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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어로 만화 속으로 나 강림-97화 (97/236)
  • 제97화

    지옥에서, 나 강림

    이거 꼭 해야 돼?

    나는 은행의 천장에서 떨떠름한 표정으로 밑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거, 내가 히어로 일 익숙해지고 나서부턴 제인도 강제로 시키진 않았단 말이야.

    【“말하지 않았나. 제인이 예전에 그런 방식으로 일을 시켰던 건, 슈트의 기능을 깨어나게 하기 위한 시험 운행이었다고. 과부하로 인해 잠겨 버린 슈트의 기능들을 깨우기 위해선 필요한 일이다.”】

    정말이야? 진짜 못 믿겠어서 그래.

    【“제인이 남긴 메시지, 기억 안 나나? 제인이 없는 동안엔 나 벨제뷔트가 제인의 대리자다. 내 말을 들어야지.”】

    에휴. 알겠습니다. 지옥의 군주시여. 당신의 뜻대로 하겠나이다.

    나는 내심 한숨을 내쉬며 자리를 잡았다.

    이것도 정말 간만에 하는 말이네. 진심으로… 하기 싫다….

    【“빨리! 더 큰 피해가 일어나기 전에 어서 해치우도록!”】

    나는 건물의 옥상에서 뛰어내렸다.

    S 내 이름은 나강림.

    H 예전 나이는 스물셋,

    H 현재 나이는 열일곱.

    H 만화 「Heroicest」에

    H 들어온 지는 약 반년 정도,

    H 제인이 과부하로 사라지며

    H 벨제뷔트가 제인의 자리를

    H 대신하게 돼버리는 바람에

    H 매일 밤,

    H 히어로【헬 카이저】로서

    H 활동을 강요받는 중이다.

    “지옥에서, 나 강림.”

    자세도 예전에 비하면 꽤 괜찮아졌고, 이젠 꽤 익숙해져서 예전처럼 아프지 않았다.

    하지만, 들불처럼 밀려오는 창피함은 오히려 예전에 비해 두 배는 되는 듯하다.

    졸지에 중2병 컨셉의 슈트만 두 벌을 가진 셈이 되어버렸으니까.

    나는 지금 다크 카이저가 아닌 【헬 카이저】로서 변형된 모양의 지옥 슈트를 입고 활동하고 있었다.

    솔직히 디자인 센스는 나쁘지 않다. 색감과 세세한 디테일만 조금 바뀌었을 뿐인데, 오히려 기존 다크 카이저보다 낫다고 생각이 들 정도.

    그럼 내가 왜 창피하다 생각하냐고?

    “앗! 다크 카이저가 나타났다! 이제 우린 살았어!”

    “아니야! 자세히 보니까 [다크 카이저]가 아니다! 저건 【헬 카이저】야!”

    “【헬 카이저】? 【헬 카이저】가 누군데?”

    “‘한밤의 수호자, 더 다크 카이저’에서 다크 카이저가 레드 래빗과의 전투로 큰 부상을 입었다고 하더라. 다크 카이저가 아픈 동안 나타난 다크 카이저의 짝퉁이래!”

    “이젠 히어로도 짝퉁이 다 나오네.”

    은행 강도들에게 인질로 잡혀 있던 시민들이 나를 보고 소곤소곤 대기 시작하는 것을 보며 나는 내심 한숨을 내쉬었다.

    졸지에 나를 따라 한 짝퉁으로 몰리기 시작했거든.

    나는 지금까지 만났던, 나를 좋아한다는 팬들을 떠올렸다.

    정학근 아저씨, 박준석… 정학근 아저씨가 만든 다크 카이저 팬클럽의 회원들….

    그들은 전부 심각한 중증 중2병을 앓고 있는 환자들이다.

    그런 중증 중2병 환자들처럼, 다크 카이저를 따라 하는, 중증 중2병 환자로 보이는 이 상황이 내겐 너무나도… 창피했다.

    “헬 카이저? 다크 카이저가 다시 돌아온 줄 알고 놀랐잖아! 짝퉁이면 잘 되었지.”

    “그래. 빠르게 해치우고 돈 가지고 돌아가자고.”

    나를 보며 자신들이 착용한 외골격 슈트의 기어를 올리기 시작하는 은행 강도들.

    플럭스 공학회 놈들이다. 최근 플럭스 공학회의 물건들이 다시 활개를 치기 시작했다.

    그 말인즉슨, 플럭스 공학회에서 무언가 돈이 필요한 상황이 생겼다는 뜻이겠지.

    지금 당장은 무슨 에피소드랑 연결되는지 감이 잡히지 않는다.

    【“이걸로 이번 주에만 3번째 은행 강도로군.”】

    그러게 말이다.

    요즘 다크 카이저가 없어졌다는 소문이 도는 바람에 강력 사건의 발생량이 증가하였다.

    내가 있을 때는 범죄를 일으킬 생각도 못 하던 놈들이 범죄를 일으키기 시작하는 모양이었다.

    다크 카이저라는 이름난 영웅이 있어도 그렇게 많은 사건들이 일어났는데, 다크 카이저가 없어지고 나면 당연히 그렇겠지.

    “간다! 짝퉁 카이저!”

    “으하하하! 신나는구만!”

    외골격 슈트를 착용한 채 양손으로 들고 있는 돌격 소총을 내게 난사하기 시작하는 은행 강도들.

    나는 몸을 기둥 뒤로 숨겼다.

    파파파팍!

    순식간에 파여 들어가는 기둥.

    다크 쉴드를 사용할 수 있었다면 막아냈겠지만, 지금은 다크 카이저 능력의 대부분이 사실상 봉인된 상태다.

    흑염으로 만들어진 쉴드로는 아무래도 방탄력이 조금 떨어진다.

    【“항상 말했지만 그건, 네가 흑염을 다루는 능력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네네. 알겠습니다. 내 머릿속인데 뭔 생각을 못 하겠네, 정말.

    “하하하! 짝퉁 카이저 녀석! 기둥 뒤로 숨는 꼴 보라지!”

    “너무 놀리지 마, 바보들아! 저런 짝퉁 히어로 따위 빨리 해치우고 돈 가지고 튀어야 돼. 퀘이사나 종이가방이 도우러 오면 귀찮아진다고.”

    【“아까부터 헬 카이저를 무시하는 게 너무 거슬리는군. 미션이다! 저놈들을 죽여 버려라, 헬 카이저.”】

    【MISSION!

    헬 카이저를 무시한 은행 강도들을 모두 죽여 버려라!】

    눈앞에 떠오르는 미션 창을 순식간에 치워 버린다.

    이게 재밌냐?

    【“긴장감을 풀기 위한 조크였다, 다크 카이저. 너무 진지해지지 말아.”】

    놈들이 사용하고 있는 물건들이 전부 기계인데다, 분명 사용자 편의를 위한 소프트웨어가 존재할 터.

    만약 제인이 함께했다면, 놈들의 장비를 쉽게 못 쓰게 만들었을 테지만, 지금은 그게 가능하지 않다.

    헬 카이저로서의 장점이라면….

    【“화력! 화력이지! 더 강한 흑염! 흑염을 사용해라, 헬 카이저!”】

    제인이 없어진 이후로 벨제뷔트의 텐션을 따라잡기가 힘들다.

    평소에는 이 정도 텐션을 어떻게 감추고 산 거야? 내 머릿속에서 하루 종일 재잘거리니까 살 수가 없네.

    내가 제인을 그리워하게 될 줄이야.

    SUIT MOD

    HELL Kiaser

    블래스터가 만들어지자마자 숨어 있던 기둥에서 튀어 나가 놈들을 향해 흑염을 발사한다.

    마치 슈팅 노바의 화염탄처럼 응축된 화염이 날아가 은행 강도가 입고 있던 외골격 슈트를 맞췄다.

    “크아아악! 앗, 뜨거! 뜨거!”

    외골격 슈트에 불이 붙어 타오르자 깜짝 놀라 슈트를 벗어던지는 은행 강도들.

    아무래도 금속으로 만들어진 슈트라 그런지 불이 붙을까 의문이었는데, 다행히도 잠시뿐이었지만 흑염은 금속에도 영향을 줄 수 있었다.

    【“예전의 너라면 못 했겠지. 지금은 내가 너의 컨트롤을 보조해 줄 수 있어서 그런 거다.”】

    네네. 어련하시겠어요, 지옥의 황제님.

    【“군주다.”】

    네, 군주님. 아니, 근데 이거나 그거나 대체 뭐가 다른 거야?

    아무튼 금속에도 효과가 들어간다는 사실을 알았으니, 더 지체할 필요가 없다.

    나는 양손에 만들어진 블래스터를 은행 강도들에게 난사하며 몸을 굴렸다.

    “으악 뜨거, 뜨거!”

    “물! 물! 물 가져와!”

    미안하지만, 지옥의 흑염은 물을 들이붓는다고 쉽게 꺼지지 않는답니다.

    흑염이 사용자의 정신에 영향을 미치는 것처럼, 흑염에 피해를 입은 사람도 흑염을 이겨낼 정신력만 있다면 몸에 붙은 흑염도 쉽게 꺼트릴 수 있다.

    흑염을 버틸 만한 정신력을 가질 정도로 강력한 빌런은 없는 모양이다.

    【“일반적으로 흑염을 버틸 만한 정신력은 정신계열 초능력자가 아닌 이상 아무리 초능력자라고 해도 가지기가 힘들지.”】

    네네. 알겠습니다. 흑염 만세!

    나는 대충 벨제뷔트에게 장단 맞춰준 뒤, 슈트의 모드를 변경시켰다.

    SUIT MOD

    HELL Kiaser

    가벼운 스피드 모드로 변형한 내 슈트에 순간적으로 화륵, 흑염이 흐른다.

    쭈욱-

    순식간에 놈들과 나의 거리가 좁혀진다.

    DUDADADADADADA!

    나를 향해 순식간에 발사되는 놈들의 총알.

    하지만, 이미 늦었다.

    나는 가장 앞에 있는 놈의 목젖부터 올려 쳤다.

    “커헉!”

    숨 막히는 소리를 내며 놈이 나가떨어지는 것을 보며,

    화륵.

    다시 한번 스피드 모드를 가속시킨다.

    “크헉!”

    바로 옆에서 권총을 꺼내 들며 어버버 대고 있는 은행 강도의 다리를 걷어차며, 그 옆에서 품 안의 다른 물건을 꺼내 들려고 하는 마지막 은행 강도에게 몸을 낮추며 파고들었다.

    놈이 꺼내든 물건은 주먹에 쥐고 사용하는 듯한 외골격의 일부.

    만약을 대비해서 준비해 둔 물건인 것 같지만, 지금은 조금 늦었다.

    화륵.

    한 번 더 가속시켜 몸을 튕기며 놈의 안면을 가격했다.

    “억!”

    잠시 정적.

    “오….”

    “우와!”

    “와. 진짜 멋있다!”

    짝짝짝짝짝!

    순식간에 은행을 메우는 박수 소리. 총알이 무서워 고개를 숙이고 있던 인질들이 나를 보며 박수를 치고 있었다.

    “와. 진짜 빠르다.”

    “다크 카이저보다 더 멋있는 거 같은데.”

    “오히려 더 강할지도 몰라.”

    “왜 짝퉁처럼 활동하는 거야?”

    웅성웅성 대는 소리를 들으며 나는 흑염을 뿌려 온몸을 감쌌다.

    “우와!”

    시민들이 흑염에 시선이 몰려 있는 틈을 타, 천장을 향해 뛰어올랐다.

    정말 오랜만에, 더 이상은 못 버티겠다는 생각이 들었거든.

    나는 혹시라도 누가 나를 발견하고 손짓할까 무서워 곧바로 은행 환풍구를 타고 밖으로 도망치듯 사라졌다.

    *    *    *

    [어… 이거 이렇게 하는 게 맞나? 자. 헬 카이저. 오늘 영웅적인 활동에 대한 보상이다.]

    [오늘 얻은 동화율 : +0.25%]

    [헬 엠페러 벨제뷔트 님에게 바칠 동화율 : -0.20%]

    [획득 총합 동화율 : 0.05%]

    나는 내 눈앞에 떠오르는 동화율 창을 보며 얼굴을 쓸어내렸다.

    이 꼴을 나 혼자 봐서 다행이지. 진짜 다른 사람이 볼 수 있었으면 창피해서 혀 깨물고 죽어버렸을 거다.

    【“네게 배당된 동화율이 적은 건 어쩔 수 없다. 사용되는 흑염의 양이 늘어나고, 내가 보조하며 사용하는 힘까지 치면 사실 이걸로도 부족할 정도야.”】

    그래그래. 알겠다.

    【“그래도 많이 나아졌다. 오늘 전투에 피드백할 부분은 없군. 블래스터 모드의 사격 실력도 꽤 늘었고, 마지막 제압 때도 낭비되는 동작 없이 깔끔했다.”】

    그건 제인이 없어서 편한 꼼수들을 사용할 수 없게 되어서 그렇다.

    며칠 전, 레드 래빗과의 전투에서 꽁꽁 얼어버린 내 몸을 녹이기 위해 제인은 슈트를 과부하 시켰다.

    과부하된 슈트 덕분에 죽기 전에 얼음 속에서 빠져나올 수 있는 건 좋았지만, 슈트를 과부하 시켜 버린 탓에 과부하로 입은 타격을 회복하기 위해 제인은 깊은 잠에 빠져 버렸다.

    언제쯤 일어나게 될지는 자신도 장담할 수 없다고 그랬단다. 하지만 늦어도 두 달 안에는 다시 깨어날 수 있게 노력해 보겠다는 약속은 남겨놓았다.

    그런 게 노력으로 되는 부분인지 모르겠지만.

    【“한 가지 지적하고 싶은 점은, 스피드 모드가 아니라 래피드 데빌 모드라는 점이다. 줄이려면 래피드 모드라고 줄여줬으면 좋겠군. 그리고 나머지….”】

    아… 그냥 제인이나 빨리 돌아왔으면 좋겠다….

    나는 내 머릿속에서 시끄럽게 재잘거리는 악마의 목소리를 들으며 제인을 그리워했다.

    *    *    *

    “오늘도… 어디에도 나타나지 않으셨군.”

    다크 스코프, 정학근은 키보드를 두드리다 말고 고개를 푹 숙였다.

    레드 래빗과의 전투 이후 다크 카이저 님은 순식간에 자취를 감추셨다.

    정학근은 그날, 묻지 못했던 질문을 떠올렸다.

    “다크 카이저 님! 레드 래빗 가족의 죽음에 관여하신 게 정말 맞습니까?”

    정학근이 히어로 활동을 하기로 마음먹었던 사건 중의 하나였기 때문에, 정학근은 꼭 이 대답을 다크 카이저에게 듣고 싶었다.

    하지만 슬프게도, 다크 카이저는 그날의 전투를 마지막으로 모습을 완전히 감춰 버렸다.

    그리고 다크 카이저가 없어진 이 도시는, 훨씬 더 많은 범죄자들이 활개치기 시작했다.

    이 도시를 지키던, 진짜 히어로가 사라졌기 때문에.

    삐빅- 삐빅-

    경찰 시스템을 해킹해서 만들어놓은 알람이 울리는 소리를 들으며 정학근은 몸을 일으켰다.

    이 도시엔 지금, 새로운 영웅이 필요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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