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히어로 만화 속으로 나 강림-20화 (20/236)
  • 제20화

    엑스트라(1)

    미닝리스(meaningless).

    스스로가 스스로에게 지은 이름에 걸맞게, 이 세상의 모든 것이 가치가 없다고 생각하는 인물이다.

    이 세상에 가치가 있는 것은 단 하나도 없는데, 사람들은 왜 그렇게 가치 없는 것들에 집착하는 걸까?

    그는 감정이 없을지언정 능력이 없는 인물은 아니었기 때문에, 자신이 가진 정신계 능력과 약으로 아무 의미 없는 이 세계에서 벗어나 더 넓은 세계를 보여준다는 사이비 집단인 망령당을 만들었다.

    말이 번지르르하지, 그냥 약과 돈을 통해 사람들을 지배하는 쓰레기 빌런 중 하나일 뿐이다.

    실제로 이놈이 지옥의 업화로 타 죽을 때 가장 많이 했던 말이 죽고 싶지 않다는 말이었다.

    하긴, 초능력을 사용하기 위해선 컨셉을 지켜야 하는 이 세계의 특성상, 미닝리스도 자신의 초능력을 지키기 위해 이 세상의 모든 것이 가치가 없다고 말하고 다녔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게 진짜 진심이라면, 그건 그것대로 소름이고.

    얜 대체 어디 숨어 있는 거야?

    나는 망령당의 은척동 지부를 막 부숴 버린 참이었다.

    “아. 너무 지루하다.”

    이 지부를 지키는 간부들은 세 명의 신체 능력자들이었는데, 별다른 특색 없는 강화계 특성인지라 쓰러트리는 게 그렇게 어렵지도 않았다.

    마치 망령처럼 본인의 실체는 숨긴 채, 어딘가에 숨어서 이 모습을 계속해서 보고 받고 있을 미닝리스를 생각하니, 조금 약이 오르기도 했다.

    “제인. 이번에 끝낸 게 몇 번째더라?”

    [“천산시 내 망령당 지부로 치면 5번째 건물이고, 제가 찾아놓은 건 앞으로 16개 정도 더 있어요.”]

    뭐가 이렇게 많아? 요즘 잘나가는 프랜차이즈 치킨집도 아니고. 이렇게 많으니까 약이 사방에 다 뿌려져 있지.

    제인이 찾아놓은 8개의 건물을 다 뒤진다고 해도 미닝리스의 실마리를 잡을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다.

    워낙 폐쇄적인 집단인데다가, 약에 절어 있거나 완전히 세뇌되어 버린 탓에, 정보를 수집하기가 매우 까다로웠다.

    정신계열 능력자는 크게 두 종류로 나뉘는데, 첫 번째는 지금과 같은 정신 조작 능력이다.

    환각, 세뇌, 최면. 심하면 현실 조작 수준까지 치닫는 경우도 있다.

    정신 조작 계열 능력자들이 짜증 나는 점이 이런 부분이다. 다른 계열 능력자의 능력은 대부분 눈에 보이는 곳에서 대응할 수 있게 해주는 능력이 대부분이지만, 정신 조작 계열 능력자들의 능력은 그 실체가 모호해서 파훼하기가 쉽지 않다.

    정신계열 능력자의 두 번째 종류는 인간의 한계를 넘어선 듯한 천재적인 두뇌를 가지게 되는 능력자들이다. 이런 종류의 능력자들은 대부분 스스로 슈퍼 테크놀로지를 개발하는 데 스스로의 능력을 사용한다.

    미닝리스의 경우는 두 가지를 모두 가지고 있는, 아주 까다로운 빌런이다. 마약을 만드는 데에도 천부적인 재능을 가지고 있거든.

    항상 슈퍼 빌런들과 싸우며, 세상을 구하는 신나는 일만 할 거라고 생각했던 나의 소망은 그저 환상일 뿐이었나 보다.

    [“마스터. 퀘이사에게라도 도움을 요청하면 어때요?”]

    “뭐? 퀘이사한테?”

    [“마스터가 먼 미래에 일어날지도 모르는 세뇌 사건을 막기 위해서, 히어로들과 가깝게 지내려 하지 않는 건 알고 있긴 하지만. 마스터가 아무리 미래를 다 알고 있다고 해도 혼자서만 모든 걸 다 해내기엔 한계가 있다고 생각해요.”]

    [“지금만 해도 혼자서 미닝리스를 찾는 데엔 한계에 다다랐잖아요. 마스터 혼자서 알 수 없는 정보를 다른 사람들은 알고 있을 수도 있구요. 제가 주변에 일어나는 모든 정보를 다 아는 건 아니에요.”]

    “…….”

    “틀린 말은 아니긴 하지만….”

    삐빅- 삐빅- 삐빅-

    “오늘은 여기까지. 그건 다음에 더 생각해 볼게.”

    *    *    *

    “대수야.”

    “예. 회장님.”

    사대희의 눈에, 정대수의 이마에서부터 대수의 턱 아래까지 흐른 식은땀이 바닥으로 떨어지는 것이 보였다.

    땀에 푹 젖은 이마, 떨리는 동공, 가쁜 숨소리.

    모두 정대수가 자신에게 가진 공포 때문이리라.

    겁쟁이 같으니.

    사대희가 정대수를 지금까지 신뢰하고 사용하고 있는 이유 중의 하나가, 자기 자신에게 가진 공포 때문이긴 했다.

    정대수가 사대희에게 가진 압도적인 공포는, 정대수가 감히 사대희를 배신하겠다는 생각 자체를 하지 못하게 차단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가끔씩은, 겁먹어 이성이 마비된 무능한 부하 덕분에 화가 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사대희는 보고 있던 보고서를 책상에 내려놓았다.

    파워 피스트.

    대외적으로 깨끗하고 믿을 수 있는 기업이라는 이미지를 가지고 있는 경한에겐, 대외적인 이미지만을 믿고 일해줄 깨끗하고 순진한 광대가 하나 필요했다.

    그런 의미에서 파워 피스트는 경한이 찾던 바로 그런 광대였다.

    대중이 보고 열광할 수 있게 만드는 캐릭터 성.

    시키면 시키는 대로만 하는 충성심.

    대외적인 이미지만을 믿고 그 밑은 조사해 볼 생각도 없는, 머릿속까지 싸움으로만 가득 차 정의만 부르짖는 멍청한 광대.

    그럼에도 꽤 괜찮은 승률을 가진, 나름 이름있고 열망 있는 히어로.

    그런 놈이 이번엔 같은 놈에게 연속으로 두 번이나 지고 돌아왔단다.

    경한은 패배해선 안 된다. 만약 진다고 해도, 똑같이 갚아줄 수 있어야만 한다. 사대희는 그 말대로 했고 그것을 항상 지켜냈기 때문에, 계속해서 이 자리에 앉아 있을 수 있었다.

    “사람은… 한 번까진 실수할 수 있다. 이 세상에 완벽한 사람은 없으니까.”

    사대희의 말을 들은 정대수의 눈빛에 짙은 공포가 스쳐 지나간다.

    사대희는 공포에 질린 정대수를 보며 다시 입을 열었다.

    “두 번까진 실패할 수 있다. 사람이 성장하기 위해선 실패를 딛고 일어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사대희는 자신의 말을 들은 정대수의 얼굴에서 안도감을 읽었다.

    사대희는 슬슬 사람을 바꿔 쓸 때가 왔다는 것을 느꼈다.

    부하란 형광등과 같다. 영원히 빛나는 형광등은 없다. 언젠가 빛이 바래고 깜빡거리다, 꺼지기 마련이다.

    마찬가지로 영원히 유능한 사람은 없다. 사람도 쓰다 보면 빛이 바래고, 깜빡거리다 꺼진다.

    정대수는 이제 곧 수명을 다하려는 것처럼 불안하게 깜빡이고 있었다.

    “그러나, 같은 일을 세 번째 실패한다면, 그건 그 사람이 무능한 것이다.”

    “저희가 스폰 주고 있는 히어로 말씀하시는 겁니까?”

    사대희는 정대수가 무능하긴 해도, 자신의 말을 못 알아들을 만큼 멍청하진 않았다는 것에 만족했다.

    “그놈에게 세 번째 기회를 줘라.”

    자신의 말을 듣고 서둘러 나가는 정대수를 보며 사대희는 혀를 찼다.

    나를 물 일이 없는 개와 함께 일하는 것이 지금까진 나쁘진 않았지만, 거슬리는 놈들이 많이 나타나기 시작한 지금은… 다른 사람을 공격하지 못하는 개와 일하는 것이 썩 기분 좋게 느껴지지 않았다.

    “다크 카이저… 다크 카이저라….”

    사대희는 책상 위에 놓여 있던 보고서를 활활 불타고 있는 벽난로에 집어 던졌다.

    “웃기지도 않는군.”

    *    *    *

    으아악.

    그래도 주말 동안 좀 쉬었으니 오늘 아침은 괜찮을 줄 알았는데, 아니네.

    역시 아침은 근육통과 함께 시작하는 거지.

    암. 이게 내가 살아 있다는 증거지.

    “아이고. 우리 강림이 요즘 허리가 안 좋은가? 아침마다 죽상이네. 요즘 책상에 오래 앉아 있어서 그런가 보다.”

    방문을 열고 나가자, 아침을 준비해 주시던 이모가 내 모습을 보고 안타깝다는 듯이 말했다.

    방문을 열자마자 느껴지는 고소한 김치찌개 냄새.

    이모 김치찌개를 얼마 만에 먹어보던가. 이모 아프신 후로 한 번도 못 먹었으니까, 거의 일 년 가까이 됐나? 정말 오랜만이네.

    “에이. 아니야, 이모. 그냥 잠을 좀 잘못 잤나 봐. 학교까지 걸어가다 보면 낫더라. 이모. 오늘 김치찌개야?”

    혹시 이모가 걱정하실까 싶어 근육통이 오는 것도 참으며, 아무렇지 않은 척 식탁에 가 앉았다.

    “잘 먹겠습니다.”

    아. 군침 도네.

    나는 이모 아프고 나서부터 먹기 힘들었던 이모의 음식을 다시 먹을 수 있다는 사실에 감사하며 숟가락을 들었다.

    “요즘 우리 강림이가 반찬 투정도 잘 안 하고 잘 먹네. 고등학생이 돼서 그런가?”

    요즘 운동량도 많아졌으니 식사량이 많아진 거야 당연한 일이고, 이모가 아플 때 생각하면 반찬 투정 같은 걸 어떻게 할 수 있겠어? 그런 짓을 하면 내가 개새끼지.

    라고 말하는 대신 나는,

    “이모가 요리를 잘해서 그렇지, 뭐. 우리 이모 요리 솜씨가 날이 갈수록 늘어.”

    라고 대답했다.

    “얘가 별말을 다 할 줄 아네. 그렇게만 하면 곧 여자친구 생기겠다.”

    이모가 내 아부에 기분 좋게 웃어주는 걸 보니 몸에 쌓여 있던 근육통이 날아가는 기분이다.

    기분 좋게 싱글싱글 웃는 이모의 얼굴이 오늘따라 환해 보인다.

    우리 이모가 이렇게 예쁘셨나.

    그러고 보니 지금 이모 나이가 서른둘이던가?

    이 세계로 오기 전 내 나이가 스물셋이었으니까, 그 시점의 내 나이와 비교해도 열 살도 채 차이가 나지 않는다.

    우리 이모, 나 때문에 고생이 많았었네.

    제인이 말하길, 동화율만 계속해서 올린다면 이모가 아플 일이 없을 거라고 했었다.

    “이모. 이모는 연애 안 해?”

    “응? 갑자기 무슨 연애? 난 너랑만 살아도 괜찮아. 연애는 너 다 크고 해도 돼.”

    “무슨 소리야. 우리 엄마도 이모가 겨우 열네 살 때 아빠 만나서 결혼했잖아. 난 지금 열일곱 살인데. 그때 이모랑 비교하면 3살이나 더 먹었는걸.”

    “얼씨구. 이모가 여자친구 생기겠다고 한마디 했다고 바로 이모 물고 늘어지는 거야? 그것도 남자가 있어야 하지.”

    “이모가 맘만 먹으면 지금 바로도 가능할걸?”

    “어이구. 까불지 말고 밥이나 좀 드세요.”

    그때였다.

    한참 건강 정보를 알려주던 아침프로에서 화면이 바뀌고 송출되는 뉴스 속보.

    “어머. 저게 무슨 일이래?”

    <“뉴스 속보입니다. 천산시에 있는 아산 성모병원에서 폭발물로 인한 테러가 발생해, 아산 성모병원 본관 건물이 붕괴되는 대참사가 벌어졌습니다….”>

    「Heroicest」는 항상 그랬다.

    만화의 한계 때문일까? 아니면 작가의 역량이 거기까지밖에 되지 않았던 걸까?

    악당들이 하는 나쁜 짓을 막아야 한다고 묘사하면서도, 악당들이 이런 짓을 무슨 생각으로, 왜 하는지에 대한 묘사는 그렇게 많이 하지 않았다.

    그래서 난 이 만화 속 세계에 들어온 지금, 이 세상이 내가 봤던 히어로 만화처럼 나쁜 놈이 왜 이런 짓을 하려고 했는지는 상관이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내가 지금 있는 이곳은 그게 아니었다.

    이 세상은 만화 같은 게 아니었다.

    그냥 게임처럼, 원작 속에 있는 악당들을 클리어해 나가면 그럼, 행복하게 살 수 있을 줄 알았다.

    원작과 상관없는 내용들은 미루고 외면해 가며 내가 아는 내용만, 내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내용들만을 막아내려 행동했다.

    <“테러리스트는 빌런 네임, 레드 래빗으로 알려진 자연계열 화염 능력자로, 과도한 병원비를 요구하던 병원에서 치료를 받던 어머니가 사망하게 되자, 원한에 의해 테러를 저지른 것으로 파악 중….”>

    이 세상에서 누군가를 지키고 싶었던 것은 나뿐만이 아니다. 내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의 인물들도 모두 나처럼 가족과 식사를 하고, 나처럼 가족과 이야기하고, 나처럼 저마다의 삶이 있다.

    그리고 이 세상에 사는 사람들은 자신들의 일상이 위협받게 되면, 언제든지 빌런이 될 수 있다.

    이 세상에 중요하지 않은 인물이란, 존재하지 않았다.

    [히어로 활동에 실패하셨습니다.]

    [원래 세계 선에 있던 사건을 완전히 해결하는 데 실패하셨습니다.]

    [동화율이 하락합니다.]

    [하락하는 동화율 : -4.5%]

    [현재 동화율 :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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