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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어로 만화 속으로 나 강림-15화 (15/236)

제15화

헬스폰(6)

♬♪♩

스마트폰에서 알람 소리가 울리는 동시에 눈을 뜬 나는 반사적으로 알람을 껐다.

내가 언제 마지막으로 알람 소리에 눈을 떴더라?

와. 뭔데? 왜 이렇게 개운하지?

어제 평소보다 몇 시간 일찍 자서 그런가?

몸에 쌓여 있던 피로가 조금 덜어진 느낌이다.

[동화율이 하락합니다. -0.20%]

[현재 동화율 : 22.95%]

아. 오늘은 좀 많이 떨어지네.

매일 아침 일어나는 동화율의 하락.

아침에 일어나는 동화율의 하락은 매번 일정하지 않고 유동적이다. 무슨 이유로, 왜 동화율이 떨어지는지에 대한 설명은 나오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동화율이 많이 하락했을 때 일어나는 일 또한 나는 아직 모른다. 언젠가 제인에게 물었을 때, 제인도 구체적으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에 대한 설명은 해주지 않았다.

나는 다만, 이 동화율이 하락하면 일어날지도 모르는 알 수 없는 미지의 사건이 너무 두려울 뿐이다. 이모와 도유진을 이 세계로 데려오는 것보다 지워버리는 게 더 쉬울 테니까.

그리고 나는?

나는 동화율이 다 떨어지면 어떻게 되는 걸까?

*    *    *

“어, 강림아. 일찍 일어났네. 얼른 이리 와서 앉아.”

방문을 열고 나가자마자 느껴지는 고소한 냄새.

“이모, 무슨 아침부터 이런 걸 다 했어?”

“네가 한참 집에서 쉬면서 먹을 거 잘 먹고 지내다가 학교에 갔잖아. 자꾸 늦잠도 자고 친구 집에서 깜빡 잠들고 그러는 거, 다 속이 허해서 그래. 남자는 스무 살이 넘어서도 큰다는데, 네 나이 때 가장 잘 먹어야 키도 크고 덩치도 좀 커지고 그러지. 니네 아빠랑 엄마, 둘 다 덩치가 작아서 넌 좀 많이 먹어야 커.”

식탁 위에 놓여 있는 건, 삼계탕이었다.

와. 삼계탕.

고등학교에 올라간 조카를 위해 아침 일찍부터 손도 많이 가는 삼계탕을 준비해 주다니.

역시 우리 이모밖에 없다.

“아니. 이모… 무슨 3월 아침 7시에 삼계탕을 하고 그래. 손도 많이 가는데….”

감동으로 메어오는 목을 가다듬으며 나는 수저를 들었다.

“손 별로 많이 갈 것도 없어. 방금 나가서 사 왔어. 요즘은 내가 만드는 것보다 사 오는 게 더 맛있어.”

아.

*    *    *

아침부터 삼계탕 한 마리를 죄다 먹고 오는 건 생각보다 힘들었다. 그래도 요즘 몸을 많이 써서 그런가, 어찌어찌 들어가긴 했네.

지각할 일도 없겠다. 지각할 걱정도 없이 천천히 등굣길을 걸어 나가기 시작했다.

그러고 보니 도유진, 오늘도 안 깨웠는데 자기가 알아서 일어났겠지?

등굣길을 걸어 나가다 보니, 어제와 똑같이 내 앞에 있는 익숙한 뒤통수가 보였다.

강수아.

매번 같은 시간에 마주치는 게 신기하네.

원작 만화를 볼 땐 슈트를 입기 전엔 차갑던 아이가, 슈트를 입고 나면 열혈 히어로가 된다는 느낌의 캐릭터로 받아들였지만, 막상 함께 같은 반에서 공부하게 되니 느낌이 달랐다.

한소연이 원하지 않는데 왕따가 되는 타입이라면, 강수아는 스스로 주변을 따돌리는 아웃사이더 타입에 가깝다.

그래서 어제도 한참 말을 걸어볼 타이밍을 쟀지만, 차가운 표정과 날 선 눈빛을 보고 남고, 공대를 나왔던 모쏠 나강림이 내 몸에 강신해 버린 덕에, 단 한 마디도 제대로 붙이지 못하고 하루가 지나가 버렸지.

아니면 쟤도 낯을 좀 가리는 건가?

뒤통수를 보고 있었더니 날 선 눈빛이 보이지 않아서 그런지, 오늘은 조금 용기가 생겼다.

나는 발걸음을 조금 빨리 옮겨 강수아가 내 목소리를 들을 수 있을 정도의 뒤에 섰다.

후아. 조금 무섭네.

“어. 저기… 안녕? 강수아 맞지?”

내가 부르자 강수아가 내 쪽을 돌아보았는데, 품 안에 무언가를 꼭 안고 있는 모습이 퍽 귀엽다.

무슨 신줏단지도 아니고 뭘 저렇게 안고 있지…?

저게 대체 뭔가 싶었지만, 일단 나를 바라보는 강수아의 표정이 심상치 않았으므로, 먼저 변명 아닌 변명부터 시작했다.

“어. 내 이름은 나강림인데, 너 4반이지? 나도 4반이거든. 그러니까, 같은 반이니까, 친구잖아? 그냥 같이 가면 좋을 거 같아서.”

“어, 그래. 안녕.”

아. 나강림, 진짜….

나강림은 예쁜 여자 앞에선 말을 똑바로 못 하는 병이 있나 봐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한참 고민하다 보니, 품 안에 안고 있는 물건에 눈이 갔다.

에코백 안에 들어가 있는 쇼핑백이었는데, 쇼핑백 안이 들여다보이지 않게 스테이플러로 몇 번이나 박아놓고, 그 위에 테이프까지 둘둘 둘러놓은 걸 보니 꽤 중요한 물건인가 본데….

저러면 안에 들어간 물건을 어떻게 꺼내려고 그런 거래?

잠깐만….

저거 헬-스폰이 든 가방 같은데?

내가 어제 황서연한테 전해 달라고 부탁했던, 물건 관리를 잘해 달라는 말이… 아주 제대로 전해졌네.

완벽한 물건 관리를 위해 자기 몸에서 떨어트리지 않는 방법을 택한 모양이다.

강수아, 얘… 은근 소심한 구석이 있는 친구였구나.

하기야, 얘도 가방 내용물을 봤으니 저럴 만도 하다.

만화에서 본 적 있는 나도 내용물을 보고 엄청나게 놀랐는데, 얘라고 안 놀랬을까.

내가 강수아라고 생각해도, 저런 불길한 물건을 안 보이는 곳에 놔두기도 조금 불안하겠다 싶었다. 생각해 보니 짐 덩이를 맡겨놓은 느낌이라 마음이 좀 그렇네.

아니야. 퀘이사는 능력도 출중하고, 슬슬 돕기 시작하는 히어로도 많을 테니 괜찮을 거다.

[“찐특. 자기 합리화 잘함.”]

제인의 비아냥댐을 귓등으로 흘리며 강수아와 함께 걷는 이 길에 집중하기로 했다. 내가 제일 좋아했던 캐릭터와 같이 등교하게 되다니… 감개가 무량하다.

나를 경계하는 건지, 아니면 나를 싫어하는 건지, 아니면 그 가방 때문에 긴장한 건지. 강수아는 단 한마디도 먼저 꺼내지 않을 느낌이라 먼저 아무 말이나 찾아 입을 열었다.

“어, 넌 어디서 살아? 나 바로 저기 아산힐 사는데.”

예의 그 날선 눈빛이 내게 쏘아져 왔다.

“나. 유란동 살아.”

그래도 대답이 나와서 다행이다.

“아, 그렇구나. 멀리 사네. 매일 등교할 때 고생하겠다.”

듣고 나니 기억났네. 유란동은 천산시에서 가장 가난한 동네 중 하나다.

유란동 가까이에 가난한 브루트들이 사는 슬럼가가 있어, 치안도 썩 좋은 편은 아니다.

얘 할머니랑 단둘이 힘들게 사는 애였지.

대답해 준 이후에 분위기가 훨씬 냉랭해진 기분이다.

괜한 이야기를 꺼낸 모양이다 싶어 나는 화제를 돌리기 위해 다시 입을 열었다. 그래, 차라리 공통 관심사일 가능성이 높은 이야기를 꺼내는 게 나을지도 모르겠다.

“어. 나 지난번에 너 피시방에 있는 거 봤거든. 히어로에 관심이 좀 있나 봐?”

말하고 나니까 뭔가 스토커 같은데…?

“아니… 화면을 보려고 본 건 아닌데, 어쩌다 보니까….”

“어 진짜? 너도 히어로 좋아해?”

아, 깜짝아!

갑자기 내 옆에서 툭 튀어나온 박준석 때문에 주먹이 반사적으로 나가려던 걸 간신히 참았다.

“안녕. 나 너랑 같은 반인데, 우리 한 번도 얘기 안 해봤지? 준석이라고 해. 반가워.”

뭐야? 얜 언제 왔어? 얘 원래 이렇게 친화력 좋은 놈인가?

“그럼 너도 혹시 요즘 떠오르는 루키, 다크 카이저 알아? 이거 봐봐. 영상이 몇 개 없긴 한데, 내가 요즘 영상을 따왔는데….”

아아악! 그런 거 묻지 마!

아. 박준석 제발 조용히 하고 낄 때 끼어. 얜 왜 이렇게 눈치가 없….

“어… 알아. 뭐… 히어로로서 괜찮은 사람인 건 맞는 거 같아. 컨셉이 조금 오글거리긴 하지만, 그게 본인이 하고 싶어서 하는 건 아닐 테니까.”

와! 역시 슈퍼 인싸 박준석! 고맙다! 네가 도움이 될 때가 있구나.

그래도 남의 눈치 안 보는 박준석이 끼어서 대화를 주도해 준 탓에, 덜 어색한 상황에서 등교할 수 있었다.

그러고 보니 다크 카이저 현상수배 됐을 텐데. 아직 일반인한테까지 그런 소식이 퍼지진 않았던 건가?

[“걱정 마세요, 다크 카이저. 방금 보도 계획 알아봤는데, 오늘 저녁 9시 뉴스에서 보도될 예정인 거 같아요.”]

그런 소릴 듣고 퍽이나 걱정 안 하겠다.

*    *    *

그나저나 저 가방… 되게 불안하네. 바로 옆에 놔두니까 가방을 열었을 때 느꼈던 그 불길한 감정이 생각나서 영 찝찝한 기분이 든다.

자꾸 저게 신경 쓰여서 그런가… 수업 시간이 더 더디게 지나가는 느낌이다.

[“그건 마스터가 공부를 안 해서 그러는 거 같은데요. 수업 시간엔 수업을 좀 듣고 공부를 좀 해요.”]

아, 시끄러워. 원래 학기 초반엔 적응 기간을 좀 두는 거야.

♬♪♩

우당당탕.

“야. 이놈들아. 복도에서 뛰어다니다가 다쳐! 좀 천천히 다녀!”

점심시간을 알리는 종소리가 들림과 동시에 순식간에 교실을 뛰어나가는 아이들.

애들 참 먹성도 좋아. 나도 옛날에 점심시간마다 최대한 줄 빨리 선다고 뛰어가던 때가 있었는데. 저 멀리 맨 앞줄에서 뛰어나가는 박준석이 보인다. 쟨 진짜 아무 데나 다 끼는구나.

“야, 나강림. 밥 먹으러 안 가냐?”

“나 귀찮게 하지 말고 너나 가라.”

“아, 거 새끼. 까칠하네. 알았다.”

나한테 괜히 치대는 도유진도 내보내고, 나를 슬쩍 바라보고 나가는 강수아도 보내고, 나는 잠시 교실에서 시계를 바라보았다.

점심시간이 시작되고 5분 정도 지난 후, 나는 천천히 교실 바깥으로 나왔다.

역시.

한소연이 바로 옆 반에서 슬그머니 고개를 내밀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어? 안녕?”

다른 애들하고 섞여서 점심을 먹으러 가는 게 두려워서 매점에서 빵으로 때우려는 거다.

하지만. 미래를 보고 온 나, 나강림은 한소연의 친구가 되어주기로 마음먹었기 때문에, 우연을 가장해서 함께 점심을 먹으러 가볼 생각이다.

“어… 응….”

“아, 너도 이제 점심 먹으러 가는 거야? 같이 먹으러 갈래? 오늘 어쩌다 보니 다른 애들이랑 못 먹게 돼서. 괜찮지?”

[“마스터. 너무 구닥다리 헌팅 멘트 같아요.”]

아, 조용히 해. 내가 언제 이런 거 해본 적이 있어야 말이지.

“응? 어… 응….”

“혹시 먹으러 갈 다른 친구들 있으면 괜찮아.”

“어, 아니야… 나도 이제 막 가려던 참이었어.”

됐다.

*    *    *

속이 거북하다.

내 속이 이렇게 거북한 이유는 오늘 아침을 너무 배불리 먹고 와서일까? 아니면 내가 원래 세상이었으면 말도 못 붙였을 여자들이랑 계속해서 이야기를 하고 있기 때문일까?

아니면 내 앞에 앉아 있는 붙임성 없는 이 친구 때문일까?

이 어색한 분위기 속에서 계속해서 밥을 먹고 있으면 체할 거 같았으므로, 일단 질문을 먼저 하기로 했다.

어디 보자… 책을 좋아한다고 했었으니까….

“너 책 좋아한다고 했었지? 혹시 괜찮은 책 나한테 추천해 줄 수 있을까?”

책은 잘 모르지만, 상대방의 관심사에 맞춰주면 평타는 치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했던 질문이지만….

“어, 어떤 장르 좋아하는데? 추리? 판타지? 로맨스?”

아, 정답인가 보다.

소연이가 내 질문에 눈을 반짝이며 내 쪽으로 거리를 좁혀오는 게, 그제야 이 나이대 여자애 같아 나도 모르게 미소가 걸렸다.

“너는 어떤 장르 좋아하는데? 네가 제일 좋아하는 거로 추천해 줘.”

“난… 스티븐 킹의 ‘캐리’를 가장 좋아해.”

“캐리? 들어본 것 같기도 하고… 스티븐 킹이면 보통 공포소설 쓰는 작가 아니던가?”

“응, 맞아. 집안에선 어머니의 학대에 시달리고, 학교에선 따돌림을 당하던 주인공 캐리가 세상과 소통하려다 배신당하고, 자신이 가지고 있던 초능력으로 자신을 무시했던 친구들과 마을 사람들을 죽이고, 쓸쓸하게 죽는다는 내용의 소설이야.”

뭐?

“그 소설의 백미는 캐리를 괴롭히는 일진들이 졸업 무도회에서 프롬 퀸으로 뽑혀 올라간 캐리의 머리 위로 돼지 피를 퍼붓는 장면인데, 그때 수치심과 분노에 빠진 캐리가 초능력으로 거기 있던 사람들을 전부 죽여 버리지.”

얘가 원작에서 어떤 상황에 놓여 있던 친구인지를 깜빡하고 있었다. 중학교 시절부터 쌓여 있던 괴롭힘과 가정폭력에 대한 증오가 꽤 마음속 깊게 응어리진 모양이다.

“결국은 자신을 학대하던 어머니에게 돌아가는데, 어머니 또한 자신을 무서워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한참 신나게 말하던 소연이가 갑자기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내 얼굴을 바라보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잠시 내가 표정 관리를 못 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잠깐 딴생각을 했네. 미안, 미안. 내용만 들어선 재밌어 보인다. 그 주인공이 복수하는 내용이 흥미로운 거야?”

이내 내 얼굴을 보고 있던 소연이가 말없이 빙그레 웃었다.

처음으로 보는 소연이의 웃음.

소연이는 귀를 기울여 듣지 않으면 사라질 것 같은 목소리로, 내게 속삭이듯 말했다.

“에이. 그럴 리가. 난 그냥 스티븐 킹이 좋은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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