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4화
현장학습(3)
“야! 나 잠깐 저기 갔다 온다.”
“뭐? 어딜 가?”
한참 음식을 씹으며 즐거워하던 도유진이 벌떡 일어나서 어디론가 달려가기 시작했다. 뭐 하나 싶어 돌아보니, 아까 함께 버스 안에 있던 여군에게 쪼르르 달려가고 있는 중이었다.
군인들도 점심식사를 위해 근무를 교대하고 있는 모양이다.
나는 그런 도유진의 모습을 보며 피식 웃었다. 오빠가 완전히 나아버려서 경찰이나 군인이 되고 싶다는 생각이 다시 바뀔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었는데, 아직도 진심으로 경찰이나 군인이 되고 싶어 한다는 것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이 세계에서 경찰이나 군인이라… 둘 다 생각보다 위험하고 어려운 일이지만….
내가 아는 한, 도유진이 자신의 꿈을 제대로 가져본 것은 이전에 살던 세계에서도, 지금 살고 있는 세계에서도 처음이었기 때문에 나는 도유진의 꿈을 응원해 주기로 했다.
되도록 경찰을 하게 만들긴 해야겠지만.
천산시 내부의 경찰이 된다면 히어로 활동을 하며 얼마든지 도와줄 수 있다. 내가 지켜볼 수 있는 곳에서 근무한다면 위험할 일도 거의 없을 것이다.
나는 이 세계에 나 때문에 끌려온 이모와 도유진의 가족이 모두 행복하길 바란다. 나는 그들이 행복하게 살게 만들 수 있는 능력이 있으니까.
슈트와 제인의 힘을 이용한다면 내 주변 사람들이 행복하게 살게 만드는 것쯤은 어렵지 않을 테지.
[“그런 일에 히어로 슈트를 마음대로 쓰겠다는 말씀이신가요?”]
사실 이건 네가 처음부터 내게 약속한 내용인걸? 동화율을 100%까지 모은다면, 평생 우리 가족이 행복하게 살게 해주겠다는 거.
【“그런 약속을 했었군? 계약은 중요하다. 똑바로 지켜라, 인공지능아.”】
[“네. 네. 약속은 꼭 지켜드리겠습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소연. 그런 걸 또 먹을 거야?”
내가 그런 생각을 하며 상념에 젖어 있는 사이, 내 옆에 있던 수아가 놀란 목소리로 소연이에게 묻기 시작했다.
뭐야? 뭔데?
나는 내 앞에서 부스럭대며 슈퍼마켓에서 파는 커다란 분홍색 소시지를 꺼내는 소연을 보며 눈을 휘둥그레 떴다.
“아니, 소연아. 아까 그만큼 먹고 뭘 또 먹으려고?”
“아하하… 역시 이거까지 먹기엔 너무 많지?”
분홍색 소시지의 껍질까지 벗기던 소연이 어색한 표정으로 웃으며 다시 가방 안으로 소시지를 집어넣기 시작했다.
나는 소연의 표정을 보며 대체 소연이 왜 그런 짓을 했는지 깨달았다. 아마 소연이가 새로 각성한 능력과 관계가 있는 행동이겠지.
가방으로 들어가고 있는 소시지를 유심히 살펴보니 더 확실하게 알아차릴 수 있었다.
물건을 가방에서 꺼낼 때보다 집어넣을 때 더 힘들기 마련인데, 가방 안으로 밀어 넣는 소시지가 너무 스무스하게 빨려들어 갔거든. 마치 안에 다른 곳으로 통하는 구멍이 하나 있는 것처럼.
지난번에 보니까 팔 하나만 해도 엄청나게 크던데, 저 정도 소시지 먹고 배가 차려나 모르겠네.
일단 모른 척 고개를 돌려주던 바로 그때,
오른쪽 눈이 아려오는 것을 느끼며 나는 고개를 푹 숙였다.
갑자기…? 여기서…?
“아~ 피곤하다~.”
나는 붉게 물든 눈을 숨기기 위해 풀밭 위로 드러눕고 눈을 감았다.
“나강림. 이런 데서 자면 벌레 물려.”
“우와! 풀밭에 누워서 친구들이랑 낮잠 자는 거 나도 해보고 싶었어! 나도 할래!”
“…여긴 깨끗하게 관리하는 거 같으니까 괜찮을지도.”
다행스럽게도 내 주변 친구들의 반응을 보니 내 눈에 문제가 생긴 건 눈치채지 못한 모양이다.
나는 눈을 감고 붉은 눈이 내게 보여주려는 영상을 받아들였다.
이젠 자주 봐서 익숙해진 책이 한 권 떠오른다.
후드드드.
책장이 쭈르륵 넘어가며 내 눈앞에 몇 가지 장면들이 펼쳐지기 시작한다.
가장 먼저 여군 옆에 앉아 신나게 떠들고 있는 도유진의 모습이 보인다.
도유진의 갑작스러운 질문 공세에 조금은 당황한 듯 보이지만, 이윽고 빙긋 웃으며 도유진의 말에 대답해 주기 시작하는 여군. 옆에 앉아 함께 밥을 먹고 있던 군인들도 도유진에게 여러 가지 말을 해주기 시작한다.
군인이 되기 위해서 택할 수 있는 방법, 필요한 조건, 격려. 그런 이야기를 듣고 있는 도유진의 눈이 반짝반짝 빛이 났다.
탕탕탕탕!
갑자기 어딘지 모를 곳에서부터 울리기 시작하는 총소리! 그리고 그 총을 맞고 쓰러지는 군인들과 도유진.
그걸로 끝이 아니었다. 이윽고 벌어지는 군인들과 습격자들 간의 총격전. 그 사이에 끼어 있던 관람객들이 총을 맞고 쓰러지는 모습도 보인다. 그 틈을 타 박물관 안으로 들어가는 스카 페이스.
번쩍.
다시 세상이 붉은색으로 점멸하고, 풀밭 위에 누워있던 내 모습이 보였다. 나는 나도 모르게 몸을 벌떡 일으켜 도유진이 있는 곳을 바라보았다.
“으하하핫! 진짜요?”
다행히 아직도 깔깔거리며 웃고 있는 도유진의 모습이 보였다. 나는 그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몸을 일으켰다.
“…강림아?”
“나강림. 무슨 일이야?”
“어? 아니. 갑자기 화장실이 가고 싶어서. 잠깐 다녀올게.”
나는 화장실로 이동하며 오른눈의 능력을 개방해 주변을 훑어보았다. 지금까진 보이지 않았던 수상한 사람들의 모습이 발견되기 시작했다.
박물관 안에도, 바깥에도, 주차장에 있는 차량들 안에도. 품 안에 무기를 숨긴 채 숨죽이고 있는 사람들.
생각보다 숫자가 너무 많다. 등허리로 땀이 쭉 흘러내렸다. 이런 곳에서 총격전이라도 일으킨다면, 이 안에 있는 많은 사람이 크게 다치거나 죽고 말 거다.
나 혼자서 해결하기엔 규모가 너무 크다. 이 많은 사람을 모두 구해내기엔 내 능력으론 부족하다.
천산시 내부였다면 순식간에 부를 수 있는 히어로들이 많이 있었겠지만, 지금 있는 곳은 천산시에서 버스를 타고 한 시간은 움직여야 하는 시외다.
제인. 일단 호출할 수 있는 히어로들에게 전부 호출 돌려줘.
[“네, 알겠습니다. 마스터.”]
그렇다면 지금 당장 함께할 수 있는 히어로는 나와 함께 같은 버스를 타고 여기까지 온 퀘이사와 세상에서 가장 빠른 남자라고 불리는 페이퍼 백. 나머지는 여기까지 오는 데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릴 테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이 닿는 히어로들 전부에게 호출을 날린 이유는, 당연히 내 정체를 숨기기 위해서이다. 수아가 내 정체를 알아차릴 가능성을 최대한 줄여야만 하니까.
나는 슈트를 착용하기 위해 주변을 둘러보았다. 몰래 변신하기 위해선 숨을 곳이 필요한데, 그렇게 숨어 있을 만한 곳엔 군인들이 있거나, 습격자들이 자리 잡고 있었다.
일단은 화장실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화장실 안에도 딱 봐도 범상치 않은 기세를 풍기고 있는 남자 둘이 대기하고 있었다.
나는 셰이드 & 셰도우를 먼저 소환에 손에 쥐고 화장실 쪽을 향해 힘껏 내던졌다. 내 손을 벗어나 날아가는 두 단검은 스스로 벽을 피해 두 남자의 허벅지에 박혀 들어갔다.
“끄아아아악!”
“으악!”
화장실 안쪽에서 비명이 들려옴과 동시에 셰이드와 셰도우의 전기 제압 능력을 발동시켰다.
PZZZZZZZ!
“끄르르르르윽!”
“끄아아악!”
화장실 안을 지키고 있던 두 남자가 쓰러짐을 확인함과 동시에 화장실로 뛰어 들어가 슈트를 입었다.
* * *
띠링! 지이이잉-
풀밭에 드러누운 한소연을 따라 함께 누워 있던 강수아는 주머니에 넣어뒀던 다크 카이저의 호출기가 진동하는 것을 느꼈다.
호출기가 진동하는 경우는 딱 하나다. 자신이 필요한 사건이 일어났다는 것.
이거 큰일인데….
학생인 신분 탓에 평일 낮에는 사실상 히어로 활동이 불가능하다. 그 사실을 히어로 미팅 때도 분명 어필했었고.
그렇기 때문에 다크 카이저의 사건 호출기가 평일 낮에 자신에게 진동하는 경우는 지금까진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런데 평일 낮에 자신에게 호출이 들어왔다? 이는 심상치 않은 사건이 벌어졌음을 의미했다.
강수아는 옆의 소연이에게 들키지 않게 몰래 주머니에 있던 호출기를 열어 내용을 확인했다.
[※!!!!지원 요청!!!!※
간성 역사박물관이 총기류를 가진 괴한들에게 5분 이내 습격당할 예정. 목표는 박물관 안의 물건인 듯 보이나, 최우선적으로 관람객들을 보호할 필요가 있음. 자세한 데이터는 다크 바이저를 통해 전송하겠음.]
퀘이사는 깜짝 놀라 몸을 일으켜 주변을 둘러보았다. 최근 이런저런 일들 때문에 몇 번 함께 활동해 보며 느꼈지만, 다크 카이저의 정보력은 믿을 만한 수준이다. 그리고 절대 허튼 말은 하지 않는다.
“수아야? 무슨 일이야?”
당장 자리를 떠나 슈트로 갈아입어야 하는 상황이었지만, 공교롭게도 학교에서 이곳으로 현장 학습을 온 상황에서 일어난 사건. 자신이 여기서 갑자기 자리를 비우기에는 친구인 소연이 걱정된다.
소연이 새로운 능력을 개방한 것은 알긴 하지만, 그것을 곧바로 전투에 사용할 수 있는 가는 둘째의 문제이다. 일단은 안전한 곳으로 대피시켜야 옳다.
지금 있는 곳은 사방이 너무 노출되어 있는 풀밭이다. 강수아는 몸을 일으켜 주변에 있는 짐을 싸기 시작했다.
“어? 수아야? 왜?”
“이제 슬슬 갈 준비하자.”
“어? 강림이 아직 화장실에서 안 돌아왔는데… 시간도 좀 남았고….”
수아는 그 말을 듣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일단은 소연을 먼저 안전한 곳으로 숨긴 후에, 퀘이사의 모습으로 강림이를 찾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강림은 알아서 잘 찾아올 거야.”
남은 시간은 5분. 자신의 능력은 예열이 필요하다. 강수아는 손가락으로 머리카락을 꼬는 척을 하며 머리에 열기를 서서히 집어넣기 시작했다.
* * *
“세상에서 가장 빠른 피자! 초고속 피자, 래피드 피자입니다! 네. 네. 페퍼로니 라지 한판이요. 네. 주소가….”
래피드 스타, 공다혁은 주문을 받고 있는 자신의 아내, 이가영의 모습을 보며 포장되어 있는 피자를 들어 올렸다.
히어로 활동에 다시 복귀하기 위해 회사를 그만두고 차린 피자집은, 다행히 요리에 소질이 있는 아내 덕분인지 먹고 살 만큼의 돈은 벌 수 있었다.
아내는 주방에서, 자신은 홀이나 배달. 자영업 해서 먹고 살기 위해선 인건비를 아끼는 것이 중요했다.
“별이 아빠! 그거 말고! 그건 복동으로 가야 되는 거니까 대행시키고, 자기는 그 옆에 있는 거 가지고 보석동에 다녀….”
띠리링! 다크~ 카이저!
그때, 가게 한편에 놔둔 다크 호출기에서 알람 소리가 들려왔다. 평일 낮에 이렇게 알람이 울린다는 건, 갑작스럽게 자신이 필요할 만큼 큰일이 생겼다는 의미.
호출기의 소리를 들은 것은 자신뿐만이 아닌지, 자신의 아내, 이가영도 똑같이 호출 소리가 들려온 방향을 바라보는 것이 보였다.
자영업의 특성상 바쁠 땐 미치도록 바쁘다. 그리고 오늘 밀린 배달을 볼 때 오늘도 미치도록 바쁠 확률이 높다.
공다혁은 자신도 모르게 아내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이런 상황에선 눈치가 안 보일래야 안 보일 수가 없다.
그런 공다혁을 본 이가영은 피식 웃었다.
“배달 한 분 더 부르면 돼. 요즘은 시스템이 잘되어 있으니까 걱정하지 말고 다녀와. 몸조심하고.”
“어. 미안해. 내 능력이 무슨 능력인지 알지? 세계에서 가장 빠른 남자니까 순식간에 정리하고 다시 돌아올게. 걱정하지 마!”
아내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종이봉투를 얼굴에 쓰고 능력을 발동한 채 호출기를 들여다보았다.
주변의 시간이 천천히 늘어지는 것이 느껴진다.
[…간성 역사박물관이 총기류를 가진 괴한들에게 5분 이내 습격 당할 예정.]
…간성 역사박물관이면, 차로도 한 시간은 가야 하는 거리. 늘어진 시간 속에서 공다혁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대체 거기까지 어떻게 뛰어가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