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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어로 만화 속으로 나 강림-102화 (102/236)
  • 제102화

    데빌-보이(4)

    히어로란 무엇인가?

    솔직히 나는 아직 그 답을 모른다. 하지만, 강요로 인해 히어로 활동을 시작했던 나보다, 스스로 생각해서 히어로 활동을 시작한 준석이가 더 히어로답지 않을까?

    하지만 마음가짐이 히어로에 가깝다고 해서, 모든 사람이 히어로를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특히 지금 준석이 같은 경우야말로 더 그렇다.

    능력은 각성한 지 얼마 되지 않았고, 컨셉과 맞는 슈트도 제대로 정립되어 있지 않다.

    신체 능력과 회복 능력에 집중되어있는 능력이라곤 해도, 위험성은 달라지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최소한 위험하지 않을 정도로만 준석이에게 여러 가지를 가르쳐 보기로 마음먹었다.

    “아까는 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사건이 끝나자마자 예전처럼 자신감이 없는 모습으로 돌아오는 박준석.

    아직 슈트와 컨셉이 동기화되지 않아서 그런가?

    “이제 정신이 좀 돌아온 모양이군.”

    “아 네… 아까까진 입이고 몸이고 좀 마음대로 움직이는 듯한 느낌이 좀 있었는데….”

    “위험에 처하는 사람을 보자, 몸이 마음대로 움직였다. 그 말이지?”

    “아… 네.”

    능력 발현의 방향성이 히어로 쪽인 건 다행이지만, 이대로 갔다간 그저 그런 자경단 중 하나가 될 뿐이다.

    어느 날 갑자기 빌런들에게 습격당해 죽고, 뉴스에 이름 한 줄 나온 뒤 끝나는 삶.

    나는, 내가 아는 한 누구에게도 그런 삶을 주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어쩔 수 없군. 따라와라.”

    어쩌겠어. 히어로 하나 만든다고 생각하고 가이드해줘야지.

    이젠 아무도 찾지 않는, 공사가 중단된 오래된 건물 하나. 박준석을 그 안으로 데려온 나는, 일단 준석이의 히어로 컨셉부터 만져주기로 마음먹었다.

    “일단 가장 먼저 히어로 네임은 어떻게 지었지?”

    “네? 저 이제 와서 말씀드리긴 죄송한데… 사실 히어로 활동하면 안 되거든요?”

    “왜?”

    “저… 사실 다크 카이저님이랑 히어로 활동 다시는 하지 않기로 약속했거든요.”

    그거 난데.

    내가 그런 말을 했던 건 사실이고, 헬 카이저인 상태로 그런 건 이제 신경 꺼도 된다고 말하기도 애매하고. 어떻게 하지?

    【“어차피 다크 카이저와 헬 카이저를 다른 사람으로 만들 생각인 거 아니었나? 좀 더 세게 나가자.”】

    세게?

    【“그래. 네가 어릴 때 잘하던 거. 좀 더 설정을 넣어보자는 거지. 다크 카이저랑 헬 카이저는 사실 대립하는 상태인 걸로. 그쪽이 오히려 사람들을 속이기 편할 거다.”】

    일리는 있네. 조금… 어색하지만 그럼 한번 해볼까?

    “다크 카이저의 말을 다 들을 필요는 없다. 다크 카이저라는 히어로가 항상 절대적으로 맞는 말만 하는, 완벽한 히어로가 아니니까. 요는 너의 의지지. 너는 어떤가? 히어로를 아직 하고 싶나?”

    “네?”

    잠시, 생각에 빠진 듯 입을 다물었던 박준석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런 것 같아요.”

    “그럼 됐다.”

    【“잠깐! 거기서 끝내면 안 되지. 설정을 생각해라. 다크 카이저와 헬 카이저는 지금 대립하는 상태야.”】

    아이고 거참 빡빡하게 구시네. 알겠습니다. 네네.

    “누군가의 말은 의미가 없다. 네 마음속의 말이 중요하지. 그리고 난, 다크 카이저를 그렇게 좋아하진 않거든.”

    “아….”

    내 얼굴을 보며 복잡한 표정을 짓는 박준석. 그야 내가 다크 카이저의 짝퉁이라는 소리가 훨씬 많이 퍼져있으니까 이게 무슨 소린가 싶겠지.

    “네. 알겠습니다.”

    “좋아.”

    박준석의 대답을 들은 나는 팔짱을 끼고 고개를 끄덕였다.

    “다시 원래 하던 대화로 돌아가서, 히어로 네임은 어떻게 지었지?”

    “저 사실은 히어로 네임이 없는데요.”

    뭐야? 히어로 네임을 아직 안 지었다고?

    “그럼 히어로 네임부터 짓는 게 좋겠군.”

    “사이드킥 네임. 사이드킥 네임으로 짓는 게 좋겠어요.”

    뭐?

    “보통 사이드 킥과 함께 하는 히어로는, 사이드 킥의 이름도 히어로 네임과 연관되게 짓는 편이거든요. 솔라 버드와 문 캣. 캡틴 클라우드와 레인 걸처럼요.”

    아는 분야가 나와서 신이 난 오타쿠로군.

    “그럼… 헬 카이저의 사이드 킥인 저의 사이드 킥 네임은, 데빌 보이. 데빌 보이가 좋겠네요.”

    뭐야 그거 X나 구린데? 다크 카이저만큼 구린데? 진짜 그게 좋아?

    【“딱 좋군! 정말 좋은 이름이야! 저 녀석 뭔가 좀 아는구만!”】

    “어… 아니 좀 더… 고민해 보는 게 낫지 않겠나?”

    “아니요. 전 지금 이 이름이 마음에 들어요. 이대로 갈게요.”

    아이고 머리야.

    *    *    *

    “자. 오늘 너에게 해주고 싶은 말은 총 세 개다. 먼저, 히어로 네임인 데빌 보이에 걸맞은 슈트를 구상해 올 것. 다른 히어로들과 겹치지 않게 자신만의 디자인을 구축해와야만 한다. 거기에 실용성까지 있으면 좋지. 이게 왜 중요한지는, 아까 규약을 설명하면서 했지?”

    “네. 알겠습니다.”

    좋아. 대답하는 목소리가 마음에 드는군.

    “둘째, 사용할 무기와 도구의 소재와 특성에 대해서 생각해볼 것. 네가 오늘 들고 온 야구 배트는 알루미늄으로 만들어진 거라 히어로 활동에는 적합하지 않다. 좀 더 튼튼한 소재로 되어있는 장비를 찾아오는 게 좋을 거다. 그 외에도 필요한 장비가 있으면 상황상 더 좋은 장비가 무엇일지 생각해보는 것도 좋고.”

    “네. 알겠습니다.”

    “마지막으로, 다시는 오늘처럼 네 모든 것에 대해서 다른 사람에게 맡기지 않도록 해라. 너의 능력, 너의 모든 것을 아는 사람이 많을수록, 네 약점이 드러나는 셈이니까.”

    내 마지막 말에, 힘껏 고개를 끄덕이는 박준석, 아니 데빌 보이.

    “네! 알겠습니다!”

    “좋아. 그럼 나는 가볼 데가 있어서, 먼저 가보겠다.”

    아까부터 도유진이랑 지훈이 형이 너무 신경 쓰이거든.

    *    *    *

    똑 딱 똑 딱

    도지훈은 또다시 알 수 없는 꿈에 시달리다 시계 소리에 눈을 떴다. 눈앞에 보이는 것은 병원의 하얀 천장.

    또다시 딱딱해진 피부를 쓸어내리며, 도지훈은 자신의 스마트폰을 찾았다.

    스마트폰엔 도지훈에게 남겨져 있는 메시지도, 통화목록도 없었다. 도지훈은 알 수 없는 허전함을 느끼며 손을 내렸다.

    “뭐야? 연락 올 곳이라도 있었어? 일어나자마자 폰부터 확인하네.”

    도지훈은 자신의 옆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언제부터 있었는지 자신의 옆에 나강림이 앉아있는 것이 보였다.

    그리고 그제서야 도지훈은 자신이 어떤 상황에 처해있었는지를 깨달았다.

    똑 딱 똑 딱

    시계 초침이 움직이는 소리와 함께 점점 기억이 살아나기 시작했다. 피시방에서 일어났던 난동, 거기에 휘말려 쓰러졌었지.

    피시방에서 난동을 부리던 남자의 주변에 널려있던 약 봉투, 그리고 느꼈던, 동질감.

    뭔가 잊은 게 있는 것 같은데.

    “뭐가 어떻게 된 거냐? 기억이 잘 안 나네.”

    “어… 그게 마침 그 주변에 히어로가 있었다나 봐. 다행히 금방 알고 온 히어로 때문에 크게 다친 사람은 없는 모양이야.”

    히어로?

    그제서야 머릿속에 떠오르는, 자신의 앞에서 싸우던 히어로의 모습.

    피시방에서 흑염을 뿌려대며, 괴물과 싸우던 히어로가 있었다.

    짤그락.

    귓가에서 쇠사슬 소리가 들려오는 기분이 들었다.

    피시방에서 자신을 구출했던 히어로가 팔에 쇠사슬을 칭칭 감고 있었다.

    뭔가 기억이 날 듯 말 듯, 머리가 아파오는 것을 느끼며 도지훈은 입을 열었다.

    “아. 그거 참. 내가 미안하게 됐네. 넌 피시방 갈 생각도 없었는데, 내가 가자고 해서 괜한 일이 생긴 거잖아.”

    “아니야. 뭐 그런 일이 생길 줄 아는 사람이 어디 있었겠어? 괜찮아. 나는 다친 곳 하나 없이 멀쩡한걸. 의사 선생님 불러올 테니까, 혹시 아픈 곳이 있는지 확인해봐.”

    의사를 불러오겠다며 몸을 일으키는 나강림의 뒷모습을 보고 있던 바로 그때,

    똑… 딱… 똑… 딱….

    선명하게 느껴지는 묘한 기시감.

    짤그락, 짤그락. 쇠사슬끼리 부딪치는 소리.

    그리고 그와 동시에 떠오르는, 잊고 있었던 옛 기억들.

    “아무래도 너랑 나랑은 같이 갈 수 없을 거 같다. 성향 차이도 그렇고. 원하는, 최종 목표도 그렇고.”

    “미안하다. 최소한 너는 네가 원하던 대로, 진짜 히어로로서 죽게 해줄게.”

    “그래요? 몸 상태가 멀쩡하시면 이제 그만 퇴원하셔도 되겠네요. …환자분? 괜찮으신가요?”

    멍하니,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들을 훑어 내리고 있던 도지훈의 귓가로 들려오는, 의사의 목소리.

    “저기요? 괜찮으신가요? 혹시 기억이 나지 않는다거나, 머리가 아프다거나 하는 증상이 있으신가요?”

    “아니요. 괜찮습니다. 이제 기억이 나요.”

    네. 이제 조금 기억이 납니다.

    *    *    *

    나는 도유진과 도지훈을, 기어이 집에다 데려다준 뒤 길을 나섰다.

    지훈이 형 상태가 괜히 걱정되는 것도 있었고, 함께 있던 도중 사라진 내 정체를 의심할까 싶어 확인차 함께 움직인 것도 있었다.

    다행스럽게도, 돌려 찔러본 내 대화에도 도유진과 도지훈은 내 정체에 대한 의심을 하지 않았다.

    【“당연하다. 대외적으로 너와 헬 카이저는 이미지 차이가 심하게 크니까.”】

    그렇습니까? 감사합니다. 이미지 차이가 커서 다행이네요. 저를 두고 헬 카이저라는 이미지를 떠올리면 그게 더 두려울 것 같아요.

    우르르 쾅!

    갑자기 왜 마른하늘에 날벼락이 친대?

    쏴아아-

    내가 그렇게 생각하는 것을 기다리고 있었던 건지, 갑자기 쏟아지기 시작하는 소나기.

    이거 어쩔 수 없나? 그냥 빨리 근처에 숨어서 슈트나 갈아입고 움직이던가 해야….

    “야 나강림! 나강림! 기다려!”

    토도도도!

    내 뒤 저 멀리서부터 들려오는, 다급한 발소리.

    “나강림! 너 뭔 발이 그렇게 빨라?”

    도유진이었다.

    한 손에는 자기 머리 위에 우산을 들고, 또 한 손에는 내게 건네주려 했던지 또 다른 우산을 하나 들고 있었다.

    “이 새끼… 꼴에 남자라고 발걸음은 더럽게 빠르네.”

    “내가 발걸음이 빠른 게 아니라 네 보폭이 좁은 거 아닐까?”

    “뭐? 뒤지고 싶냐? 나강림 많이 컸다?”

    그렇게 말하면서도, 내게 건네는 남색 우산. 나는 피식 웃으며 우산을 펼쳤다.

    펑-

    펼쳐진 우산엔, 커다랗게 구멍이 뚫려있다.

    이 새끼 이거… 또 나 놀려먹으려고….

    “어? 이거 뭐야?”

    …반응을 보니 그러려고 했던 건 아닌 모양이다. 구멍 난 우산을 보고 눈에 띄게 당황하는 도유진.

    에휴. 내가 너한테 무슨 도움을 받을 일이 있겠냐?

    “야 됐다. 이거 가지고 다시 돌아가라. 바람 불면 너도 비 맞아. 나 뛰어가면 금방이야.”

    “야 됐다. 이제 그거 가지고 돌아가 봐야 쓰레기밖에 더 되냐?”

    내가 건넨 우산을 받아드는 대신, 자신의 우산을 내 머리 위로 씌워주는 도유진.

    “뭔데? 도유진.”

    “가자. 너네 집까지 데려다줄게.”

    토독 토도독 톡.

    우산 위를, 가볍게 두드리는 빗소리를 들으며, 나는 도유진과 함께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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