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히어로 만화 속으로 나 강림-108화 (108/236)
  • 제108화

    매드독(8)

    도유진과 나는 같은 동네에 살며, 같은 유치원을 다니고, 같은 초등학교에 입학한 사이였다.

    골목 몇 개만 건너가면 만날 수 있을 정도로 도유진의 집과 우리 집은 가까웠고, 가까운 만큼 우리 부모님과 도유진의 부모님은 빠르게 친해졌다.

    나와 도유진이 친해서 부모님이 친해진 게 아니라, 부모님끼리 친해져서 함께 시간을 많이 보내게 된 사이였던 거다.

    하지만 부모님들끼리 친해지면 당연스럽게도 아이들끼리도 친해지기 마련이다.

    유치원에서 무슨 행사를 하더라도 항상 짝을 지었고, 사진을 찍을 때도 항상 도유진과 함께 찍었다.

    가족 여행을 갈 일이 있어도 항상 동반으로 함께 움직이곤 했었다.

    당연하지만 함께 보낸 시간이 많을수록, 아이들끼리는 친해질 수밖에 없었고, 나와 도유진, 그리고 나보다 네 살 많은 형이던 도지훈은 그렇게 친해지게 되었다.

    도지훈은 어렸을 때부터 참 활발했다. 주변에 있던 놀이터란 놀이터의 위치는 전부 알고 있었고, 공사 중인 건물이나 공터 같은 곳도 많이 알고 있었다.

    골목대장이던 도지훈은 골목과 골목을 쏘다니며 할 수 있는 놀이란 놀이는 모두 나와 도유진에게 알려주었고, 나도 그때까지 그렇게 소심한 성격은 아니었다.

    하지만 나는, 열 살 때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나서부터 바뀌기 시작했다.

    나는 예전처럼 밖으로 돌아다니기보단 집에서 혼자 보내는 시간이 많아졌다.

    도지훈, 도유진과 함께 밖에서 노는 것보단 집에서 혼자 만화책을 읽는 것을 더 좋아하게 되었고, 혼자만의 노트에 이런저런 설정을 끄적이는 걸 더 좋아하게 되었다.

    혼자 보내는 시간이 많은 아이가 거진 그렇듯, 나는 극도로 소심한 아이가 되고 말았고, 종종 아이들의 괴롭힘 타깃이 되곤 했다.

    그런 나를 항상 도와줬던 것이, 도지훈과 도유진이었다.

    *    *    *

    쨍그랑!

    내가 던진 셰도우와 셰이드가 날아들어 매달려 있던 강무영을 바닥으로 떨어트렸다.

    그와 동시에 나는 허공을 날던 속도 그대로 도지훈에게 부딪혔다.

    쾅!

    사람끼리 부딪쳤다고 믿기 힘든 소리가 났지만, 놀랍게도 도지훈은 뒤로 물러나긴 했지만 땅에 멀쩡하게 다리를 붙이고 서 있었다.

    아니, 사실 물러난 게 아니라 밀려난 것에 가까웠고, 오히려 타격을 입은 것은 도지훈이 아니라 나였다.

    마치 달리다 금속 벽에 몸을 부딪친 것 같은 느낌이다.

    나는 가까스로 쓰러지지 않고 버텨낼 수 있었다.

    “넌, 누구지?”

    좀처럼 진심으로 화내지 않는 도지훈에게서 쉽게 들을 수 없는, 차갑게 분노한 목소리.

    금속처럼 변한 피부가 달빛을 받아 번들거린다.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언제나 그렇듯, 그냥 히어로 네임을 말하면 되는 것인데. 도저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지금까지의 경험으로 봐서 어차피 약물 때문에 제정신이 아닌 상태일 거다. 나는 말을 하는 대신 흑염을 뿜어내기 위해 오른손을 뻗었다.

    일직선으로 쏘아지는 흑염을, 몸을 슬쩍 비트는 것만으로 피해낸 도지훈의 신형이 내 쪽으로 쏘아져 들어온다.

    “히어로인가?”

    빠르다.

    스텝을 몇 번 밟는 것만으로 순식간에 내 눈앞까지 다가온 도지훈이 나를 향해 주먹을 뻗었다.

    나는 몸을 살짝 숙여 도지훈의 주먹을 피했다.

    쉭-!

    주먹이 소름 돋는 소리를 내며 내 머리 위를 스쳐 지나갔다.

    “넌 이 자가 구할 가치가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나?”

    아니. 난 당신을 구하고 싶은 거야.

    뻗어진 주먹을 회수함과 동시에 들어오는 도지훈의 반대편 주먹.

    아까보다 훨씬 빨라진 공격에 겨우 고개만을 틀어 공격을 피해냈다.

    가까스로 어깨를 비틀어 피했지만, 내 뺨을 스치고 지나가는 도지훈의 주먹. 분명 스치고 지나간 것은 주먹인데도 뺨이 찢어지는 것이 느껴진다. 상처 난 뺨에서 주륵, 피가 흘러내린다.

    다음 공격을 맞았다가는 뼈도 못 추릴 거라는 본능적인 공포가 느껴져 나는 양팔을 들어 올려 얼굴을 가렸다.

    그리고 예상했다는 듯 들어오는 도지훈의 보디블로.

    POW!

    제대로 박혀 들어온 보디 블로에 정신이 아찔해진다.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사이 재차 들어오는 공격들.

    【“나강림! 지금의 속도로는 상대의 템포에 휘둘리기만 할 뿐이다! 래피드 데빌 모드로 변형해라!”】

    갑자기 박혀오는 고통에 제정신이 아니지만, 다행스럽게도 벨제뷔트의 말은 내 머릿속을 울린다.

    SUIT MOD

    HELL Kiaser

    보인다.

    이번엔 도지훈이 질러오는 주먹이 눈에 보였다. 주먹이 뻗어지는 예측 경로대로 몸을 숙인다.

    주먹을 뻗기 전에 흑염의 힘을 두른다.

    뻗어진 주먹이 내 귓가를 스치는 그 타이밍을 노린다.

    바로, 지금.

    흑염의 힘을 머금은 내 주먹이 도지훈의 주먹보다 빠르게 가 닿는다.

    Dang!

    마치 청동 조각상에 주먹을 휘두른 느낌. 뼈가 지리리 울린다.

    틀려먹었다. 피부 자체가 너무 단단해.

    하지만,

    화륵!

    “큭!”

    도지훈의 입에서 처음으로 흐르는 신음.

    옮겨붙은 흑염이 타격을 주긴 하는 모양이다.

    거리가 충분히 있다면 블래스트 모드를 이용한 원거리 대결로 몰고 갈 수 있겠지만, 현재 우리가 전투를 벌이는 곳은 좁은 건물 안. 내가 거리를 벌릴 틈을 주지 않겠지.

    그렇다면, 완전하게 타격전으로 넘어가는 수밖에 없다. 하지만 래피드 데빌 모드로 두들기는 동안 내 주먹이 먼저 부서질 판국이다.

    이 상황을 타개할만한 새로운 능력이 필요하다.

    벨제뷔트! 지금 당장 새로운 능력을 개방할 수 있어?

    【“할 수 없다고 말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군. 어떻게든 찾아서 해내 보지. 어떤 능력이 필요하지?”】

    다크 아머! 다크 아머 모드를 개방해줘!

    【“조금만 버텨라! 당장 방법을 알아보마!”】

    충분히 버틸 수 있어.

    나는 지금까지 상대했던 빌런들과 했던 전투들을 머릿속에 떠올렸다.

    지금까지 겪었던 경험들을 토대로 한다면, 나는 충분히 도지훈을 이길 수 있다.

    내 몸에 흐르는 흑염의 힘을 느끼며, 나는 다시 한번 양 주먹을 들어 올렸다.

    *    *    *

    나에게 있어서 도지훈은, 항상 동경하던 사람이었다.

    힘이 있었고 그 힘을 허투루 쓰지 않았지만 불의는 참지 않았다.

    괴롭힘 받는 약자들을 외면하지 않았고, 도움이 필요한 사람은 항상 먼저 도왔다.

    히어로 만화 속의 히어로가 이 세상에 존재한다면 저런 사람일 거야. 난 그렇게 생각하곤 했었다.

    그래서 나는, 끈덕지게 도유진과 도지훈의 옆에 붙어 있고 싶어 했다.

    거기에 우리 엄마 아빠와의 추억을 함께 공유할 수 있는, 얼마 안 되는 사람들이기도 했으니까.

    그러던 어느 날, 나는 아무 생각 없이 머릿속에 들어 있던 말을 입 밖으로 내고 말았다.

    “나는 지훈이 형이 부러워.”

    *    *    *

    래피드 데빌 모드를 켠 나는 확실히 도지훈보다 빠른 동체시력과 스피드를 가질 수 있었다.

    하지만, 도지훈은 조금 더 재빨라진다고 잡을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다시 한번 내 코앞을 향해 뻗어 오는 주먹. 나는 주먹을 피하기 위해 몸을 비틀었다. 하지만, 내가 거기로 피하길 기다렸다는 듯 반대편 주먹이 내가 피할 곳으로 따라붙는다.

    빠각!

    “커… 커헉!”

    압도적인 기술 차이.

    내가 정신을 못 차리는 사이 허리를 숙이고 들어오는 태클.

    나는 뒤로 물러나며 몸을 회전시켜 도지훈의 태클을 가까스로 피해냈다.

    도지훈은 타격전에만 능한 것이 아니었다. 몇 번이고 나를 향해 걸어오는 그라운드 기술을 피해내기 위해 나는 온 힘을 다해야만 했다.

    태클을 피하기 무섭게 내 가슴을 향해 날아드는 도지훈의 무릎.

    【“나강림! 아머 모드를 언락하는 데 성공했다! 평소 하던 대로 일단 경험치 죄다 털어 넣었어.”】

    그와 동시에 내가 말하지 않아도 저절로 변형하기 시작하는 슈트.

    SUIT MOD

    HELL Kiaser

    헬 나이트라니.

    생사를 건 전투 도중에 실소가 나올 뻔할 정도로 어처구니없는 네이밍 센스였지만, 타이밍은 좋았다.

    뻑-

    강화된 슈트의 외골갑이 도지훈의 공격을 흡수하는 것이 느껴진다. 타격이 모두 흩어지는 것은 아니었지만, 이 정도 타격이면 충분히 버텨볼 만하다.

    헬 나이트라는 네이밍답게 마치 기사의 갑옷처럼 온몸을 덮은 슈트의 외골격은 무겁고 튼튼했다.

    나는 두 주먹에 흑염을 머금었다.

    퍼억-

    도지훈의 주먹이 내 턱에 틀어박힌다. 완전히 얼굴을 덮고 있는 마스크의 형태 때문에 턱에 틀어박힌 주먹도 조금은 더 버틸만했다.

    나는 내 몸에 한 방이 틀어박힌다면, 나 또한 도지훈에게 한 방을 먹인다는 마음가짐으로 주먹을 휘둘렀다.

    완전히 난타전으로 들어간 전투 상황.

    퍽- 팍- 퍽- 팍- 퍽- 퍽- 팍!

    아머 모드의 영향으로 이전보다 타격의 흡수율이 올라가긴 했지만, 그렇다고 타격이 제로가 되는 것은 아니다.

    이전부터 쌓여 있던 타격의 영향인지, 점점 몸이 무뎌지는 것이 느껴진다.

    지금 당장 무릎 꿇고 쓰러지고 싶지만, 그럴 순 없다.

    퍼억!

    도지훈은 정말 강했다.

    내 공격이 세 번 중 한 번이 맞아 들어간다면, 도지훈의 공격은 단 한 번도 빗나가지 않았다.

    내가 조금이라도 방심한 것 같으면 그 빈틈을 타고 들어와 항상 치명타를 먹이고 빠졌다.

    그것은 마치, 이 전 세상에서 도지훈이 격투기 선수로 활동했을 때와 비슷했다.

    격투기 시합에서나 볼 수 있을 법한, 압도적인 격투 기술들…!

    퍼버벅!

    순식간에 슈트에 연속으로 박혀 들어오는 세 번의 공격!

    쩌적-

    아머 모드에 균열이 가는 것이 느껴진다.

    점점 흐려지는 정신을 붙잡기 위해 나는 이를 악물고 주먹을 휘둘렀다.

    “시야가 흐려졌군.”

    퍼---억!

    명치에 틀어박힌 주먹을 중심으로, 견고하던 헬 나이트 모드의 외골격에 금이 가기 시작한다.

    풀썩.

    나는 결국 버티지 못하고 무릎을 꿇고 말았다.

    WARNING!WARNING!WARNING!WARNING!WARNING!

    언젠가 본 적 있는, 붉은색 홀로그램이 내 시야를 덮는다.

    【“나강림! 슈트도 네 몸도 한계에 다다랐다! 이대로 갔다간 네가 죽어!”】

    WARNING!WARNING!WARNING!WARNING!WARNING!

    *    *    *

    “나는 지훈이 형이 부러워.”

    부럽다는 나의 소리에 도지훈이 물었다.

    “뭐가 부러운데?”

    “형은 강하고, 또 멋있고, 또… 동생도 있고… 엄마도 아빠도 있잖아.”

    내 말에, 잠깐 생각에 잠겨있던 도지훈이 입을 열었다.

    “강림아. 부모님과 동생은 내가 어떻게 해줄 수 없는 부분이지만, 강하고 멋지게 되는 방법은 알려줄 수 있어.”

    “응? 뭔데?”

    “포기하지 않으면 돼. 죽을 만큼 아프고 힘들어도 포기하지 않으면 강하고 멋진 사람이 될 수 있어.”

    아주 오래전에 잊었던 기억이었지만, 도지훈과 맞서고 있는 지금, 내 머릿속엔 그때의 기억이 떠올랐다.

    *    *    *

    천둥이 치는 소리가 귓가에 울려 멀어지던 정신이 다시 돌아왔다.

    나는, 이를 악물고 몸을 일으켰다.

    그나마 지훈의 공격을 막아주던 아머 모드도 힘을 다하고 부서지고 말았고, 온몸은 상처투성이인데다, 설상가상으로 비를 맞고 온 탓에 체온마저 떨어져 몸이 덜덜덜 떨린다.

    도지훈은 그런 나를 보고 닫혀있던 입을 열었다.

    “아직도 포기하지 않았나?”

    “…….”

    “이쯤 되면 알 만하지 않나? 넌 나를 절대 이길 수 없어. 왜 포기 하지 않는 거지?”

    “…싶거든.”

    “뭐라고?”

    “강하고 멋진 사람이 되고 싶거든.”

    그렇게 말하며 나는 양손을 들어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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