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화
히어로 만화 속으로 나 강림!(1)
내 이름은 나강림.
성별은 남성, 열일곱 예비군 남고생이다.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냐고?
군대를 전역하고 복학을 준비하다 만화 속 세상에 빠져 열일곱 남고생 히어로가 된다면 가능하다.
나는 아무도 없는 골목에 숨어 가면을 얼굴에 썼다. 마치 기다렸다는 듯 가면에서 튀어나온 검은색 실이 내 몸을 타고 내려가 내 온몸을 칭칭 묶더니, 슈트의 형태로 변화했다.
이 거지 같은 슈트의 외형 면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부분이 바로 이 변신 장면이다. 이거 외엔 쪽팔리고 볼품없다.
내가 중2병 시절에나 만들었던 디자인의 슈트를 입고 히어로 활동을 한다는 게 너무 쪽팔리지만, 지금은 입고 다니는 수밖에 없다.
[변신 장면 목격자 없음. 주변 CCTV 1대. 변신 장면 촬영됨. 해킹 후 영상 삭제 조치했습니다. 조금 더 주의해 주세요.]
아, 조심한다고 조심한 건데. 이게 또 걸리네.
[주변 500m 반경 내에 강도 사건 발생. 강도 사건 발생. 강도의 감정 상태를 고려했을 때, 피해자에게 상해를 입힐 가능성이 있습니다. 빠른 출동을 요함.]
알겠다. 알겠어.
나는 눈앞에 번쩍번쩍 떠오르는 홀로그램 글씨들을 읽어 내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이놈의 세상에 들어오고 나서는 단 한 순간도 쉴 새가 없다.
나는 망토를 펼치며 옥상에서 뛰어내렸다.
내겐 좋지 않은 징크스가 하나 있다.
비가 많이 오는 날엔 꼭 나쁜 일이 생긴다.
당연히 비가 온다고 항상 나쁜 일이 생기는 것은 아니지만, 내 인생에 커다란 악영향을 끼친 안 좋은 일이 생긴 후 돌이켜보면, 그땐 꼭 비가 왔었다.
내가 열 살 때, 우리 부모님이 돌아가셨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도 그랬다.
그날도 비가 내렸다.
학교에서 수업을 받다 말고 이모에게 불려 나와, 울음을 참으려 애쓰며 내게 사실을 말해주던 비에 젖은 이모의 모습이, 아직도 두 눈에 아른거릴 만큼 선하다.
그리고 스물세 살이 된 지금.
툭··· 투투툭… 툭… 툭툭…
“2026년 4월 26일 18시 27분. 이소희 님 사망하셨습니다.”
이모가 돌아가시는 오늘도, 똑같이 비가 내린다.
* * *
장례식은 조촐했다.
가장 먼저 몇 안 되는 우리 이모의 친구들이 찾아와 다녀갔고, 오랫동안 우리 이모를 돌봐주었던 병원 관계자들이 몇 명 다녀갔다.
예전 우리 부모님의 친구 몇 분과, 우리 이모의 친구와 동료라는 사람이 몇 명 찾아왔다. 그리고 마지막까지 함께 있어 줬던 내 친구들이 돌아간 것을 마지막으로, 장례식장에 남은 사람은 나 혼자뿐이었다.
그리고 장례식을 끝내고 집에 돌아와서야 나는, 이모의 흔적이 아직 남아있는 듯한 집 안 풍경을 돌아보게 되었다.
그리고 그제야,
이모가 돌아가시고 난 후,
3일 만에야,
나는 내 인생 처음으로 혼자라는 것이 무엇인지를 느끼게 되었다.
이 세상엔 이제 나 혼자뿐이다.
“이제, 좀 움직여야지.”
언제까지 멍하니 있을 순 없었다.
멍하게 있었던 건 요 일주일이면 충분했다. 최소한 무언가 했다는 생각이 들 수 있도록, 나는 집 안을 청소하기 시작했다.
* * *
우리 이모가 열 살 때, 할머니와 할아버지께서 돌아가셨다. 우리 부모님이 돌아가셨을 때처럼 똑같이 갑작스러운 죽음이었다.
갑작스러운 죽음이었지만 돌아가신 조부모님 대신에 이모와 10살 차이 나던, 고등학교를 갓 졸업한 우리 엄마가 이모를 키웠다.
당시 스무 살, 말만 성인이지 사실상 이제 막 졸업한 어린아이나 다름없던 우리 엄마는, 혹시라도 이모가 부모님의 빈자리를 느끼지 않게 친부모처럼 이모를 맡아 길렀다.
다행스럽게도 엄마 앞으로 나온 보험금은 적지 않아서, 터 좋은 곳에 카페를 하나 차려 두 식구가 먹고 살 만큼 돈을 벌 수 있었고, 또 운이 좋게도 카페 단골손님으로 좋은 남자를 만나 일찍 결혼에 성공할 수 있었다.
자신을 길러준 엄마와 같은 언니의 결혼 소식 때문에 조금 서운했을 수도 있었겠지만, 드라마나 영화 같은 데서 나올 법한 이모와 아빠의 마찰은 없었다.
이모는 어릴 때부터 자신을 길러주던 엄마를 존경하고 있었고, 엄마의 행복을 바랐기 때문에 엄마의 결혼을 축복했다.
엄마의 결혼 이후로 많은 것이 바뀌지도 않았다.
이모와 엄마는 그럼에도 함께였고, 거기에 가족이 하나, 아니 둘이 늘어났을 뿐이니까.
나는 엄마와 아빠가 결혼한 후, 정확하게 일 년 만에 태어났다. 세 가족의 축복을 받으며 나는 무럭무럭 자라났고, 그렇게 영원히 행복하게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
.
.
우리 부모님이 모두 돌아가시기 전까진.
사인은 교통사고.
트럭 운전기사가 졸음운전을 했고, 재수 없게도 우리 부모님은 그 트럭 앞을 지나고 있었다.
텔레비전에 가끔 뉴스로 나오는.
그냥 아이고… 쯧쯧.
혀를 차고 지나가면 끝나는.
단지 그런 사연이었다.
내 나이 열 살.
어린 나이였지만 다행스럽게도 나는 나를 길러줄 이모가 있어 천애 고아가 되지는 않았다.
이모 나이, 스물다섯.
아직 꽃다운 나이인데도 불구하고 이모는 열 살짜리 아이이던 나와 함께 살기를 택했다.
쏴아아아
요 며칠 하늘에서 구멍이 뚫린 듯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요 며칠 사이 나쁜 일은 생길 만큼 생겼으니, 내게 이 이상 나쁜 일이 생기진 않겠지. 나는 비가 들어오지 못하게 창문을 닫고 다시 청소하기 시작했다.
“야~ 이모. 이걸 여기다 숨겨놨었네.”
이모 방 옷장을 정리하다 나온 상자 하나.
아, 이거 너무 오랜만이다.
눈가에 송글송글 맺히려는 눈물을 참으며, 나는 상자를 열었다.
이모가 옷장에 고이 숨겨놓은 상자 안에는, 내가 예전에 버렸던 만화책들과 내 설정집, 그리고 내가 만들었던 마스크가 들어가 있었다.
우리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나서 나는 당시 막 유행하기 시작하던 히어로물에 광적으로 집착하기 시작했다.
당시 유행하던 영화들로 시작해서, 애니메이션, 만화, 피규어까지. 히어로들이 나오는 것들이라면 아무런 상관도 하지 않고 죄다 수집하고 모으기 시작했다.
그중 내가 가장 좋아했던 작품이 만화 「Heroicest」였다.
히어로 붐을 타 우리나라에서 만들었던 만화인데, 영화는 메이저여도 만화는 마이너였던 우리나라에서 거의 유일하다시피 한 히어로물이었다.
나는 천문학적인 돈을 때려 부은 할리우드 영화보다 이 만화가 좋았다. 이 만화의 주인공 최강훈이 나처럼 부모님을 잃고 이모와 단둘이서 살아가는 처지였기 때문이다.
나와 같은 처지인데다 내가 좋아하는 히어로로서 활동하는 주인공에 나는 깊게 이입했다. 그리고 주인공이 입고 있는 히어로의 마스크가 주인공에게 힘을 주고 있다는 설정 때문에, 나도 주인공과 똑같이 히어로 마스크를 디자인하고, 직접 만들어 가지고 있을 정도로 그 만화를 좋아했다.
딱 열네 살까지만.
내가 열네 살이 되던 시절에 나온 만화 「Heroicest」 신간에는 적의 정신 공격에 당한 주인공이 주변 히어로들을 모두 죽여 버리는 장면이 나왔었다.
그런 말도 안 되는 장면으로 수많은 등장인물이 죽는 것을 본 어린 나는 크게 충격받았고, 가지고 있던 「Heroicest」와 관련된 모든 것들을 상자에 집어넣고 이모에게 갖다버려 달라고 부탁했다.
그러나 이모는 내가 만든 것들이 아까워 버리지 않고 모두 모아, 옷장 한편에 숨겨두고 계셨던 거다.
쏴아아아아…
우르릉!
잠시 멍하니 있다가, 천둥 번개 소리에 정신이 들었다.
잠시 붉어졌던 눈가를 다시 훔치고, 나는 상자 안의 내용물을 살펴보았다.
“이거 완결까지 다 있네.”
아마 내가 버리자고 한 이후로 이모가 따로 한 권, 한 권 구매해 두신 모양이다. 내가 이 만화를 왜 좋아하고 읽었는지 잘 알던 이모인지라, 내가 버려 달라고 했을 때 안타까워했던 기억이 났다.
그래도 그렇지, 지금까지 안 잊고 한 권도 안 빼놓고 다 모아두셨다니… 나는 묵직하게 올라오는 감정과 더불어 의아함을 동시에 느꼈다. 근데 왜 보관만 하시고 나한텐 아무 말도 없으셨던 거지?
나는 마지막 권을 집어 들어 몇 장 넘기자마자 그 이유를 깨닫고 말았다.
…이래서였구나.
주인공이 지키려고 했던 세상은 결국 빌런들의 손에 넘어가 무너지고, 주인공은 쓸쓸하게 혼자 늙어 죽는 결말.
마지막 페이지에는 빌런들이 활개 치는 도시 전경을 내려다보는 늙은 주인공의 모습이 그려져 있었다.
아니, 이 작가는 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딴 엔딩을 낸 거야? 내가 그려도 이것보단 잘했겠다.
나는 혀를 쯧쯧 차며 만화책을 상자 안에 집어 던지고, 내가 만든 마스크를 들어 올렸다.
까마귀를 닮은 듯한 느낌의 어두운 가면.
원작 만화의 주인공은 좀 더 밝고 환한 느낌이지만, 당시 중2병에 걸려 있던 나는 다크 히어로의 로망에 빠져 있었다.
이거 이름이 다크 카이저였나.
내가 붙여둔 이름이지만 참 유치하네.
함께 들어 있는 공책을 훑어 읽어보며, 나는 이모와의 추억들을 되새김질하며 낄낄 웃었다.
내가 어렸을 때 이런 걸 얼굴에 쓰고 방방 뛰어다닐 때, 이모 기분이 어땠으려나.
‘이모. 다시 한 번만 보고 싶어요.’
오랜만에 추억과 그리움 때문인지, 나는 아무 생각 없이 그 마스크를 얼굴에 썼다.
번쩍.
“뭐지?”
잠깐 내가 쓰고 있던 가면이 번쩍거리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뭔가… 세상이 달라진 듯한 기분이야.
혹시 나한테도 소설이나 만화 속 인물들처럼 새로운 능력이 생긴 건 아닐까?
나는 천천히 가면을 벗었다.
.
.
.
.
.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난 뭘 기대했던 건지.”
씁쓸하게 웃으며 나는 가면을 다시 상자에 집어넣었다.
“아 맞아. 복학 신청해야지.”
이모의 유언에 따라 대학 졸업은 꼭 할 생각이었다.
<“내가 조금 일찍 언니를 보러 가게 되었지만, 너 대학은 졸업시켜야 서운하다는 소리를 안 들을 거 같아. 그러니까 꼭 졸업해.”>
그땐 이모가 왜 죽냐고, 절대 죽을 일 없을 거라고 난리를 쳤었지만, 사실은 알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아마 이모는 나를 위해 아픈 것도 참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내가 조금이나마 마음의 준비가 될 때까지.
갑자기 가버린 자신의 빈자리를 견뎌낼 수 있을 때까지 버텨내 주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내가 그걸 견뎌낼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그래… 그래도 학교는 다녀야지.”
보험금도 조금 나왔고 이모가 남겨둔 돈도 있으니까, 알바랑 병행하면서 학교에 다니면 좀 괜찮을지도 모르겠다.
나는 만화가 들어 있는 상자를 들어 올렸다.
우르릉 쾅!
그리고 그것이, 내가 만화 「Heroicest」의 세계에 들어가기 전 기억하던 마지막 장면이었다.
* * *
“허억……!”
나는 내 귓가를 때리는 천둥소리에 땀을 흠뻑 흘리며 침대에서 눈을 떴다. 낯선 천장이었다.
나는 조금 어안이 벙벙한 채로 몸을 일으켜 주변을 둘러보았다. 방금까지 이모 방 안에서 만화책을 읽고 있었는데, 갑자기 왜 처음 보는 방 안 침대에 누워 있는 건지 상황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퍽-!
“아야!”
갑자기 내 얼굴을 덮쳐온 책 한 권. 난 얼얼한 코를 감싸 쥐고 책을 뒤집어 표지를 확인했다.
「Heroicest 完」
어…?
내가 아까 전까지 읽고 있었던 만화책의 마지막.
제목도, 출판사도, 그림체도 내가 기억하던 그 만화책이 맞다.
하지만,
표지만 봐도 알 수 있을 만큼 가장 중요한 것이 달라져 있었다.
표지에서 보이는 주인공의 모습은….
바로 나, [나 강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