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7화
심연(4)
뜨득… 뜨드득….
일반적으로 만화나 영화에서 괴물이 본모습을 드러낼 땐, 등장인물들이 괴물이 모두 변할 때까지 지켜보고 있는 경우로 그려지는 경우가 잦은데, 나는 오늘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다.
일단 첫 번째로 갑작스럽게 일어난 변화를 뇌에서 온전히 정보로 받아들이지 못한다. 처음 보는 장면이니, 저게 무슨 장면인질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
둘째로, 그렇게 변화하는 모습은 굉장히 그로테스크하고 공포스럽다. 뚜둑거리는 소리, 살이 찢어지고 뼈가 움직이는 그 모습. 그런 모습을 처음 보게 되면, 그 그로테스크한 모습에 잠시 사고가 멈춘다.
뜨득 뜩 뜨득
【“정신 차려라, 어둠의 황제! 그렇게 가만히 있다간 그대로 죽는다!”】
머릿속에 울려 퍼지는 벨제뷔트의 목소리에 나는 멍한 정신으로 뒤로 몇 걸음을 움직였다.
【“소년! 정신 차려라!”】
내가 뒤로 몇 걸음 밀려난 사이, 손에 채찍을 쥔 성인 여성과 비슷한 형태를 갖춘 그것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것은 사람의 형태를 하고 있었다.
팔이 네 개고, 턱이 반쯤 갈라져 있고, 키는 3미터는 될 거 같고, 눈이 흰자위 없이 모두 검은색이라는 것만 빼면.
“나강림… 그리고 강수아… 너희 너무 거슬려….”
그것이 손에 쥐고 있던 채찍이 바닥을 후려친다.
키리리리리릭! 캬라라라락!
채찍을 맞은 바닥에서 이전에 해치웠던 바퀴벌레들이 튀어나와 나를 향해 기어 오기 시작했다.
나는 괴물들에게 대적하기 위해 반사적으로 사슬을 들어 올려 휘둘렀다. 내가 휘두른 사슬이 바퀴벌레 한 마리를 박살 냈지만….
“그 오른쪽 눈. 그리고 오른손에 쥐고 있는 사슬. 나강림. 넌 대체… 뭐야?”
KUH CHCHH!
그 뒤로 다시 한번 휘두른 채찍이 몇 배는 더 많은 바퀴벌레를 만들어냈다. 거대한 바퀴벌레들이 뒤엉켜 나를 향해 기어 오기 시작했다.
키리리리리릭! 캬라라라락!
키리리리리릭! 캬라라라락!
【“도망쳐라! 소년! 넌 지금 슈트도 없고, 네 힘을 완전히 사용할 수 없다. 네가 지금 저것들을 모두 해치우기란 불가능이야!”】
나는 벨제뷔트의 말을 듣고 뒤를 돌아 달려 나가기 시작했다.
“너만! 너만 없었으면 소연이는 내 것이 될 수 있었는데!!!”
키리리리리릭! 캬라라라락!
키리리리리릭! 캬라라라락!
분노에 찬 목소리와 휘두른 채찍이 벽을 때리는 소리가 내 등 뒤에서 들려온다.
저게 대체 뭐지? 내가 원작에선 본 적이 없는 괴물인데….
【“심연의 여왕이다. 저 소녀는 태생적으로 마이너스적인 에너지를 가득 가지고 태어난데다, 차원의 문을 넘나들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다.”】
【“내가 저 소녀를 이용해 지옥의 문을 열 생각을 했던 것처럼, 심연의 여왕 또한 저 소녀를 이용해 이 세계에 심연의 문을 열 계획을 세우고 있었던 모양이군.”】
아, 맞다. 지금은 내 사슬 안에 갇혀 옴짝달싹도 하지 못하는 상태지만, 한때 벨제뷔트도 소연을 차지하려던 경력이 있다.
아무래도 태생적으로 가지고 나온 힘에 더해, 불행했던 어린 시절의 경험으로 부정적인 감정을 품던 소연은, 다른 차원의 괴물들에게 차원 간의 연결을 위한 통로쯤으로 보이는 모양이다.
나는 복도를 내달리며 오른쪽 눈의 능력을 사용했다. 붉은색 기운이 나보다 훨씬 빠르게 내달리며 복도를 탐색한다.
복도를 탐색하며 슬쩍 들여다본 교실 안쪽에는 괴물들이 가득하다. 사람처럼 생긴 괴물들이 얼굴과 입에 피 칠갑한 채 교실 한구석에 우글우글 모여서 쭈그려 앉아 있다.
【“교실 안으론 들어가지 않는 게 좋겠다. 심연의 여왕의 하수인이 깔려 있구나.”】
하수인?
【“구울이다. 심연의 괴물 중 가장 흔한 타입이지. 일반적으로 최대한 공포스러운 모습으로 변하는데 말이지… 저 모습은 거의 사람과 비슷하군.”】
설명을 듣던 도중, 잠시 기시감이 들었다.
이런 이야기… 분명 어디서 본 적이 있는데….
키리리리리릭! 캬라라라락!
잠시 생각에 빠지려는 나를 깨우려는 듯, 바퀴벌레들이 울부짖는 소리가 들려온다. 나는 상념에서 깨어나 붉은 기운을 다시 움직인다.
잠시 교실 내부를 살펴본 붉은 기운이 다시 복도를 내달린다. 어디로… 어디로 도망쳐야 하지?
복도를 내달린 붉은 기운이 갈림길에서 오른쪽으로 향한 계단으로 향하려다 멈춘다. 층계의 입구에는 1층에서 아가리를 벌리고 있던 거대한 괴물이 자리를 옮겨 입을 벌리고 있다.
내가 계단을 타고 올라가려는 것을 기다리고 있는 거다.
여기는 2층, 문을 이용할 수 없다면 창문을 열고 뛰어내리면 된다. 나는 곧바로 붉은 기운을 움직여 창문 바깥을 내려다보았다.
딱 따닥 딱 딱.
상처투성이 얼굴을 한 괴물들이 아무것도 없는 허공을 향해 입질하고 있다.
【“바깥에는 아귀들이 있군. 심연을 너무 깊게 들여다본 사람들 중 일부는 심연 안으로 굴러떨어지게 된다. 그럼 저 아귀들에게 잡아먹혀 실종되는 거지. 심연의 힘을 탐하는 마법사나 과학자들이 실종된다면, 십중팔구는 심연으로 굴러떨어져 아귀들한테 죽어버린 걸 거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머릿속에서 잊고 있었던 만화 속 장면이 떠올랐다.
“꺄아아아아아아악!”
【“뭐… 뭐냐? 심연의 여왕을 보고서도 소리를 안 지르더니, 왜 이제 와서 소리를 지르고 그러는 거냐? 놀랐잖느냐!”】
나… 나 이거 본 적 있어. 본 적 있다고.
「Heroicest」의 출판사에서 만들었던 공포 만화인 「Abyssal zone」.
그 만화에서 나왔던 이야기다.
내가 한참 「Heroicest」에 빠져 있던 때 나왔던 만화라, 스포 당하지 않기 위해 아무런 정보도 찾지 않고 구매해 읽었었지. 그리고 일주일 동안 악몽을 꿨었다.
당시에는 러브 크래프트의 세계관을 어정쩡하게 베낀, 수준 미달의 공포물이라는 평가를 들으며 2권부턴 만들어지지 않았었다.
하지만 그게 사실은 「Heroicest」와 같은 세계관인, 스핀오프 작품이었던 거다.
내가 지금 공포 만화 속에 들어와 있는 거였어!! 슈트도 못 입고 도망치고 다니는 데에는 이유가 있었던 거야!!
내가 떨어지는 순간, 저 아귀들에게 물어뜯겨 죽고 말겠지!!
“꺄아아아아악!!”
【“비명 좀 그만 질러라, 소년! 네가 공포에 질릴수록 괴물들은 점점 강해지고 말 거다.”】
나는 그 말을 듣고 달려가다 내 등 뒤를 살펴본다. 바퀴벌레들이 어느새 나와 꽤 가까워져 있었다. 크기도 더 커진 거 같고, 크게 벌린 입 안의 이빨 또한 더 날카로워진 듯한 기분이다.
【“어렵게 생각할 필요 없다. 어비스와 연결되는 도중이긴 하지만, 아직 이곳은 어비스가 아니야. 아직은 한소연, 그 소녀의 머릿속이다. 그 소녀가 겁에 질려 악몽을 꾸고 있는 거야. 잠들어 있는 그 소녀의 정신을 차리게 한다면, 이 세계가 정신을 온전히 잠식하는 건 피할 수 있을 거다.”】
나는 도서실에서 흘러나오던 빛을 떠올리고, 그 안에 있던 소연이를 떠올렸다. 이 세계와는 완전히 다른 모습이었지. 분명 소연의 정신은 어비스에 완전히 침식되진 않았다.
그렇다면, 나는 3층으로 올라가야만 한다. 3층의 문을 두드려 소연의 정신을 깨워야만 하는데, 그러기 위해선 내가 3층으로 올라갈 필요가 있다.
나는 오늘 오전에 검사센터에서 받았던 결과를 생각했다. 내 육체는 내추럴 중에서도 상위권에 가까운 능력치를 가지고 있다고 했다. 내 원래 세계에서 운동깨나 하는 사람들 정도로는 올라갔다는 이야길 거다.
그 육체 능력이 정신세계인 이곳에서도 통용될지는 의문이지만, 시도하지 않으면 어차피 죽을 판이다.
나는 오른쪽으로 향하는 대신, 그대로 복도를 내달려 창문을 향해 몸을 날렸다.
쨍그랑!
창문을 깨트리며 손으로 창문틀의 위쪽을 붙잡는다. 몸을 날리며 생겨난 관성이 내가 잡아당기는 창문틀 덕분에 원심력으로 바뀐다.
딱 따닥 딱 딱
바닥에서 나를 향해 입질하는 아귀들의 이빨 소리가 들려온다. 다시 공포에 아득해지려는 정신을 붙잡는다.
회전하려는 몸을 그대로 끌어올려 위쪽 창문을 다시 깨고 올라선다.
쨍그랑!
키리리리리릭!캬라라라락!따닥딱딱딱따닥딱!
나를 따라오려던 바퀴벌레들이 바닥에 떨어져 아귀들과 뒤엉키는 소리가 들려온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내려다볼 시간은 없다.
나는 또다시 복도를 내달리기 시작했다.
도서실이 코앞이다.
내가 얼마 남지 않은 복도를 내달려 도서실에 가까워지려던 순간,
또다시 채찍 휘두르는 소리와 함께, 복도가 쭈욱 길게 늘어나며 도서실까지의 거리가 멀어진다.
뭐… 뭐야? 복도의 길이까지 늘일 수 있다고?
다 닿았다고 생각했던 것이 멀어진 바로 그 순간, 엄청난 공포가 몰려오기 시작했다.
허억….
키리리리리릭!캬라라라락!
내 뒤에 나를 따라오던 바퀴벌레들은 어디로 갔는지 모두 사라졌다. 바퀴벌레들 대신 몰려오는 것은 깊은 어둠. 나를 잡아먹을 듯 다가오는 깊은 어둠이다.
어느새 내 몸엔 슈트가 입혀져 있었다. 슈트의 무게가 점점 무거워 나를 짓누르기 시작했다. 홀로그램창은 떠 있지 않았다.
제인! 제인! 스피드 모드! 파워 모드! 제발!
허억… 허억….
슈트의 무게에 숨이 가빠오기 시작했지만, 뒤쪽에서 나를 잡아먹기 위해 달려오는 어둠을 피하기 위해선 멈춰서는 안 된다.
쿵!
“복수! 형제의 원수! 내 어머니의 원수!”
피를 뒤집어쓴 토끼가 교실의 문을 두드린다. 피를 뒤집어쓴 탓에 하얗던 토끼의 모습이 붉게 보였다.
나는 어느새 외나무다리 위에 서 있었다. 외나무다리의 밑에는 비쩍 말라버린 도지훈이 나를 향해 입을 벌리고 있었다.
딱!딱!
양옆에는 내가 떨어지길 저주하며 손을 휘두르는 토끼들, 그리고 그 밑에서 내가 떨어지기만을 바라는 도지훈.
“내 형제의 원수! 어머니의 원수! 복수! 복수! 죽어! 죽어!”
딱!따닥딱!
나는 점점 숨이 막혀오는 것을 느꼈다. 점점 숨이 막혀오고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숨을 쉴 수가 없다. 숨을 쉴 수 없다. 숨 쉴 수 없다. 숨 쉴 수 없어….
욱씬….
“강림아. 나 없다고 늦잠 자지 말고 일찍 일찍 일어나.”
그때, 내 귓가로 들려오는 이모의 목소리.
“삼시 세끼 항상 잘 챙겨 먹고. 대학은 꼭 졸업하고, 좋은 사람 만나서 결혼도 하고, 애도 낳고. 애가 결혼하고 손주도 보고. 내가 못 한 거 다 해주고 나서 따라와야 해. 먼저 오면 이모한테 혼난다?”
이모가 돌아가시기 전날 내게 했던, 유언 같았던 말들.
“니네 엄마 아빠랑 참을성 있게 기다릴 테니까 천천히 와.”
그와 동시에 내 정신이 서서히 돌아오고 있음이 느껴졌다.
찬 바닥의 기운이 내 볼에 느껴진다. 나는 내가 쓰러져 있음을 깨닫고 몸을 일으켰다.
“킥… 키킥… 킥… 키….”
도서실 복도 앞에 쓰러진 나를 보며 킬킬 웃고 있던 어비스의 여왕이, 내가 일어나는 것을 보고 웃음을 멈췄다.
욱씬… 욱씬….
오른쪽 눈이 쿡쿡 쑤셨다.
저 괴물이 내게 가하던 정신 공격을 오른쪽 눈이 돌려놓았음을 문득 깨닫는다.
난 괜찮아. 이제 정신이 좀 들었어.
내 말을 알아들은 것처럼 욱신거리던 고통이 사라진다.
【“다행이군. 어둠의 황제. 아까까지 소녀 같은 비명을 질러대길래 이대로 끝나나 했다.”】
뭐가 다행이야? 나 죽으면 너도 풀려났을지도 모르는데. 나 죽길 바랐어야 하는 거 아냐?
【“봉인되어 있던 내가 풀려난다고 어비스에서 심연의 여왕을 이길 수 있겠는가? 맛있는 먹잇감밖에 되지 않을 터. 나로서는 네가 정신을 차리는 것이 더 낫다.”】
“대체… 넌 뭐야?”
심연의 여왕이 내게 걸었던 공포를 이겨낸 바로 지금 이 순간, 나는 심연의 여왕이 소연에게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깨달았다.
바로 저것이다.
소연의 머릿속을 엉망으로 만들어 점점 어둠의 구렁텅이로 밀어 넣는 것.
심연의 여왕이 어비스 위치를 만드는 방법이 바로 그것이었다.
나는 방금까지 느꼈던 심연의 공포를 떠올렸다. 나의 존재 자체가 지워지는 듯한 답답함과 공포. 심연의 여왕의 목표는 그 공포를 통해 소연의 존재를 지워버리고, 그 위에 자신의 모습을 뒤집어씌우는 거다. 그래서 내가 여자애 같은 비명을 마구 질러댔던 거다. 심연의 여왕이 내 몸을 뺏으려고 했으니까.
【“아니. 내가 보기엔 그거랑 관계없이 네가 무서웠던 거 같다만.”】
…나는 벨제뷔트의 지적을 무시하고 다시 생각에 빠졌다.
내 생각이 맞다면, 나는 이제는 이 녀석을 쓰러트릴 수 있다.
내가 「Abyssal zone」이든, 「Heroicest」든 둘 중에 하나라도 끝까지 봤더라면, 훨씬 더 빠르게 알아차렸을 텐데… 머릿속에 잠겨 있던 공포를 이겨내고 나자, 이 괴물들의 실체가 보였다.
“…심연의 공포를 이겨내? 너 정체가 뭐냐?”
“내 정체? 고등학생, 다크 카이저, 박애주의자, 그리고 소연이 친구.”
영화로 보면 되게 멋진 대사였는데, 내가 하니까 되게 구리네.
“…친구 …친구라. 역시… 넌 떼어내야 맞겠다.”
뚜둑… 뚜둑….
다시 한번, 심연의 여왕의 몸이 변화하기 시작한다.
결국 결론적으론 소연을 구해내기 위해선 이곳을 빠져나가기만 해선 안 된다. 결국 저것이 소연의 머릿속에서 빠져나가야만, 소연을 이 컴컴한 심연의 공포 속에서 벗어나게 할 수 있다.
[어비스의 여왕이 만들어낸 심연의 공포에서 벗어나는 데 성공하셨습니다. 동화율 : 10.6% 획득.]
[현재 차원 어비스(한소연)의 동화율 : 12.7%]
[동화율을 사용하여 차원, 헬의 군주 벨제뷔트의 힘을 불러옵니다.]
“필요 없는 부위는 떼어내야, 진짜 괴물이 만들어지는 법이지.”
온전히 자신의 모습을 드러낸 심연의 여왕이, 내 앞에 모습을 드러낸다.
그와 동시에, 내 오른손의 체인에서 흑염이 뿜어져 나와 흑염의 날개를 만들어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