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2화
현장학습(1)
후욱….
후욱….
후욱….
천산시 마석구의 가장 오지에 있는, 슈퍼 빌런 교도소. 정확한 위치는 세상에 알려져 있지조차 않은, 오직 슈퍼 빌런들의 수감만을 위한 장소.
일반적으로 흉악범 교도소라고 불리는 교도소의 한 좁은 감방 안에 털북숭이의 한 남자가 있다.
후욱….
후욱….
후욱….
한 사람이 살기에는 지나치게 좁은 것이 아닌가 싶을 정도의 작은 감방 안에서 끝없이 운동을 하고 있는 한 사람.
한때 토끼 가면을 쓰고 다크 카이저를 위협하던 빌런이었던 레드 레빗.
레드 레빗은 한때 그를 아는 사람이라면 믿지 않을 정도로 크게 변화해 있었다.
갈비뼈가 보일 정도로 말라 버렸던 몸은 다시 예전의 덩치로 돌아와 있었지만, 예전과는 다르게 몸 구석구석 붙어 있는 탄탄한 근육이 예전의 그와는 다르다는 것을 보여주는 듯했다.
고작 몇 개월 동안 이뤄낸 일이라곤 믿을 수 없을 정도의 변화였다.
자신이 조금만 더 똑똑했더라면, 자신이 조금만 더 열심히 살았더라면, 자신이 조금만 더 강했더라면!
자신이 조금만 더 나은 사람이었다면 자신에게 일어난 모든 불행들을 막을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이, 아니, 최소한 가족들의 복수라도 끝낼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그 사실이 레드 레빗을 매 순간 고통스럽게 만들었다.
달콤한 복수의 순간이 바로 눈앞까지 와 있었는데!!
복수의 직전까지 와서 모든 것을 망쳐 버린 자기 자신을, 레드 레빗은 용서할 수가 없었다.
흉악범만을 모아놓은 이 슈퍼 빌런 형무소에서는 사실상 할 수 있는 것에 대한 자유조차 거의 없었다.
그래서 레드 레빗은 스스로를 단련하기로 했다. 혹시라도 다시 찾아올 새로운 기회를 놓치지 않기 위해서.
덜컹.
“으아아아악! 아파! 천천히 합시다, 좀! 네?”
그의 앞으로 새로운 죄수 한 명이 지나가고 있었다.
“저기… 혹시 저랑 같이 들어온 여자는 어디로… 저기요? 저기? 제발!”
흉악한 수준의 능력을 가진 슈퍼 빌런들이 가득한 교도소인 만큼, 교도소 내부의 형무관들은 수감자들과 단 한 마디도 나눠서는 안 된다. 새로 들어온 죄수 ‘골드 재킷’의 애절한 목소리에도 형무관은 아무런 답을 해주지 않았다.
철커덕.
레드 레빗의 옆 감방의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 * *
“있잖아, 나아… 지금 너무 신나….”
“어차피 역사박물관 가는 거잖아. 별로 재밌을 것도 없을걸.”
“하지만… 난 중학생 때 가던 현장 학습 때마다 선생님 옆에 앉아서 갔는걸. 친구들이랑 이렇게 모여 앉아 가는 건 처음이란 말이야.”
소연아… 갑자기 그런 말 하는 건 반칙이지… 그래… 네가 좋다면 좋은 거지.
내 옆에 앉아 눈을 반짝반짝 빛내고 있는 사람은 말하는 것만 봐도 누구나 다 알 수 있듯, 한소연이다.
“야, 넌 여자애가 무슨 키가 이렇게 크냐? 너랑 같이 앉아있으니까 내가 너무 작아 보이잖아.”
“내가 큰 게 아니라 네가 작은 거야, 땅꼬마. 키가 155는 되니?”
“뭐… 뭐? 아니거든? 155는 넘거든?”
“155 턱걸이구나?”
“야, 너 이럴 거면 왜 나랑 앉자고 했냐?”
우리 뒤에 앉아 투닥거리고 있는 두 사람은 강수아와 도유진이었다.
왜 나랑 소연이가 같이 앉아 있고 쟤네 둘이 앉아 있냐고?
‘소연이랑 강림이랑 앉아. 나는 도유진이랑 앉아서 갈 테니까.’
갑자기 강수아가 내 옆에다가 소연이를 앉히고 도유진을 데리고 우리 뒤에 앉아버렸거든.
[“마스터. 수아도 이렇게까지 해주는데 아직도 소연이의 마음을 모르시겠어요?”]
너 자꾸 헛소리할 거면 또 음소거 한다?
[“그 음소거 기능도 사실은 제가 조절하는 거거든요? 참나.”]
스으읍. 적당히 해.
시끌벅적하게 앉아 버스의 출발을 기다리고 있던 그때, 버스의 문이 열리고 총으로 무장을 한 군인 세 명이 버스 안으로 들어섰다.
“자. 조용, 조용. 여기 이분들은 이번에 저희 현장 학습을 도와줄 보안요원들입니다.”
“97사단 정보통신대대 하사 김한길입니다.”
“안녕하십니까!!! 97사단 정보통신대대 일병 윤! 이! 슬! 입니다!”
“안녕하십니까. 97사단 수송대대 상병 강성호입니다.”
군인들이 대민 지원 나왔구나. 참 고생이 많다.
이 세계는 악질 슈퍼 빌런들이 판치는 세상, 그런 빌런들의 타깃이 되기 가장 쉬운 것들 중에 하나가 현장 학습이나 수학여행 같은 걸 가는 학생들이 탄 버스를 하이재킹 하는 것이다.
그런 일들을 방지하기 위해 학교에서 현장 학습 등을 가야 할 일이 생겼을 때에는, 주변 군부대에서 대민 지원을 나와 버스를 호위해 준다.
원작에서도 나온 적이 있는 에피소드여서 기억에 남아 있었다. 최대한 현실과 비슷하게 구성되어 있는 「Heroicest」에서 몇 안 되는 현실과 다른 점 중 하나니까.
수송대의 군인은 버스의 운전자석에 앉고, 두 군인은 버스의 맨 뒷자리로 가 양쪽으로 퍼져서 앉았다.
이 세계는 이런 점이 좋구만. 보통 맨 뒷자리엔 일진들이 모여 앉아서 시끄럽게 떠드는데 말이야.
나는 슬쩍 내 뒤에 앉아 있는 (구)일진 도유진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우와와와… 여군이다.”
그러고 보니 얘 요즘 경찰이랑 군인에 꽂혀 있었지.
눈이 초롱초롱해진 채로 뒤에 앉아 있는 여군을 슬쩍슬쩍 바라보고 있는 도유진을 보며 나는 피식 웃었다.
얼마 전까진 오빠 일도 있고, 황채경의 일도 있고 그래서 그런지, 꽤 시무룩해져 있는 상태였는데 다시 기운이 조금은 돌아온 것 같아 다행이었다.
내가 뒤를 보는 것을 본 소연도 눈을 빛내며 몸을 돌려 자신의 뒤에 앉아 있는 수아와 도유진을 보았다.
“우와아. 나 버스 안에서 뒷사람이랑 이야기하는 거 처음이야.”
소연아. 목소리가 너무 커. 주변 애들이 다 쳐다보잖아. 평소엔 부끄러움도 많은 애가 왜 이런 건 창피해하지 않는 거야?
“와, 수아. 왜 갑자기 머리 묶었어? 수아는 머리 묶은 것도 이쁘네에.”
“아… 더… 더워서 그랬어.”
나는 소연이의 말에 수아를 바라보았다. 듣고 보니 머리를 묶었네. 나는 수아의 머리 색을 보고 나서야 수아가 왜 머리를 묶었는지 알 수 있었다.
날씨가 더워지면서 머리카락이 열을 흡수해 따뜻해져 버린 모양이다. 수아의 짙은 검은 머리가 열을 흡수해 은은한 붉은 기운이 돌아 갈색처럼 보였다.
“수아 머리카락 색 엄청 이쁘다아. 염색한 거야?”
“아… 아니야… 내가 원래 여름엔 머리가 좀 붉은 느낌이 좀 나고 그래….”
어라? 수아가 부끄러워하는 건 처음 보네. 나는 원래 예쁜 애들은 예쁘다는 말에 부끄러움도 안 탈 줄 알았더니. 의외네.
[“마스터. 예쁘다는 말은 언제나 여자들에게 먹히는 칭찬이랍니다. 꼭 알아두시길 바라요.”]
뭐래. 예쁘다는 소리 들을 몸도 없는 게.
【“워~ 우! 말이 너무 심한 거 아닌가?”】
[“마스터. 그거 AI 한정 패드립 같은 말이에요. 주의해 주세요.”]
요즘 둘이 부쩍 사이가 좋아진 거 같은데?
【“사이가 좋아진 게 아니라 널 놀릴 때만큼은 단합할 뿐이다.”】
그게 그 말이잖아.
부우우웅….
내가 AI와 악마에게 시달리는 사이 버스가 출발하기 시작했다.
* * *
한참 앞뒤로 신나게 재잘거리던 반 친구들이 쌔근쌔근 잠에 빠지고, 시끌시끌하던 버스 안이 완전히 조용해지고 나서도 나는 쉽사리 잠에 들지 못했다.
평소 같았으면 이때다 싶어서 더 달게 잤을 텐데, 오늘은 왜인지 모를 불안함이 마음 깊숙이 차올라 쉽사리 잠이 오지 않았다.
[“마스터. 그거 일 중독이에요. 오늘처럼 쉬어야 할 땐 쉬셔야 해요.”]
【“…동감이다. 악마인 내 눈으로 봐도 최근 너무 힘든 일이 많았다는 생각이 드는군. 편해졌을 때 휴식을 취하는 게 나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그래. 오늘따라 너희 둘이 왜 이렇게 죽이 잘 맞는지 모르겠지만, 너희 말이 맞긴 하지.
나는 내 옆자리에 앉아 쌔근쌔근 잠에 든 소연이의 숨소리를 들으며 눈을 감아보려고 했다. 노력의 결실 때문일까? 슬금슬금 잠에 빠지려고 했던 바로 그때, 내 등 뒤에 앉아 있던 도유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야. 나강림. 자냐?”
와, 방금 잘 뻔했는데 깨우네. 도유진, 내 인생에 도움이 된 적이 한 번도 없어.
“어. 잔다.”
“자는데 대답을 어떻게 하냐?”
“나는 가능하다.”
“너 내추럴인데 그런 능력이 왜 있냐?”
“슈페리어 각성했다. 왜?”
“고마웠다.”
뭐야? 갑자기 반 친구들 다 자는 버스 안에서?
“소희 이모도 그렇고 너도 그렇고… 너희 가족 일도 아닌데 나서서 도와줘서… 고맙다고.”
나는 슬쩍 등 뒤를 돌아보았다.
“뭘 봐. X끼야. 잔다는 놈이 어떻게 뒤를 돌아봐?”
“나는 가능하다.”
“진짜 나강림, X나 짜증나.”
잠시간의 어색한 침묵이 지나고, 이번엔 내가 먼저 입을 뗐다.
“고맙긴 뭐가 고맙냐. 지훈이 형 일인데. 난 외동에다가 부모님도 안 계시잖아. 지훈이 형도 내 친형 같은 사람이나 마찬가지였어.”
[“그런 친형 같은 사람의 동생에게 차였다고 연을 끊었던 적이 있지 않나요?”]
뭐래? 그거 이 세상에선 없던 일이야.
【“그 사실을 아는 사람들이 아직 존재한다면, 없던 일이라고 할 수 없지. 최소한 네 머릿속의 목소리까지 포함해서 셋은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군.”】
그만해!! 내 5년 전 흑역사 가지고 언제까지 울궈먹을 거냐고!
내가 내 머릿속의 악마들과 싸우고 있는 사이에, 다시 한번 도유진의 차분해진 목소리가 들려왔다.
“요즘 몸 상태가 많이 좋아졌다고, 너도 한번 봤으면 좋겠다더라. 나보고 꼭 너 데리고 오래.”
“어… 몸 괜찮아졌으면 내가 한번 꼭 가야지… 으악!”
그 말을 하고 다시 눈을 감으려던 그때, 내 팔 쪽에 무언가 따끔한 느낌이 확 들어 깜짝 놀라 작게 비명을 질렀다.
뭐야, 대체?
놀라 돌아본 곳엔, 강수아가 내 팔을 힘껏 꼬집어대고 있었다.
“나강림. 그러라고 너 거기 앞에 앉힌 거 아니야. 넌 소연이나 신경 써.”
“아니… 지금 소연이 잔다구….”
진짜 좀 억울하네… 자는 애를 어떻게 더 챙겨줘?
다시 한번 팔 쪽에 느껴지는 따끔함.
“으아아악!”
“조용히 해! 변명하지 마, 나강림!”
따끔.
“으아아악. 그만 꼬집어!”
* * *
후욱….
후욱….
후욱….
“어이~ 저기요~ 안녕하세요~ 제 옆방에 누가 살고 있다는 거 알고 있거든요? 여기 들어올 때 봤어요.”
“…….”
“옆 방 이웃님~ 제가 이렇게 조용하고 그런 걸 못 참아서 그래요.”
“…….”
“이제부터 오랫동안 같이 살게 된 사이인데 같이 통성명 정도라도 해봐요. 예?”
거, 시끄럽게 구는군.
레드 레빗은 온몸에 묻은 땀을 바닥에 놓인 옷가지로 대충 닦으며 한쪽에 놓인 침대에 걸터앉았다.
삐---이걱.
낡은 침대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삐걱댔다.
“계속해서 운동하시는 거 같던데. 이제야 좀 앉으시려나 보네. 피곤하시겠지만 저랑 이야기라도 좀 해봅시다. 예? 이름이 어떻게 됩니까? 전 골드 재킷이라는 이름으로 활동하고 있거든요.”
“…….”
“여기 있는 사람들 전부 한따까리해서 모인 사람들 아닙니까? 모인 김에 같이 통성명이나 하고 지내보자… 뭐, 그런 이야기죠.”
“르… 레… 레레드 레… 레레빗.”
“어후. 왜 이렇게 과묵하시나 했더니 그럴 만한 이유가 있으셨네. 그래요, 레드 레빗 님.”
“…….”
“방금 제가 기깔나는 탈옥 루트를 하나 떠올렸는데요. 저랑 탈옥 한번 해보지 않으시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