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4화
RedRabbit Returns(3)
토끼 가면을 쓴 남자. 피처럼 붉은 토끼 가면을 쓴 남자가 다크 스코프를 바라보고 있었다.
틀림없다. 수십 번을 돌려봤던 영상 속 그 남자가 맞다.
자신이 오래전에 했던 조사의 내용들이 스쳐 지나갔다. 무언가 석연찮은 구석이 있었던, 다크 카이저와 래빗즈의 관계.
끊겨 있던 흐름.
다크 스코프의 머릿속으로 다크 카이저와 함께 행동하던 지난 몇 개월간의 시간이 스쳐 지나갔다.
다크 카이저는 분명 히어로, 영웅이었다. 믿지 못하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알고 싶었다. 자신이 존경하는 우상에게 어떠한 흠도 없음을 증명받고 싶었다.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키도 크고… 덩치도 훨씬 크군.’
정학근이 수집했던 사진과 정보들은 모두 사건 이후의 것들. 그래서 정학근은 레드 래빗이 파란 가면을 썼던 시절의 덩치를 알지 못했다.
“…탈옥했나?”
“그래. 네가 구차하게 살려준 이 목숨. 너에게 돌려주지 못한 복수. 둘 다, 돌려주기 위해 왔다.”
맞은편에 있던 레드 래빗의 몸이 부들부들 떨리는 것이 다크 스코프에게도 느껴졌다.
복수. 정확하게 복수라는 말을 언급했다. 정학근은 그때부터 오랫동안 묻어두었던 기억을 꺼내 보았다.
자경단에 의해 형제를 잃었던 레드 래빗. 소리는 잘 들리지 않는 CCTV 속 영상이었음에도 느껴지던 다크 카이저에 대한 증오심. 그리고 오늘 들은 복수라는 말.
“네… 형제의 복수 말인가?”
“그래. 벌써 다 잊었나? 아직 몇 개월도 채 되지 않았는데. 나는 한시도 잊은 적이 없었는데. 넌 몇 개월 만에 모두 잊은 모양이군.”
모든 조각이 맞아떨어졌다. 레드 래빗의 형제를 죽음으로 몰아갔던 그 히어로는, 다크 카이저가 맞았다.
“이번엔, 정말 나를 죽여야만 모든 걸 끝낼 수 있을 거다. 다크 카이저.”
다크 스코프가 채 생각을 정리하기도 전에 날아드는 푸른빛의 빙결 광선!
다크 스코프는 몸을 비틀어 얼음 광선을 피하며 자신의 장비 상황을 점검했다. 아까 전에 보기맨과의 결전을 준비할 때의 장비를 그대로 장비하고 있었다.
정학근의 데이터에 따르면 레드 래빗은 빙결 속성의 자연계열 능력자.
자연계열 능력자의 경우 장비의 영향을 많이 받기 때문에, 전용 장비가 아닌 이상 대응력이 떨어진다.
심지어 지금 입고 있는 보호구는 보기맨의 강한 타격을 막기 위해 구상한 젤이 들어가 있는 타입이다.
보기맨이 때린 주먹의 충격을 젤로 흡수해 충격을 분산시키기 위한 장비였지만, 빙결 속성의 능력자라면 오히려 역으로 약점으로 작용한다.
보호구에 한 번이라도 적중하게 된다면, 보호구 전체를 못 쓰게 돼버릴 터였다. 그렇다면, 보호구를 차고 있는 건 괜히 움직임에 방해만 될 뿐이다.
zhieeeeee-
아니나 다를까, 레드 래빗의 반대쪽 손에서 재차 뿌려진 광선이 결국 다크 스코프의 보호구를 살짝 스치고 나갔다.
몸의 움직임이 둔해졌다는 생각이 든 즉시, 다크 스코프는 오른손을 들어 올려 보호구 위쪽에 달려 있는 버튼을 조작했다.
덜컥! 터덩!
다크 스코프의 몸에 붙어 있던 보호구가 덜컹거리며 몸에서 떨어져 나오더니, 방패처럼 변화했다.
다크 카이저의 다크 쉴드에서 영감을 받아 만든 쉐도우 아머 쉴드였다.
몸에 장착하고 있으면 위험하겠지만, 방패로 변형시킨 상태에서는 꽤 오랫동안 빙결 광선을 막아줄 수 있을 터였다.
자신을 향해 쏘아지는 광선을 쉐도우 쉴드로 막아내며 다크 스코프는 레드 래빗을 향해 달려들었다.
zhieeeeee-!
등 뒤에 매달려 있는 스파크 파이어를 꺼내 들고 싶었지만, 날아드는 빙결 광선의 힘이 생각보다 거센 나머지 손을 뒤로 뺄 여유가 없었다.
오른손의 건틀릿엔 두 번의 폭발 탄환과 한 번의 최루탄이, 왼손의 건틀릿엔 두 번의 폭발 탄환과 한 번의 연막탄, 그리고 재떨이가 존재한다.
“그렇다면 이건 어떠냐!”
퍽!
레이저를 막아주고 있던 쉴드에 뾰족한 무언가가 박혀 들어왔다. 박혀 들어온 것은 쉴드를 뚫고 들어와 다크 스코프의 코앞에서 멈췄다.
그것은 얼음이었다. 뾰족하게 깎여 있는 고드름.
파파파파파팍!
기다렸다는 듯 쏘아져 나오기 시작하는 고드름이 다크 스코프의 쉴드를 순식간에 구멍투성이로 만들었다.
“구멍 뚫린 방패로 내 광선을 막아낼 수 있는지 한번 볼까?”
zhieeeeeee-
다시 한번 다크 스코프를 향해 쏘아져 나오기 시작하는 광선. 하지만 이미 균열이 생겨 버린 쉴드는 한계를 맞이한 듯 삐거덕대기 시작했다.
다크 스코프는 조금이라도 더 버티기 위해선 오른손을 써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힘이 강한 오른손으로 쉴드를 고쳐 잡고 왼 주먹을 꽉 쥐었다.
치이이익-!
방패의 균열이 끝나기 전에 방패를 내리며 곧바로 휘두르는 왼 주먹!
폭발이 일어남과 동시에 오른손을 뒤로 당기며 방패를 손에서 놓고 오른 주먹을 휘두른다.
치이이이익-!
폭발 탄환에 타격을 입은 듯 비틀거리는 얼굴에 뿜어지는 다크 스코프의 최루탄!
“크아아아악!”
예상하지 못한 공격이었던 듯 얼굴을 부여잡는 레드 래빗. 쉴 틈 없이 쏘아져 나오던 공격에 빈틈이 생겼다.
얼굴에 뿌려진 최루탄은, 육체계열 슈페리어라도 5분 이상은 눈물 콧물 짜게 만들어져 있는 독한 녀석이다. 아마 지금 당장은 정신 차리기가 힘들 거다.
다크 스코프는 스파크 파이어를 꺼내 들기 위해 왼손을 뒤로 뻗었다.
그때, 다크 스코프를 향해 정확하게 손을 뻗는 레드 래빗.
벌써 정신을 차리고 공격을 해온다고? 이렇게 빨리?
슈슈슈슉!
정확하게 다크 스코프를 향해 쏘아지는 고드름 더미들!
다크 스코프는 부랴부랴 몸을 틀어 고드름 더미를 피해 보았지만, 스쳐 지나간 고드름이 다크 스코프의 슈트를 찢고 생채기를 내고 말았다.
다크 스코프는 곧바로 섬광탄을 바닥에 내던지며 몸을 뒤로 물렀지만….
PANG!
이미 최루탄에 당해 눈가를 문지르고 있는 레드 래빗에겐 큰 영향이 없었다.
소닉 세이버의 음파 공격이었다면 이런 상황에서도 타격을 줄 수 있었겠지.
다크 스코프는 또다시 자신의 능력이 얼마나 한계가 있는지를 체감했다. 자신은 갑작스러운 상황에서 대처할 수 있는 대처 능력이 너무나도 떨어졌다.
찢긴 상처에서 피가 흘러나오는 것이 느껴졌다. 출혈이 느껴진다는 것은 좋지 않은 징조다. 출혈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힘이 빠질 수밖에 없으니까.
다크 스코프는 뒤로 살짝 물러난 뒤 손을 들어 파이팅 포즈를 취했다. 오늘따라 양팔에 착용하고 있는 건틀릿이 무겁게 느껴졌다.
그 사이 정신을 차린 레드 래빗이 빨갛게 충혈된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최루탄의 회복이 지나치게 빠르다. 이중 능력자. 신체/자연계열의 이중 능력자다.
“못 본 사이 이상한 술수를 많이 쓰게 변했군, 다크 카이저. 하지만….”
순식간에 다크 스코프를 향해 쏘아져 오는 레드 래빗의 신형. 눈 깜짝할 사이에 일어난 일이었다.
“몸이 많이 둔해졌군.”
퍼-억!
순식간에 다크 스코프의 배에 틀어박히는 레드 래빗의 주먹. 복부에서 느껴지는 고통. 다크 스코프는 깜짝 놀라 오른 주먹을 휘둘렀다.
퍼-엉!
오른 주먹의 폭발 탄환이 레드 래빗의 얼굴 바로 앞에서 폭발했지만,
쉬이이이이익-퍼펑!
레드 래빗이 왼손에 만들어낸 얼음 파편이 폭발을 막아낸다. 폭발 탄환을 막아낸 얼음 파편이 마치 눈이 뿌려지는 것처럼 허공으로 흩어졌다.
퍼-억!
그 뒤로 이어지는 압도적인 차이의 폭력. 다크 스코프는 손쓸 방법도 없이 얻어맞기 시작했다.
펑! 펑! 펑! 펑!
연이어 터지는 최루탄도, 폭발 탄환도, 연막탄과 섬광탄마저도.
다크 카이저가 CCTV 영상에서 했던 것처럼 타격전으로 들어가면 승산이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털썩.
결국 다크 스코프는 레드 래빗의 앞에서 무릎을 꿇고 말았다.
“여보… 그 꼴을 하고 대체 어딜 가는 거예요?”
히어로가 하고 싶었다. 더 나이 들기 전에, 해보고 싶었던 일을 한 번이라도 해보고 싶었다.
“그건 내가 당신이 다치는 걸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지. 다른 슈퍼 빌런들이 나처럼 사정 봐가며 상대해 줄 줄 아시오?”
다크 카이저의 말이 맞았다. 이 일은 그저 재미로만 할 수 있는, 하고 싶다고 해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미쳤어? 당신 미쳤어? 당신 그러고 다니다가 큰일이라도 당하면, 나 혼자 어떻게 애를 키우라고. 미쳤어? 당신 진짜 미쳤어? 미쳤어? 미쳤냐고!”
한계를 느꼈다. 자신의 능력에 대한 한계도 있었지만, 가족, 책임져야 할 나의 가족이 있다는 부분에서도 한계를 느꼈다.
책임져야 할 가족이 있었기에 목숨 걸고 싸워야 할 상황에서 망설임을 느꼈다. 조금 더 안전하게, 조금 더 덜 다치는 방향으로 싸우기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그것도 이젠… 끝이겠지….
삐빅-
싸움 직전 눌러두었던 호출기의 버튼이 삐빅거리며 반응하는 것이 느껴졌다. 다크 카이저가 거의 다 왔으니, 조금만 기다리라는 신호였다.
아직은… 끝이 아니었다.
무릎을 꿇은 다크 스코프에게 레드 래빗이 저벅저벅 걸어 다가왔다.
“너… 다크 카이저가 아니었군?”
“어떻게… 알았지…?”
“어떻게 알긴. 싸울 때 사용하는 도구도, 싸우는 수법도, 몸놀림도 전부 다르니까 알았지.”
“그렇군… 듣고 보니 알아차릴 만도 하군.”
‘그리고, 다크 카이저라면, 내 가면을 가장 먼저 공격했을 테니까.’
덤덤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다크 스코프의 목에, 레드 래빗은 손을 얹었다.
“너는 다크 카이저와 무슨 관계지?”
“나는… 다크 카이저의 사이드 킥이다.”
“사이드 킥? 그게 뭐지?”
“일종의… 제자… 같은 거지.”
“제자… 제자라… 그럼 너는 다크 카이저에게 소중한 존재인가?”
그 말에 다크 스코프는 피식 웃었다.
“글쎄… 소중한 존재라… 전혀 모르겠군.”
“그럼 너 하나로는 수지가 안 맞겠군. 혹시 다크 카이저에게 소중한 무언가에 대해서 알고 있는 것이 있나?”
“알아도 내가 너한테 말해줄 것 같나?”
“…그것도 그렇군. 그럼 수지 타산이 맞지 않는데… 그래. 하나 더 죽이면 되겠군.”
레드 래빗은 서서히 손아귀에 힘을 주었다. 다크 스코프의 얼굴이 붉게 물들기 시작했다.
“너를 죽인 건 내가 아니라, 다크 카이저라고 생각해라.”
다크 스코프는 허공을 바라보았다. 저 멀리서 검은색 흑염이 이곳을 향해 날아오는 것이 보였다. 조금만 더. 아주 조금만 더 시간을 벌면 될 거 같은데….
섬광탄이나 스파크 파이어는 꺼내게 둘 리가 없다.
건틀릿에 담겨 있던 폭발탄은 모두 사용했다. 최루탄도, 연막탄도 더는 없다. 남은 거라곤… 재떨이?
왼손의 건틀릿에 있던 재떨이의 뚜껑을 열었다. 안에 있던 담뱃재가 날려 레드 래빗의 얼굴에 뿜어졌다.
“케엑!”
혼미해지던 정신이 돌아온다.
“이 자식이 또 이런 되도 않는 짓을.”
다시 다크 스코프의 목을 조르기 시작하는 레드 래빗.
바로 그때!
“안 돼! 그만둬!”
허공에서 검은색 별똥별이 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