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2화
능력 개방
“확실히 몸 상태가 좋아지고 있어요. 이대로 회복되는 속도가 유지된다면 이전에 말했던 대로 수술은 할 수 있겠어요.”
“정말이죠, 선생님? 우리 지훈이… 좋아질 수 있는 거죠?”
“수술 이후에 회복할 수 있는 몸 상태가 될 것인가가 중요했는데, 몸 상태가 계속해서 좋아지고 있는 중이라… 지켜봐야 알겠지마는 수술은 예정대로 진행해도 되겠습니다.”
“아휴… 선생님, 정말 감사드립니다.”
부모님과 의사 선생님이 하는 대화를 조용히 옆에서 듣고 있던 도유진은 흐르는 눈물을 훔쳤다.
사고 이후, 몸 상태가 좋아지지 않아 회복에 무리가 있을 거라는 판단 때문에 수술하지 못했던 오빠의 몸이, 최근 갑자기 좋아지고 있다고 한다.
무슨 새로운 약이나 새로운 치료 방법을 사용한 것도 아닌데도, 갑작스럽게 좋아진 회복 속도는 병원에서도 자주 있는 일이 아니라며 놀랄 정도였다.
아무래도, 진짜 죽을 위기 상황에서 뮤턴트 인자가 새로운 방향으로 능력을 개방시킨 것 아닌가 한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을 들으며, 도유진은 병실 밖으로 나왔다.
실은 평소에 그렇게 대화를 많이 하는 편도, 연락을 자주 주고받는 편도 아니었다. 도지훈이 스타 히어로가 되겠다고 집을 떠난 후에는 더욱더 그랬다.
도유진은 오빠가 얼마나 강한 사람인지 알고 있었다. 도지훈은 천산시에서 아는 사람은 다 알 만큼 강하다고 소문난, 제일 잘나가는 싸움꾼이었다.
걸어오는 싸움은 피하지 않았고, 도유진이 알기론 단 한 번도 져본 적 없었다. 그런 힘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나쁜 짓은 단 한 번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부도덕한 장면이나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보면 참지 못하는, 정말 히어로를 하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었다.
아마 본인이 어렸을 때부터 스타가 되고 싶어 했던 것도 그런 행동에 영향을 주었을지도 모르겠지만.
그래서 도유진은, 히어로가 된 오빠가 이렇게 다칠 수 있다는 상상을 단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다.
도유진에게 오빠는 그런 사람이었으니까.
절대 다치지 않고, 지지 않는다.
약자를 지키고, 부도덕한 장면을 참지 않는다.
그런 오빠가 쓰러져 사경을 헤매다, 결국 식물인간이 되었다는 소식은 도유진에게 큰 충격이었다.
그리고 억울했다.
단 한 번도 나쁜 짓을 해본 적 없이, 옳은 길만 가기 위해 싸워왔던 오빠였다.
그런 오빠가 병실에 누워있다는 사실이 억울해, 도유진은 나쁜 사람이 되어보려고 마음먹었던 적도 있었다.
하지만, 결국 도유진은 그렇게 끝까지 나쁜 사람이 되진 못했다. 문득, 얼마 전에 싸웠던 황채경이 떠올랐다.
오빠가 깨어있었다면, 누가 잘못했든 친구라면 먼저 사과하라고 했을 테지.
조금 어색할 테지만, 내일 등교하면 황채경하고 이야기라도 좀 해봐야겠다.
-띵동
그렇게 생각하던 도유진의 스마트폰에 알람이 울렸다.
<황채경 : 야, 잠깐 이야기 좀 하자.>
* * *
털썩.
주무시는 이모 몰래 조용히 씻고 나온 나는 침대에 드러누웠다.
[6:23]
이대로 자봐야 몇 시간 후에 일어날 판이었다.
꽤 자주 있는 일이다. 이런 경우 다시 자는 것보단 버티고 그냥 학교에 가는 편이 더 나을 때가 많았다.
요즘 바빠서 하지 못했던 일이나 마무리하자.
제인, 새로운 능력이나 열어보자. 현재 경험치 좀 보여줘.
[“네. 마스터.”]
[현재 동화율 : 42.5%
현재 경험치 : 5121exp]
그동안 동화율이 오르고 내리는 추세를 통해 알아낸 부분이 있다면, 내 슈트가 점점 강해지면 강해질수록, 출력을 높이면 높일수록 소모하는 동화율이 점점 많아진다는 사실이다.
그래. 애초에 말이 안 되는 설정이었다. 아무런 연료가 들지 않는데도 엄청난 힘을 사용할 수 있게 하는 히어로 슈트.
이 슈트가 먹는 연료는, 동화율이었던 거다. 평소에 슈트의 능력 활용이 많으면 많을수록 떨어지는 동화율이 많아진다.
꼬와도 어쩔 수 없지. 난 슈트의 능력이 없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일개 고등학생일 뿐이니까.
【“일개 고등학생의 눈이 붉게 빛나며 미래를 보진 않을 거 같은데 말이지.”】
그걸로 미래를 보면 뭐 어디다 쓰는데? 결국 슈트빨을 받아야 사건을 해결하는데.
【“내 말은, 네 자신을 너무 무시하지 말라는 뜻이었다. 내가 보기에 넌 충분히 잘 해내고 있다. 소년으로서의 너로서도, 히어로로서의 너로서도.”】
아이구. 예. 감사합니다. 하지만, ‘충분히’ 잘 해내는 것만으론 부족해. 그러기 위해선 이제 새로운 능력을 골라내 볼 필요가 있지.
그래도 지금까지 해결한 사건으로 얻은 경험치는 생각보다 많이 모였다. 그동안 무슨 일만 있으면 경험치 다 때려 박아서 어거지로 해결한 사건이 많았기 때문에 경험치가 얼마 되지 않을 줄 알았는데.
이제… 내 인생의 업보를 확인해야 할 때.
나는 슈트에 내장되어 있는 내 설정 노트 파일의 능력 부분을 열었다.
내 눈 앞에 펼쳐지는 내 흑역사들. 이래서 능력 업그레이드를 자꾸 뒤로 미루고 싶었는데….
안 그래도 피곤했던 정신이 혼미해지려고 하지만, 정신을 붙들고 천천히 살펴보기 시작했다.
꿰뚫는 섬광 다크 스피어… 죽음의 광선 데스 레이저… 절명의 독 다크 포이즌….
각오했다고 생각했지만, 더 심하다. 아니 근데, 아까부터 계속 거슬리는 건데, 왜 영어 표기가 Dark Kaiser가 아니고 Dark Kiaser야?
[“마스터 공책에 이렇게 표기되어있던데요? 제 잘못 아니에요.”]
하. 이젠 창피함을 넘어서서 내 스스로에게 자괴감을 느끼기 시작한다.
중학생의 나는… 영단어 공부도 제대로 안 했었으니까.
나는 일단 방금 봤던 무시무시한 흑역사들을 옆으로 치워 버렸다.
창피함을 떠나서 전부 너무 살상력이 높아 도저히 사용할 수 없는 능력들이었기 때문이다.
어쩌면 절체절명의 위기 상황에서 나를 구해줄 수 있는 구명줄이 될지도 모르긴 하지만, 지금은 무난하게 많은 상황에서 쓸 수 있는 노멀한 능력이 더 필요하다.
[다크 카이저 슈트 모드 – 다크 아머]
이것도 고려해 봄 직한 좋은 능력이긴 한데… 지금은 다크 쉴드만으로도 많은 일을 해낼 수가 있다.
그리고 아머 모드를 이용해 방어력을 올려 방어하는 것보다는 오히려, 스피드 모드에 경험치를 추가로 투입해서 빠르게 제압하는 것이 더 유리한 상황을 만들기에 좋기도 했고.
이건 나중에 필요한 상황이 생기면 사용하도록 하자.
요즘 느끼기 시작한 건 장거리 능력의 부재였다. 특히, 지난번 수면제가 들어 있는 통을 깨트려야 할 때엔 돌까지 주워다 던져야 할 정도로 곤란했었다.
제인 도구-무기-장거리 태그로 정리해 줘.
순식간에 정리되어 나열되는 능력들.
어디 보자.
다크 리볼버… 이것도 너무 살상력이 높고…
다크 웹슈터… 이건 다크 카이저랑 상관도 없는데 왜 만들어놓은 거야? 작살총은 뭐야? 고래 잡으러 가는 거야?
나는 한숨을 푹푹 내쉬며 목록을 밑으로 내렸다.
이렇게 끝도 없이 많은 능력이 있지만, 정작 제대로 쓸 수 있는 건 몇 개 없구만.
[다크 스코프 – 셰이드 & 셰도우]
이건 또 뭐야? 이건 내가 만든 게 아니잖아.
[“원하시는 느낌의 능력이 없잖아요. 다크 카이저의 설정과 어울리면서도, 확장성부터 범용성까지 두루 갖춘 괜찮은 도구라서 원래부터 눈독 들이고 있었거든요.”]
그래도 이거 만든 사람은 다크 스코프 아저씨잖아. 이거 표절이라고.
치이이이익
내가 그런 생각을 함과 동시에, 지직거리는 소리와 함께 내 눈 위로 떠오르는 영상 하나.
<“예? 다크 카이저 님이 제 셰이드와 셰도우를 본뜬 도구를 만들고 싶어 한다고요? 정말이십니까? 저는 영광이죠. 원래부터 제가 다크 카이저 님을 따라 한 것 아닙니까.”>
[“그렇다고 하는데요?”]
이런 건 또 언제 준비한 거야?
근데… 뭐 틀린 말은 아니네… 어차피 아저씨가 날 따라 했던 거니까….
제인… 거… 셰이드 & 셰도우… 개방해 줘.
* * *
내가 내 과거와 마주해 고르고 고른 능력은 총 3가지.
먼저 첫 번째 능력은 [셰이드 & 셰도우].
내게 부족한 장거리 견제 능력을 보완해 줄 수 있는 도구. 거기에 원래부터 이것저것 덕지덕지 붙어있는 기능형 도구이기에 확장이 용이하고, 살상력이 낮고 제압에 특화되어 있다.
나와 똑같은 중2병 감성으로 만든 도구이지만, 쓸모있는 물건을 만들어냈다는 부분에서 내 흑역사 노트에 담겨 있는 쓰레기들과 비교해선 충분히 사용해봄 직한, 좋은 도구이다.
두 번째 능력은 [다크 카이저 슈트 모드 – 디제스터 레스큐(Disaster rescue) 모드]
예전에 화재 현장에서 사람들을 구출하기 위해 개방했던 파이어 파이터 모드와 비슷한, 사람들을 구출하기 위해 만들어진 모드다.
무너진 잔해를 들어 올리고 잔해를 부숴 버리는 등, 여러 가지 재난 상황에서 사람들을 구조하기 용이하도록 만들어진 모드.
그 쓰레기 더미 속에서 이렇게 진주 같은 능력이 있었다는 게 조금 다행일 지경이다.
마지막으로 개방한 능력은, 내 장거리 견제 능력을 보완해 줄 완전판.
[다크 카이저 슈트 모드 – 블래스터 모드]
장거리에서 블래스트를 발사해 적을 타격한다고 설정되어 있는, 다소 심플한 슈트이지만 오히려 그래서 더 좋다.
‘타격’한다는 것은 바꿔 말하면 비교적 살상력이 적은 능력이라는 뜻이다. 블래스트를 맞아도 죽진 않을 거다. 능력의 서술이 심플하기 때문에 나와 제인이 바꿀 수 있는 범주도 많아지니까.
블래스터 모드의 여기저기 살상력 높은 무기들이 숨겨져 있긴 하지만, 그런 무기들은 사용하지 않으면 그만이니까.
이 세 가지의 능력을 개방하는 데에만 든 능력이 2500exp 정도. 남은 경험치 중 일부는 원래 가지고 있던 능력들을 강화하는 데 사용하고, 일부는 일부러 조금 남겨두었다.
위기 상황에 필요한 능력에 경험치를 때려 박고 성장시키는 게 의외로 쏠쏠한 편이니까.
-띠리리리 띠리리리 띠리리리
내 스마트폰에서 울리는 알람 소리를 끄며, 나는 학교 갈 채비를 하기 위해 몸을 일으켰다.
* * *
그래도 며칠 전에 시험 끝나고 조금이라도 쉬어둔 탓인지, 그게 아니면 이런 생활에 적응되어 버린 탓인지, 한숨도 자지 않았지만 등교하는 데에는 문제가 없었다.
이 세상은 슈퍼 빌런이 존재하고, 또 그런 슈퍼 빌런을 막아내는 슈퍼 히어로가 존재하는 세계관이다.
어린 나이에 히어로 활동을 하러 다니는 히어로가 발견되는 것은 흔한 일은 아니지만, 있을 수 없는 일은 아니다.
내가 학교에 와서 잠만 처잔다든지, 수업 외의 다른 것들을 하는 느낌이 보이면 선생님들과 면담을 하게 되는 경우도 흔하다.
어떤 아이가 슈퍼 빌런이, 혹은 슈퍼 히어로가 되어 밤거리를 떠돌아다닐지는 선생님들도 확신할 수 없는 일이니까.
그런고로, 나는 멀쩡하게 학교만 잘 다니는 학생의 연기를 해야 할 필요도 있다.
“헬로, 얘들아. 좋은 아침.”
그래서 나는 밝은 표정으로 웃으며 교실에 들어와, 밝게 인사를 날렸다.
오늘도 좋은 연기다. 나강림.
어디 보자… 그 난리가 났던 반장, 다혜도 정상적으로 등교해서 자리에 앉아 있었다. 아까 사건의 진범을 잡았다는 뉴스 기사도 확인했으니, 다혜에게 큰 문제가 생기진 않을 거다. 결국 가면 쓰고 변장하고 다녔으니까.
근데… 우리 반 분위기가 좀 이상하네.
나를 바라보는 반 친구들의 눈빛이 조금 묘하다.
“쟤도 모르나 본데?”
“어제 새벽에 있었던 일이라잖아. 강림이한테는 연락이 아직 안 갔을 수도 있지.”
저 멀리서 나 몰래 조용히 쑥덕거리는 우리 반 여자아이 둘.
근데 내가 요즘 귀가 꽤 좋아져서 너무 잘 들리는걸.
아무래도 무슨 문제가 생긴 모양이다. 그리고 아무래도 얘네 반응을 보니, 그 문제는 도유진에게서 비롯된 모양이다.
“뭐야? 무슨 일이야? 다들 나 보는 표정이 좀 이상한데.”
조용한 우리 반의 분위기.
아무도 대답을 하지 않자, 우리 반에서 가장 눈치 없는 박준석이 내게 말했다.
“강림아. 유진이 어젯밤에 강도한테 습격을 당했다나 봐. 병원에 입원했대.”
빙긋 웃고 있던 내 표정이 무너지는 것이 내게도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