

    툭… 투투툭….

    타일 위로 물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지만, 나는 모른 척하기로 했다.

    *    *    *

    시간은 흐르고, 한참을 놀던 아이들도 해가 지기 전에 모두 놀이터를 떠났지만, 우리는 계속해서 놀이터에 남아 있었다.

    click… click….

    사위가 어두워지자, 어두운 놀이터에 단둘이 남아 있던 우리의 머리 위에 가로등에 불이 들어왔다.

    이젠 슬슬 내가 슈트를 입어야 할 시간이 돌아온 것이다.

    “야 도유진. 이제 그만 집에 가자. 내가 데려다줄게.”

    나는 몸을 일으키려 했다.

    “조금만 더 있어.”

    도유진이 내 손을 잡기 전까진.

    상상도 하지 못했던 상황에 나는 나도 모르게 얼어붙어 버리고 말았다.

    “나 너한테 하고 싶은 말이 있어.”

    내가 생각하는 그런 상황은 아니겠지. 천하의 도유진인데.

    “미리 말해두지만, 오늘 있었던 일들 때문에 내가 충동적으로 이런 말 하는 건 아니야.”

    아니야 유진아.

    “예전에 너에게 내가 했던 말들은 모두 잊어줬으면 좋겠어. 나, 이젠 너를….”

    “거기까지만 해, 도유진.”

    나는 유진이의 말을 끊었다.

    더 이상 들어서는 안 됐다.

    해야 할 일이 많고, 해결해야 하는 일들도 많다.

    시험 공부도 해야하고, 이모의 신상에도 혹시나 무슨 일이라도 생기지 않을까 항상 확인해야만 한다.

    원작에서 있었던 각종 사건 사고들을 막아야 하고, 빌런들이 천산시를 쥐고 흔드는 것도 막아야 한다.

    그리고, 이제는 사대희와의 싸움을 준비해야만 한다.

    나는 이 모든 사실을 도유진에게 말해줄 수 없다.

    내가 항상 주변에 해야만 하는 거짓말. 그런 거짓말들로 상처 입을 도유진을 나는 볼 수 없다.

    나는 오래전에 내가 도유진에게 고백했던 때를 떠올렸다.

    나는 그 때, 내 옆에 있어주는 사람이 오직 도유진 뿐일거라 생각했었다.

    나는 억지를 부려서라도 도유진을 내 옆에 두고 싶었다.

    사실 나는 알 수 없다.

    도유진이 정말 나를 좋아해서 이러는 건지, 아니면 예전의 나처럼 억지를 부려서 그러는 것일지.

    하지만 지금의 나는, 둘 중 어떤 상황이라도 도유진의 말을 들어줄 수 없었다.

    “도유진. 그 말은 더 멋진 날, 네게 진심인 사람에게 했으면 좋겠다.”

    나는, 도유진이 내게 했던 말을 그대로 돌려줄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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