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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어로 만화 속으로 나 강림-38화 (38/236)
  • 제38화

    난 히어로 같은 거 진짜 싫어.

    하… 그냥 돌아가서 무르자고 할까….

    그래도 원작에선 빌런이었던 사람인데, 괜한 짓을 했나?

    생각해 보면 원작에서의 나이트 스코프는 육체/정신계열 빌런이어서 몸도 꽤나 날렵했었는데, 어째 다크 스코프는 육체 능력보다 정신계열 능력이 더 발달해 버린 것 같기도 하다.

    아무래도 이전엔 가족을 잃은 충격으로 육체적 훈련을 더 열심히 했을 가능성이 더 높기도 하지만, 그런 걸 제외하고도 원작과는 너무 다른 전투 방식을 가지고 있다.

    원작의 나이트 스코프는 이름답게 자신이 개조한 총기를 사용해서, 장거리 사격을 이용한 전투 방식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유명한 슈퍼 빌런이었으니까.

    각성을 어떤 방향으로 하냐에 따라서 능력의 분배가 달라질 수도 있는 걸까? 원작의 나이트 스코프 때보다 지금 다크 스코프의 수법이 더 악랄해진 거 같기도 한데….

    만약 내게 뿌렸던 가루가 독이나 다른 병증을 유발하는 약품이었다면, 그 공격으로 크게 다쳤을 가능성이 높다.

    원작에서 저런 식으로 변칙적인 전투 방식을 사용하는 빌런이 없었던 건 아니지만, 원작에서의 나이트 스코프는 저런 식의 공격을 사용하지 않는 빌런이었기 때문에, 너무 방심했던 감도 있다.

    앞으론 원작 등장인물들의 공격 방식이 바뀔 수도 있다는 점을 항상 머릿속에 집어넣고 있어야 할 듯하다.

    드르륵….

    생각에 빠진 채 내 방 창문을 열고 들어가려다 나도 모르게 창문을 너무 빠르게 열어버린 탓에, 시끄러운 소리를 내고 말았다.

    [“걱정하지 마세요. 마스터. 아직 곤히 주무시는 중이에요.”]

    내 방 창문에 따로 홀로그램이 설치되어 있는 탓에, 내가 왔다 갔다 하는 게 바깥에서 찍힐 확률은 거의 없지만… 그래도 나는 조심스럽게 창문을 닫고 커튼을 쳤다.

    슈트 해제.

    [“마스터. 오른쪽 눈에 생긴 붉은 기운이요. 요 며칠간 계속 분석해봤는데, 원래 뮤턴트 인자가 생기면 능력이 어찌 되었든 몸 전체로 뻗어나가 슈페리어화 되는 게 정상인데, 마스터의 오른쪽 눈동자 안에만 뮤턴트 인자가 생성되어 있는 상태예요. 즉, 마스터는 지금 오른쪽 눈동자만 슈페리어인 상태예요.”]

    “뭐? 그게 가능해?”

    평소엔 생각만으로도 대화하는데, 이번엔 나도 모르게 입 밖으로 말이 나오고 말았다.

    [“그러게요. 그게 가능한진 저도 이제 처음 알았네요. 그게 온몸으로 퍼져나갈지, 아니면 또 다른 현상을 가져올진 조금 지켜봐야 할 거 같아요. 다행스럽게도 브루트 인자가 섞인 것 같진 않지만….”]

    나는 땀범벅이 된 얼굴을 거울에 비추어보았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아직도 내 오른쪽 눈동자 깊은 곳에 붉은 기운이 스며들어 있는 것이 보인다.

    [“일단 계열은 정신계열 슈페리어인 걸로 추정되고 있어요. 축하드려요. 평소에 슈페리어가 아닌 걸 꽤 아쉬워하셨었잖아요.”]

    능력이 뭔데?

    [“글쎄요… 단편적인 미래를 보여주는 능력? 마스터가 보던 미래가 거의 반쯤 이뤄졌잖아요?”]

    그렇네… 원래 나이트 스코프로 활동하던 정학근이 지금은 다크 스코프랍시고 나 따라 하면서 설치고 있으니까… 아직 내가 본 장면인, 경한 병원의 원장실을 저격하는 장면은 나오지 않았지만, 이 정도면 내가 미래를 본 게 맞다고 할 수 있겠다.

    그거 말고 다른 능력은?

    [“저도 아직 파악이 잘 안 돼요. 계속해서 분석은 하고 있지만… 실마리가 생기면 다시 알려드릴게요.”]

    나는 다시 한번 내 눈을 바라보았다.

    번쩍.

    내가 바라보는 것을 알기라도 하는 듯, 내 눈 안의 붉은 기운이 흔들 움직인 것만 같았다.

    *    *    *

    “가, 강림아. 수아야~ 그럼 이따가 봐!”

    나름 쾌활하게 인사해 주면서 자신의 반으로 향하는 소연이에게 손을 흔들어주며, 수아와 함께 우리 반 안으로 들어섰다.

    “야아아, 강림아! 너 어제 ‘히어로 아카데미에 합격한 찐따가 사실은 SSS급 능력자!?’ 봤냐? 그거 어제 쩔더라.”

    “뭐냐, 그 혼종은.”

    역시나 오늘도 변함없는 준석이의 인사를 적당히 받으며 내 자리에 앉았다.

    또 역시나 변함없이 지각인 듯 비어 있는 도유진의 자리.

    요즘 지각 안 하고 나보다 일찍 일찍 잘 다니는 것 같더니만, 오늘은 또 늦으려나.

    하긴, 도유진 얘가 일주일이 넘게 일찍 온 것도 기적이긴 하지.

    하지만 도유진은 오늘 종례 때까지 결국 학교를 나오지 않았다.

    *    *    *

    “그래서… 오늘 도유진 왜 안 나오는지 아는 사람 있어? 야, 서지예. 너 도유진, 왜 안 나왔는지 몰라?”

    “저 유진이랑 안 친한데요.”

    원래 항상 도유진과 함께 다니던 서지예였지만, 최근 몇 주간은 서로 개 닭 보듯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아서… 아무래도 분열이 조금 있긴 있었던 모양이라 생각은 하고 있었다.

    여자들 사이에서 일어난 일이라 내가 뭐라고 하기도 좀 그렇고… 거기에 원래 질이 안 좋은 애들이었으니까, 오히려 같이 안 다니면 더 낫겠다 싶어서 내버려 두고 있었는데…. 쟤네랑 무슨 일이 있어서 안 나오는 건가?

    “나강림. 넌 아는 거 없어? 너 도유진이랑 동창이라며.”

    “아니요…. 안 그래도 카톡도 해보고 했는데 안 받아요.”

    “후우… 일단 알겠다. 도유진이 왜 안 나왔는진 선생님이 알아볼 테니까 쓸데없는 소문 내지 말고, 다들 밤길 조심히 다니고 항상 사건 사고에 휘말리지 않게 조심하고. 내일 보자.”

    아예 담임 선생님도 모르는 무단결석이었어? 얘가 아무리 막장이어도 학교 안 나올 애는 아닌데….

    그때 뒤에서 수군수군 대기 시작하는 반 아이들.

    “걔 맨날 애들 잡아다 약 팔고 그러더니, 잡혀 들어간 거 아니야? 맨날 골목에서 양아치 짓이나 하던데.”

    “풉. 아니면 자기가 약하고 뻗어 있는 거 아님? 그럼 진짜 막장 인생인데.”

    저것들 방금 담임 선생님이 뭐라고 한 건지 못 들었나?

    갑자기 화가 나 한마디 쏘아붙여 주려던 그때, 서지예가 쑥덕거리는 아이들 앞으로 천천히 걸어가기 시작했다.

    “야. 너희 집으로 안 꺼지냐?”

    서지예의 날 선 반응에 놀란 아이들이 눈치 보다 조용히 제 짐을 챙기고 바깥으로 나가버린 탓에, 나도 화낼 타이밍을 놓쳐 버렸다.

    방금 자기 입으로 도유진이랑 안 친하다고 해놓고선… 지들끼리 뭐, 저런 식으로 통하는 게 있는 건가?

    “…….”

    시선이 느껴졌는지 나를 잠깐 노려보더니, 아무 말 없이 돌아서는 서지예.

    참나.

    쟤네는 히어로도 아니면서 왜 저렇게 폼에 살고 폼에 죽는지 모르겠네. 지네가 무슨 느와르 영화에 나오는 조폭들인 줄 아나 봐.

    나도 신경전은 그만두고 가방을 대충 챙기고 몸을 일으켰다.

    제인. 오늘 슈트는 밤쯤은 돼야 입을 수 있겠어.

    [“네, 마스터. 도유진 님은 마스터의 소중한 첫사랑… 아니, 소꿉친구니까요. 주변 사람의 상황을 돌보는 것도 히어로의 미덕 중 하나랍니다.”]

    쓸데없는 말을 하려다, 내 심정을 읽은 탓인지 말을 돌리는 제인.

    도유진이 며칠 전까지 레온 PC방에서 알바를 계속했었으니까, 아무래도 거기 가서 한번 아는 게 있는지 물어나 볼 생각이다.

    *    *    *

    음식 냄새, 키보드 소리, 탄식과 감탄사, 그리고….

    엥. 분명 전엔 여기서 알바 하고 있지 않았나. 아직 앞 타임이랑 교체를 안 해서 그런가?

    아무리 목을 빼고 찾아봐도 도유진의 ㄷ 자도 안 보인다.

    내가 여느 고딩처럼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카운터에 서성거리자, 주문받은 라면에 물을 올리던 한 알바생이 눈길을 줬다.

    “저기, 돈은 저기 무인기에서 넣으면 되는데.”

    “네?”

    “저기 안 보여? 저기서 돈 넣으면 된다고.”

    아니, 보자마자 왜 반말이야.

    아무리 내가 교복을 입고 왔다고 해도 갑자기 반말 세례를 맞으니 기분이 급격하게 나빠진다.

    “나 게임 하러 온 거 아닌데?”

    그렇게 말하고 빤히 알바생을 쳐다보자, 무성의하게 응대하던 알바가 드디어 내 얼굴을 제대로 쳐다봤다.

    눈매가 올라간 고양이상 얼굴.

    어… 좀, 아니 꽤 미인이신 것 같기도 하고.

    “그럼 뭐 하러 오셨어?”

    “그게… 유진이 찾으러요. 전에 보니까 여기서 알바 하던데….”

    PC방 미인 누나 어택에 올라온 화는 어느 순간 사라지고, 몸을 배배 꼬는 나.

    “어머. 유진이 친구야? 그러고 보니까 교복이 익숙하네?”

    “네, 네에….”

    아, 박준석 놈 어쩐지, 근처 PC방은 안 가고 레온 PC방만 주야장천 오더라.

    와, 배신자. 나한테 말도 안 했네.

    나는 일방적인 롤 약속 파토에 대해선 일절 생각지 않고 속으로 박준석을 씹을 찰나.

    “미안한데, 유진이 오늘 안 나왔어.”

    “아 그렇… 아니, 왜요?”

    “어제 근무 때 갑자기 오빠가 아파서 병원에 가봐야 한다고, 근무 좀 바꿔 달라고 해서 내가 대타 뛰는 거야.”

    “아니, 지훈이 형이 병원에 있었어요?”

    “뭐, 이름은 나도 잘 모르는데. 전에 들어보니까 원래도 입원 중이었을걸?”

    뭐? 유진이 오빠가 아프다고? 그럴 리가 없는데?

    내가 원래 살던 세계에서의 유진이 오빠, 도지훈은 내가 이 세계로 날아오기 전까지 격투기 세계권 선수로 이름을 날리던 사람이다. 그렇게 건강하던 사람이 갑자기 이렇게 아프다니.

    무슨 사고가 났던 건가?

    나는 귀찮아 보이는 PC방 누나한테 기어이 병원 이름까지 알아내 서둘러 PC방을 나섰다.

    *    *    *

    천산 대학병원의 입원실.

    BEEP- BEEP-

    병실 안의 환자 모니터링 장비가 불안한 소리를 내며 울리고 있었다.

    병실 침대에 누워 있는 건, 내가 아는 도지훈이 맞았다. 분명 그렇게 건강하고 멋지던 사람이었는데, 이 세계에선 식물인간이 되어 일 년이 넘게 일어나지 못하는 중이란다.

    도유진, 이 계집애는 이래서 돈을 그렇게 모으고 있었던 거야? 나한테 말이라도 했으면….

    나는 뭐라 할 말을 잃고 멍하니 의식 없이 누워 있는 도지훈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야, 나강림. 너 여기서 뭐 하냐?”

    그때 내 등 뒤에서 들리는 까칠한 목소리.

    도유진이었다.

    *    *    *

    병원의 한쪽에 만들어져 있는 휴게실.

    희고 싸늘한 그 숨 막히는 공간 안에 나와 도유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손엔 커피 한잔을 들고 멍하니 테이블만 바라보고 있었다.

    그 숨 막히는 정적을 깬 건, 나였다.

    “도유진. 너 왜 이렇다고 나한테 이야기 안 했어?”

    분명 나보다 도유진이 힘들었을 테지만, 내게 아무 말도 해주지 않았다는 서운함이 내 말투를 날카롭게 만들었다.

    아, 이게 아닌데.

    “야, 뭐 좋은 일이라고 너한테까지 말을 해….”

    들키고 싶지 않은 사실을 들킨 탓인지, 평소와 다른 도유진의 풀죽은 목소리에 심장이 울렁울렁 하다.

    “그래도… 너랑 나랑 안 세월이 얼만데… 내가 지훈이 형을 모르는 것도 아니잖아.”

    “가족들이 아무리 말려도 지가 하고 싶은 거 하고 싶다고 우기다가 저렇게 된 놈이, 뭐가 자랑스럽다고 주변에 말을 하고 다녀?”

    “야, 너 니네 오빤데 어떻게 말을 그렇게….”

    깜짝 놀라서 뭐라고 하려다, 눈물을 참고 있는지 필사적으로 천장을 올려다보는 도유진을 보니 다시 한번 심장이 아려왔다.

    이 세계에서 도유진을 보게 된 후론, 꽤 오랜만에 느껴보는 감정이었다. 내가 그토록 아니라고 외면하고 싶어 했던, 아주 오래전 접어두었던 감정.

    “그래서, 어쩌다가 저렇게 다친 건데.”

    조금 마음이 조급해지기 시작했다.

    “하, 너도 우리 오빠 알잖아. 어릴 때부터 동네 대장이랍시고 나대던 거. 나이 먹어서도 별것도 아닌 자기 능력 하나 믿고 히어로를 하겠답시고 나대다가 저렇게 누운 거야. 자기 주제도 모르고….”

    그 말을 들은 순간, 온몸의 피가 빠져나가며 머릿속까지 차가워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내가 모르는 사이, 이 세계에서 도유진의 가족사를 바꿔 버린 것이다.

    그러고 보면, 이 세계에선 격투기를 아무도 보지 않았다. 생각해 보면 당연한 일이다. 매일같이 인터넷을 켜면 빌런과 히어로가 목숨 걸고 싸우는 영상투성이인데, 그 누가 격투기를 보겠는가?

    히어로와 빌런이라는 격투기 선수들이 목숨 걸고 하는 데스매치가 이 세상에선 일상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원래 세계에서 격투기 선수였던 도유진의 오빠는, 이 세계에선 히어로를 지망하던 히어로 지망생이었다.

    “히어로 같은 거. 진짜 싫어.”

    도유진이 한 말이 내 가슴에 비수처럼 박혀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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