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4화
다크 스코프의 탄생(1)
“나 강림. 왜 그래?”
정신을 차려보니 옆에서 강수아가 나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너 방금, 눈….”
혹시… 들켰나?
“어? 아? 괜찮아. 괜찮아. 잠깐 어지러워서.”
강수아가 지금 내 눈을 봤을 가능성이 있긴 하지만, 그 이야기를 꺼내게 해선 안 되겠다 싶었다. 옆에 소연이도 있을뿐더러, 대충 말을 돌리다 보면 착각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으니까.
“갑자기 땀을 엄청나게 흘리네. 괜찮아? 운동을 너무 심하게 해서 근육통이라도 온 거 아니야?”
아. 고마워, 소연아.
한소연이 나를 보고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말하는 것을 들으며, 나는 고개를 저었다.
“어제 좀 무리를 했더니 근육통이 좀 심하네. 며칠간은 운동 못 하겠다 야.”
“그러니까 조심 좀 하지 그랬어.”
“나강림. 뇌도 근육으로 되기 전에 몸 상태 보면서 운동해.”
다행스럽게도 강수아도 그 이야기를 다시 꺼내지 않는 걸로 봐서, 잘못 봤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다행이야.
“초보라서 그래. 초보라서. 앞으로 조심해야지.”
후….
나는 마음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 * *
“자. 문제 풀이 들어가자. 선생님이 몇 가지 문제를 적고 번호 부를 테니까, 불린 번호가 일어나서 문제 풀어보자.”
딱… 따다닥… 딱….
조용한 교실에서 선생님이 칠판에 필기하는 소리만 교실을 울렸다.
수아와 소연이와 함께했던 정신없던 등교가 끝나고, 드디어 조용히 내 생각을 정리할 수 있는 시간이 돌아왔다.
조회 시간엔 나도 혼란스러워서 생각이 쉽게 정리가 되지 않았다. 거기에 지금보다 훨씬 시끌벅적하기도 했고.
자, 이제 어제오늘 있었던 일들을 하나하나 생각해 보자.
일단, 어제 스타라이트가 만들었던 아스트로 스타즈의 팀업 멤버 중 하나인 래피드 스타, 페이퍼 백의 아내가 죽어야 하는 운명에 처해 있던 걸 내가 구해냄으로써, 원작의 내용과는 다르게 변화했었지.
“자… 일단 3번. 3번 나와서 풀어봐.”
“네.”
저 앞자리에 있던 강수아가 일어나 문제를 풀기 시작하는 모습을 보며, 나는 재차 다시 혼자만의 생각에 빠져들었다.
그 사건을 막아내면서 입은 상처가 너무 깊어 치료사 밀키웨이에게 치료를 받으러 가서 나도 모르게 기절했었고….
기절했을 때, 이 세계에 와서 처음으로 꿈을 꿨었지. 잠깐… 근데 기절했는데 꿈을 꿀 수가 있나? 인터넷에 검색해 보고 싶네.
“어, 그래. 맞았어. 잘했네. 수아 들어가고….”
뭐야, 나강림. 그런 헛생각 할 시간이 아니잖아. 정신 차려.
나는 뭔가 다른 곳으로 흘러가려던 정신을 다시 붙잡고, 다시 생각을 정리해 나가기 시작했다.
“야, 쟤 누구냐? 저기 자는 애. 어, 그래. 깨워. 왜 못 깨워? 저거 유진이냐? 넌 학교 와서 맨날 그렇게 잠만 퍼 잘 거야? 나와서 문제 풀어봐.”
기절해서 꿈을 하나 꿨었는데… 그 꿈속에서 스타라이트를 만났지.
꿈속에서 스타라이트가 내게 새로운 만화책을 보여줬었는데, 그 만화책의 주인공인 퀘이사가 정신 지배를 받아 히어로들을 죽이고 다녔고… 그래서 나와 싸우게 되는 내용이었지.
“풀지도 못하는데 수업 시간에 잠은 왜 이렇게 자냐? 인석아. 밤에 게임 좀 그만하고 일찍 일찍 좀 자라.”
“아, 쌤. 저 게임 같은 거 안 하거든요?”
“어쭈. 너 휴대폰 안 내고 꼬박꼬박 폰 게임 하는 거 모를 줄 알고? 요거, 요거. 지금 소지품 검사 들어갈까?”
“아~ 쌤~ 한 번만 봐줘요~.”
하하하하!
교실을 울리는 우리 반 친구들의 웃음소리.
그냥 지독한 악몽일 거라 생각했는데, 그 꿈을 꾸고 난 이후에 내 눈에 붉은색 빛이 들어와 버렸단 말이지….
그리고 오늘, 자경단에 관련된 뉴스 내용을 들으면서 다시 내 눈이 빛났었고, 또 내 꿈속에 만화책이 나왔었단 말이야….
“그다음 마지막 문제는… 8번. 8번 나와서 풀어봐.”
그 만화책은… 내가 빌런이 되는 걸 막아냈던 나이트 스코프가 다른 사건을 일으키려는 듯한 장면이었고… 이걸 그냥 개꿈이라고 생각하기엔 너무 찝찝하고….
“8번? 8번 없어? 오늘 결석한 사람도 없잖아? 8번, 누구야?”
역시 일단, 정말 내가 본 사건이 일어나는지를 확인하는 게 우선이겠어.
그럼, 정말 그 꿈속의 스타라이트가 내게 힘을 줬던 걸까?
“어디 보자… 7번이 성민이고… 8번은… 나강림? 나강림! 어쭈~ 정신 안 차려?”
한참 생각에 빠져 있던 나는, 수학 선생님이 나를 부르는 소리에 깜짝 놀라 몸을 일으켰다.
“네… 네?”
“집에 두고 온 새색시 생각하고 있냐? 무슨 생각을 그렇게 깊게 하는 거야? 장가 빨리 가고 싶으면 빨리 나와서 문제부터 풀어.”
허둥지둥 나가 풀려고 해봐야, 수업에 집중도 하지 않고 있었는데 무슨 문제인지 알 리도 없었고. 나는 수학 선생님께 혼나고 망신당한 채로 다시 자리로 돌아와야만 했다.
힝….
* * *
“내가 항상 하는 말 알지? 밤에 돌아다니지 말고. 사건 사고에 안 휘말리게 조심하고. 골목길로 드나들지 말고. 밤에 문단속 잘하고. 다들 조심하고 내일 보자.”
언제나처럼 짧게 할 말만 마치고 떠나는 담임 선생님.
나는 또 박준석이 게임이나 같이 하자고 보채기 전에 빠르게 복도를 달려 빠져나갔다.
오늘 아침에 내 눈을 통해 보았던 만화책의 내용을 생각해 보면, 나이트 스코프가 나타날 위치를 어느 정도까진 알아차릴 수 있다.
그렇다면 지난번에 정학근 아저씨네 가족을 구하기 위해 썼던 것처럼, 그 주변에 카메라를 설치하고 나이트 스코프가 나타나기를 기다리면 된다.
이 근처에서 슈트를 입기 가장 좋은 장소를 알고 있지.
나는 주변을 면밀히 살피면서 평소에 자주 쓰는 골목길로 들어가 재빨리 슈트를 입었다.
슈우우웅
그리곤 곧바로 건물의 옥상으로 뛰어올라 경한 센트럴병원이 있는 방향으로 활공하기 시작했다.
제인. 천산시 지도 좀 열어줘.
[“네. 마스터.”]
내 눈앞에 펼쳐지는 천산시 지도.
나는 그중 경한 센트럴병원을 찍어 그 주변만 확대했다.
제인. 경한 센트럴병원의 원장실을 저격할 수 있는 위치의 건물들이 어디 있는지 추려봐 줄래?
지도 위에 표시되는 몇 개의 건물들. 하지만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너무 많다.
거기에 건물의 위치를 확인하고 나니, 또 다른 문제에 직면하게 되었다.
건물의 위치를 내가 정확하게 알더라도, 그다음엔 이 큰 건물의 몇 층의, 어디서 저격하고 있는지를 파악해야만 한다는 문제.
내가 머릿속 만화책 내에서 본 내용은, 정확하게 경한 센트럴병원의 원장실을 스코프로 저격하고 있던 장면뿐이었다. 때문에, 확실히 어디서 일어난 사건인지 알기 위해선 수없이 많이 발품을 팔아야만 한다.
그래도… 포기해선 안 되겠지.
<“지금 여기… 나… 다크 스코프는 오늘, 죄지은 자를 벌하고, 외면당하는 자들을 대변하기 위해, 이 자리에 섰다.”>
분명. 아저씨는 이렇게 말했었다.
내 퇴장 대사를 슬쩍 바꿔서 사용한 저 대사는, 분명 나를 흉내 내고 있었다.
그리고 그건 아마 지금 하는 행동이 원작에서처럼 자신의 가족을 잃게 만든 세상에 대한 복수심이 아닌, 그저 동경심으로 나라는 히어로를 흉내 내고 있다는 증거다.
나는 이미 알고 있다.
내 손으로 사람을 죽였다는 걸 알았을 때 느꼈던 그 죄악감.
내가 한 사람의 인생을 나락으로 빠트려버렸다는 그 죄책감.
누군가를 쏠 수 있는 총이 손에 쥐어졌다고 해서, 그것을 악당에게 마음대로 쏴버려선 안 된다는 사실을, 아직 나이트 스코프는 알지 못한다.
그저 히어로를 흉내 내서 쏘아낸 총알은, 자신에게 돌아와 큰 흉터를 남기게 되겠지.
내가 겪어본 일인지라, 다른 사람이 나를 따라 하다 그런 일을 겪게 내버려 두고 싶지 않았다.
앞으로 매일같이 그 주변을 둘러보는 일이 있더라도, 정확하게 내가 본 장면과 맞아떨어지는 건물을 찾아야만 한다.
나는 내 기억에 의존해, 가장 비슷한 각도에 있을 것 같은 건물을 찾기 위해 다시 한번 허공을 날았다.
* * *
정학근은 다크 카이저가 자신을 구해준 그 날 이후부터, 계속해서 자경단 활동을 하고 싶다는 생각에 사로잡히기 시작했다.
회사에 출근해 일을 할 때에도,
집에서 휴식 시간을 가질 때도,
가족과 함께 있을 때에도,
집에서 밥을 먹을 때도,
샤워를 하고 있을 때에도,
화장실에서 일 보고 있을 때도,
심지어 잠을 자고 있을 때마저도!
유튜브에서 다크 카이저 목격담이 뜰 때면 그 영상만을 몇 번이나 돌려보며 눈에 담았다.
누군가는 중2병이라 비웃는 슈트마저도.
누군가는 비웃을지도 모르는 대사마저도.
그 모습이 뇌리에서 떠나질 않아.
.
.
.
.
.
그래서 정학근은 그날 이후로 아내 몰래 인터넷을 뒤져 자경단 활동을 하는데 필요한 물건을 몰래 하나씩 구매해 나가기 시작했다.
첫날은 가면과 슈트. 이미 아마추어들이 조악하게 만들어 팔아 재끼는 싸구려 코스프레용 슈트들이 많아서 어렵지 않았다.
둘째 날은 무기로 사용할 수 있는 싸구려 나이프와 인터넷에서 구할 수 있는 몇 가지 개조용 부품들.
셋째 날은, 큰맘 먹고 인터넷을 뒤져 알아낸 슬럼가의 불법무기 밀매상에게서 스코프가 달린 아주 오래된 엽총도 하나 샀다.
하나하나 물건을 사면 살수록, 인생 처음으로 하고 싶은 일을 하기 때문인지 인생에 활력이 생기기 시작하고, 머리가 점점 똑똑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다크 카이저가 자신을 구해줬던 그날, 바닥에 흩뿌려져 있던 레이저총의 부품들을 본 이후부터 머릿속이 맑아지고, 뭐든 할 수 있을 거 같은 기분이 들었다.
매일 밤마다 아내 몰래 인터넷을 통해 다크 카이저의 활동 영상을 분석했고, 또 자신이 산 물건들을 하나하나 개조하기 시작했다.
물건들을 개조하는 것은 자신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훨씬 쉬웠다.
왜인지 모르겠지만, 이전엔 할 수 없었던 일들이 히어로 활동을 마음먹고 난 뒤엔 원래부터 할 수 있었던 것처럼 쉽게 할 수 있게 되었다.
마치 새로 생긴 꼬리나 팔을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는 것처럼, 정학근은 새로 생긴 자신의 능력을 최대한으로 활용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경한 센트럴병원 테러 사건의 자료를 보던 그때, 정학근은 둘 사이의 미묘한 기류를 알아차리고 말았다.
둘은 이미 서로를 알고 있는 것처럼 행동했다.
그렇다면….
그때부터 정학근은 계속해서 레빗즈에 대한 내용을 찾아다니기 시작했다.
아주 크게 테러를 저질렀던 사건이기 때문인지, 레빗즈에 대해 분석해 놓은 이야기가 생각보다 많았다.
어머니가 큰 병을 얻어, 여러 병원을 전전했었음.
병원비를 위해 ATM기 속 돈을 훔쳐 달아나던 도중, 알 수 없는 자경단에게 제압당함.
자경단에게 제압당하던 도중, 형제 중 하나가 사망.
결국 모친이 죽고 나서 분노한 나머지 일으켰던 테러.
일목요연하게 정리해 놓고 보니, 레빗이 감옥에 들어갈 때까지 목 놓아 저주하던 경한 센트럴병원이 대체 어떤 곳인지가 궁금해졌다.
그래서 경한 센트럴병원에 대해 알아보고 다니던 바로 그때, 정학근은 아주 충격적인 사실을 하나 알게 되었다.
레빗즈의 모친처럼, 경한 센트럴병원에서 약을 맞은 이후로 오히려 병세가 악화된 ‘브루트’ 환자들이 수도 없이 많았던 거다.
단지 브루트들이라는 이유만으로 보도되지 않았던 사건들을 하나하나 알게 되니, 정학근은 자신이 첫 번째 타깃으로 삼아야 할 악당이 누구인지 알게 되었다.
그래서, 정학근은 슈트를 입었다.
“나는 오늘부터… 다크 스코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