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3화
이중 신분
“쉽지 않네.”
내 눈앞에는, 내가 방금까지 겨우 제압한 사람 하나가 기절한 채 기둥에 묶여 있었다.
피시방에서 만났던 사람과는 다르게 이빨이 잔뜩 변형되어있는 듯한 모습이었지만, 사소한 것에 분노에 차 주변을 파괴하는 행동은 비슷했다.
“요 며칠 사이 같은 사건으로 이렇게 자주 싸워보는 건 또 처음이구만.”
【“보통은 사건이 일어나고 한 두 번만 막아내면 끝이니까 말이지.”】
하지만… 이걸로 네 명째네.
피시방에서 있었던 남자의 폭주는 시작이었을 뿐, 그 이후로도 많은 사람이 폭주하기 시작했다.
이 세상에 일어나는 모든 사건이 전부 내가 아는 사건일 수는 없다.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부분, 내가 보지 않은 부분, 그것도 아니면 원작엔 나오지 않았던 사건이나 나로 인해 바뀐 사건들까지.
결국 내가 미리 막아낼 수 있는 사건들에는 한계가 있었다.
그리고 내가 피시방에서 겪은 바 있는, 폭주 상태는 원작에선 나온 바 없는 사건이었다.
원작에서 비슷한 사건을 찾으라고 한다면, 인휴먼증과 관련된 사건이었을 거고, 그 사건은 내가 분명 먼저 막아냈을 터였다.
그렇다면, 내가 모르는 곳에서 인휴먼증과 관련된 무슨 사건이 생겨났다는 뜻이겠지.
내가 알 수 없는 상황에서 만들어진 사건은 어떻게 막아야 하는 걸까?
보통 이런 건 제인이 알아서 힌트도 주고 정보도 취합해주곤 했었는데….
벨제뷔트, 이번 사건에 대한 정보 같은 건 알아낸 거 없어?
【“슬슬 슈트의 기능들이 하나씩 열리고 있긴 하다만, 정보의 수집이나 조사 같은 건 내가 잘 할 수 있는 분야가 아니라서 말이지….”】
그래. 내가 너한테 뭘 기대하겠냐. 이런 말 자주 해서 미안하지만 정말 제인이 그립다 야.
【“…….”】
헬 카이저의 모습으로 다른 히어로들을 만나긴 껄끄럽지만… 어쩔 수 없나….
…
..
.
[Tattoo Daphne]
내 짧은 히어로 생활 중 이런 정보를 가장 많이 알만한 사람이라고 하면, 역시 다프네의 밀키웨이밖에 없지.
하지만, 기존엔 다크 카이저였던 상황과는 다르게, 지금은 헬 카이저의 모습인 상황.
다크 카이저의 방식이었던 창문 넘어가기는 컨셉이 겹친다.
【“좋은 마음가짐이다. 헬 카이저라는 이름을 달고 있으면 새로운 컨셉을 만드는 편이 더 어울리지.”】
그렇다면….
Knock, Knock.
나는 다프네의 문을 두드렸다.
* * *
밀키웨이, 황서현은 가게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하던 일을 내려놓고 소리쳤다.
“네~ 문 열려있어요. 들어오셔요.”
Knock, Knock.
다시 한번 문을 두드리는 소리.
“네. 알겠어요. 나가요.”
언뜻 보면 일반 가정집으로 보일 만큼 평범한 외관 덕분에 가끔 브루트 손님 같은 경우는 직접 문을 열어주기 전엔 문을 열고 들어오는 걸 거북해하는 경우가 있었다.
브루트는 주인이 직접 문을 열어주지 않았는데 문에 손을 댔다가 도둑 같은 걸로 오해받아 총을 맞는 경우도 종종 있으니까.
이번도 그런 경우겠거니, 생각하며 문을 열어본 황서현은 바깥에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하곤 고개를 갸웃했다.
“내가 문을 너무 늦게 열어서 가버리셨나?”
문을 닫고 다시 원래 하던 작업으로 돌아오려던 황서현은 갑작스럽게 느껴지는 기시감에 뒤를 돌아보았다.
그늘진 곳 근처에 아무 말 없이 서 있는 누군가. 그걸 알아챈 그 순간.
“지옥에서, 나 강림.”
“어머. 깜짝이야. 누구세요?”
놀라 묻는 말에 천천히 바깥으로 나오는 그 사람의 모습은… 다크 카이저…?
“다크 카이저? 요즘 갑자기 사라져서 걱정했잖아요.”
“놀라게 해서 미안하군. 나는 다크 카이저가 아니라 지옥의 황제, 더 헬카이저다.”
이 엉뚱한 히어로가 또 무슨 소리를? 하며 자세히 살펴본 황서현은 확실히 헬 카이저는 다크 카이저와는 조금 다르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슈트의 모양도, 목소리도, 말투와 행동거지도. 전부 조금 달랐다.
사실, 여러모로 발전하고 있던 다크 카이저보다 훨씬 유치한 설정들이었다.
‘지금의 다크 카이저라면, 거기서 더 유치한 설정의 규약이 생길 이유가 없겠지.’
그리고 결정적으로, 슈트에서 풍겨오던 마법적인 기운이 크게 달라졌다.
그럼에도 의문점은 아직 남았다.
“그럼… 다크 카이저랑은 무슨 사이신가요?”
실은 다크 카이저를 따라 한 거냐고 묻고 싶었지만, 그렇게 물어볼 순 없었다.
“…뿌리가 같다고 말해두지.”
설정답게 두루뭉술한 대답. 하지만 황서현은 금방 이해했다. 자신도 뿌리가 같은, 자매 같은 사람이 하나 있었으니까.
‘지금은 대립하고 있는 상태긴 하지만.’
그렇다면 저런 디자인의 슈트가 더 존재할 수도 있다는 것일까?
황서현은 비슷한 디자인의 슈트를 입은 사람들이 줄을 맞춰 ‘나 강림’을 외치는 장면을 떠올려보았다.
…끔찍하네. 괜히 상상했어.
“다크 카이저가 보냈나요? 다크 카이저는 지금 어디에 있는 거죠?”
“…아니. 난 다크 카이저와 함께 일하지 않아. 그가 어디로 갔는지는 나도 모른다.”
“그럼 저에겐 무슨 일로…?”
황서현에게 건네지는 몇 장의 서류.
슬쩍 살펴본 서류에는 사람 네 명의 인적 사항과, 그들의 변이 형태 등이 적혀있었다.
“어제오늘 일어난 사건들이다. 천산시에 온 지 얼마 안 돼서 그런지 조사가 힘에 부치더군. 도움이 필요하다.”
황서현은 이 부분에서 다크 카이저와 헬 카이저가 동일 인물이 아닐까 의심하던 생각은 완전히 접었다.
다크 카이저는 자신보다 훨씬 정보 수집력이 좋았으니까.
아마 이런 일이 일어나면 진작 해결 방법까지 찾아 들고 왔을 가능성이 높다.
황서현은 일단은 이번은 함께 일해보기로 마음먹었다.
일의 심각성도 꽤 높은 편이고, 당장 해결이 필요한 일이기도 하다.
“이런 일이라면, 당연히 해야지요. 연락은 어떻게 할 건가요?”
“내가 내일 이 시간에 찾아오도록 하지.”
“헬-호출기. 뭐 이런 거 없어요?”
“없다.”
다크 카이저랑 일할 땐 그쪽에서 알아서 해주는 일이 많았는데. 여긴 오히려 내가 챙겨줘야겠네.
황서현은 옆에 있던 서랍을 열어 호출기를 하나 꺼내 들어 건넸다.
마법적인 기술로 만들어진 호출기로, 보통은 퀘이사와 단둘이 사용하는 라인이었지만, 가끔 이런 일이 있을 땐 다른 히어로들과 공유하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잠깐 이거 빌려줄게요.”
* * *
“…그래서. 언론은 잘 틀어막았고?”
“네. 일단은 언론에 새어 나가지 않게 잘 처리하긴 했습니다.”
“잘했다.”
사대희가 별말 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보며, 정대수는 긴장했다.
사대희가 불같은 성미를 가지고 있긴 하지만, 그건 무언가를 잃었을 때의 경우.
극심한 손해에 이르기 전에 일을 마무리 할 수 있다면 오히려 관대하게 넘어가 주는 경우도 많았다.
하지만, 이 다음에 할 이야기는 조금 다를지도 모르기 때문에, 정대수는 계속 긴장한 채로 입을 열었다.
“프로젝트에 포함되었던 샘플들은 전부 재입원 시키긴 했습니다만… 샘플의 성향에 따라 부작용이 발현한 이후 자취를 감추는 경우가 몇 명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전 히어로였던….”
“대수야.”
“네. 회장님.”
사대희가 자신의 말을 끊는 경우는 거의 없었기 때문에, 정대수는 바짝 긴장했다.
보통 이런 경우엔 자신에게 물건이 날아드는 경우가 잦았으니까. 하지만 오늘은 그런 날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내가 이 도시에서 뒷골목의 쓰레기들과 광대들을 내버려 두는 이유를 아느냐?”
“…그런 하찮은 존재들한테까지 화장님이 신경 쓰실 필요는 없지 않겠습니까?”
“대수야. 그들은 하찮은 존재가 아니다. 오히려 이 도시에 필요한 존재들이지.”
필요한 존재들?
무슨 의도로 하는 말인지 머리를 굴려보았지만, 의도가 쉽게 잡히지 않았다.
다행스럽게도, 사대희의 말은 끝난 것이 아니었다. 손에 들고 있던 시가의 연기를 한입 베어 물은 사대희가 재차 입을 열었다.
“우리 그룹이 손쓰기엔 사소한 일들을 저들끼리 알아서 관리해주고 있지 않느냐?”
정대수는 그제서야 사대희의 말의 의도를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런 사소한 일은, 히어로와 빌런들이 알아서 처리하게 내버려 두라는 말이었다.
“네 회장님. 가르침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정대수는 사대희를 향해 고개 숙였다.
* * *
【“하하하! 어제는 정말 잘해주었다. 지옥의 황제! 헬 카이저! 내가 만든 고급스러운 설정을 아주 완벽하게 연기해주었다. 아주 만족스러운 연기였어.”】
진짜 해주는 것도 없으면서 더럽게 까다롭네.
등장 장면을 다르게 설정하겠다는 소리를 괜히 하는 바람에 노력이 배로 더 들었다.
먼저 문을 두드리고, 몰래 창문을 열고 들어가 들키지 않게 벽 뒤에 숨어야만 했다.
이번에는 이런 식으로 등장했지만, 다음번엔 그냥 다크 카이저처럼 창문을 통해 들어가는 편이 낫겠다.
【“안 돼! 슈트의 관리자인 내 말을 듣지 않으면 동화율을 깎아버리겠다!”】
아 몰라. 깎아, 깎아. 아 거참 더럽게 구네. 내가 중학생 때 만들었던 다크 카이저보다 유치한 설정 연기하느라 안 그래도 힘들어 죽겠단 말이야. 얼마나 더 받아줘야 되냐? 어?
너 신나있는 건 알겠지만, 좀 적당히 하란 말이야.
【“…알겠다. 그럼 딱 한 번만 더 하는 걸로 하지. 다음부턴 창문을 통해 드나들어도 좋다.”】
그래. 한 번으로 합의 보자.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교실 문을 열었다.
“좋은 아침 얘들아.”
“어 강림이 안녕.”
나를 향해 쾌활하게 인사해주는 반장 다혜. 본격적으로 미대 입시를 준비한 이후로는 많이 발랄해졌다.
다크 스코프 아저씨가 이 사실을 알게 되면 기분 좋아하실 텐데. 나중에 다크 카이저로 돌아가게 되면 꼭 알려줘야겠다.
“야 나강림 너 어제 롤드컵 봤냐?”
“어 안 봤어~”
또 게임 토크를 시도하는 준석이를 미리 잘라내며 나는 자리에 앉았다.
슬쩍 지나가며 본 준석이의 공책에는 슈트의 디자인이 잔뜩 그려져 있었다.
신났네. 신났어.
슬쩍 지나가면서 본 슈트의 디자인은 꽤 괜찮았다.
본래도 슈트 디자인 자주 하던데, 능력 발휘가 꽤 되는 모양.
오늘 저녁에 만나기로 했었는데, 그 전에 완성 할 수 있을 진 모르겠네.
“야 나강림. 따라와 봐.”
내가 자리에 앉기 무섭게 내 손을 잡고 나를 데리고 나가는 도유진.
【“뭐지? 이 박력은? 오늘로 나강림의 오랜 소원이 성취되는 것인가?”】
시끄러워 벨제뷔트! 제인이 없다고 제인 대신 호들갑 떨 생각하지 말고 제인처럼 서포트를 하라고! 서포트!
“뭔데 또? 무슨 일인데?”
나는 이때까진 또다시 방심하고 있었다.
내가 직접 도지훈의 모습을 보았을 때, 분명 꽤 멀쩡한 상태였으니까.
동화율도 차곡차곡 쌓이고 있고, 최근 내 주변은 꽤 평화로워졌다고 또 자만했을지도 모르겠다.
“우리 오빠. 며칠 전에 나간 이후로 집에 안 들어오기 시작했어.”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 이 세계는 내가 평화롭게 놔두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