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희망을 위한 찬가-299화 (299/300)

#   300-희망을 위한 찬가 - 희망을 위한 찬가(49)

#

마스터와 수행이 마주보고 있었다. 이리세는 멀지 않은 곳에 다소곳이 시립해 있었다. 다른 차원인 것처럼 격리된 공간 안이었다. 마스터는 무릎을 꿇는다. 이리세가 뒤 따른다. 이어 두 사람은 느리게 말한다.

“비의(秘意)의 왕을 뵙습니다.”

“비의의 왕이라...”

수행은 그 말을 듣고 입가를 쓰다듬는다. 알케미스트의 왕. 진정한 현자. 신비의 주인. 그노시스트의 진정한 지배자. 그노시스트는 권력에 굴하지 않는다. 그노시스트는 권위에 굴하지 않는다. 그노시스트는 오직 스스로를 납득시키는 지와 사상에 굴복한다. 때문에 그들은 조건이 충족된다면 적을 ‘왕’이라 부르는 일도 주저하지 않는다. 그들이 그러하다는 것을, 수행 역시 알고는 있었다. 수행은 이내 큭큭거리기 시작한다. 뜨거운 어둠을 품은 웃음이었다. 그 조롱 같은 웃음이 갑자기 뚝 끊어진다. 수행은 짙은 분노를 품은 낮은 목소리를 마스터에게 향한다.

“...꼴 같지 않은 소리 그만둬라. 나는 당신에게 졌다.”

마스터는 천천히 일어섰다. 그의 얼굴은 만족 같기도 하고, 당혹 같기도 한 기묘한 감정으로 얼룩져 있다. 수행은 그의 얼굴을 증오를 담아 바라봤다.

“언제 눈치 챈 거지?”

“지난여름의 일이었소. 아담의 언어에 대한 공명현상과 일본인 소녀의 아담의 언어에 대한 이해할 수 없는 저항력에 나는 의혹을 품게 되었지.”

‘역시, 그랬던가...’ 라고 수행은 속으로 중얼거린다. 그때이외에는 결정적으로 이들에게 꼬리가 밟힐 만한 일은 없었다. 이런 일을 막기 위해 얼마나 많은 노력을 기울였는데. 그때는 설마 이들이 아담의 언어를 완성해 놓고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그걸 알았더라면 상황은 많이 달라졌을 텐데. 적어도 쓸데없는 모험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수행은 가슴이 메이는 것을 느낀다.

“확신하게 되었던 것은 리리스와 대면하게 한 다음이었소. 강렬한 공명이 일어났소. 하지만 그 아이의 이야기로는 왕의 결계 안에서는 그 공명이 일어나지 않았다고 했으니, 더 이상 그 아이의 정체를 의심할 이유는 없던 셈이지.”

수행은 이리세를 쳐다본다. 이리세는 움찔 몸을 떤다. 수행은 그녀에게로 천천히 다가가 얼굴을 양 손으로 쥔다. 이리세는 긴장하지만 그의 손길을 피하지 않는다. 수행은 한동안 그녀의 얼굴을 유심히 살피다가 느릿하게 말을 한다.

“부족한 기술로 호문클로스에 도전한 결과 얼굴이 없다니, 소녀에게 몹쓸 짓을 하는군.”

“제게는, 아무 불만도 없습니다.”

“그래. 그렇겠지... 착한 아이들은 아무도 가혹한 부모를 원망하지 않으니까. 내 아이들도... 그랬으니까. 하지만 걱정하지 말거라. 이 정도는 손볼 수 있다. 나중에 네 얼굴을 찾아주마. 지금처럼 아름다움이란 관념 자체를 상대에게 인식시키는 것은 아니지만, 틀림없이 예쁜 얼굴이 될 거란다.”

“감사합니다.”

수행이 손을 떼자 이리세는 황급하게 사의를 표하며 물러섰다.

“그런데, 호문클로스를 떠나보내기 전에 왕께서 행하신 것은 내 생각이 옳다면-”

“네 생각이 옳다. 그것은 그 아이의 호문클로스로서의 본질을 완전히 봉하는 술식이다. 이론은 이미 만들어 두었지만, 필요한 에너지가 너무 거대해서 나로서도 실제 사용한 것은 방금 전이 처음이었던 극단적인 술법이지. 이제 다시는 그 아이의 힘으로 인해 기이한 사건이 발생하는 일은 없겠지.”

수행은 회한을 담아 말했다. 에너지가, 필요했다. 하지만 면적과 시간당 필요한 에너지의 양은 진정으로 엄청난 것이었다. 아무리 수행이라도 도저히 조달할 수 없을 만큼 막대했다. 필요한 수준의 에너지를 얻어내기 위해서는 현자의 돌에 사용된 술식을 사용해야만 했다. 현실적으로 거의 유일한 수단이었다. 그러나 그렇게 얻어낸 에너지는 주변을 ‘전염’되는 특성을 지니고, 그런 힘을 호문클로스의 본질을 봉하는데 사용하기는 불가능했다. 에너지의 공명현상이 일어날 테고, 이는 자칫 술식의 폭주를 부르게 된다. 현자의 돌을 사용하지 않고 그만한 에너지를 모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술자들을 모아 힘을 집중시키는 것이었다. 그노시스트의 등장이란 그를 위한 좋은 명분이었다. 때문에 수행은 지금까지 방관자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던 것이기도 했다.

“왜 그런 강대한 호문클로스의 힘을 일부러...?”

“나는 그 아이가 행복하게 살기를 바랐으니까.”

수행의 답은 건조하고 억눌려 있다. 마스터는 의아한 얼굴을 한다.

“무슨...?”

“다시 말해 주지. 나는 그 아이가 ‘행복’ 하게 살기를 원했다.”

수행이 한층 억눌린 목소리로 마스터를 노려보며 말한다. 그 눈빛에 마스터는 공포에 휘감겼다. 이길 수 없다. 벗어날 수 없다. 넘어설 수 없다. 움직일 수 없다. 거역할 수 없다. 상상 가능한 모든 종류의 무력과 공포가 신경조직을 얽어매어 놓아주지 않는다. 수행은 이야기를 지속한다.

“어쩌면 처음에는 네가 말한 것이 옳다. 그 아이는 실험용 모르모트 같은 존재였을지도 모른다. 그 아이는 목적을 가지고 탄생되었던 존재니까. 그러나-”

말 사이에 골이 패인다. 그 골에 고여드는 것은 추억이다. 수행은 짧은 순간 가운데 어렸던 은결과 보냈던 시간들을 기억한다. 첫걸음걸이를 보았다. 말과 글을 가르쳤다. 옷을 입혀주었다. 배변을 처리했다. 젖병을 물렸다. 많은 일과 일들을 했다. 그리고 어느 날인가, 수행은 자신을 향해 해맑게 웃어오는 아이의 얼굴을 보고 ‘실수’했다고 깨닫게 되었다.

“-시간이 지나고, 나는 더 이상 그것을 원치 않게 되었다. 그래서 그 아이가 호문클로스로서 세상의 이목을 끌게 되는 것을 피하고자 했다. 다른 이들은, 그리고 은결 그 아이조차 속일 수 있었다. 하지만 너희들만은- 이미 내가 현자의 돌의 핵심에 가 닿았다는 것을 알고 있을 너희들만은, 우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마스터는 약하게 질린 얼굴로도 싱긋이 웃는다. 약간의 승리감이 섞여든 얼굴이다. 그들은 이십년도 전, 칠레에서 수행과 첫 인연을 맺었다. 이후 수행은 자신의 연구 성과에 약간의 거짓을 섞어 세상의 이목을 속이려 하지만, 도그마에 속박됨이 없는 그노시스트들에게 그것이 얼마나 유효할지 자신할 수 없었다. 그때 어떤 전율이 마스터의 등줄기를 탄다. 그는 ‘음-’ 하고 침음성을 낸다.

“그래서 그때 우리가 왕을 몰락시킬 수 있었던 것이군...”

그 말을 듣고 수행은 웃는다. 마스터는 움찔, 몸을 물린다. 그의 미소가 무언가 강렬한 감정을 담고 있었기 때문은 아니었다. 그보다는 불가지의 영역에 가 닿아 있는 것 같은 미소였기 때문이다. 이유를 알 수 없는 웃음. 마스터가 수행의 미소에 대해 생각할 여유를 두지 않고 수행은 고개를 끄덕인다.

“어느 정도는 사실이다. 내가 폐인이 되고 활동을 중지해 숨는다면, 더 이상 너희가 내게 관심을 가질 이유는 없으리라 생각했다. 얄궂게 이렇게 다시 너희들 앞에 서게 되었지만, 나는 그때 진정으로 힘을 잃었고, 생각했던 대로 너희는 내게서 관심을 끊었지. 거의 성공했다고, 생각했었다.”

“우리 역시 카미로 인해 우연히 당신의 아들과 연결되지 않았다면, 모르고 지냈을 것이오.”

경의를 담아 마스터가 말했다. 그는 수행이 얼마나 빛나던 힘을 지니고 있던지 진정으로 이해하는 사람의 하나다. 그렇기에 그가 은결이라는 호문클로스를 위해 내다버린 것의 가치가 어떤 것인지도 진정으로 이해하는 사람의 하나다. 단시 이목을 속이기 위해 진정으로 내다버리기엔 너무나 가치로운 것이었기에, 그노시스트들은 진정으로 수행의 계획에 말려들었다. 서로간의 목적과 수단이 충돌한다 할지라도 그는 수행을 ‘전설’이라 칭송받을 자격이 있다고 존경한다.

“-그러니 지금 이 자리에서 너를 죽이더라도, 그 아이의 운명은 변하지 않겠지.”

“그렇소. 나와 이 아이만이 그노시스트인 것은 아니지. 우리는 세상의 비극에 뿌리를 내리고 탄생하지. 비극이 끊어지지 않는 한, 우리는 영원하고, 영원한 우리의 추적 앞에, 미안한 말이지만 비록 본질을 봉했더라도 그 호문클로스에게 숨을 곳이 없소.”

마스터는 당당하게 말한다. 수행은 고개를 끄덕인다. 눈앞의 사내를 쳐 죽여보아야 은결이 짊어져야할 짐은 가벼워지지 않는다. 그래서 그는 마스터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아니, 그전에- 수행은 이를 물고 생각했다. 그의 마음은 뚜렷한 소리와, 뚜렷한 표정을 기억하고 있었다. 은결의 세 마디 외침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 사랑스런 아이가 결국 그것을 택한 이상, 이제 누구도 은결의 앞길을 더럽혀선 안 되었다. 숨결이 뜨거워진다. 수행은 장중하게 제안한다.

“-그 아이를 이제 건드리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나와 거래를 하자.”

“후, 후후후-”

마스터는 웃는다. 그의 웃음에 처음으로 경멸과 흡사한 것이 스며들어간다. 옆자리에서 이리세의 얼굴로 깊은 우려가 발생한다. 지난날 몰락 조차 의도된 것이었다면 전설의 힘은 진정으로 가늠된 적이 없다. 아무리 마스터라 할지라도- 그녀의 걱정을 향해 고함을 내지르듯, 마스터는 말한다. 그의 눈동자로 새파란 불꽃이 머문다.

“-아, 이거 실례. 무척 매력적인 제안이지만 웃지 않을 도리 역시 없었소. 당신 역시 마지막 걸음을 내딛지 못하는군. 한갓 만들어진 자식의 행복이란 것 때문에 스스로가 지켜온 모든 것을 내던진단 말인가?”

-꽉!

수행은 마스터의 멱살을 잡는다. 이리세는 수행의 기세에 억압되어 감히 끼어들지 못한다. 마스터는 두려워하지 않고 수행을 본다. 수행의 눈동자는 분노하고 있지만 타오르지 않는다. 실은 분노조차 아니다. 너무나 치열한 비웃음이기에 차라리 분노를 닮은 것이 거기 자리하고 있을 뿐이다. 마스터는 모멸감을 맛본다. 수행은 억눌린 음성으로 사나운 맹수의 그르렁 거림처럼 말한다.

“행복, 이라고? 그 아이는 희망하지 않겠다고 했다. 희망하지 않기에, 절망하지 않겠다고 했다. 절망하지 않기에, 멈추지 않겠다고 했다. 기것 너희의 간섭이 멈춰지는 정도로 이제 그 아이가 행복해 진다고?”

“-그렇-”

“개 같은 소리 하지 마라. 너는 나와 닮은 인간이다. 걸음을 걸을 때 마다, 네 시야에는 ‘신’이 보인다. 세상에 베풀어진 기적의 흔적들이 보인다. 무수한 혼탁들이 몇 줌 되잖는 규칙을 통해 어찌나 아름답고 다양하게 형성되어 나가는 것인지 네게는 보인다. 그 아름다움을 견딜 수가 없다. 그들 맞물림에 숨이 막힌다. 이렇게 아름다운데, 하지만 세상은 고통스러워하는 이들로 가득하다. 대체 왜? 너는 견딜 수가 없다.”

“---”

“은결이의 ‘행복’이라고? 희망하지 않는다. 절망하지 않는다. 멈추지 않는다. 그 아이는 그렇게 말했다. 그런데, 그 아이가 ‘행복’하다고? 네가 바라보는 그 세계를, 그 아이도 가지고 있었다. 내가 바라보는 그 세계를, 그 아이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 그 아이는 그 세계를 폐기했다. 손이 자유도 타자도 아닌 손일뿐인 세상을- 그 아이는 택했다. 화해할 수 없는 것들을, 화해시키지 않고 살아가기로, 결정했다. 심지어 나는 거기다 주박과도 같은 것을 걸어놓고 말았지.”

수행은 잡았던 멱살을 놓는다. 마스터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한다.

“-나는 그 아이의 선택을 지켜주려 하는 것일 뿐이다. 그것이 은결이의 선택이라면, 나 역시 그 아이를 위해 중단했던 일을 이제는 마무리 지어야 한다고 생각했을 뿐이다. 그리고 내 계획의 마무리란 아마 너희들에게도 반가운 일이겠지.”

“그렇다면, 우리가 그 호문클로스를 노리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왕이 내놓을 것은 무엇이오?”

“너희가 그 아이를 노리지 않는 한, 나는 그노시스트와 적대하지 않겠다. 그것으로 부족한가?”

“당신이 농담을 즐기는 줄은 몰랐군.”

마스터의 답은 딱딱하다. 수행은 피식 웃는다. 하기야 그도 이들이 그 정도 조건에 타협하리라곤 생각하지 않았다. 이들이 목숨을 아까워하는 자들이라면 얼마나 대처하기 쉬웠을까. 수행은 잠깐 말을 끊는다. 그는 자신의 과거를 생각한다. ‘전도’ 그 자체에 답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마르셀 뒤샹이 ‘샘’이라는 예술작품으로 보여주었듯이. 폴 발레리가 ‘불투명성’이란 개념으로 설명했듯이. 그러니 시작에 목적이 없었다고, 마지막까지 목적이 없어야할 이유 또한 없는 셈이 아닌가. 지금도-

수행은 갑자기 말문을 연다.

“은결이에겐 여동생이 하나 있지. 그 아이 역시 무척이나 귀엽고 사랑스럽네. 나는 그 아이를 은결이만큼 사랑하지. 알고 있나?”

갑자기 무슨 이야기일까. 의혹을 품으면서 그는 수행의 이야기에 순순히 따라가기로 한다.

“그 아이 역시 호문클로스라는 것은 알고 있소. 아무런 힘도 가지고 있지 않았지만, 두 사람의 어머니란 사람이 실재한 적이 없던 가상의 인간이란 것을 고향이라는 곳에까지 가서 확인했으니 의심의 여지는 거의 없지. 그 소녀가 호문클로스가 아니라면 그렇게 까지 완벽하게 거기 사람들의 기억에 당신이 간섭했을 이유가 없을 테니까.”

마스터는 슬쩍 이리세를 본다. 안쓰럽게 바라보는 눈빛이다.

“자네 말이 맞네. 같은 실수를 반복할 수 없었기에 그 아이는 이 세계로 들어오지 못하도록 한 덕분에 은결이와는 달리 능력의 대부분을 봉인할 수 있었지만, 그 아이 역시 틀림없이 호문클로스지. 하지만 착각하지 말도록 하게. 은결이와 미래의 관계는 순수한 남매사이지.”

“그는 이미 자신이 호문클로스라는 것을 알고 있소.”

“아니. 나와 당신, 그리고 저 소녀를 제하고는 아무도 모르네. 은결이를 비롯해 다른 둘의 기억에 간단하게 간섭해 두었으니, 그들은 은결이 호문클로스라는 것을 모르지. 하지만 은결이는 희망하지 않겠다는 자신의 결정은 뚜렷하게 기억하고 있네.”

“...당신의 노림수를 읽을 수가 없군.”

마스터는 눈살을 찌푸리고 말했다. 수행은 웃었다. 웃으면서, 다시금 슬퍼했다. 만일 은결이 사랑하는 사람이 있었더라면, 아마 이런 선택을 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세연이란 소녀를 쭉 마음에 두고 있었던 것인데. 하지만 은결은 그저 가혹한 길을 선택했고, 그 아이가 진정으로 넘어야 할 산으로서, 자신은 폐기하려 했던 다른 선택을 다시 마련하게 되었다. 그런 일이었다.

“하지만 당신 생각이 완전히 틀린 것 또한 아니지. 나는 은결이에게 희망하지 않는 시선으로 세계를 보고도 그것을 견딜 수 없다고 여긴다면, 그때 시두리의 노래를 떠올리고, 미래를 아내로 맞이하라고 했으니까.”

묶였던 것이 풀렸다. 마스터는 왜 수행이 호문클로스에게 ‘주박’같은 것을 걸었다고 말했는가 이해했다. 그의 말이 사실이라면 이제 호문클로스에게는 돌아올 길이 없다. 그가 돌아온다면, 그것은 ‘인간’이기를 포기, 혹은 넘어섰다는 뜻이다. 그는 괴물이거나 신이다. 여기서 다시 매듭이 풀렸다. 그리고 인간이기를 포기한 그가 소속될 곳은, ‘이곳’ 뿐이다. 희미한 만족을 느끼며 마스터는 중얼거린다.

“종에 대한 상징적 살해인가.”

“아니네. 진정한 살해지.”

“진정한?”

“그 아이가 희망 없는 눈으로 세계를 보고도 견딜 수 없게 된다면, 그래서 그 아이가 제 동생을 아내로 맞이하게 된다면 그때 인류는 조용히 그 숨을 거둘테니까.”

“무슨... 의미인지 알 수가 없소.”

“간단하네. 그 두 아이 사이에 다시 아이가 생긴다면, 그 아이가 남자이든 여자이든 상관없이 그 아이는 제 부모가 그러하듯 천재일걸세. 용모도 수려하겠지. 그 아이 역시 호문클로스니까 당연히 무척이나 건강하고 운동에도 능할걸세. 성격은... 아마 다양하겠지. 쾌활하거나, 내성적이거나, 진지하거나, 차분하거나. 가능성은 여러 가지지. 하지만 어떤 아이가 되든 타자에 대한 상상력이 무척이나 풍부할 걸세. 타자의 고통을 자신의 고통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 거야. 도무지 모른 척 할 수가 없겠지. 그리고 고집도 셀 테고, 유행 따윈 코웃음을 치며 쳐다도 보지 않을 가능성이 높네. 남자든 여자든, 많은 사람들이 그 아이를 연모하겠지.”

노인이 과거를 회고하며 성공한 자식들의 이야기를 자랑하는 태도로, 수행은 계속 말한다. 마스터는 그 모습에 ‘섬뜩’함을 느낀다. 그는 자신의 오른팔로 왼팔을 잡는다. 떨리고 있다.

“-그리고 그러한 특성들은 계속해서 이어질거네. 그 아이들이 누구와 어떻게 사랑을 해 부모가 되든- 어머니가 되든, 아버지가 되든, 그 아이들의 아이들은 그런 특성들을 다른 쪽 부모를 완전히 무시하고 이어받겠지. 그 두 아이 사이에 아이가 생긴다면 그렇게 되도록 되어 있네. ...600년 정도면 충분하다고 생각하네. 지금의 인류는 자취를 감추게 되겠지.”

“돌연변이...는?”

“물론 일어나지. 유전자 풀의 다양성은 손상 받지 않을 걸세. 내가 고정시켜둔 특성은 유전자의 다양성이란 관점에서 전체에 비하면 그리 대단한 것이 못 되니까. 어려운 것은 돌연변이를 충분히 허용하면서 몇 가지 중요한 특성을 절대적인 우성으로 고정시키는 작업이었지만, 이를 0.01% 이하의 변이로 고정시키는데 성공했네. 이 정도라면 향후 그 고정됨이 문제가 되더라도 해결할만한 능력을 갖춘 사회가 되어 있겠지.”

“---”

“파블로프가 우리의 희망이 될 수 없다면, 이것이 최선이겠지. 시작이 무목적이었다고, 우리가 영원히 무목적의 세계를 받아들일 이유는 없는 법이니까. 이것이 내가 내 놓을 수 있는 패의 전부네. 그러면 다시 묻지. 당신은 그 아이의 선택을 개입없이 지켜본다는 나와의 거래를 받아들이겠나?”

손익에 대한 계산을 떠나, 수행이라는 괴물의 크기에 마스터는 무릎을 꿇는다. 이리세가 따른다.

“기꺼이.”

수행은 차갑게 웃고는 눈을 감는다. 마음이 먼 과거로 자신을 데려다 놓는다. 타자를 넘어설 수 없다는 것을 진정으로 실감했던 그 밤에, 자신은 계획했던 대로 폐인이 되었다. 그때의 마음이 다시금 피어오르며 뜨거운 고통으로 변한다. 그는 고통을 부퉁켜 안고 ‘은결’이란 이름의 아들을 생각한다.

‘은결’

고귀한 자들은 모두 죽고 스러져 참혹하던 칠레의 한 마을이었다. 그곳에 있던 썩어가는 연못물은 낮의 빛 가운데 토기가 일 만큼 더러웠다. 하지만 새벽의 한 때를 지나, 어둠이 여명에 스러지며 예리한 빛이 스며드는 순간에, 그토록 더러웠던 연못 위에도, 아름다운 빛의 여울은 피어났다. ‘은결’ 그래서, 수행은 아이의 이름을 그렇게 지었다.

*뿌려뒀던 떡밥은 이로서 전부 정리한 것 같군요. 하지만 아쉽게도 안 끝났습니다. 한화짜리 에필로그가 남았음! 에이, 에필로그는 개인지에만 실어서 신청자 수를 늘려 볼까요. ㅋㅋ 개인지 팔아서 무슨 만덕수덕 보겠다고 그러겠습니까. 솔직히 부담만 되니 뻥입니다. 완결까지 연재합니다.

*시두리의 노래는 여러 번 본문에서 소개했던 그 시두리의 노래입니다.

*4.19입니다. 나라 돌아가는 꼴을 보니 많이많이 속 쓰린 날입니다. 한 달 뒤엔 더 속 쓰린 날도 하나 있고.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