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히어로 만화 속으로 나 강림-5화 (5/236)

제5화

래빗즈(2)

슈퍼 히어로 「다크 카이저」는 이름답게 어둠 속에서 소리 소문도 없이 적을 쓰러트려야 하는 히어로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도 슈트에 달린 적외선 카메라가 시야를 밝혀주니, 눈이 봉인 당한 적과 싸울 때 유리한 건 당연지사다.

어둠 속에 숨어서 전투하면 할수록 유리하다.

마침 지금 시간도 밤이 깊어가는 시간이겠다. 이런 상황이야말로 다크 카이저의 장기를 발휘할 수 있는 시간이다.

물론 요즘 시대에 광원이 없는 곳은 존재하지 않지만, 얼마 전에 내가 사용할 수 있는 능력 중에서 하나 괜찮은 것을 준비해 놨다.

“제인. 그거. 그거 준비해 줘.”

이렇게만 말해도 제인은 내가 생각하는 것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알 테지.

[“분석 중….

범위는 이 건물이랑 창문에 보이는 가로등까지. 시간은 30초 정도.”]

아직 내 힘이 미약해 시간과 범위가 작지만, 그 정도면 충분하지.

『더 다크 카이저-하늘을 가리는 운명의 장막(the DESTINY)이 준비되었습니다.』

“이런 거지 같은 작명은 대체 어떻게 해오는 거야? 그냥 주변 불 한번 끄는 거 가지고 호들갑은.”

[“참고로 하늘을 가리는 운명의 장막(the DESTINY)은 다크 카이저 설정 노트 32p에 나와 있는 작명입니다.”]

“중학생 때의 나로 돌아가면, 저 공책 절대 쓰지 말라고 할 거야.”

푸슝.

제인은 내가 투덜대자 아무 신호도 없이 건물과 주변의 불을 꺼버렸다.

“어? 뭐야! 아~ 씨!!! 논문 저장 안 했는데! 미치겠다.”

거기에 뜻밖의 피해자도 생기고. 개인적인 감정은 없었어요. 미안합니다. 갑자기 주변이 암전되자, 놀란 레드 래빗이 공격을 멈추고 상황을 살피는 기색이 보였다.

나는 그 틈을 타 뒤로 풀쩍 물러나서 어둠 속에 숨었다. 슈트의 재질에 광이 거의 나지 않기 때문에 갑작스럽게 어둠 속으로 숨으면 잘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나는 적외선 카메라가 있지.

제인, 적외선 모드 켜줘.

[“적외선 모드 ON.”]

제인의 목소리와 함께 내 눈앞에 적외선 시야가 펼쳐지기 시작했다.

게임에서만 보던 적외선 카메라의 시점을 실제로 보게 되다니. 몸도 생각하는 대로 붕붕 날아다니는 게, 마치 VR 히어로 게임을 하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사락사락

뭘 하려는지 몰라도 옷자락이 움직이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내 발을 묶을 수 있는 블루 래빗부터 처리하기 위해 서둘러 몸을 움직였다.

왼쪽에 있는 레드 래빗은 발을 불편하게 만드는 블루 래빗만 처리한다면, 손쉽게 처리할 수 있다. 거기에 불꽃 능력이 나에게 상처를 입히기 더 쉽기 때문에, 나는 가장 먼저 블루 래빗을 가볍게 들어 올려 바깥을 향해 던져 버렸다.

“아… 아아… 앞… 앞이 안 보여. 부… 불 … 불, 불 좀 켜줘.”

“어디야? 어디? 이 새끼, 어디야?”

살집이 있어서 그런지 건물 밖으로 날아가 콘크리트 바닥에 패대기쳐졌음에도 불구하고, 놈은 꽤 멀쩡하게 일어났다.

그래도 지금 슈트를 입으면 웬만한 신체 능력자 버금가게 근력이 강해지는데, 이걸 버텨내다니. 자연계열 능력자에 신체계열 능력을 함께 갖춘 듀얼 능력자일지도 모르겠다.

시간이 얼마 없기 때문에 나는 곧바로 날아간 놈을 향해 따라붙어, 놈들이 내 위치를 알아차리기 전에 무릎으로 배를 찍었다.

“끄어… 어…….”

숨을 참는 듯한 비명이 들리고, 놈의 몸이 축 늘어지는 것이 느껴졌다.

지이이잉…

“여깄구나, 이 새끼야아!”

주변에 불이 다시 들어오는 소리와 함께 레드 래빗이 나를 향해 손을 휘두르는 모습이 보였다. 소리로 바깥으로 날아갔다는 사실을 유추한 모양이다.

불꽃의 길이가 짧아 꽤 약해 보여도, 철판도 뚫을 정도로 온도가 높은 불꽃이다. 공격을 당해줄 필요는 없다.

나는 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발을 디뎠다.

쩌저저적

충격으로 인해 저 멀리 얼어붙어 있던 바닥이 쩍 갈라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바닥이 얼어 있다고?

아마 바닥에 쓰러져 있는 블루 래빗이 숨을 쉬지 못하고 있는 모양이다.

그래도 지금 내가 밟아야 할 곳이 얼어버린 것은 아니다. 그대로 앞에 있는 레드 래빗의 배에 주먹을 내질렀다.

고깃덩어리를 후려치는 소리와 함께 붕 뜬 상대방이 바로 옆에 있는 벽에 부딪히는 소리가 들려왔다. 벽이 가깝다.

아직 손에서 분사하고 있는 불꽃이 타오르는 소리가 들리는 걸 보니 정신이 멀쩡한 모양이다.

정신을 차리고 내 쪽을 향해 손을 휘두르는 레드 래빗의 공격을 손으로 밀어 흘리며, 나는 곧바로 레드 래빗을 향해 돌려차기를 먹였다.

후려친 발차기가 정확하게 레드 래빗의 턱에 틀어박히는 것이 느껴졌다.

삐뽀삐뽀-

경찰차의 사이렌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하자, 조금 맘이 급해진 레드 래빗이 다시 한번 내게 손을 휘둘렀지만, 놈의 손을 가볍게 붙잡아 엎어치기를 메다꽂아 버렸다.

레드 래빗의 뼈가 부러지는 소리가 적나라하게 들린다.

이 녀석들은 아주 약간의 속성 능력과 튼튼한 육체 강도만을 가지고 있을 뿐, 전체적인 신체 능력은 일반인 이하로 느껴질 정도로 약해 빠졌다. 괜히 숨어서 ATM 강도질이나 하고 있던 게 아니다.

그래도 원작에 나온 적 있는 인물들이라 원작 주인공 최강훈처럼 뒤를 조금 봐줄까 생각했지만, 굳이 잡범들에게까지 신경을 쓸 필요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차피 이렇게 두나 저렇게 두나, 아무런 힘이 없어 다신 등장하지 않을 인물들이다. 굳이 회유하거나 공략할 필요가 없지.

거기에 원작 주인공 최강훈이 이 사람들을 도와주기 위해 했던 행동들은, 나중에 나오는 빌런에게 최강훈의 정체를 알리는 실마리가 되어버리고 만다.

나는 단지 이모와 함께 행복하게 살고 싶을 뿐이기 때문에, 내 정체가 들킬지도 모르는 단초를 만들고 싶진 않았다.

나는 경찰이 현장에 들어오기 전에 이곳에서 벗어나기 위해 반대편 건물을 향해 체인을 던졌다.

으음… 저쪽 건물에서 뭔가 반짝한 것 같은데, 기분 탓이겠지?

*    *    *

[“고생하셨습니다. 더 다크 카이저. 이번 활동의 종합 보상입니다.”]

[5.0(등장점수) + 4.5(대사점수) - 10.0(품위유지 실패) - 3.0(하늘을 가리는 운명의 장막 사용) + 3X2(전투점수)=2.5]

[히어로 활동 성공. 동화율이 올라갑니다.]

[원래 세계 선에서 존재하던 사건을 해결하였습니다.]

[오늘 하루 획득한 동화율 : 0.15%]

[현재 동화율 : 16.65%]

0.15퍼센트.

이 고생을 해서 겨우 0.15퍼센트가 올랐다.

원작에서도 중요하지 않은 내용을 다룬 탓인가? 오른 동화율은 평소와 그다지 다르지 않았다.

[“등장 신과 대사는 좋았지만 넘어져 버린 실수가 크네요. 다음부턴 조심하세요.”]

[총 2exp가 적립되었습니다.]

[현재까지 누적 경험치 152exp.]

아… 깎여나간 10점이 너무 아깝다.

나는 채점 창을 보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방심해서 넘어진 탓에 10점이나 깎였다.

아직 내가 쓰는 슈트에는 꽤 많은 제한이 붙어 있다.

청소년기인 내 몸과 정신은 내가 만들었던 능력들의 대부분을 사용하기엔 너무 나약하기 때문에, 슈트의 힘을 배분하는 방법을 점수를 계산하는 방식으로 제한하는 것이다. 모인 경험치를 이용해서 내가 필요한 능력부터 천천히 해제하란다.

일단은 내 몸과 정신의 모든 부분을 끌어 쓰는 다크 카이저 슈트의 특성상, 슈트를 착용하고 활동만 해도 내 몸과 정신은 점점 성장하지만, 아무래도 아직 갈 길이 먼 모양이다.

“아, 점수 너무 아쉽네.”

원작에 존재하는 사건인데다, 초능력을 가진 슈퍼 빌런이라 전투점수를 많이 받을 수 있을 거라 기대했지만, 생각보다 나약한 놈들이라 그런지 경험치와 동화율을 많이 얻은 것도 아니었다.

히어로로서의 성장을 위해선 히어로 활동이 강제되고, 원작에 있는 사건들을 최대한 막아내야 동화율을 빠르게 올려 나와 이모의 생활이 점점 더 나아진다.

이 세상에 곧 올지도 모르는 종말. 히어로들이 인류에게 등을 돌리게 되는 결말을 막아내기 위해선 빨리 성장할 필요가 있다.

대체 무슨 일이 있어서 갑작스럽게 빌런이 이 세상을 장악하고, 히어로들 대부분이 어디론가 사라졌는지는 알 수 없었다. 제인도 내가 모르는 부분까지 알려줄 만큼 친절하지 않다.

알 수 없는 부분들에 대해 대응하기 위해선 내가 빠르게 성장하는 수밖에 없겠지. 그리고 이 세상이 어떻게 굴러가는지에 대해서 공부도 좀 하고.

나는 잠시 내가 떠나온 방향을 바라보았다.

나도 이모가 아프던 시절을 기억하지 못하는 건 아니지만… 어차피 여긴 만화 속 세상일 뿐이다. 거기에 한 에피소드만 나오고 사라지는 엑스트라니까… 괜찮겠지.

*    *    *

이 세상의 모든 초능력자들은 자신의 능력을 사용하기 위한 여러 가지 컨셉을 가지고 있어야만 한다.

이 세계에 존재하는 초능력의 설정 때문이다.

사람에게 갑자기 꼬리를 달아준다면, 그 꼬리를 정말 자유자재로 움직일 수 있을까?

그 꼬리가 정말 주인의 뜻대로 움직여줄까? 아니지 않을까?

원작의 작가는 그렇게 생각했던 모양이다.

이 세상의 초능력자들은 처음부터 초능력을 가지고 태어나지 않는다. 뮤턴트 인자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 중에서도, 많은 사람들은 자신의 능력을 깨우치지 못하고 인생을 살아가게 된다.

그러다 갑자기 어느 날 초능력을 사용할 줄 알게 되었을 수도 있고, 아니면 어떤 계기가 존재했을지도 모른다. 혹은 누군가의 가르침으로 인해 초능력을 사용하게 되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런 사람들 모두가 초능력을 제약 없이 마구 사용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심리적인 문제인지, 혹은 정말로 그런 제약이 있는 건지는 알 수 없지만, 자신의 초능력을 사용하기 위해선 개인이 지켜야만 할 자신만의 룰이 하나씩 존재한다.

초능력이 막 나타나기 시작하던 시절, 불을 사용하던 강호열이라는 히어로가 있었다.

이 자연계 화염술사는 다른 것보다 항상 가죽장갑을 끼고 활동하는 것으로 유명했는데, 어느 날 그는 자신을 인터뷰하는 프로그램에서 이런 말을 남겼다.

<“내가 이 장갑을 항상 끼고 다니는 이유는, 내 능력으로 만들어진 불이 나에게도 뜨겁게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왜인진 모르겠지만, 이 장갑을 끼고 있을 때엔 불이 뜨겁게 느껴지지 않아요. 그래서 항상 장갑을 낀 채로 활동하는 겁니다.”>

그 이야기를 그의 라이벌 빌런이 알게 되었고, 그 빌런은 다음 전투에서 그의 장갑을 노려 찢었다. 불을 사용할 수 없게 된 강호열은 결국 라이벌과의 전투에서 죽고 말았다.

티비에나 나오는 마법소녀의 컨셉으로 활동하던 하트 스테이시는, 마법소녀 변신 컨셉을 지키지 않으면 초능력을 사용할 수 없다는 사실을 파파라치에게 들키고 말았다.

그녀는 자신의 본모습이 찍힌 신문 기사로 인해 능력을 상실하고, 일반인으로 살아가야 하게 되어버렸다.

히어로들이 가면을 쓰고, 이상한 슈트를 쓰고, 이상한 컨셉을 계속해서 지키는 것은, 자기 스스로의 약점을 감추기 위함이다. 그리고 자신이 가지고 있는 강점을 계속해서 유지하기 위함이다.

자신의 약점이 될지도 모르는 사생활을 지키고, 자신이 능력을 잃을 불상사에 놓이지 않기 위해서 자신을 거짓 속으로 숨기는 거다.

그런 의미에서 나 또한, 내가 초능력이 없는 일반인이라는 사실을 숨기기 위해 컨셉을 유지해야만 한다. 이모를 지키기 위해서.

나는 슈트의 가면을 해제했다. 아무리 슈퍼 히어로 슈트라지만, 가면을 쓰고 장시간 활동하는 건 아무래도 갑갑하긴 하다.

“제인. 이 주변에 별일 없으면 이제 그만하고 집에 갈까?”

아무리 미친 듯이 범죄가 자주 일어나는 만화 속 세상이라지만, 하루에도 몇 번씩 강력 범죄가 일어날 정도는 아니다. 그리고 그런 일들 전부를 나 같은 초짜 히어로가 처리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슈트의 인공지능인 제인이 내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 혹은 급하게 내가 처리해야 할 만한 일들을 우선으로 삼아 나에게 보고하고, 나는 그중에서 내가 처리해야 할 사건들을 정해 해결하는, 일종의 게임 퀘스트 방식에 가까운 편이다.

하지만 그중에서 긴급하게 처리해야 할 일들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의 강제성이 부여된다. 지금은 긴급한 사건은 없는 모양이다.

“제인, 오늘은 여기까지만 할게. 집으로 가자.”

나는 해제했던 가면을 다시 쓰고 옥상 난간에서 뛰어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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