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히어로 만화 속으로 나 강림-80화 (80/236)
  • 제80화

    매드독(2)

    “후우.”

    도유진은 병실 앞에 서서 숨을 한번 골랐다.

    병실 안에 있는 부모님과 강림이네 가족에게 펑펑 울었던 티를 내고 싶진 않았다. 부모님은 물론이고 강림이 마저 엄청나게 충격을 받았을 테니까.

    강림이가 울었으면 울었지, 자신은 모두의 앞에서 울어선 안 된다. 부모님 앞에선 항상 밝은 모습으로 힘이 될 수 있는 딸이 되어야만 한다.

    그래야 오랜 병간호로 지친 부모님에게 조금이라도 힘이 될 수 있을 테니까.

    그리고… 강림이에게는 자신이 울었다는 사실을 절대 들키고 싶진 않았다.

    병실 앞에 서서 얼굴 정리를 좀 하고 나서 도유진은 문을 열었다.

    beep- beep- beep-

    “뭐야…? 다들 어디 갔네….”

    병실 안에는 평소와 다름 없는 표정으로 눈을 감고 있는 오빠 도지훈과 그 옆에 앉아있는 나강림 밖에 없었다.

    “야 나강림. 다들 어디 가셨어?”

    도유진도 가만히 앉아있는 나강림의 옆 자리에 앉아 도지훈을 내려다보았다.

    괜히 얼굴을 들어 말을 걸었다간 나강림이 자신의 얼굴을 볼 테고, 자신의 얼굴을 보면 우는 티가 날지도 모르니까. 그래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조용히 옆에 앉아 도지훈의 얼굴만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혹시라도 강림이가 말을 걸어오면 어떻게 대답해줘야 하나. 그런 고민을 좀 하면서, 도유진은 슬쩍 옆을 바라보았다.

    푹 고개를 숙인 나강림의 눈은 감겨 있었다.

    아 뭐야. 얘 자는 거였어? 참나.

    “휴.”

    잔뜩 긴장했던 몸이 풀리며 한숨이 폭 빠져나왔다. 요즘 계속해서 피곤해 보이더니 얜 여기까지 와서 자고 있네.

    나강림이 안 그런 것 같아도 은근 여리고 예민한 성격이라는 걸 도유진은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이런 상황에서 자고 있는 나강림이 안 좋게 보이기보다는 조금 안쓰러웠다.

    자려면 집에 가서 편하게 자야지… 수술 못 한 게 얘 잘못도 아니고.

    도유진은 나강림을 깨우기 위해 어깨를 툭 쳤다.

    “야 나강림. 피곤하면 집에 가라.”

    툭 치는 대로 옆으로 퍽 쓰러지는 나강림.

    도유진은 깜짝 놀라 몸을 일으켜 나강림을 바라보았다. 완전히 눈을 감고 옆으로 푹 쓰러진 나강림의 표정은 어딘가 다른 세상으로 가버린 듯 평소와는 완전히 다른 얼굴을 하고 있었다.

    뭔가 이상하다.

    도유진은 손을 뻗어 강림이의 코 밑에 가져다댔다. 다행히 숨결이 느껴졌다. 몸에 무슨 일이 생겨서 기절하거나 쓰러진 걸지도 모른다. 여긴 병원이니까 빠르게 긴급 처치를 한다면….

    도유진이 그렇게 생각하며 급하게 몸을 일으키던 그때,

    “흐허어어어어억.”

    “크헉!”

    갑자기 도지훈과 나강림이 동시에 눈을 떴다.

    *    *    *

    제인의 말이 맞았다.

    꽤 오랫동안 식물인간 상태로 잠에 빠져 있던 도지훈의 머릿속은 혼란함 그 자체였다. 기억의 파편들이 여기저기 흩어져있었고, 도지훈의 자아는 흩어진 기억의 파편들 사이를 불규칙적으로 왔다 갔다 했다.

    겨우 자아를 찾았다 싶으면 길이 엇갈려 다른 기억의 파편으로 도망가기 일쑤였고, 그 뒤를 부랴부랴 쫓아봐야 또다시 허탕을 치기 일쑤였다.

    체감상으론 몇 날 며칠 동안 도지훈의 머릿속을 헤맸던 느낌이었다. 내가 정신을 차리고 시계를 보니 현실 시간으로도 어림잡아 30분 정도는 지나가 있는 것 같았다.

    [“30분 정도로 해결돼서 얼마나 다행인데요… 잘못하면 다른 사람의 기억 안에서 정신이 매몰되어 빠져나올 수 없게 되었을지도 모른다구요.”]

    알겠어… 다시는 이런 위험한 짓은 하지 않을게.

    끼릭- 끼릭-

    화장실의 수도꼭지를 틀어 물을 받아 얼굴에 끼얹었다. 다행스럽게도 깨어난 도지훈은 정신세계에서 겪었던 일들은 물론이고, 자신이 히어로를 하던 시절의 기억까지 모두 잊어버린 모양이었다. 식물인간이 되던 날의 사고 당시의 기억까지 모두 포함해서.

    도지훈의 정신세계를 돌며 사고 당시 있었던 일을 보게 된 나로서는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도지훈의 머릿속이 너무나도 뒤죽박죽인 나머지 어떤 일이 있었는지는 정확하게 알 순 없었지만, 도지훈이 그 일들에 얼마나 고통받았는지는 충분히 알 수 있었던 것이다.

    [“마스터. 그… 마지막에 본 기억 말이에요…”]

    나는 이모가 돌아가시고 난 다음의 이야기를 보여주던 도지훈의 기억을 떠올렸다. 이모가 돌아가시고 방에 틀어박힌 나를 방 밖으로 끌고 나온 도유진과의 대화. 아마 제인은 알고 있었을 거다.

    됐어. 더 말하지 않아도 돼.

    이 세계에 끌려온 나는, 원래 세계에 있던 나와는 다른 존재였던 거겠지. 일종의 복사 붙여넣기 비슷한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쩐지 이 세계로 어떻게 들어왔는지, 어째서 들어왔는지가 너무 희미했다.

    됐어. 괜찮아. 이모가 살아계시는 이 세계로 들어온 그 순간부터 내가 원래 세계에서 뭘 어떻게 하고 살았는지는 아무런 의미가 없어졌다.

    내가 원래 세계의 나와 다른 사람이라고 해도 상관없다. 나는 이제 이 만화 속 세상에서 살아가는 등장인물 1이니까.

    끼릭 끼릭.

    졸졸졸 흐르던 수돗물을 잠그고 나는 화장실 바깥으로 나왔다.

    “야 나강림.”

    그런 나를 도유진은 남자 화장실의 바로 옆에 서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얘는 뭔 여자애가 이렇게 창피함이 없어? 네가 이렇게 남자화장실 옆에 딱 달라붙어 있으면 들어오는 사람들이 불편하잖아.

    “뭐냐? 지훈이형 정신 차렸는데 너도 옆에 가서 이것저것 도와야 하는 거 아니냐? 여기서 뭐 하냐?”

    아까 정신 차렸을 때 가장 먼저 보이던 것이 누워있는 나를 보며 놀란 표정을 짓고 있던 도유진의 얼굴이었다.

    아마 30분 남짓 내가 조용히 눈 감고 있는 걸 보고 수상함을 느꼈던 거겠지. 조금만 더 늦었으면 병원 장비 속에 들어가 온종일 건강검진 받을 뻔했다.

    “너 아까… 괜찮은 거냐?”

    그런 걸 봤으니 놀라는 게 당연하다. 나는 표정을 정리하고 고개를 돌렸다.

    “엉? 아까 뭐? 잠깐 눈 감고 졸았어. 요즘 내가 피곤해하는 거 너도 봐서 알잖아.”

    짐짓 아무렇지도 않는 것처럼 말하며 손씻은 물을 도유진의 어깨에 쓱쓱 비벼 닦았다.

    삐빅. 삐빅.

    눈 앞에 홀로그램 창에서 사건 알람이 반짝반짝 거리기 시작했다. 알람이 울리는 상황을 보아하니 그렇게 긴급한 사건은 아닌 듯 하지만, 그래도 오늘 같은 날은 왠지 슈트를 입고 밤거리를 돌아다니고 싶었다.

    “오늘도 너무 피곤해서 얼른 들어가서 잘련다. 이모한테 나부터 먼저 갈 테니까 조심히 들어오라고 전해드려.”

    그런 나를 보며 무언가 할 말이 있는 듯 입술을 달싹이던 도유진이 결국 입을 열었다.

    “야 나 강림. 우리 오빠 깨어난 거 니가 한 거냐?”

    묻지 않길 바랐는데.

    “…그럴 리가 있냐? 나 네추럴이야. 나한테 그런 능력 같은 건 없어.”

    제인이 내게 말해주지 않은 것이 많다는 것을 나는 탓할 수 없다. 나 또한 주변을 속이는 것은 마찬가지니까.

    이제는 내게 적이 너무 많다. 내가 잡아넣은 빌런들은 평생 감옥에 있지 않을 거다. 또 언제 어떤 빌런이 내게 도전해올지 모른다.

    내 정체를 아는 사람이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내 주변의 사람들이 고통받을 가능성이 높아진다.

    그러니까. 나는 평생 주변에 내가 다크 카이저라는 사실을 그 누구에게도 알려줄 수 없다.

    “지훈이형 몸 많이 회복돼서 이야기라도 좀 할 수 있게 되면 꼭 다시 오겠다고 전해줘.”

    *    *    *

    “자. 브릴리언트 팀! 지금 촬영 들어갈게요. 빨리 와서 포즈 취해주세요.”

    “아 네! 잠시만요. 저 지금 메이크업 중이라. 곧 가요~”

    신나게 외치는, 브릴리언트의 막내 럭키 펀치 신현지의 목소리를 들으며 플리커, 오은별은 편치 않은 기분으로 몸을 일으켰다.

    자신이 생각하던 히어로의 생활은 이게 아니었다. 계약이 끝나기까진 아직 2년이 넘는 시간이 남아 있었다.

    “어? 언니! 언니도 메이크업하고 가야지 어디가? 그래도 카메라 앞에 서는데.”

    “난 괜찮아. 집에서 하고 왔어.”

    “언니, 그러다 훅~ 간다? 우리 같은 아이돌 히어로는 얼굴이 생명이잖아. 인기 떨어지면 모가지 순식간이야.”

    그래. 어차피 2년 후면 그만둘 거니까 괜찮아. 목 끝까지 나왔던 말을 참으며 플리커는 카메라 앞에 섰다.

    카메라 앞에는 이미 브릴리언트의 리더, 밴디저가 서서 화면을 모니터링하고 있었다.

    은별은 아직도 1년 전 지훈이 사고를 당할 당시를 기억하고 있었다. 당시에 있었던 빌런과의 사투에서 팀을 위해 선두에 서 있었던 도지훈을 버리고 후퇴를 지시했던 것은 리더였던 밴디저, 강무영이었다.

    ‘무영 오빠! 지훈 오빠는요? 지훈 오빠는? 왜 오빠 혼자 나와요?’

    ‘지훈이가… 지훈이가 우리를 위해 희생하기로 했어.’

    ‘무슨 소리예요? 지금 건물 흔들리잖아! 이거 무너지면 지훈 오빠도 죽어요!’

    ‘금방 따라 나오기로 했어! 일단 우린 먼저 뒤로….’

    ‘지훈 오빠 혼자 놔둘 순 없잖아요! 놔요! 나 혼자라도 가게 해줘요!’

    ‘너가 지금 저기 들어가서 뭘 할 수 있을 거 같아? 너 혼자 저기 들어가면 지금 자살이야!’

    ‘안돼!! 지훈 오빠!! 안돼!!’

    자신을 가장 많이 챙겨주던 사람이었다. 그리고 자신이 가장 많이 따르던 사람이었다. 가장 믿고 있었던 사람이었고, 가장 좋아하던 사람이었다.

    은별은 그것을 배신이라고 생각했다. 자신들을 구하기 위해 끝까지 빌런과 맞서 버티던 도지훈은 무너진 건물에 깔려 4일이나 지난 후에 빈사 상태로 발견되었다.

    그 이후로 은별은 스타 히어로로서의 일에 대한 회의감을 느꼈다. 자신들이 살기 위해 동료를 희생시키고 나오는 것이 과연 히어로라고 불릴 수 있는 사람들일까?

    그 이후로 은별은 스타 히어로 활동을 위해 하는 모든 것들이 가짜인 것처럼만 보였다.

    티비와 라디오에 출연하고, 광고를 찍는 것은 물론이고, 자신들이 한 일이 뉴스 기사에 올라가는 것부터 팬들을 위한 서비스랍시고 사진을 찍어주는 것까지.

    자신이 하고 있던 일은 히어로가 아니라, 그냥 한 명의 엔터테이너라는 사실을 그제야 실감하게 된 것이다.

    “은별이 오늘도 기분이 별로 안 좋은가 보네.”

    팀 브릴리언트의 리더, 강무영이 멍하니 앉아 있는 은별에게 다가와 말을 건넸다.

    “오늘 같이 맛있는 거 먹으러 갈래? 내가 쏠게.”

    “됐어요.”

    “오케이. 술만 한잔할까?”

    “어우. 싫어요.”

    “하아….”

    강무영이 크게 한숨을 쉬었다.

    “은별아. 너가 요즘 이런 일에 회의감 느끼는 거 내가 알긴 하는데… 아후우….”

    다시 한번 한숨을 푹 쉬더니 머리를 세차게 긁는 강무영. 헤어 디자이너가 한 시간 넘게 다듬어줬던 머리가 전부 흐트러지고 말았다.

    “회사에서 우리한테 해주는 게 있잖아. 회사에서 돈 받고, 장비도 지원받고, 훈련도 지원받고. 그게 다 회사돈이야. 우리가 돈을 벌어야 히어로 활동을 유지할 수 있는 거고. 응? 너가 요즘 이런 부분에서 회의감 느끼는 거 아는데. 그거 이 업계에서 일하는 사람들 한 번씩 다 지나가는 일이야. 좀… 이제 그만 좀 하자. 어?”

    또 시작이네.

    ‘저 계약 만료되면 이제 그만둘 거예요.’

    이 말이 목 끝까지 차올랐지만 은별은 일단 참았다. 그런 마음을 은연중에 비추면 또 어떤 방식으로 자신을 얽매려 할지 알 수 없었으니까.

    이런 상황에서는 잠자고 입을 닫고 있는 편이 더 나을지도 모른다.

    ♪♬♩

    그때, 강무영의 스마트폰에서 벨소리가 울리기 시작했다.

    강무영은 스마트폰을 슬쩍 바라보더니, 한숨을 푹 내쉬고 등을 돌려 전화를 받았다.

    “네~ 이사님~ 무슨 일이십니까. 예. 예. 예? 지훈이가 깨어났다고요?”

    지훈 오빠가… 깨어났어?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