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9화
새로운 계약
“허억… 허억….”
“채… 채경아. 이제 그만 뛰어도 돼… 대머리 안 쫓아온다.”
이 세계엔 꽤 많은 수의 능력자들이 존재하기 때문에, 학교에서 24시간 근무하는 경비들도 신체계열 슈페리어인 경우가 많다.
학교는 일반적으로 테러나 총기사고의 발생률이 높기 때문에 전문적인 인력이 사용되는 것이다.
그래서 황채경과 서지예도 경비를 따돌리는 데 꽤나 애를 써야만 했다.
헉헉대고 있는 채경에게 지예가 손수건을 내민다.
“…채경아. 코에서 피난다.”
까득.
“도유진… 이 X발 년… 그래도 그렇지 친구를 때려?”
피투성이가 된 코를 닦으며 채경은 이를 까득 갈았다.
뭐? 돈 때문에 친구한 거라고? 진짜 X발 년이네.
“…채경아. 그냥 그만해. 걔가 왜 돈이 필요했는지 알잖아.”
“그만하긴 뭘 그만해? 이제 돈 필요 없어졌으니까 친구도 그렇게 쉽게 그만할 수 있는 거야? 아무리 그래도 그 찐따 새끼들 편들어 주는 게 말이 돼?”
“유진이는 원래부터 그런 거 싫어했어. 한 번도 같이 괴롭힌 적 없는 거 알잖아.”
“너. 자꾸 그런 말 할 거면 너도 꺼져버려. 꼴도 보기 싫으니까. 너 같은 친구 필요 없어.”
“채경아….”
손수건을 주머니에 대충 우겨넣는 황채경이 서지예를 무시한 채 성큼성큼 걸어 학교를 빠져나가기 시작한다.
그렇게 빠져나가는 황채경의 등 뒤엔 심연처럼검은 얼룩이 묻어꿈틀대고 있었지만, 채경도 지예도 그것을눈치채지 못했다.
* * *
“다녀왔습니다!”
집안이 조용한 거 보니 아직 이모가 퇴근하지 않으신 모양이다. 시계를 보자 시간은 이제 6시가 막 지나가고 있었다. 오늘은 조금 빨리 끝나긴 했으니까.
나는 대충 옷을 갈아입고 침대에 드러누웠다. 내일도 시험이라 오늘은 시험공부를 좀 해야 하는데, 그전에 잠깐이라도 쉬어야겠다.
정신세계에 있던 시간은 실제 시간으론 1분도 되지 않았지만, 체감 시간으론 당연히 훨씬 더 길었고. 거기에 그 안에서 겪은 일들이 심리적인 부담이 되었던 건지 조금 지친 느낌이었다.
긴장되고 무서웠던 시간이 지나고, 집에서 편하게 누워 있으니까 이제 무언가를 해냈다는 뿌듯함이 찾아오기 시작했다.
제인과 벨제뷔트의 도움이 있긴 했지만, 소연을 구해낸 건 슈트의 도움이 없이 나 혼자서 해낸 일이니까.
[“그렇네요. 마스터… 이제 마스터에겐 제가 필요 없어진 건가 봐요….”]
제인이 시무룩해진 말투로 작게 중얼거렸다.
아니. 이번에 간 곳이야 정신세계였으니까 슈트가 없어도 해결할 수 있었지만, 여기선 네가 없으면 난 진짜 그냥 일개 고등학생일 뿐인걸.
[“그건 아니에요. 이제 마스터는 일반적인 고등학생이라고 할 수 없죠. 슈트가 없어도 사용할 수 있는 능력도 생겼고, 악마와의 계약을 통해 힘도 빌려올 수 있으니까요.”]
[“그리고 그 힘을 이용해 마스터의 친구, 한소연을 공포와 외로움에서 구해내는 데 성공했잖아요, 마스터. 히어로, 영웅이라는 건 꼭 수많은 사람을 구해야만 하는 건 아니에요. 한 명. 단 한 명만 구해내더라도 그 사람에게 있어서 마스터는 영웅이 되는 거니까요.”]
[“그런 의미에서 마스터. 오늘은 정말 잘하셨어요.”]
뭐… 뭐야? 오늘따라 무슨 일로 이렇게 칭찬을 많이 해준대?
[“최근 미튜브에서 육아와 관련된 영상들을 보고 있거든요. 그동안 제가 너무 마스터를 몰아붙이지 않았나 싶어서요. 육아에는 칭찬이 가장 중요하다고 하더라고요. 앞으로 잘한 일은 항상 칭찬해 드릴게요.”]
자꾸 어디서 이상한 단어들을 배워온다 했더니, 나 몰래 미튜브 영상 같은 걸 보는 모양이다.
인터넷 문화가 AI에게 끼치는 영향….
[“마스터. 저희도 미튜브 채널 하나 개설할까요? 사건을 해결할 때마다 해킹한 CCTV 영상을 모아서, 편집해서 올리면 재밌을 거 같지 않아요?”]
너 그런 짓 하면 난 차라리 혀 깨물고 죽어버릴 거야. 이미 스마트폰으로 찍힌 영상이 미튜브에 돌아다니고 있단 말이야. 볼 때마다 창피해서 죽고 싶으니까, 제발 관둬. 그런 이상한 생각하지 말고 오늘 있었던 일이나 같이 정리해 보자.
내 말에 알고 있었다는 듯, 홀로그램 메모장을 띄워주는 제인. 확실히 이런 서포트는 벨제뷔트보다 제인이 훨씬 낫다. 내가 필요한 부분을 말하지 않아도 바로바로 찾아 도와주니까.
[“당연하죠, 마스터. 악마가 어떻게 저보다 서포트를 잘하겠어요? 홀려다가 악덕 계약서에 사인이나 하게 만들겠지.”]
【“다 참아도 이런 음해는 도저히 참을 수가 없군. 적어도 나와 내 밑의 악마들은 차원 표준보다 훨씬 양심 있는 계약서를 만드는 편이란 말이다.”】
시끄럽네. 제인, 생각에 집중 좀 할 테니 벨제뷔트 목소리 좀 줄여.
【“아니. 내가 필요할 땐 힘 좀 빌려달라고 사정하더니….”】
벨제뷔트의 목소리가 점점 작아지는 것을 보며, 나는 허공에 떠 있는 홀로그램에 생각을 정리해 보기 시작했다.
오른쪽 눈에 존재하는 능력은 현재까지 총 3개 정도.
먼저 미래를 볼 수 있는 능력.
사실 이 부분은 지금까진, 내 눈으로 보게 된 미래가 진짜 일어나는 일인지 아닌지에 대한 확신이 없는 상태였다.
그런 상황에서 혹시나 모르는 상황을 대비하여 믿는다는 느낌이 강했었는데, 이번에 있었던 일은 확실히 일어날 수 있을 법한 일이었다.
내가 소연이의 정신세계에 들어가 막아내지 않았다면, 정말로 거기 있던 사람들이 모두 죽고, 퀘이사 혼자서 소연이와 대적하는 그런 상황이 실제로 일어났을지도 모른다.
그럼 퀘이사, 강수아의 성격상 평생이 지나도 스스로와 소연을 용서할 수 없었을 거다.
원작 만화에서도 비슷한 일이 일어났었다. 그 때문에 둘은 서로를 잡아먹지 못해 안달이 난 아치 에너미처럼 묘사 되었었지.
그리고 두 번째로 각성한 능력, 다른 사람의 정신세계로 들어갈 수 있는 능력이었다.
하지만… 미래를 보는 능력처럼 스스로 발동시킬 수는 없는 모양이다.
심연의 여왕이 없어진 것이 확실한지를 확인해 보려고 다시 한번 소연이의 정신으로 들어가려고 시도해 보았지만, 내 눈이 반응하지 않았거든.
[“제 분석으로는 아직 데이터가 조금 부족하긴 하지만, 아무래도 정신적으로 불안정해진 사람에게만 들어갈 수 있는 게 아닌가 싶어요. 이번 한소연처럼요.”]
그 말을 듣자 떠오르는 장면.
스타라이트의 꿈을 꾼 후, 보았던 미래.
정신 공격을 받은 퀘이사와 대적하던 나, 다크 카이저.
그리고 이번에 새로운 능력을 각성할 때도 들려왔던 목소리.
“너라면… 이걸 막을 수 있을까?”
…내게 이 능력을 준 사람은 퀘이사도 그런 정신적인 공격에서 구해내 주길 바라고 있는 게 아닐까?
그리고 세 번째로….
내 의지에 따라 거울처럼 내 얼굴을 비춰주는 제인.
나는 거울을 보며 오른쪽 눈의 능력을 개방했다. 내 오른쪽 눈에 확 밝혀지는 붉은빛.
나는 그 빛을 보다 눈을 감았다.
스르륵.
내 눈에서 빠져나간 붉은빛이 보는 것들이, 내 머릿속으로 들어온다.
나는 붉은빛을 움직여 벽을 뚫고 복도로 나가보았다.
“아휴… 오늘따라 엄청 무겁네.”
엘리베이터에서 장 본 물건을 잔뜩 들고 낑낑대며 내리는 이모가 보였다.
화아악.
다시 내 눈으로 붉은빛을 불러들이고, 나는 서둘러 현관문을 열어보았다.
“엄마야. 깜짝이야.”
“아이구, 이모. 이렇게 무거운 거 가지고 들어오실 거면 나 부르시지.”
나는 이모가 바닥에 내려둔 물건들을 들고 안으로 들어섰다.
“강림이 어디 가려던 거 아니었니?”
“아니요. 이모 무거울까 봐 나가본 거지.”
“어떻게 알았어?”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실 때 낑낑대는 소리가 거실까지 다 들렸어요. 이모.”
“아이구. 옆집에도 다 들렸겠네.”
“그러니까 앞으로 이런 무거운 거 사러 가시려면 날 데리고 가. 같이 사는 조카 놔두고 왜 이모가 이런 걸 들고 오고 그래.”
“너 오늘 시험 봤잖아. 시험공부 하라고 두고 이모가 맛있는 거 해주려고 그랬지.”
“그래도 이런 건 나 시켜도 괜찮아. 고생하셨으니까 정리는 내가 할게. 빨리 편한 옷으로 갈아입고 오세요.”
“그래. 고맙다, 우리 조카. 부탁 좀 할게.”
봉투 안에 든 물건들을 정리하며, 나는 세 번째 능력을 홀로그램 메모장에 적었다.
붉은빛이 보는 것을, 함께 볼 수 있는 능력.
* * *
슈트가 없이도 사용할 수 있는, 새로운 능력을 얻었지만, 일단 가장 중요한 건 내일 있을 중간고사 시험이다.
일단 공부는 해놔야지.
내가 이 세상에서 계속 살아가기 위해선 히어로 활동도 중요하지만, 그 이후 내 평범한 삶에 대한 비전도 확실히 세워져 있긴 해야 하니까.
이번에 얻은 능력을 활용하면 커닝 같은 건 일도 아니긴 하겠지만, 당연하게도 난 이런 능력을 이용해 사익을 챙길 생각은 없었다.
히어로 활동을 하면서 배운 책임감 때문이기도 하지만, 내 정신세계에 박혀 내가 하는 모든 것들을 지켜보는 존재가 둘이나 있기 때문이기도 했다.
나는 나 스스로를 믿지 않는다.
운이 좋아 여러 가지 능력을 얻어 히어로 활동을 하고, 이 세상의 여러 가지 비밀을 알고 있긴 하지만, 나는 내가 정말 쉽게 자만에 빠지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렇게 자만하는 자아가 비대해지면, 나는 아마 내가 아닌 다른 사람들을 쉽게 무시하고 멸시하는 쓰레기 같은 사람이 되어버리겠지.
조금만 방심한다면 예전에 래빗즈 때 했던 실수를 반복하고, 또 반복해 버릴지도 모른다.
그런 의미에서 나를 항상 보고 있는 제인과 벨제뷔트는 내 양심과 같은 존재들이다.
나를 지켜보고 있는 존재들이 있는 한, 나는 자만하지 않고 항상 옳은 길을 찾기 위해 노력할 수 있다.
나처럼 의지력이 낮고 평범한 사람으로선, 항상 능력을 사익으로 사용해선 안 된다는 사실을 자각하고 있어야만 한다.
[“마스터… 저를 그렇게나 중요한 존재로 생각하고 계셨군요…! 너무 감동이에요.”]
근데 이 능력 활용하면 공짜 영화나 공짜 공연 같은 거 볼 수 있지 않나? 히어로 영화의 시사회 같은 거, 남들보다 미리 본다든지… 이 정도는 사용해도 괜찮지 않을….
[“…마스터?”]
아니. 농담, 농담이야. 다시 공부할게.
* * *
지금 일어나는 이야기는 강림이 시험공부를 하기 위해 집중하고 있는 동안, 슈트 안에 펼쳐진 검은 공간, 그 안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혹시 내가 없는 동안 강림이에게 쓸데없는 수작을 부린 건 아니겠지?”]
어두운 검은 공간 한구석에 있던 별빛 구름에서 맑은 여성의 목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슈트의 핵심적인 기능을 담당하고 있는 AI, 제인의 목소리였다.
【“하. 머릿속에 있는 모든 것을 꺼내서 보는 주제에 더 의심하는 건가? 방금까지 너를 믿겠다고 생각하던 소년을?”】
파지직… 파직….
어두운 검은 공간 안에, 불길한 흑염의 색으로 일렁이는 별 하나. 그 안에 체인에 칭칭 감긴 채 묶여 있는 작은 개구리 한 마리.
제인이 대화하려는 존재는 지옥에서 현세에 온전하게 강림하지 못한 채, 봉인의 사슬에 봉인되고 만 지옥의 군주, 벨제뷔트였다.
[“강림이를 못 믿는 게 아니라, 너를 못 믿는 거지.”]
【“그냥 인정하는 게 어떤가? 내가 저 소년에게 네 정체에 대해 말해 버리는 것이 불안하다. 그렇게 인정하는 게 편하지 않겠나?”】
제인은 그 말에 분개할 뻔했지만, 기대하는 것처럼 반짝거리는 흑염을 보며 분노를 가라앉혔다. 악마가 하는 말에 일일이 흥분해선 좋을 필요가 없다.
[“그런 말로 나를 도발하려 해도 소용없어. 나는 강림이가 너 같은 악마에 정신이 홀릴까 봐 걱정할 뿐이니까.”]
【“그래? 그렇다면 더 제대로 관리해야겠군. 네 마스터는 내가 그래도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는 모양이거든.”】
[“너의 힘이 쓸 만하니까 이용하는 것뿐이지. 너와 강림이는 그저 계약 관계일 뿐이야.”]
또, 또 시작이다. 벨제뷔트는 제인과 함께하는 대화가 전혀 즐겁지 않았다. 매번 같은 흐름으로 흐르는 대화가 지겹지도 않은지, 제인은 매번 똑같은 방식으로 자신을 의심해 온다.
【“아니. 그건 너도 나랑 별다를 것 없지 않… 이봐. 난 이런 답답한 삶이 지루해지는 참이거든? 이참에 나랑 계약 하나 하는 것이 어떤가?”】
[“내가 악마랑 계약할 것 같아? 무슨 수작을 부리려고?”]
이럴 줄 알았다. 하지만 벨제뷔트는 더는 참을 수가 없었다.
【“일단 조건부터 조금 들어보라고. 내가 너의 정체와 너의 비밀에 대해서, 네가 떠나는 그날까진 절대 말하지 않겠다는 조건과 더불어, 네가 떠난 이후로도 강림이에게 해코지하지 않겠다는 계약을 하도록 하마. 네가 떠난 이후에도 난 여기에 봉인되어 있을 거 아닌가. 이 외에도 네가 원하는 조건이 있다면 모두 긍정적으로 검토하도록 하지.”】
[“그렇게 해서 네가 얻을 것이 없잖아. 이 조건 사이에 대체 뭘 숨겨놓은 거지?”]
【“아직 내 조건을 말하지 않았을 뿐이다. 내 조건은… 지금은 내가 소년에게 도움을 줄 때 외의 말들은 대부분 소년에게 들리지 않고 있지 않나? 검열의 강도를 조금 줄이고 소년과 대화를 조금 더 하고 싶다. 내 요구 조건은 이게 전부야.”】
[“…겨우 그게 전부인 게 확실해? 대화하면서 다른 수작을 부리려고 하는 게 아니고?”]
【“아니, 난 그냥 너무 지루할 뿐이다. 사슬 안에서 너흴 지켜보는 것밖에 할 수 없는데, 너무 답답하고 지루해! 나를 싫어하고 의심하는 너와의 대화는 나를 미치게 한다. 아주 그냥 미쳐 버릴 것 같다고!”】
미쳐 버릴 것 같다고! 같다고! 같다고! 같다고!
수다쟁이 악마의 비명이 어두운 공간 안을 메아리쳤다.
지옥의 군주라고 생각할 수 없을 만큼 비굴한 목소리였다. 외로워서. 심심해서. 지루해서. 제인은 지옥의 군주가 말하는 이유가 너무 구차한 점이 오히려 믿음직스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옥의 군주라는 이 악마는 자신이 알기론, 자신의 체면과 품위를 중요하게 생각한다. 자신의 체면이 떨어질 만큼 비명을 질러댈 정도면, 사슬의 봉인이 지옥의 군주의 존재 자체에도 꽤 큰 영향을 주는 모양이다.
제인은 자신이 떠나간 이후에도 강림이에게 도움이 될 방법이 어떤 것이 있을지를 생각해 보았다.
[“좋아. 대신 내가 떠나기 전까지 맘에 들지 않는 부분이 있다면, 언제든지 계약 조건을 수정할 거야.”]
【“잠깐! 말도 안 되는 소리다. 그건 계약이라고 하지 않는다. 그건 노예지! 세 가지. 원하는 동안 세 가지 조건을 더 추가할 수 있게 해주마.”】
[“좋아. 세 가지. 계약서 쓰자.”]
제인은 불쌍하게 칭얼대는 지옥의 군주와 악덕 계약을 맺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