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히어로 만화 속으로 나 강림-64화 (64/236)

제64화

한밤의 수호자, 다크 카이저(5)

내 얼굴을 보며 방긋방긋 웃고 있는 꼬맹이의 얼굴을 보며, 나는 내심 한숨을 쉬었다.

혹시 이런 상황을 유도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없었던 건 아니지만, 또 이런 식으로 내가 나타나길 유도하는 사람이 나타났다.

다크 스코프 아저씨도 그렇고, 얘도 그렇고. 연예인들이 사생팬 때문에 고생하는 이유를 알겠다.

이렇게 된 거, 먹은 경험치로 슈트 바꾸면서 컨셉을 바꿀까? 지옥에서 빌런들을 단죄하러 올라온 헬 엠페러로….

【“찬성이다. 디자인은 내가 해주도록 하지. 어둠의 황제여. 네 디자인 센스는 너무 구리다.”】

야, 이거 내가 중학교 때 만든 슈트라 그렇다니까?

【“네 미술 시간 결과물을 보면, 지금도 그렇게 다를 거 같진 않다만.”】

사운드바 만지기 전에 닥쳐, 개구리.

【…….】

“꼬마. 겁이 너무 없군.”

“헤헤. 제가 그런 말을 좀 많이 듣습니다, 형님.”

처음 봤을 땐 내 또래쯤 되는 고등학생인 줄 알았는데, 목소리를 제대로 듣고 가까이서 살펴보니 앳된 느낌이 많이 든다.

중학생 정도나 되려나? 또래 애들보다 키도 덩치도 큰 편인지, 나랑 키도 엇비슷하다.

신발 안에 깔창이라도 올려야 하나. 약간 자존심이 상하는데.

“꼬마. 내겐 적이 많다.”

레드래빗, 스카 페이스, 미즈 컴뱃, 라이트닝 스파크… 전부 흉악하고 쟁쟁한 빌런들이다. 이런 꼬맹이 하나 죽이는 건 그들에겐 일도 아니다.

내가 이 친구가 나를 불러들이기 위해 이런 짓을 하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나타난 이유 또한, 내 적이, 이 꼬마가 하는 짓이 맘에 들지 않는 빌런이 이 꼬마의 신상을 위협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만약 여기서 나타난 것이 내가 아닌 다른 빌런이었다면, 최악의 경우 너는 이미 죽었을 수도 있다.”

“어… 아니, 아마 괜찮을 거예요. 형님이 아니면 지금처럼 제 근처에 오기도 힘들걸요?”

아오, 진짜. 꿀밤 존나 마렵네.

한 대 때려주고 싶은 마음을 꾹 참으며 나는 입을 열었다.

“그래. 여기까지 오는 동안 보안 장치가 꽤 잘 되어 있다는 건 확인했다. 하지만 이 정도론 슈퍼 빌런들의 접근을 막을 수 없어.”

“아니, 정말 괜찮아요. 저도 나름대로 믿는 구석이 있어서 이러는 거라니까요? 저기 저 벽에 저거, 보이세요? 저게 나름 비싼 보안 장치거든요. 제가 버튼 하나만 누르면… 악! 아야!”

나는 결국 참지 못하고 녀석의 머리에 꿀밤을 한 대 먹이고야 말았다.

“아. 히어로가 일반 시민 이렇게 때려도 됩니까? 아이고, 동네 사람들! 히어로가 꼬마 때려요!”

방송용 스튜디오로 소음이 나가지 않게 전부 방음 장치를 한 주제에, 넉살 좋게 웃으며 비명을 마구 질러대는 꼬마.

얘한테 어떻게 겁을 줘야 하나? 혼을 좀 내주긴 해야 되는데, 그렇다고 애를 줘팰 수도 없고.

[“왜 못 패요? 저런 버르장머리 없는 꼬맹이는 뼈 한두 개 정도 부러트려 버리죠? 이번엔 감점 안 할게요.”]

제인도 평소와는 다르게 약이 바짝 오른 느낌이다.

야, 그래도 아직 더 커야 할 꼬맹인데 뼈를 어떻게 부러트리냐?

【“아니면 지옥의 공포를 이용해 트라우마를 새겨주는 건 어떤가? 오른손의 체인을 살짝만 열어젖혀 주면 지옥이 무엇인지 알려줄 수 있다.”】

약 오른 건 벨제뷔트 쪽도 마찬가지인 모양. 하지만 얼마 전에 트라우마가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알게 되어서, 그런 방법을 쓰는 것도 영 내키지는 않았다.

“꼬마. 경고한다. 지금 올라간 영상 전부 내리고, 방송을 관둬라. 다행히 네가 가면을 쓰고 방송을 하고 있는 것 같으니, 방송을 하지 않는다면 위험한 일은 생기지 않을 거다.”

“지금 올라간 영상의 수익금이랑 후원금, 전부 천년 빌딩 붕괴 사건의 피해자들한테 기부되고 있거든요.”

“기왕 좋은 일 하시는데 별거 아닌 영상 몇 개 만들어서 기부 활동도 하면, 형님의 이미지에 조금 더 좋은 영향이 생기지 않을까요? 아, 수익의 10퍼센트 정도는 다크 카이저님을 위해 남겨뒀거든요? 용돈벌이 수준밖에 안 되긴 하는데… 그래도 좀 가져가실래요?”

요 덩치만 큰 꼬맹이가 자꾸 머리를 쓰고 까불거리네. 그럼 어쩔 수 없지.

나는 지금은 화면이 꺼졌지만, 아까까지 방송을 하고 있던 모니터에 주먹을 내질렀다.

내가 뻗은 주먹이 모니터를 관통하고 반대편으로 튀어나왔다.

“끄아아아악! 그 모니터가 얼마짜린데!”

나는 꼬마의 비명을 무시하고, 이번엔 방송 장비들을 하나하나 깨부수기 시작했다.

컴퓨터를 발로 차버리고, 조명을 구부리고, 카메라를 부쉈다.

“아, 안 돼요! 이거 다 아빠 몰래 구하느라 고생했단 말이에요.”

심지어 부모님은 방송하는 걸 모른단 말이지? 잘됐네. 이 정도만 하려고 했는데, 그냥 전부 부숴 버려야겠다.

내가 마음먹고 1분도 채 지나지 않아, 방 안에 있던 모든 물건은 전부 고물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심지어는 방음 부스에도 구멍을 몇 개 내버려서 무용지물로 만들어 버렸으니, 여기서 방송하긴 힘들어졌다.

중학생 꼬마. 개인 방송을 해서 그런지 돈은 꽤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돈이 무한하진 않겠지. 부모님이 방송하는 걸 모른다고 했으니, 부모님에게 손 벌리는 것도 한계가 있을 거다.

“아… 내 스튜디오가….”

나는 망연자실해서 방 안을 살펴보고 있는 꼬마의 멱살을 잡아 들어 올리고, 얼굴에 쓰고 있는 가면도 벗겨 부숴 버렸다.

끼기긱… 끽….

내 손아귀에 쥐어진 가면이 듣기 싫은 소리를 내며 찌그러져 고철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이 꼬맹이 요거, 이 주변에 또 카메라 숨겨놓은 거 아니지?

나는 붉은빛을 이용해 방 안 구석구석을 훑었다. 숨겨져 있는 카메라가 3개. 나는 부서진 물건들을 던져 숨겨져 있는 카메라까지 꼼꼼하게 부쉈다.

어쭈, 이 약은 꼬맹이 좀 봐라.

방 한구석에 놓여 있는 곰 인형 안에도 카메라가 있었다. 얘 진짜 지독하네.

나는 곰 인형의 머리를 잡아 뜯어 안에 있는 카메라도 남김없이 부숴주었다.

이 정도로 끝내면 겁을 안 먹을지도 모르지.

“꼬마. 다음번에 또 만나게 되면, 이 정도로 끝내진 않겠다. 평생 방송을 하지 못하는 몸으로 만들어주지.”

“네… 네에….”

덩치는 커도 중학생이면 아직 어린 꼬맹이다. 이 정도 겁만 줘도 충분하겠지.

나는 꼬마를 내려놓고 어둠 속에 몸을 숨긴 채 방 안을 빠져나갔다.

*    *    *

나는 조심스럽게 창문을 열고 방 안으로 들어섰다.

어휴… 정말 쉽지 않네.

지난번 다크 스코프 아저씨의 사례도 있기 때문에, 혹시라도 히어로 활동을 한다고 나대지 않게 하기 위해 잘하지도 못하는 협박을 하려니, 온몸에 땀이 줄줄 흘렀다.

혹시라도 잘못돼서, 이 어린 꼬마 친구가 이렇게 위험한 일에 뛰어들게 해선 안 되니까.

스물 중반에 다시 고등학생으로 돌아와 살고 있는 나에게도 충격적이고 힘든 일들의 연속인데, 저 어린 나이부터 히어로에 대한 환상 때문에 이 위험한 일에 뛰어들게 하고 싶진 않았다.

똑똑.

“강림아. 잠깐 들어가도 되니? 과일 좀 가져왔어. 먹으면서 해.”

나는 화들짝 놀라 주변을 살폈다.

아직 슈트를 벗지도 않았고, 나 대신 만들어뒀던 홀로그램도 지우지 않았다.

“앗. 잠시만요~.”

나는 부랴부랴 슈트를 해제하고 홀로그램을 지우곤 자리에 앉았다.

“네. 들어오세요.”

“어휴. 강림이 땀 냄새 좀 봐. 공부하는데 무슨 땀을 이렇게 흘리니?”

나머지는 모두 정리하는 데 성공했지만, 항상 흘리는 땀은 어떻게 할 수가 없네.

“아… 공부하다 보니 졸려서 잠 깬다고 잠깐 운동을 했더니… 고마워요, 이모. 과일 먹고 금방 한번 씻고 나올게요.”

“그래, 그래. 고생이 많아. 우리 조카, 파이팅!”

“파이팅!”

어휴. 하마터면 들킬 뻔했네.

*    *    *

다크 카이저가 어둠 속으로 몸을 숨김과 동시에 꺼져 있던 전기가 다시 들어와 방 안을 밝혔다. 방금 전까지 하준의 멱살을 잡고 들어 올렸던 다크 카이저는 보이지 않았다.

“가… 갔어요? 가셨나?”

갑자기 어두컴컴한 쪽으로 뒷걸음치길래 뭐하나 싶었는데, 눈치채지도 못한 사이에 방 안에서 사라져 버렸다.

“와, 씨. 진짜 때릴 줄은 몰랐네.”

사하준은 찔끔 흘러나오는 눈물을 닦으며, 머리에 나 있는 혹을 쓰다듬었다.

아니, 히어로인데 시민을 이렇게 패도 되는 거야? 살짝 쥐어박은 게 아니라 거의 풀스윙급 꿀밤을 때리네. 그러다가 내가 맞아 죽으면 어쩌려고?

“어휴… 슈트가 허접해서 별거 아닐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훨씬 과격하잖아.”

하준은 엉망진창이 되어버린 스튜디오를 보며 한숨을 푹 쉬었다.

어떤 성향의 히어로인지 알아보기 위해 도발을 했던 건데, 라이브 방송을 켜자마자 스튜디오로 찾아와 전부 부숴 버렸다.

여길 그렇게 찾기 쉽게 만들진 않았는데….

숨겨놨던 카메라에 메모리 카드도 전부 회수해 갔는지, 아무리 찾아봐도 보이지 않았다.

원래 목적은 화가 나서 찾아온 다크 카이저를 찍어 미튜브에 올릴 만한 영상감을 만드는 것이었지만, 직접 다크 카이저를 만나보니 생각이 달라졌다.

가면의 오른쪽 눈구멍에서 흘러나오던 푸른빛이 갑자기 붉은빛으로 바뀌고, 그 빛이 일렁이며 흘러나올 때,

자신의 마음속을 들여다보는 듯한 그 불빛에 하준은 감동과 전율을 느꼈다.

슈트의 디자인이 구려서 별거 아닌 히어로라고 무시했었는데, 직접 만나본 다크 카이저의 모습은 카리스마 있는 멋진 다크 히어로, 그 자체였다.

그래서, 하준은 다크 카이저를 몰락시키기 위해 만들었던 계획들을 전부 철회했다. 다크 카이저는 하준이 순식간에 몰락시킬 수 있을 정도로 하찮은 히어로가 아니다.

대신, 하준은 오늘부터 다크 카이저라는 히어로의 전담 연출가가 되기로 마음먹었다.

하준은 스마트폰을 꺼내 성민에게 전화를 걸었다.

“어, 성민아. 우리 채널 이름 바꿔라. 어. 뭘로 바꾸냐고?”

음… 어떤 이름이 좋으려나… 그래. 이거다.

“한밤의 수호자. 더 다크 카이저.”

*    *    *

“뭐지? 갑자기 그쪽 인터넷 상황이 별로 안좋아졌나?”

나강림의 반 친구, 박준석은 방금까지 보던 방송이 갑자기 꺼지는 바람에 아쉬워하고 있었다.

“아니 갈데 가더라도 내 도네에 대답은 끝까지 해주고 가야지!”

그 동안 내가 쏴준 도네가 얼만데...

박준석이 잠시 투덜대며 다른 일을 하고 있는 그 사이, 보고 있던 방송, 미드나이트 헌터 채널명 변경 공지가 올라왔다.

<미드나이드 헌터는 히어로 다크 카이저와의 콜라보레이션의 일환으로 금일 부로 한밤의 수호자, 더 다크 카이저로 채널명이 변경됩니다.>

그와 함께 채널에 올라온, 다크 카이저와 미드나이트 헌터가 함께 찍은 사진.

실은 비슷한 옷을 입고 찍은 뒤 잘 합성한 합성 사진이지만, 기본적으로 다크 카이저의 슈트가 허접한 탓에 티가 잘 나지 않았다.

“우와. 갑자기 방송 끄더니 다크 카이저를 만났나보구나. 진짜 개 신기하네.”

박준석은 채널에 알림설정 버튼을 눌렀다. 앞으로 꾸준히 찾아와서 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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