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히어로 만화 속으로 나 강림-105화 (105/236)
  • 제105화

    매드독(5)

    “켁… 케켁….”

    종인은, 자신의 목을 조르고 있는 머리카락 때문에 숨을 쉴 수 없었다.

    종인의 앞에서 종인의 목을 조르고 있는 것은 이제는 괴물처럼 변해버린, 자신의 학교 후배였다.

    “한종인! 말해! 나를 좋아한다고 말해!”

    숨이… 막혀서… 말을 할 수가… 없어….

    종인에게는 1년이 넘게 짝사랑하던 여자가 하나 있었다.

    종인이 짝사랑하는 그녀의 이름은 진아. 같은 대학의 동아리 후배로, 처음부터 진아를 좋아했던 것은 아니었다.

    처음에 진아는, 자신의 가장 절친한 친구인 성호를 좋아했다. 하지만 성호에게는 2년 넘게 사귄 여자친구가 있었고, 진아는 그런 성호의 연애를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그런 진아의 마음을 종인이 눈치챈 이후로 둘은 자주 시간을 가지게 되었다. 한쪽은 위로를 해주고, 다른 한쪽은 항상 위로를 받는 쪽으로.

    처음에는 그저 동정심이었던 것이 갈수록 발전해 종인은 점점 그녀가 좋아졌고, 그것은 진아가 더 이상 성호를 좋아하지 않는다고 말했을 시점에 가장 절정에 닿았다.

    그럼 혹시 지금은 누굴 좋아해?

    그 질문을 하지 못한 채 종인은 1년이 넘은 세월 동안 그저 가슴앓이만 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하지만 얼마 전, 갑작스러운 병으로 병원에 입원했던 진아는 실종되고 말았다.

    병원 치료를 받던 도중에 병실을 탈출했다는 소식만을 들었을 뿐이다.

    퇴원하면 고백해야지. 그렇게 마음을 먹고 있었는데… 그랬는데….

    “한종인! 너도 나 말고 다른 여자를 좋아하고 있는 거지? 나 말고 다른 여자 좋아하고 있는 거잖아!”

    실종되었다던 진아는 자신의 집에서 자신의 귀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마치, 살아있는 무언가처럼 멋대로 움직이는 머리카락을 가진 채.

    “말해!!”

    1년 동안의 짝사랑의 결말이 이런 것인가.

    종인은 묘한 기분을 느끼며 눈을 감았다.

    그 때,

    피융!

    무언가가 날아와서 종인의 목을 조르고 있던 머리카락을 쏘아 맞혔다.

    “커헉… 헉… 헉….”

    날아온 무언가는 정확하게 진아의 머리카락만을 끊어놓았고, 종인은 거의 죽음의 직전에서 살아 돌아올 수 있었다.

    쨍그랑!

    그와 동시에 자신의 방 창문을 뚫고 들어오는 한 사람.

    “지옥에서, 나 강림.”

    *    *    *

    S 내 이름은 나 강림.

    H 현재 나이 열 일곱.

    H 제인이 사라지며 잃어버린

    H 다크 카이저의 모습 대신

    H 벨제뷔트가 만들어낸

    H 헬카이저의 모습으로

    H 히어로 활동을 하고 있다.

    H 그리고 오늘 밤,

    H 나는 원작에선 나오지 않았던

    H 사건을 해결하려고 한다.

    BOOOOM!

    쨍그랑!

    “지옥에서, 나 강림.”

    “넌 또 뭐야?”

    온 머리가 산발이 된 여자가 나를 향해 머리카락을 쏘아낸다. 머리카락은 마치 생명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나를 향해 날아들었다.

    머리카락을 움직이는 능력이 강화된건가. 골치 아프네.

    이 세상의 슈페리어 중 90퍼센트는 실질적으로 사는 데 큰 도움이 안 되는 사소한 초능력들만을 가진 채 살아간다.

    그리고 머리카락을 움직이는 능력은, 이 세계의 신체계열 슈페리어들이 가지고 있는 능력 중 가장 많은 축에 속하는 사소한 능력이었다.

    머리카락을 자유자재로 움직일 수 있지만, 머리카락 자체가 큰 물리력을 가지긴 힘들다.

    원래는 마치 귀를 움직일 수 있는 사람처럼, 별것 아닌 수준의 초능력일 뿐이었지만.

    머리카락을 마치 촉수처럼 움직이며 나를 공격해 들어오는 변이자, 아니 환자.

    공격의 속도는 빠르지만, 공격해오는 경로 자체는 뻔하다. 나는 슬쩍 몸을 비틀어 나를 향해 날아드는 머리카락을 피했다.

    퍼억!

    벽에 부딪힌 머리카락에 의해 벽 한구석에 구멍이 뚫린다.

    약물로 인해 강화된 지금은 다르다.

    지금은 실질적으로 누군가에게 피해를 입힐 수 있는, 강력한 초능력이 되고 말았다.

    이런 것이 약물의 부작용이라면,

    확실히 당장 다른 사람들에게도 큰 피해를 입힐 가능성이 있다.

    “크아아악! 나를 방해하지 마!”

    나를 향해 다시 한번 날아드는 머리카락들. 아까와는 다르게 그물처럼 넓게 펼쳐져 나를 포위한다.

    사실 이까짓 머리카락들쯤은 흑염을 이용하면 모두 불태울 수 있을 테지만… 상대는 아직 20대 초중반의 여성분이시다.

    머리카락을 심하게 손상시킬 필요는 없었다.

    자신의 의도가 아닌 채 약물 때문에 정신을 잃은 상황이라면, 나는 이 피해자를 상처 하나 없이 제압할 의무를 가지고 있다.

    나 혼자라면 피하기 힘든 상황이었을 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지금 혼자가 아니지.

    나는 고개를 숙여 몸을 피했다.

    탕! 탕! 탕!

    멀리서부터 날아오는 세 개의 둥근 탄환.

    팡! 팡! 팡!

    날아오던 둥근 탄환은 갑작스럽게 터지며 끈적한 액체를 내 뿜었다.

    “으아악! 이게 뭐야?”

    끈적거리는 액체가 순식간에 여자의 머리카락을 휘감았다. 내게 날아오던 머리카락들도 제멋대로 엉킨 채 여기저기로 흩어진다.

    래피드 데빌 모드로 변환한 후, 슈트의 다리에 부분에 힘을 준다.

    화륵.

    다리 부분에 흑염의 힘이 맺히는 것이 느껴진다.

    흩어지는 머리카락들 사이로 몸을 날린다. 여성과 나의 거리가 순식간에 좁혀졌다.

    쉬익-.

    아직 끈적이지 않은 머리카락 몇 가닥이 내 뺨을 스치고 지나간다. 스쳐 지나간 뺨에서 피가 주륵 흐르는 것이 느껴진다.

    하지만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더 이상 나를 막아낼 수 있는 머리카락은 없다.

    나는 곧바로 여자의 품 안으로 달려 들어가 목 언저리를 살짝 후려쳤다.

    풀썩 쓰러지는 여자를 받아 똑바로 눕히며, 나는 턱 아래로 흐르려는 땀을 닦아냈다.

    다행히, 큰일이 나기 전에 막아낸 듯하다.

    *    *    *

    전투가 끝나자 손에 쥔 아토믹 건을 분해하기 시작하는 슈팅 노바.

    차차차착.

    멋들어진 장총이 분해되어 두 개의 권총으로 변해가는 과정은 너무 멋졌다.

    만화에선 한두 컷으로 대충 뭉개고 끝나던 장면이었는데, 옆에서 보니까 진짜 되게 멋지네. 나도 저런 총 하나 가지고 싶다.

    “이제 마지막 한 명 남았네. 이 사람도 오늘 안에 나타나 주면 좋을 텐데.”

    스스로 자취를 감춘 환자들의 대부분은, 당장의 분노보다는 평소에 쌓여있던 감정이나 원한에 의해 움직이곤 했다.

    환자의 주변 환경을 조사하고, 환자가 어떤 분노를 가지고 있을지를 추리한다.

    그리고, 환자가 어디로 갈지를 예상해서 환자의 출현을 감시한다.

    이 방법은, 만화 속 빌런들이 탄생하는 장면들을 따라가는 듯한 기분을 들게 만들었다.

    사건을 일으킬 사람을 온전히 이해할 수 있어야, 그 사건을 막아낼 수 있는 것이다.

    예전에 레드 래빗 테러 사건을 막을 때 이런 방법으로 막았었는데….

    원작의 사건들에만 정신이 팔려 잠시 잊고 있었던 방식이었다.

    “그래서 우리 깜찍씨는 깜깜이랑 무슨 사이신가? 둘이 여러 가지로 하는 행동이 비슷한데. 능력적인 부분도 그렇고.”

    슈팅 노바가 스마트폰을 들여다보며 내게 말을 건넨다. 자기 나름대로 설치해둔 장비들과 연동되어 거리의 정보를 수집해준다고 한다.

    아무래도 생각보다 많은 히어로들이 자신만의 장비들을 활용해서 정보 수집을 하는 모양이다.

    하긴 그런 게 없으면 도시 내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알아차리기가 힘들겠지.

    “깜깜이는 누구고 깜찍이는 누구를 말하는 거지?”

    “깜깜이는 다크 카이저고 깜찍이는 당신이지. 하는 짓이 다크 카이저보다 깜찍하길래.”

    원작에서부터 주변 히어로들에게 별명을 붙여주길 좋아하는 버릇이 있었지. 다크 카이저와 헬 카이저가 비슷한 구석이 있으니까 나온 네이밍 센스인 모양이다.

    【“뭐? 깜찍이? 내가 심혈을 기울여서 만든 헬 카이저를 깜찍이라고?”】

    “그래. 저 꼬맹이는 깜찍이 사이드 킥이라며? 사이드 킥을 데려왔으면 같이 일을 시켜야지. 왜 그냥 보고만 있으래? 아직 너무 초짜라 그래?”

    “히어로 활동을 시작 한지 이제야 2일째인데, 아직은 너무 위험….”

    갑자기 내 앞을 탁, 치고 나오는 데빌 보이.

    “뽀쓰!!! 저도 함께 싸우고 싶습니다! 싸울 수 있게 허락해주십쇼!!!”

    아니 너 아까는 이번 일까지는 조금 더 지켜보며 일하는 방식을 확인하고 싶다며. 이게 어떻게 된 일이야?

    “뽀스!!! 저도!!! 할 수 있습니다!!! 초짜가 아닙니다!!!”

    얼굴은 완전히 가리고 있는 탓에 볼 수 없었지만,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고개를 든 채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준석이의 모습에서 나는, 모태솔로로서 준석이의 머릿속을 이해하고야 말았다.

    얘, 지금 여자한테 잘 보이고 싶어서 이러는 거다.

    【“그럼… 데빌 보이의 컨셉은 여자의 앞에서 활성화되는 종류인 모양이군….”】

    그래. 심지어, 소설에서나 나올 법한 삼류 깡패 같은 느낌으로.

    여자 앞에선 강한 척하는 컨셉의 모태솔로 히어로… 그게 바로 데빌 보이의 컨셉이었다.

    *    *    *

    “거, 잠복근무하는 형사가 이런 느낌인 모양이군.”

    “아 그거 알아요. 티비에 가끔 나오죠? 차 안에 들어가서 빵 같은 거 먹으면서 계속 지켜보고 있는 그거.”

    밀키웨이의 말에 래피드 스타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이런 일을 하다 보면 가끔은, 경찰이 된 기분을 느끼곤 한다.”

    “경찰들은 영장 없으면 이렇게 뒷조사 다 하기 힘들걸요? 그런 거 신경 안 쓰는 히어로니까 사생활 캐서 이렇게 조사하고 있는 거지.”

    래피드 스타와 밀키웨이는 지금 사기 범죄자의 집 앞에 잠복근무하고 있었다.

    4년여 전, 자신의 주변인들에게 투자를 빙자한 사기를 친 후 도주했다가 잡힌 범죄자.

    실종된 사람은 이 사람에게 사기를 당해 인생이 바뀐 피해자였지만, 범행을 일으킬 거라는 확증이 없는 한, 경찰은 수사를 진행하기가 힘들다.

    “그건 그렇군.”

    “그래도, 이번이 우리 쪽 마지막 한 명이니까, 빨리 마무리하고 돌아가자구요.”

    주변인에게 친 거액의 사기가 보통 그렇듯, 잡았을 당시에는 가지고 갔던 돈의 대부분을 쓴 후였고, 피해자들은 피해 금액을 돌려받지 못했다.

    죗값을 치르기 위해 3년 형을 받고 얼마 전에 형기를 마치고 나오긴 했지만, 결혼 자금을 잃고 파혼당한 피해자에겐 앙금으로 남아있을 터.

    “저기. 지금 오고 있는 저거 아니에요?”

    다행히 그 예상은 틀리지 않았던 모양이지만….

    “하필 허공이군.”

    집까지 날아드는 남자의 어깨에는 날개 한 쌍이 돋아나 있었다.

    “이럴 때 퀘이사가 그립긴 하네요. 준비됐어요?”

    “어 그래. 시작하지.”

    다행히, 날아오는 고도가 그렇게 높진 않다.

    밀키웨이가 만든 공기의 막이 허공에 계단처럼 뻗어져 올라가기 시작했다.

    밀키웨이와 래피드 스타가 협공할 때 종종 사용하는 콤비네이션이었다.

    밀키웨이는 허공에 계단을 만들어내고, 래피드 스타는 그 계단을 밟고 타깃에게로 향한다.

    슈우우욱….

    래피드 스타의 주변이 느려지기 시작한다. 물속에 들어 온 것처럼 발이 무겁고 숨이 막히고, 귀가 먹먹하지만.

    래피드 스타는 또다시 무거운 다리를 들어 올렸다.

    오늘도 한 사람을 구할 수 있다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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