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5화
아직은 잘 모르겠어(1)
♩♪♬
“오늘 시험 다들 고생 많았고… 중간고사 끝났다고 졸업한 건 아니니까, 다들 너무 풀어지진 말고….”
“박준석! 피시방 갈 사람은 종례가 끝이 나면 찾아라, 좀. 선생님이 여기 앞에 있잖아~ 에이, 준석이 때문에 종례 안 해.”
아아아~.
담임 선생님의 말에 교실 안에 가득 차는 한숨 소리와,
“야 박준석 뒤지고 싶냐!”
“야, 이 히어로 오타쿠 새X야!”
준석이를 향한 비난 소리….
준석이 쟤는 다 좋은데 눈치가 없어….
나는 내려오려는 눈꺼풀을 강제로 끌어올리며, 박준석을 노려보았다.
요 며칠, 벼락치기 시험공부와 함께 히어로 활동까지 병행하느라 잠을 거의 자지 못했기 때문에 빨리 집에 들어가 쓰러져 쉬고 싶었는데….
“자, 조용조용. 오늘은 시험 끝난 날이니까 다들 피시방을 가든, 아니면 집에 가서 낮잠을 좀 자든, 오늘 정도는 푹 쉬어. 이런 날에 쉬어야지. 학생도 사람인데. 자, 해산.”
다행스럽게도 담임 선생님의 밀당은 오래 가지 않았다.
와아아아.
우르르르.
기다렸다는 듯, 순식간에 일어나 움직이는 우리 반 친구들.
보통 이러면 한 십 분은 쓸데없는 소리 하면서 놀려먹던데. 아무튼 피곤한 입장에선 고마울 뿐.
나도 가방을 등에 메고 몸을 일으켰다.
“어… 다혜야… 괜찮아?”
“울지 마….”
다들 일어나고 있는데, 자리에 앉아 엎드려 울고 있는 여자아이 하나.
우리 반 반장 서다혜.
중학교 때부터 전교 3등 안에 꼬박꼬박 들었다고 하는, 전형적인 공부 잘하는 반장 캐릭터다.
요번 시험을 망쳤다고 그랬나. 생각해 보니 원작에서도 다혜는 이번 중간고사 시험은 망쳤지.
이 반에 몇 안 되는, 원작에서도 나온 적 있는 인물 중 하나이다. 심지어는 빌런으로, 어… 악명이 높은 편이다. 어떤 의미로는.
【“악명 높은 빌런? 요주의 빌런이란 말인가? 어허. 저렇게 작고 귀여운데다 열심히 사는 친구가 빌런이 되다니….”】
악마 주제에 이런 감상에 빠지네. 히어로 슈트 안에 갇히더니 완전 사람이 다 되셨어.
【“오해가 있는 모양인데, 악마는 대부분 본래부터 악인을 더 싫어한다. 악인과 주로 계약을 맺는 이유도 마찬가지야. 악인이 더 싫으니까, 영혼을 뺏어오려는 거지.”】
말은… 그러면서 소연이한텐 왜 붙으려고 한 거야?
【“그땐 그 소녀에게 악인이 될만한 악의가 보였다. 그게 소녀의 의지가 아니었다는 건 이제 알고 있지만… 그땐 알 방법이 없었다.”】
그래, 그렇다 치자. 근데 쟨 걱정할 필요 없어. 악명 높은 빌런은 빌런인데, 쟨 좀 잡범이거든.
【“악명이 높은데, 어떻게 잡범이 될 수 있는 거지?”】
예를 들면, 악명 높은 국회의원의 방에 잠입해서 얼굴에 낙서를 하고 나온다던가. 미술관의 미술품 얼굴에 자기 가면을 모두 씌워놓고 나온다던가.
가끔은 규모가 큰 사고들을 치긴 하는데, 기본적으로 누군가에게 큰 피해를 주기 위해 치는 사고들은 아니다. 전부 사소한 장난 정도.
그렇게 만들고 나서 찍은 인증샷을 SNS에 올리는 정도의, 귀여운 수준의 잡범이다.
그러다 살인 사건을 일으킨 범인이 범행을 뒤집어씌울 목적으로 다혜의 가면을 쓰게 되고, 결국 다혜가 살인 사건의 용의자가 되어 쫓기게 되는 것이 원작의 내용.
하지만 원작의 내용을 전부 알고 있는 나에겐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이미 그 사건의 진범이 큰 문제를 일으키기 전에 잡아넣었으니까. 원래부터 여러 범죄에 연루되어 있던 약쟁이라 어렵지 않았다.
다만 내가 걱정스러운 것은, 확실하게 봉인하지 못한 심연의 여왕 때문이다.
성적에 대한 스트레스로 밤마다 짓궂은 장난을 하고 다니는 여고생. 심연의 여왕이 들어서기에 꽤 좋은 조건이다.
확인… 해봐야겠는데.
그러나… 오늘은… 오늘은 쉬어야겠다.
나는 피곤에 찌든 눈가를 손가락으로 문지르며 몸을 일으켰다.
“어~! 어! 강림아~ 수아야~ 시험 잘 봤어? 내가 친구 생기면 가고 싶었던 카페가 하나 있는데, 같이… 강림이 괜찮니?”
마침 옆 반도 종례가 끝이 났는지, 가방을 메고 촐랑촐랑 달려오던 소연이 나를 보고 눈을 크게 뜨고 묻는다.
“어… 어? 뭐라고?”
잠깐 정신이 멍해져서 뭐라고 했었는지 기억이 안 나네. 뭐라고 했던 거 들었는데.
“어? 아니. 시험 끝났으니까 같이 놀자고 하려 했는데….”
어? 어. 오늘은 안 되겠는데. 미안한데 집에 가서 쉬어야 할 거 같아.
“아. 카페. 카페 가자고 그랬지? 그래. 그래. 시험 끝났으니까 맛있는 거 먹으러 가는 거 좋지.”
나강림… 왜 피곤하다고 말을 못 하니? 눈이 곧 감기려고 하는데 만화 속 여자애들이랑 놀러 가는 게 그렇게 좋아?
“나강림. 피곤해 보이네. 너 집에 가서 좀 쉬어야겠다.”
그치? 나 너무 피곤해 보이지? 그래, 나 가서 그냥 쉴게.
“아냐. 아냐. 카페. 카페 가자.”
나강림!!! 모태솔로 나강림!!! 여자애가 같이 놀자고 하면 헤벌레해서 쫓아가는, 너 그런 쉬운 남자야? 정신 안 차려?
“어. 유진아. 너도 우리랑 같이 가서 놀래?”
“어. 진짜 재밌겠다. 나도 가고 싶은데, 나 오늘 오빠 병원. 다음에 같이 가자.”
“그래그래. 쟨 빼고 가자. 쟨 신경 쓰지 마.”
“나강림이 너무 좋아하니까 확 가버리고 싶네.”
“그래그래. 같이 가자. 너도 빨리 와.”
“야, 나강림. 상태 이상한데?”
바쁘긴 한 모양인지, 그 말을 마지막으로 후다닥 교실을 빠져나가는 도유진. 오빠 수술이 얼마 안 남았다더니, 옆에서도 준비할 게 꽤 많은 모양이다.
“어… 강림아… 정말 괜찮겠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는 소연이의 얼굴. 소연이가 이 정도로 신경 써주는 거 보니 내 얼굴이 진짜 심각하긴 한 모양이다.
그래. 이 정도로 심각하게 물어보면 진짜 가서 쉬어야 맞는 거지. 오늘만 날이야? 다음에 또 놀면 되는 거야.
“어. 물론이지. 오늘 같은 날 놀아야지, 언제 또 놀겠어.”
아, 모르겠다. 될 대로 돼라.
* * *
“나강림. 이제 좀 정신이 들어?”
“어. 아까는 솔직히 좀 피곤했는데, 지금은 괜찮아. 밥을 먹어서 그런가?”
식사를 하고 났더니 아까까지 피로했던 정신이 조금 맑아졌다. 초인이 판치는 세계에서 살았더니, 나 스스로도 조금씩 초인이 되는 모양이다.
“맞아. 사람은 역시 밥을 먹어야 해. 그래도 같이 재밌게 놀러 올 수 있어서 다행이다. 이거 봐봐. 내가 말했던 곳이 여기야.”
기분 좋은 표정으로 한 가게 앞에서 발걸음을 멈추는 소연.
유리창 너머로 슬쩍 보이는 카페 내부의 모습을 보며 나는 침을 꿀꺽 삼켰다.
“어… 그래? 네가 꼭 와보고 싶었다던 카페가 여기야?”
“응! 맞아! 바로 여기야.”
여기…? 여기라고?
조금 당황스러워 옆을 슬쩍 봤더니, 나와 비슷한 떨떠름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는 수아가 보였다.
“응! 맞아, 맞아. 예쁘지 않아? 느낌 있지 않아?”
“어… 예… 쁘네….”
“어. 느낌 있어. 있어… 어. 있어.”
“그치, 그치. 예쁘지? 여기 꼭 와보고 싶었는데, 혼자 오기엔 용기가 좀 안 나서. 친구랑 같이 올 수 있어서 다행이다.”
음… 그래. 이런 카페면 용기가 좀 안 생길 수도 있다고 생각해.
“어… 이런 곳에 들어오려면 용기가 많이 필요할 거 같네….”
나랑 비슷한 생각을 한 것인지, 수아 또한 내 생각을 읽은 것 같은 말을 했다.
우리가 도착한 곳은, 공포 영화를 테마로 한 테마 카페였다.
* * *
“와~ 저거 봐~ 너무 예뻐~.”
뭐? 뭐가 예쁘다는 거야? 머리에 박혀 있는 도끼? 아니면 반짝반짝 빛나는 붉은색 눈?
왠지 물어봐선 안 될 거 같은 기분이라 말을 하려다 관뒀다. 그래도 눈이 너무 초롱초롱해서 기분 좋아 보이네.
나는… 이런 공포 영화 좋아하지 않는데….
어릴 때, 「Abyssal zone」을 읽고 일주일이 넘게 악몽을 꾸고 난 이후로, 나는 공포 영화는 단 한 편도 본 적이 없었다.
공포 영화가 무섭기보다는 꿈속에서 봤던 괴물들이 떠올라서 괴로웠기 때문이다.
[“마스터. 세상은 그걸 공포 영화를 무서워한다고 표현해요.”]
세상은 그렇게 부를지라도, 아닌 건 아니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
[“세상은 그걸 또 정신승리라고 표현한답니다.”]
【“용케도 나를 봉인했군. 내가 바로 지옥의 악마, 그중에서도 제일 무서운 지옥의 군주, 벨제뷔트인데 말이지.”】
쪼끄맣고 빨간 개구리라 안 무서웠거든. 누가 개구리 형태로 나오래?
[“어머. 마스터. 공포 영화에서 개구리가 얼마나 중요한데요. 무서운 분위기 만드는 소품으로는 괜찮은 편이라고요. 저기 보세요. 이 카페에도 소품으로 하나 배치되어 있잖아요.”]
생각해 보니 그렇네.
【“…….”】
나를 공격해 오는 제인의 공격을 벨제뷔트에게 흘리며, 나는 아무 생각 없이 옆을 바라보다 보고야 말았다.
힐끗.
무시무시한 소품들과 눈도 마주치지 못하고 덜덜 떨고 있는, 강수아의 모습을….
분명 원작에선 귀신이나 유령, 괴물들하고도 싸웠던 거 같은데… 의외로 가면 벗으면 이런 것도 무서워하는 성격이구나. 신기하네.
우리는 비어 있는 카운터로 향했다.
아니, 근데… 카페에 손님은 꽤 많은데 왜 카운터엔 아무도 없는 거야? 주문은 어떻게 하고?
내가 그런 의문을 가지고 있는 사이, 소연이 카운터 위에 놓여 있는 종을 두 번 울렸다.
땡~ 땡~
불길한 종소리가 울리고, 피가 잔뜩 묻은 앞치마를 한 사람이 똑같이 피가 튄 흰색 가면을 쓴 채, 천천히 카운터 밑에서 스르르 올라왔다.
“꺄악!”
“꺄아아아악!”
그 모습을 본 수아가 깜짝 놀라 비명을 질러, 나도 모르게 함께 비명을 지르고 말았다.
[“마스터! 창피하게 여자애보다 비명을 더 크게 지르면 어떻게 해요? 사람들이 보고 웃잖아요.”]
아니, 내 말이. 수아, 쟤는 저런 살인마 수십 명도 넘게 때려잡았을 텐데, 저런 걸로 깜짝 놀라고 그래? 나도 깜짝 놀랐잖아.
그 모습을 보고 키득키득 웃는 소연.
“아, 너무 재밌다. 너네, 뭐 마실래? 내가 오자고 한 곳이니까 내가 살게.”
나는 메뉴판을 천천히 살펴보았다.
테마 카페답게 메뉴판엔 메뉴의 이름과 더불어 메뉴가 어떻게 플레이팅 되어 나오는지 사진이 찍혀 있었다.
이런 걸 사람들이 좋아한단 말야? 너무 기괴한데.
나는 기괴하게 생긴 음료수 중에 가장 정상적으로 보이는 따뜻한 아메리카노를 선택했다.
이상한 얼음도 이상한 것들도 아무것도 들어가지 않을 것처럼 보였으니까.
“우와~ 강림이 아메리카노도 마셔? 난 쓰기만 해서 무슨 맛인지 잘 모르겠던데. 어른 같다.”
“아니 별 게 다 으른이네. 그냥 먹으려면 먹는거지 뭐.”
하긴… 나도 어렸을 땐 아메리카노 왜 마시는지 몰랐었던 거 같기도 해. 갑자기 이런 데서 나이 차이를 느끼네.
“음… 그럼 나는 레몬에이드. 그럼 수아는 뭐 마실래? 내가 쏠 테니까 걱정 말고 주문해.”
“어… 그럼 나는….”
그 말에 꽤 당황한 듯 메뉴를 눈으로 훑기 시작하는 강수아.
수아는 아무래도 할머니랑 단둘이 살다 보니 카페 같은 데서 음료수를 마셔본 일이 드물 테니까.
“아니다. 나도 그냥 레몬에이드 마실래. 수아야. 너도 그냥 통일 하자. 통일하면 메뉴도 더 빨리 만들어질걸?”
[“여기가 무슨 중국집도 아니고 무슨 소리세요 마스터.”]
조용히 해.
내 말에 고개를 끄덕이는 강수아.
“그… 그래. 그럼 나도 레몬에이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