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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어로 만화 속으로 나 강림-26화 (26/236)
  • 제26화

    이모 걱정 하지 마. 난 히어로 같은 거 안 할 거야.

    “다들 밤길 조심히 다니고. 요즘 세상이 흉흉해서 사건 사고가 많다. 다들 조심하고 내일 보자.”

    짧게 할 말만 하고 떠나는 담임 선생님.

    예전에 학교 다닐 땐 담임들이 그렇게 종례 시간을 질질 끌어서 힘들었는데, 요즘은 순식간이다. …우리 쌤만 그런 건가? 유독 좀 피로하신 것 같기도 하고….

    “야, 나강림. 오늘 롤 고?”

    박준석이 학교가 끝나자마자 또 나를 보챈다.

    지난번에 롤 몇 판 같이하더니, 내 버스를 타고 플래티넘으로 올라가고 싶단다.

    박준석은 솔직하게 나를 칭찬해주고 띄워줄 줄 아는, 아부에 있어선 천재적 재능을 가졌는지라 같이 한두 판쯤 하는 것도 나쁘진 않지만, 오늘은 안 되겠다.

    “나 오늘 저녁에 선약 있다. 주말에나 하자.”

    “얜 맨날 주말에나 하재.”

    “고등학생이 맨날 게임 하는 게 더 이상하지 않냐?”

    카톡!

    마침 타이밍 좋게 울리는 카톡.

    “이거 봐. 나 진짜 오늘 뭐 있어서. 간다?”

    나는 복도를 걸어 나가며 카톡을 열었다.

    [이모 : 강림아. 오늘 이모가 좀 일찍 끝났네. 학교 앞에서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천천히 와.]

    [나: 네.]

    원래 이렇게 빨리 끝나실 리가 없는데, 아무래도 나 때문에 일찍 퇴근하신 모양이다.

    내가 이모를 꽤 많이 걱정시켰나 보네.

    이모한테 내가 영 불안하게 보였나 보다.

    앞으론 더 안 들키게 조심해야지, 원.

    꼬르륵

    아… 배고파…. 오늘 급식이 맛이 없어서 대충 빵으로 때웠더니 절로 배를 잡게 되네.

    매일같이 몸을 많이 쓰고 살다 보니 기초대사량이 높아진 건지, 요즘은 먹는 양도 늘었고 금방 배가 꺼진다.

    오늘 뭐 먹자고 하지?

    *    *    *

    저쪽 길가에 이모의 차가 주차돼 있는 것이 보인다. 진짜 이모 빨리 왔네.

    나는 기분 좋게 달려가 조수석에 앉았다.

    “뭐야, 이모. 왜 학교까지 왔어? 그냥 집에 들렀다가 가도 되는 건데.”

    “우리 강림이 배고플까 봐 이모가 먼저 여기까지 왔지! 자, 이제 밥 먹으러 갑시다. 뭐 먹을까?”

    “고기. 고기 먹자.”

    “자아~ 그럼 고기 먹으러 갑시다~.”

    지이잉….

    부우우우웅….

    이모와 나를 태운 차가 출발했다.

    *    *    *

    그냥… 여자친구가 어떤 사람인지만 확인하고 싶은 거야.

    학교가 끝나고, 소연은 자신을 그렇게 합리화하며 강림의 뒤를 쫓았다.

    어떤 사람인지, 누구인지는 상관이 없어.

    그냥… 그래, 그냥 궁금한 것뿐이야. 그냥 친구 사이일 뿐이라도 애인이 누군지 궁금할 수 있는 거잖아?

    애인이 어떤 사람인지만 확인해 보자.

    단지 그런 생각이었다.

    강림이가 환하게 웃으며 달려가 차에 타기 전까진.

    안쪽에 앉아 있던 사람은 아주 슬쩍 봤지만, 분명 여성이었다.

    엄마라기엔 너무 젊고, 그렇다고 애인이라기엔 나이가 너무 많다.

    “강림이… 취향이 그런 쪽이었어?”

    그 나이 또래의 평범한 아이였다면, 가장 먼저 친인척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먼저 했겠지만… 소연이는 연애를 책과 인터넷으로 배운 모태솔로다.

    소연이의 이성은 아닐 거라고 말하고 있었지만, 각종 로맨스 소설과 영화, 드라마로 단련돼, 매일 밤 잠자리에서 자길 구해주는 백마 탄 왕자님이 오지 않을까 같은 상상이나 하는 순진해 빠진 소연이의 감성은… 혹시 진짜 그렇고 그런 어른의 사랑이면 어떻게 하지? 하는 생각을 떨치지 못했다.

    태… 택시라도 타서 쫓아가서 제대로 확인을….

    “이모야.”

    그런 소연의 머리를 차갑게 해주는 목소리.

    뒤를 돌아본 곳엔 수아가 팔짱을 낀 채 소연을 바라보고 있었다.

    “나강림 옆에 있던 사람, 강림이 이모라구.”

    “어…? 뭐…? 너… 너가 어떻게 알아?”

    하아.

    수아는 한숨을 푹 내쉬며 소연이 서 있는 교문 쪽으로 걸어 나오기 시작했다.

    “사실, 내가 끼어들 이유가 없는 이야기라 무시할까도 했지만. 네 표정 보니까 한심해서 못 봐주겠어서 말하는 거야. 쟤 오늘 저녁에 이모랑 데이트한다고 했어.”

    이모…? 진짜 이모라구…?

    “표정을 보니까 본인이 지금 어쩌고 싶은 건지도 모르는 것 같네. 혼자서 말도 안 되는 시나리오 짜지 말고, 다음엔 본인한테 직접 물어봐. 짝사랑을 현실 도피 수단으로 삼지 말고. 그건 강림이에게도 실례되는 일이니까.”

    수아가 소연을 스쳐지나 교문 밖으로 저벅저벅 걸어 나가는 동안, 소연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    *    *

    이모와 함께 간 곳은, 대학로에 있는 꽤 유명한 식당이었다.

    어떻게 유명한 줄 알았냐고?

    VS 특공대니, 유명 예능 프로그램에 나왔다는 홍보 사진에, 식당 내부엔 유명 연예인들 사인들이 한쪽 벽에 가득하거든.

    이전에 있던 세계든, 이 세계든 유명하다는 곳엔 유명한 사람들이 꼬이기 마련이다.

    야, 이거 웃기네. 히어로들 사인도 있는 모양이네. 히어로들은 그러면 여기 와서 슈트 입고 밥 먹고 가는 거야, 뭐야?

    “여기가 요즘 젊은 애들 사이에서 핫하고 유명하다고 하더라.”

    뭐야?

    안쪽으로 들어가자 보이는, 모두 히어로 슈트를 본뜬 듯한 유니폼을 입은 종업원들.

    “여기가 은퇴한 히어로가 하는 고깃집이래. 우리 강림이 히어로 좋아했으니까.”

    아, 그래서 문 앞에 히어로들의 사인이 그렇게 많았구나.

    혹시 내가 아는 히어로일까?

    나는 슬쩍 식당 여기저기를 살펴보았다.

    마침 여기저기 사진이 크게 걸려 있는 주인장처럼 보이는 히어로의 사진 밑에, 글자가 적혀 있었다.

    히어로 플레임 샷.

    처음 듣는 히어로 네임인 걸로 보아, 원작에선 크게 주목되지 않은 모양이다.

    하긴, 지금 이 시점에서 은퇴 처리되어 있는 히어로라면, 원작에서도 이미 은퇴한 상태였을 테지.

    컴공은 은퇴해서 치킨집을 차리는 것처럼, 히어로들은 은퇴하면 고깃집을 차리는 건가?

    뭔가… 신기하긴 하네.

    이모는 이미 여기에 대해서 찾아오신 게 있는 듯, 스마트폰을 잠깐 들여다보더니 이것저것 주문을 하기 시작했다.

    문득, 오늘 아침에 다크 카이저와 관련된 뉴스를 돌려버리고, 이모에게 짜증 냈었던 기억이 떠올랐다.

    이모가 그래서 날 여기로 데려온 건가…?

    내가 이 세계에서도 히어로를 어렸을때부터 좋아했던거 같으니까.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였다.

    화르륵.

    “타오르는 불꽃처럼. 플레임 샷 등장.”

    내 앞으로 다가와 초능력으로 고기를 구워주기 시작하는 종업원.

    “우와.”

    입에서 우와 소리가 절로 나온다.

    불을 사용하는 손놀림이 자못 프로페셔널한 게, 하루 이틀 한 모양이 아니다.

    아니. 자세히 보니까 손에 장착하는 느낌의 특수한 모양의 토치다.

    “오늘도 당신들의 마음에 불을 질러 버렸군. 그럼 이만 퇴장.”

    고개를 숙이고 뒤를 돌아 빠져나가는 종업원.

    저런 멘트를 히어로가 아닌데도 불구하고 표정 한번 안 바뀌고 하다니….

    저게 프로인가.

    히어로가 넘쳐나는 세상이라 그런가? 고깃집마저도 컨셉투성이다.

    “강림아 어때? 그래도 여기 오니까 기분 전환되지? ”

    “응. 동네엔 이런 식당은 없으니까… 한 번쯤 와볼 만하네.”

    무언가 말을 꺼내려다 말고 잠시 고민하는 이모.

    “이런 느낌의 특수한 고깃집은 아니었지만, 이모도 대학 다닐 땐 고깃집에서 서빙하고 그랬어. 그땐 이모도 잘나가서 이모 좋다고 번호 달라고 하던 사람들도 많았다?”

    “아이구. 그러시겠죠. 저도 유치원 땐 카사노바였답니다.”

    “어쭈? 이모 말을 안 믿네? 이모 대학생 때 얼마나 잘나갔는데.”

    “알아. 이모 좋다고 따라다니던 형 편지 내가 모르고 뜯어보고 그랬잖아.”

    “야, 그걸 네가 아직도 기억해?”

    “편지 내용도 기억나지롱. 사랑하는 소희에게….”

    “너 그 내용 읊으면 내일 아침밥 없을 줄 알아.”

    이모랑 과거 이야기로 한바탕 웃고 나서, 고기를 집어 먹다 보니 추억이 새록새록 되살아났다.

    그렇네. 이모도 대학생일 때가 있었지.

    사실 기껏 해봐야 나와 이모는 14살 정도의 차이밖에 나지 않기 때문에, 나는 이모가 대학 다니던 시절의 모습을 기억한다.

    그 꽃다운 나이에 나 키워주신다고 고생이 많으셨네.

    생각해 보니 나도 원래 대학생이었는데. 뭔가 되게 오랜만에 들어보는 느낌이네.

    대학… 실상 이 세계로 오고 시간이 그렇게 많이 지난 것도 아닌데.

    1학년 때 남자 놈들이랑 술 먹고 게임이나 하러 다니지 말고, 여자친구라도 사귀고 와볼걸. 또 대학생까지 기다리려면 아직 3년이나 남았네.

    에휴.

    나도 모르게 나오는 한숨.

    이모가 내 한숨 소리를 들은 모양인지, 조심스럽게 내게 말을 건넨다.

    “우리 강림이, 진로는 어떤 쪽으로 생각하고 있어?”

    그러네. 나 이제 고등학생이니까 진로를 새로 정해야 하는구나.

    1학년은 노느라 다 까먹었지만, 그래도 배운 게 그것뿐이니까 다시 공과대학 쪽으로 진로를 잡아봐야 하나?

    매일같이 당장의 앞날과 이 세계에 있었던 일들만 고려하다 보니, 내 미래의 앞날은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내가 원래 세계에서 보던 만화책 속 히어로들처럼 낮에는 평범한 직장인으로 생활하다, 밤엔 또 히어로를 하고 다녀야 하는 건가?

    “아직은 잘 모르겠네. 열심히 공부하다 보면 하고 싶은 일이 생기지 않을까?”

    내 말에 잠시 나의 얼굴을 걱정스럽게 쳐다보던 이모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나 학교 다닐 땐 이런 가게 없었는데, 요즘은 사건 사고도 잦고, 그걸 해결해 주는 히어로들이 많으니까 이런 가게도 생기고 그러더라. 우리 강림이 히어로 좋아하니까, 한번 와보자고 생각했어.”

    “우리 강림이 혹시, 아직도 히어로가 하고 싶어?”

    어…?

    “그래. 강림이도 히어로가 하고 싶었던 거, 이모도 잘 알아. 예전엔 가면도 직접 만들어 쓰고 히어로가 하고 싶다고 노래를 부르고 다녔잖아. 그런데 강림아. 이젠 우리 그만 언니를 놓아주자.”

    왜 갑자기 이런 흐름으로 이야기가 흘러가게 되는지 이해가 되지 않아 잠시 뇌 정지가 와서 대응하지 못하는 사이, 이모는 계속해서 내게 말했다.

    “이 세상엔 이렇게 히어로가 많아. 은퇴해서 고깃집을 차린 히어로가 있을 정도로. 네가 히어로를 하지 않아도, 네 엄마 아빠 죽였던 그 사람은 분명 다른 히어로에게 벌을 받았을 거야. 그러니까, 히어로를 할 힘이 없는 너 자신에게 실망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그렇네. 이 세계의 나강림의 부모님은 빌런에게 살해당했던 상태였지. 원작 최강훈의 설정이 내게 섞여 들어온 영향으로 이모가 나를 걱정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리고, 이 세계의 나는 슈트가 없인 내추럴일 뿐이니까.

    “그렇게 하지 않아도, 넌 나한테 히어로야. 그러니까, 그런 거 그냥 하지 말자. 응?”

    그리고, 아무 힘이 없는 내추럴 중에서도 자경단이 나오는 경우가 심심찮게 존재한다. 이모는 내가 그렇게 될까 봐 걱정하셨던 모양이다.

    “이모….”

    사실 이모는 원래 세계에선 몸이 약하셔서 자주 아프셨다.

    환절기 때마다 감기는 기본에, 조금 바빠지시면 코피를 흘리기 일쑤였고… 영양제를 입에 달고 사셨는데도 불구하고 항상 빈혈을 호소하셨었다.

    그런 몸이라 그런지, 1년에 한 번씩 건강검진을 꼬박꼬박 다녔음에도 불구하고, 갑작스럽게 얻은 병을 이기지 못하고 내가 보는 눈앞에서 돌아가셨었다.

    그땐 내가 너무 철이 없어 이모를 제대로 챙겨드리지 못했다. 그때부터 내가 조금 더 신경 썼더라면, 그렇게 아프시진 않았을지도 모르는데….

    그런데 지금 이 세계에선, 내가 동화율을 모으면 모을수록 점점 눈에 띄게 건강해지는 이모의 모습이 보인다.

    이 세계는 분명, 나에게 히어로 활동을 계속해 나가라고 강요하고 있다.

    “응. 이모. 걱정하지 마. 히어로 같은 거 안 할 거야.”

    그렇다면… 나는 이모를 위해서 가면을 쓰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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