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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어로 만화 속으로 나 강림-99화 (99/236)
  • 제99화

    데빌-보이(1)

    “야. 나강림. 너 오늘 저녁에 뭐 하냐?”

    갑자기 내 앞자리에 앉아 나를 진지하게 쳐다보고 있는 도유진을 보며, 나는 살짝 긴장했다.

    【“그냥 친구인데 왜 긴장을 하고 그러나? 혹시 설레는 건가?”】

    아니. 얘 기본적으로 일진이었던 애라고. 눈에 살기가 있어, 살기.

    “어… 거기 내 자린데….”

    “어. 잠깐만 빌릴게.”

    “응. 알겠어. 화장실 다녀올게.”

    저거 봐. 내 앞자리에 앉아야 하는 친구가 저 표정 보고 놀라서 도망가는 거. 내가 괜히 긴장한 게 아니라니까?

    “아니. 나강림. 너 오늘 저녁에 뭐 하냐고.”

    내가 대답을 안 하니까 또 나를 보채기 시작하는 도유진.

    이대로 내버려 뒀다간 또 끝없이 나를 힘들게 하기 때문에, 나는 도유진의 말에 대충 대답했다.

    “어. 학원.”

    “그 학원. 꼭 매일같이 가야 하냐?”

    “돈 냈으니까 가야지. 그럼 안 가냐?”

    “어. 알았다.”

    도유진은 용건은 말하지 않고 그냥 자리에서 일어났지만, 나는 그 사이에서 조금의 망설임을 느끼고야 말았다.

    못 느꼈으면 안 물었겠지만, 느꼈으면 무슨 일인지 물을 수밖에.

    나는 내 옆을 지나가려는 도유진의 팔목을 턱 잡았다.

    “야. 왜 말을 하다 말아? 무슨 일인데?”

    “어쭈. 나강림 많이 컸다? 누나 손목도 잡고?”

    “말 돌리지 말고.”

    내 말에 내 얼굴을 뻔히 바라보고 있던 도유진이 입을 열었다.

    “오늘 학교 끝나고 우리 집에 좀 같이 가자.”

    뭐? 이렇게 갑자기?

    *    *    *

    “그래서 내가 어제 한소연한테 가르침을 좀 내려줬지 뭐냐? 봤지? 기본적으로 되게 이쁘게 생긴 앤데 꾸미는 법을 잘 몰라서….”

    그거 교문 출발할 때부터 했던 이야긴데, 또 하네.

    “대체 무슨 일인데 그러냐?”

    나는 도유진의 말을 뚝 끊었다.

    일단은 같이 좀 집에 가달라길래 함께 길을 걷고 있긴 한데. 길을 걷는 동안 계속해서 말을 할지 말지 망설이며 이야기를 돌리는 것이 느껴진다.

    “어차피 너네 집에 가면 무슨 일인지 알 수 있을 텐데, 이렇게 빙빙 돌려봐야 나 불안하게 만들기밖에 더 하겠냐?”

    내 말에 도유진이 한숨을 푹 내쉬며 말한다.

    “후… 우리 오빠 때문이지 뭐.”

    그래. 내 그럴 줄 알았다.

    “지훈이 형한테 대체 무슨 일이 생긴 건데? 뭔가 힘든 일이 생긴 거야? 또 아파? 다시 입원해야 한대?”

    “아니. 잠깐만. 가만히 있어 봐. 내가 지금 이야기할 테니까. 말할 틈을 줘야 말할 거 아냐.”

    나는 도유진의 말에 입을 딱 다물었다.

    나도 모르게 힘들었던 과거가 떠올랐던 모양인지 채근하는 모양새가 되고 말았다.

    “우리 오빠, 얼마 전에 몸 상태가 완전히 호전돼서 퇴원했다.”

    “그건 잘됐네.”

    잘되기만 했으면 이렇게 불안하게 말하진 않았겠지만.

    나는 조금 더 빠르게 말하길 보채고 싶은 마음을 꾹 누르고 도유진의 말을 기다렸다.

    “분명 몸은 다 나았다고 했는데… 문제는 여기.”

    자신의 머리를 톡톡 두드리는 도유진.

    “기억을 잃은 게 힘든 모양이야. 하루하루 너무 괴로워한다. 무언가를 떠올리고 싶어 하기도 하고.”

    그렇게 오랜 시간 동안 병원에 누워 자신을 괴롭혀 왔으니 당연하겠지.

    “특히 히어로 일을 할 때 사용하던 능력이 제대로 조절이 안 된다. 자는 동안에는 사실상 계속해서 사용되고 있는 모양이고, 갑자기 식탁에서 능력이 발동돼서 수저가 구부러지기도 하고… 사실상 원하는 때에는 쓰지 못하는 모양이야.”

    능력의 조절이 제대로 안 된다고? 잠깐 기억 속을 뒤져봤지만, 빠르게 떠오르는 해결 방법은 없었다.

    “병원에서는 몸에는 이상이 없으니 심리적인 문제일 거라곤 하는데….”

    심리적인 문제라… 그럴 수 있다. 큰 사고를 당하기도 했고, 오랫동안 식물인간 상태이기도 했으니….

    나라고 이 세상의 모든 일을 다 아는 것은 아니고, 이런 부분에선 당연히 의료진의 말이 더 맞을 가능성이 높다.

    “네가 우리 오빠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는 건 알지. 근데… 지난번에 네가 와서 오빠가 나아졌었으니까… 혹시 이번에도 네가 와서 좀 달라질까 싶어서 부탁하려고 했다. 말 못 하고 망설인 건 미안하게 생각한다. 너도 알잖아. 내가 그런 말 못 하는 거.”

    내가 계속해서 심각한 표정으로 이야기를 듣고 있자 조금 오해했는지, 내게 해결을 바라진 않는다고 말하는 도유진.

    그래. 그래서 지훈이 형이 아픈 것도 얼마 전에야 제대로 알았지.

    지금은, 그래도 나한테 숨기지 않고 말해줬으니까. 조금은 더 나아졌네.

    “그런 일이면 왜 숨기고 왜 망설여? 당연히 내가 가서 도와드릴 수 있는 일이 있는지 확인해야지. 너랑 나는, 가족 같은 사이잖아.”

    나는 도유진의 말을 듣고 앞장서서 빠르게 걸으며 재차 입을 열었다.

    “근데 하나만 약속해라.”

    “뭐? 무슨 약속?”

    “앞으로는 망설이지도 말고 재깍재깍 나한테 보고하는 걸로. 알았냐?”

    “…….”

    내 말에 대답하지 않는 도유진.

    “알았냐고.”

    “…….”

    “알았지?”

    “…….”

    “알았냐고, 도유진! 자꾸 대답 안 하면 대답할 때까지 물어본다?”

    “…알았다.”

    “뭐라고? 안 들리는데?”

    “알았다고!”

    “그래. 약속한 거다.”

    “그래. 약속할게.”

    *    *    *

    “허억. 허억.”

    도지훈은 오늘도 알 수 없는 누군가의 꿈을 꾸다 잠에서 깼다.

    잠에서 깨어나자마자 팔을 들어 올려 자신의 피부를 확인한다. 확인한 피부는 쇠처럼 은빛으로 반짝반짝 빛나고 있다. 잠결에 또다시 능력을 사용해 버린 모양이다.

    잠시 정신을 집중하자 피부가 다시 원래의 색깔로 돌아온다. 원래대로 돌아온 팔로 얼굴을 쓸어내리며, 도지훈은 몸을 일으켰다.

    병원에 입원해 있는 동안은 안 그랬다. 하지만 본격적으로 이런 일을 겪기 시작한 것은 퇴원하기 거의 직전, 해고 통지서를 받은 이후부터였다.

    원래부터 하던 일인데다 자신을 기다려주는 팬들의 편지도 많이 받았기에 복귀할 생각도 가지고 있었지만, 막상 해고 통지서를 받았을 때 도지훈은 아무런 감정도 느끼지 않았다.

    납득했으니까.

    해고 통지서에는 회사의 입장이 납득이 갈 만큼 자세히 쓰여 있었다.

    보통 이 업계에서 한번 크게 사고를 당한 사람은 다시 능력을 사용하는 히어로 활동으로 복귀하기가 힘들다고 한다.

    슈페리어의 능력 발현은 정신적인 부분과 관계가 깊기 때문에, 완전히 이겨내지 못한 채 복귀하면 함께 일하는 동료들도 위험에 처할 수 있다는 게 그 요지였다.

    거기에 도지훈은 심지어 사고 당시 일을 기억하지 못하는 상황. 혹시라도 활동 도중 PTSD가 온다면 더 큰 사고를 야기할 수 있었다.

    틀린 말이 아니다. 모두 맞는 말뿐이었다.

    하지만 그 통지서를 받은 다음 날부터 도지훈은 끔찍한 악몽에 시달리곤 했다.

    하지만 막상 깨어나고 나선 어떤 꿈을 꿨는지는 기억하지 못하는 것이다.

    겪은 기억 속에서, 무언가 아련하게 아픈, 알 수 없는 배신감만이 도지훈의 마음속을 맴돌 뿐이었다.

    도지훈은 침대 옆에 놓아둔 스마트폰을 들어 올렸다. 원래 쓰던 건 사고 현장에서 잃어버렸다며 여동생이 새로 만들어줬던 스마트폰.

    깨어난 이후로 쭉 사용하고 있는 스마트폰이지만, 도지훈은 스마트폰을 사용할 때마다 어쩐지 어색한 기분을 느끼곤 했다.

    <010xx12xx41

    오빠 나 지금 강림이 데리고 집에 간다? 일어났지?>

    <010xx12xx41

    야 도지훈 아직 자냐?>

    <010xx12xx41

    일어나면 말해라>

    동생임이 분명한 메시지가 몇 개 도착해 있는 것을 확인하고 도지훈은 시간을 확인했다.

    요 며칠 집에 있는 동안의 경험을 보자면, 슬슬 동생이 집에 올 시간이 다 되었긴 했다.

    도지훈은 방의 커튼을 열어젖혔다. 저 멀리 동생과 나강림이 집을 향해 걸어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

    도지훈은 창문을 열어젖히고 외쳤다.

    “어~~ 야 강림아~ 진짜 오랜만이다~.”

    *    *    *

    “어~~ 야 강림아~ 진짜 오랜만이다~.”

    지훈이 형이 나를 보며 손을 흔드는 것을 보며, 나도 똑같이 손을 들어 인사했다.

    “아, X발. 또 쪽팔리게 창문 열고 소리 지르네. 쟨 왜 너만 온다고 하면 저러냐?”

    “넌 오빠한테 말하는 꼬라지가 그게 뭐냐?”

    “니가 뭔 상관? 니네 오빠냐? 우리 오빠지?”

    도유진은 입으로는 조금 투덜대고 있었지만, 활기차게 나를 부르는 도지훈을 보고 안심한 표정을 지었다.

    매일 개와 고양이처럼 싸워도 핏줄은 핏줄인 모양이다. 저렇게 걱정하는 걸 보니.

    여기까지 걸어오면서 느꼈지만, 도유진의 집이 있는 곳은 내가 예전에 살던 동네와 거의 비슷하게 생겼다.

    하나하나 세세하게 살펴보면 내 기억 속 동네랑은 다르긴 한데, 얼핏 봤을 땐 마치 내가 원래 살던 세계의 향수를 느낄 수 있는, 참 이상한 공간이었다.

    마찬가지로 도유진의 집도 내가 살던 세계의 모습, 그대로였다.

    약간 언덕진 경사 위에 올려져 있는, 녹색 대문의 작은 주택.

    도유진의 집까지 향하는 언덕을 오르며 나는 짙은 향수를 느꼈다.

    우습네.

    어렸을 땐 이 언덕이 참 그렇게 높았는데.

    내가 자란 건지, 이곳이 다른 세상이라 그런 건지. 내가 알던 그때보다 훨씬 덜 힘들어서 올라왔다.

    덜컹-

    대문을 열고 들어서서, 현관문의 비밀번호를 누르고 들어간다.

    보지 않는 척 슬쩍 본 비밀번호는, 내가 어렸을 때 알고 있던 비밀번호 그대로였다.

    덜컥.

    문을 열자 나타나는 도지훈의 무표정한 얼굴.

    “꺄악!”

    아이, 깜짝이야.

    “야! 도지훈! 너 내가 그런 장난 좀 치지 말랬지?”

    “난 너 때문에 더 놀랐다, 도유진. 깜짝 놀랐네, 진짜.”

    “야. 그래 도유진. 니가 문제지. 내 문제는 아니야.”

    낄낄대던 도지훈이 나를 보곤 씩 웃는다.

    “야. 나강림 진짜 엄청 많이 컸네. 그 쪼끄맣고 비리비리하던 놈이… 이야~ 이거 이 새끼 몸 단단한 거 봐라.”

    “아니, 뭐… 얼마 전에 병원에서도 봤잖아.”

    “그땐 내가 누워 있어서 니가 이렇게 컸는지도 몰랐다. 야, 잘됐다. 안 그래도 심심했는데. 나랑 PC방이나 가자.”

    “강림이 방금 왔는데 무슨 오자마자 PC방이야?”

    “야. 다들 바빠서 나랑 놀아줄 놈들이 없더라. 쉬는 동안 나도 좀 놀아보자.”

    PC방? 아, 안 돼! PC방 이야기 나오면 내 안의 악마가 깨어나 버려….

    【“마침 잘됐군. 우리에게 패배를 안겨준 그 소년이 아까 전에도 PC방에 갈 사람들을 찾고 있더군. 지금 가면 치욕을 갚아줄 수 있을 거다.”】

    어휴… 내가 못 살아.

    “그래… 가자, PC방.”

    *    *    *

    “야, 이 새끼들아! 니네가 PC방 전세 냈어? 조용히 좀 안 해?”

    “아, 네.”

    “죄송함다~.”

    레온 PC방 단골손님, 박용옥은 시끄럽게 떠드는 학생들에게 소리를 질러대고 다시 자리에 앉았다.

    안 그래도 머리가 왱왱 울려 죽겠는데 이것들이 자꾸 시끄럽게 하고 있어.

    얼마 전, 몸이 좋지 않아 경한 병원에 가 주사를 맞고 온 이후부터 몸 상태가 영 좋지 않았다.

    속이 더부룩한 것 같기도 하고… 사소한 것에도 기분이 확 나빠지는 경우가 생겨 도저히 화를 참을 수가 없게 돼버리는 것이다.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원래 같았으면 참고 버텼을 김 과장의 잔소리가 오늘따라 도저히 견딜 수 없어 얼굴에 서류를 던지고 도망치듯 회사를 나오게 된 것이다.

    그리고 나서 도망치듯 들어온 PC방 또한, 자신의 신경을 거슬리게 하는 것들뿐이었다.

    부글부글 끓는 속을 달래기 위해, 박용옥은 병원에서 준 약을 물과 함께 넘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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