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3화
한밤의 수호자, 다크 카이저(4)
“수아야. 낼 봐.”
“어. 강수아. 오늘 공부 같이 해줘서 고마웠다.”
“도유진. 내일 시험 배운 거 틀리면 각오해.”
수아는 도유진이 좋은지 싫은지 모르겠네. 싫어하는 거 같은데, 공부는 생각보다 더 열심히 가르쳐준단 말이지. 약간 책임감이 있는 친구라 그런가.
소연이 집을 기준으로, 수아와는 집이 다른 방향이지만 도유진과는 집이 같은 방향이기 때문에, 한 10분 정도는 더 같은 방향으로 움직여야 했다.
아까는 친구들과 같이 있어 별말 하지 않았지만, 어제 싸움이 꽤 격렬했던 모양인지 도유진의 얼굴엔 반창고가 몇 개 붙어 있었다.
“어휴. 싸움박질해서 여자애가 얼굴에 상처나 달고 다니고… 그게 뭐 하는 짓이냐?”
“어쭈? 어제는 싸우든 말든 신경도 안 쓰고 있더니. 이제 와서 걱정하는 척하기냐? 그리고 내가 이겼으니까 괜찮아. 황채경, 코 깨버렸거든. 어제 쌍코피 나더라.”
아니, 그 나이에 친구 쌍코피 낸 게 자랑이냐? 가끔 얘랑 이야기하다 보면 남중 다니는 중학생이랑 이야기 하는 기분이 든다니까.
또 어제는 도유진에게 신경 쓸 수 있는 상황이 아니어서 조금 억울했지만….
이렇게 억울한 일이 하루 이틀 일도 아니고, 어차피 말할 수도 없는 일들로 고민해 봐야 해결할 수 있는 문제도 아니고.
나는 억울해하는 대신 그냥 조금 더 도유진에게 신경을 써주기로 마음먹었다.
결국 도유진이 이 세계에 와서 고생하는 건 나 때문이니까.
“어제 싸운 친구랑은 좀 친한 편 아니었나? 화해는 했냐?”
“어… 아니. 어제 황채경한테 카톡 해봤는데 차단했더라. 오늘 학교에서 얼굴 보긴 했는데, 아는 체도 안 하더라고.”
“화해하려면 할 수도 있는데. 솔직히 내가 잘못한 거 아니잖아. 걘 쓸데없이 애들 괴롭히는 그거, 고쳐야 해.”
지금은 내용이 많이 비틀려 버려서 의미가 없긴 하지만, 원작에서 황채경은 빌런으로 각성한 어비스 위치가 만들어낸 괴물에게 갈기갈기 찢겨 죽어버린다.
죽었으므로 당연히 그 뒤엔 나오지 않고 완전히 퇴장한다. 황채경과 함께 다니는 일진 친구들도 마찬가지로 어비스 위치에게 모두 죽는다.
당연히 그 이후로 학교 내에서 다른 애들을 괴롭히는 일진들은 나타나지 않는다.
하지만 한소연의 마음속에서 심연의 여왕이 사라졌으므로, 앞으로 황채경이 죽어버릴 일은 없을 터… 그러니까 황채경이 계속해서 학교에서 사고를 치고 다닐 수도 있는 상황이 돼버린 것이다.
생각해 보면 심연의 여왕이 어디로 도망쳤는지도 알 수 없는 상황. 어쩌면 학교 내에서 제2의 한소연, 어비스 위치가 만들어질지도 모르는 상황이다.
하지만 원작의 내용과는 달라진 부분이 하나 더 있지.
나와 함께 이 세계로 들어와 버린 도유진.
도유진은 누굴 괴롭히는 걸 달가워하지 않는 편이고, 걔네와 나쁜 일을 하고 다녔던 것도 부족한 생활비와 병원비를 구하기 위해서였단 걸 나는 안다.
그렇다면 도유진을 이용해서 황채경이 엇나가는 것을 막을 방법이 존재하지 않을까?
“나도 그런 나쁜 짓 하는 버릇 고쳐야 한다는 것엔 동감하는데, 그래도 친구니까 다시 친하게 지내봐. 그 김에 그런 짓 앞으론 못 하게 하면 좋잖아.”
“야. 뭐, 어차피 우리 오빠 수술받고 일어나면, 이 동네에서 그런 짓 하고 다닐 수 있는 애들 한 명도 없어. 우리 오빠가 아프다고 누워 있어서 그러고 다니는 거지.”
생각해 보니 그랬다. 원래 세계에선 도지훈이 오지랖도 넓고, 누굴 괴롭히는 걸 싫어하는 사람이었으니까, 나도 그렇게 찌질하게 다녔어도 괴롭힘을 당해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거기에 내가 도유진이랑 지훈이 형이랑 친하게 지내는 편이기도 했고. 그러고 보니 수술은 언제지?
“그래서, 지훈이 형 수술은 언제야?”
“어. 다음 주 수요일. 저녁 8시래. 너도 올 거지? 수술하고 눈 떴는데 너가 있으면 오빠도 좋아할 거야.”
“야, 씨. 무슨 수술이 만병통치약이냐? 수술 잘됐다고 바로 그날 눈뜨고 그러게?”
“아니, 그럴 수도 있잖아. 나강림. 언제부터 너가 내 말에 토 달 수 있었냐? 요즘 좀 컸다고 개기냐? 수술 날 올 거야, 말 거야?”
내 허리춤을 사정없이 꼬집어 버리는 도유진.
“아야, 아야. 알았어. X발. 알았다고. 야, 손 떼. X나 아프잖아.”
“진작 그럴 것이지.”
내가 사는 아파트 단지 바로 앞까지 왔기 때문에 나는 인사도 하지 않고 우리 집 방향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야, 나강림. 벌써 가냐? 나 심심한데 우리 집까지 같이 가주라.”
“내가 미쳤냐? 나도 들어가서 시험공부 해야 돼.”
“나쁜 새끼… 예전엔 맨날 집 앞까지 같이 가줘 놓고선.”
그땐 내가 너를 좋아했었고, 지금은 아니거든. 나는 인사도 제대로 하지 않고 우리 집으로 가는 엘리베이터의 버튼을 눌렀다.
[“지금은 아니라고요? 지난번에 도유진이 울려고 할 땐 또 다르게 생각하셨으면서… 내가 그토록 아니라고 외면하고 싶어 했던, 아주 오래전 접어두었던 감정….”]
보이스 소리 설정 창 오픈.
[보이스 소리 설정
제인 : □□□□□
벨제뷔트 : ■□□□□]
이 AI야, 내 머릿속에서 나가!
【“하하하! 꼴 좋다.”】
벨제뷔트가 기분 좋게 웃는 소리가 마치 모깃소리처럼 작게 울렸다.
* * *
[보이스 소리 설정
양심과 도덕의 제인 : ■■■□□
쓰레기 악마 : ■■■□□]
머릿속에 왱왱 울리는 제인과 벨제뷔트의 목소리를 전부 끄고 살면 좋긴 하겠지만, 어제만 해도 나의 양심의 소리네 어쩌네 듣기 좋은 말을 잔뜩 해놨기 때문에, 나는 다시 내 머릿속의 AI와 악마의 보이스 설정을 다시 손댔다.
어차피 나 공부하는 동안은 나름대로 배려해 준다고 방해하진 않는 편이기도 하고. 거기에 비상사태가 일어나면 바로바로 들어야 하긴 하니까. 그나저나 저 보이스 설정 이름은 왜 매번 바뀌는 거야?
【“슈트의 설정을 마음대로 손댈 수 있는 존재가 있기 때문이지. 과연 저게 양심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인지는 의문이군.”】
[보이스 소리 설정
예쁜 제인 : ■■■□□
못생긴 개구리 : ■■■□□]
【“내 본모습은 개구리가 아니라….”】
아, 시끄러워. 나 공부 좀 하게 조용히 해.
내 일갈에 작은 소리로 잠시 쫑알대다 조용해지는 벨제뷔트.
나는 조용해진 상황에서 시험공부를 하기 시작했다.
와, 진짜… 책 좋아하는 친구는 괜히 책을 좋아하는 게 아니라니까. 요점 정리, 진짜 제대로구만.
나는 아까 전에 베껴 온 소연이의 요점 정리를 보며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이래서 친구를 잘 사귀어야 해. 친구 잘 사귀면 손해 볼 일이 없다니까?
나는 원래 세계에서 나의 고등학교 1학년 시절을 회고했다. 그때의 나는… 시험이 끝나면 바로 피시방으로 달려가 친구들과 6시까지 롤을 달려 버리곤 했지.
남고의 시험 기간이란….
잠시 그렇게 공부를 하고 있던 내 귓가에, 제인의 조심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마스터. 시험공부 하시는데 죄송한 일이지만… 잠깐 보셔야 할 것이 있거든요?”]
뭐? 또 무슨 사건이야? 빌런이라도 나왔어?
[“아니… 그 정도로 중요한 일은 아닌데… 또 안 보고 나중에 아시면 불쾌하실 거 같아서….”]
뭐… 뭔데?
나는 제인의 말에 스멀스멀 올라오는 불길한 예감을 애써 누르며, 제인이 띄워주는 화면을 보았다.
<보석동 천년 빌딩 붕괴, 갑자기 나타난 루키 히어로, 다크 카이저의 구조 현장 영상 입수! /미드나이트 헌터 독점/>
<보석동 천년 빌딩 붕괴 구조 현장 영상에서 나온 다크 카이저의 능력에 대해 분석해 보았습니다. /미드나이트 헌터 독점/>
<다크 카이저와 페이퍼 백이 어떤 관계인지 알아보자! /미드나이트 헌터 독점/>
이게 뭐야?
[“지난번에 구조 현장에서 카메라 들고 다니던 그 친구. 기자가 아니라 미튜버였던 모양이에요.”]
아니, 분명 내가 카메라 부쉈는데?
[“영상 보니까 주변에 드론도 띄워놨더라고요. 구조 현장에 먼지가 너무 날려서 제대로 안 보였던 모양인데. 구조 활동에 집중하고 있기도 했고… 확인해 보실래요? 영상 틀어드릴까요?”]
야, 내가 창피하게 이 영상을 왜 봐… 나 쪽팔려 뒤지라는 말이야? 해킹해서 그냥 영상 지워버려.
[“그러기엔 생각보다 사람들이 영상을 많이 봤거든요? 조회 수도 12시간 만에 몇만을 넘게 돌파하고 있고… 부속 영상도 엄청나게 많이 만들어져 있고… 마스터 지금, 미튜브 스타예요.”]
이 쪽팔린 슈트로 하는 구조 영상을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보고 있다고?
손이 벌벌 떨리기 시작했다.
제인, 걔 대체 어디서 뭐 하는지 찾아봐. 히어로 무서운지 모르고 까부는 친구, 손 좀 봐줘야겠다.
[“마침 지금 미튜브 라이브 방송 중이거든요? 어딘지 금방 위치 잡을 수 있긴 하겠는데요… 지금 가시게요?”]
나는 한숨을 쉬며 책을 덮고 몸을 일으켰다.
그래. 이런 일일수록 빨리빨리 해결 봐야지.
정말 이 세계는 내가 편안하게 시험공부를 하게 내버려 두질 않는구나.
* * *
하준이 스튜디오로 이용하기 위해 빌린 방, 이름 하야 미드나이트 케이브에서는 하준이 구독자들을 상대로 라이브 방송을 하고 있었다.
이 라이브 방송은 물론, 자신이 만든 영상의 구독자들과 소통하고 후원도 받아먹으려는 목적도 있었지만, 하준의 진짜 목표는 따로 있었다.
“네, 여기 보세요. 어깨에서 검은색 불꽃이 치솟고 있거든요? 근데 불꽃 날개가 그냥 움직이는 것도 아니고, 하늘을 날아다니잖아요. 이거 펄럭거리기도 하거든요?”“그럼 실질적으로 얘가 실제 날개처럼 작동을 한다는 의미예요. 도구 같은 걸로 만들어낸 날개가 아니라, 진짜 능력으로 만들어진 날개.”
<ㅇㅇ 님, 1000원 후원…
그러니까 하준이 말은 다크 카이저는 신체, 자연계열 능력자가 확실하다, 그거지? 그럼 페이퍼 백이랑 멀리서도 이야기할 수 있는 능력은 어디서 나온 거야? 텔레파시 능력 아니야?>
“아, 형님들. 잘 생각해 보세요. 내가 또 히어로들이 쓰는 비싼 물건들 잔뜩 사보고 그랬잖아. 내 경험상으론 그런 능력은 무조건 정신 능력자가 만들어준 도구야. 당장 나도 비슷한 물건들 어디서 구해올 수 있을걸요? 엄청 비싸겠지만.”
<히어로 캡틴 준 님, 2000원 후원…
그럼 다크 카이저가 돈이 엄청 많은 부자라는 이야기야? 경한 그룹 회장 아들인가? ㅋㅋ>
“아니, 아니. 그런 거보다 조력자가 있다는 쪽이 더 맞는 방향이 아닐까 싶어요. 돈 많았으면 고생 안 하고 해결할 수 있는 상황도 많았는데, 그렇게 못했었거든. 예를 들면….”
피이이잉.
한참 방송을 통해 이야기하고 있던 하준의 방송 장비가 힘없는 소리를 내며 꺼졌다. 그와 동시에 방 안의 불까지 전부 꺼졌다.
왔다. 왔구나.
하준이 라이브 방송을 켰던 진짜 이유.
“꼬마. 나랑 이야기 좀 해야겠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 일전에 한 번 들었던, 기다렸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 안녕하세요? 이제 오셨어요?”
다크 카이저에게 미안한 이야기지만, 배터리로 작동하는 카메라가 방 한구석에 숨어서 작동하고 있었다.
아싸. 영상 하나 더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