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98-희망을 위한 찬가 - 희망을 위한 찬가(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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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가락이 천천히 움직였다. 그것은 움찔 하고, 약간 멈춰섰다가, 다시 움직여서 인터폰의 스위치에 닿았다. 꾸욱, 눌렀다. 띠리링- 하는 차분한 음악소리가 난다. 어쩐지 그 음악이 날선 긴장으로 충만한 것 처럼 느껴진다. 그는 속으로 피식 웃는다. 긴장된 것은 음악이 아니라 자신이었다.
“사내자식이, 떨지마!”
뒤에서 그의 등을 팡 친다. 굉장히 세게 쳤기에 그는 한참 몸을 배배 꼬다가 획 시선을 돌린다. 큰 몸집의 청년이 움찔, 물러선다. 청년의 얼굴은 절반이 부어올라 있다 싶을 만큼 엉망이었고, 옷도 여기저기 흙먼지가 묻어 엉망이었다. 그는 이를 갈며 외쳤다.
“이 고릴라 새끼가! 졌으면 진 거지 이런 식으로 기습을 해!”
청년, 고릴라는 움찔 물러섰다가 그 말을 듣고 다시 타오른다.
“니 얼굴 꼬락서닐 보고 그딴 소릴 해라!”
두 사람은 으르렁 거린다. 여우가 그들 사이로 끼어들어 중재한다. “자자, 그만 진정하고, 또 한판 붙겠다.” 두 사람은 못 이기는 척 떨어진다. “그런데 말야-” 소란이 어느 정도 가라앉자 다른 청년, 늑대가 입을 연다. 그도 고릴라나 민성처럼 엉망진창이 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어디선가 크게 싸움이라도 한 것 같은 모습이다.
“-대답이 없네?”
모두 인터폰으로 시선을 돌린다. 그러고보니 조용했다. ‘누구세요?’ 한 마디 쯤은 나와줘야 정상일텐데. 민성은 다시 벨을 누른다. 마음의 어딘가에서 움찔움찔 비명 같은 것을 흘리려 했지만 꾹 참는다. 처참한 것은 이런 시시한 비명이 아니라 이런 비명을 흘려야 하는 것을 알면서도 그 마음을 언제까지나 이고 있어야 하는 것임을 이제는 안다. ‘선생님’이 그러했지 않은가.
하지만 역시 돌아오는 응답이 없었다. 여우는 고개를 갸웃거린다.
“가족끼리 어디 놀러라도 간 모양인 걸?”
“이 날씨에?”
늑대가 불쾌하게 반문한다. 민성이 얼굴을 찡그리며 받는다.
“날씨야 뭐- 문제없지 않아?”
늑대를 포함해, 다들 민성의 말에 동의한다. 확실히 날씨는 문제가 없다. 맑고 선선한 날씨였다. 다만, 뭐라고 할까- 도저히 밖에 나가 무언가를 하고 싶어지는 그런 날씨가 아니었다. 보통 때라면 그저 ‘좋은 날씨’라 여기고 말았을 법 한데, 오늘은 거의 끔찍하다 싶을 정도로 대기가 질척하게 불쾌했다. 여름날의 가장 불쾌한 한 때를 백배로 확대해 가져다 놓은 것 같은 그런 기분. 하지만 그들은 그런 날씨가 ‘이상하다’고는 느끼지 못했다. 이 불쾌함을 일상의 한 부분처럼 받아들이고 있었다.
민성이 아쉬운 얼굴로 말했다.
“으음- 없으면 할 수 없지. 내일 학교에서 만나서 직접 사과하는 수밖에.”
“쳇! 이런 더러운 날씨에 여기까지 무슨 헛걸음이람.”
늑대가 불평하며 발을 굴린다. 하지만 집에 사람이 없다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두 사람의 마음 한 구석에는 사실, 만나지 못해서 다행이라고 안도의 한 숨을 쉬는 나약한 자신의 모습이 있기도 했다. 가장 순수하게 아쉬워 하는 사람은 고릴라였다.
“후, 미래 얼굴이나 좀 볼까 했더니.”
“인간아...”
여우가 고개를 절래절래 내 저으며 한 숨을 쉬었다. 네 사람은 그리고 함께 걸어 은결의 집에서 멀어졌다.
푸른 이빨은 진정된 눈으로 은결을 바라보고 있었다. 병신새끼가 말했다. ‘나는 희망하지 않아!’ 병신새끼가 말했다. ‘희망하지 않는 나는 절망하지 않아!’ 다시, 병신새끼가 말했다. ‘절망하지 않는 나는 멈추지 않아!’ 얼마나 가소롭기 짝이 없는 말인가- 라고 푸른 이빨은 느꼈다. 두 눈을 크게 뜨고 지켜보지 않을 수 없도록 할 만큼, 가소롭기 짝이 없었다. 가슴이 없는 자의 가슴이 뛰지 않을 수 없도록 할 만큼, 가소롭기 짝이 없었다.
저 병신이 품고 있던 그 많던 모순들이 떠올랐다. 움직이기를 갈망하며 멈춰서고, 굶기 위해 먹고, 죽기 위해 살고, 기뻐하기 위해 자학하고, 현실을 위해 꿈꾸고, 지식을 위해 책을 불태우고, 사랑하기 위해 헤어지고, 만들기 위해 부수고, 숨쉬기 위해 폐를 도려내고, 생각하기 위해 뇌를 찢어발긴다. 그건 결국-- ‘제기랄-!’ 푸른 이빨은 비명처럼 인정한다. 무슨 영문 모를 헛소리냐고 생각했었는데, 역시 그 계집이 옳았던 것 같았다.
쿠로사카는 어쩐지 울고 싶은 기분에 휩싸였다. 지금 당장 저 바보에게로 다가가 꽉 끌어안아 주고 싶었다. 자랑스럽고, 하지만 섭섭하고, 아름답지만, 슬펐다. ‘절벽에서 굴러 떨어지길 주저 하지 않을거야.’ 라고, 저 바보에게 배워 말할 수 있었고, 그렇게 말함으로서 저 바보를 다시 일으켜 세워 줄 수도 있었다. 하지만, 하지만 꼭 저렇게 까지 해야 할 필요가 있는 것일까. 쿠로사카는 그것이 슬펐다. 왜 저런 길을 가려고 하는 것일까? 아프지 않은 것일까? 아프지 않을 리가 없을 텐데! 자신에게는 기대어 주길 바랬는데! 그렇지만 저 바보가 그렇게 선택했다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쿠로사카는 앞으로도 상처입길 주저않는 바보를 옆에서 계속 도와주고 싶다고 염원했다.
“큭큭, 큭큭큭-”
갑자기 마스터는 웃음을 터뜨리기 시작했다. 처절함이 느껴지는 웃음이었다. 은결은 양 손을 꽉 쥐고 그 앞에 대치한 채, 그가 다음 행동을 이어나가길 기다렸다. 마스터는 웃음을 터뜨릴때 그랬던 것 처럼 갑자기 웃음을 멈췄다. 그는 아련하고 쓸쓸하게 말했다.
“그래. 언제나 너 같은 자였다.”
“......”
“언제나 너 같은 자들이야 말로, 최후의 최후에 우리에게 맞섰고, 우리를 방해해, 세계를 지금까지 이어오게 했다.”
그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봤다.
“역설적인 일이다. 우리가 진정으로 구하고 싶었던 것은 바로 그러한 자들이었는데, 그런 자들이야 말로 우리의 가장 큰 대적으로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우리 앞에 서 있었다. 바로 지금의 너처럼 말이다. 어째서 그래야만 하는 것일까. 이러고도 이 세계의 진정한 창조자는 악마에 불과하다고 말하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말에 담긴 슬픔이 마음을 울렸다. 파장과 파장이 만나 이루는 급격한 상승처럼, 슬픔이 높은 곳 까지 치솟았다. 은결은 알 수 있었다. 그는 아름다운 사람이었다. 그래도-
마스터가 고개를 내렸다. 그는 은결을 바라봤다. 눈동자와 눈동자가 다시금 마주했다. 마스터는 슬프게 웃으며 손을 들었다.
“그래서, 네 말대로 나는 역시 내 믿음을 부정하는 상상력을 가질 수는 없다. 그러니, 어쩔 수 없는 일인 것 같군.”
“......”
은결은 이를 꽉 물고 자세를 잡았다.
“호문클로스, 너를 죽이겠다.”
웅, 하고 공간이 진감했다. 은결은 자신을 향해 들이닥치는 거대한 힘을 느꼈다. 전후좌우위아래, 어디로도 피할 곳은 없었다. 거대한 원이 중앙을 향해 좁혀지는 것처럼 틈 없이 다가오는 공격이었다. 은결은 전신을 역장으로 둘러싸고 이 공격에 대비한다. 이길 수 있을까? 의문이 마음에 떠오르지만, 대답은 간명했다. ‘상관없잖아.’ 최선을 다할 뿐이다. 최선을 다해 살아남도록 노력하고, 쿠로사카와 푸른 이빨을 구한다. 그렇게 해야 할 일을 한다.
‘-아아, 알겠다.’
문득, 은결은 상상할 수 있었다. 지금 어떻게 마음을 개방해 힘을 운용해야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이 공격을 막을 수 있는지를. 희망하지 않는 마음은 세계를 재단하지 않았고, 재단되지 않는 세계상은 무수한 가능성을 은결에게 일러주고 있었다. 천만은 하나였고, 하나는 천만이었다. 자신은, 그저 가야할 길을 가는 것으로 충분했다. 은결은 느리게 손을 들었고, 힘을 개방했다. 웅- 하고 두 번째 떨림이 일어났다.
-꾸웅!
힘이 충돌하며 세계가 하얗게 물들었다. 너무나 거대한 소리에 소리가 사라졌다. 순간적이지만 아득한 것 같던 시간이 지나고, 세계가 원래의 모습을 되찾았다. 은결은 죽지 않았다. 마스터도 죽지 않았다. 그리고 은결과 마스터 사이에는 한 사람이 서 있었다. 아무 것도 느껴지지 않는 평범해 보이는 중년의 남자였다. 그러나 평범한 중년의 남성이 하늘을 날 수 있을리는 없는 일이었다. 그는 은결을 바라보며 웃었다. 무척이나 익숙한 웃음이었다. 그래서 이 장소에서는 더욱 믿기 힘든 미소였다. 은결은 의혹을 담아 물었다.
“...아버지?”
*slglfslglf님의 추천에 감사! 현평님의 꼽사리 추천도~
*파편화 되어 있는 것처럼 보이던 모든 요소들이 한 지점에 모여드는 글이 적어보고 싶었습니다. 완결에 즈음해 되돌아보니, 성공했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처음에는 1부 완결에 은결의 정체가 드러나고, 2부 완결에 은결의 선언이 들어가도록 하려 했었습니다. 1, 2부를 통합하면서 빡빡해지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괜찮게 정리해 낸 것 같습니다.
*확실히 슬슬 개인지를 준비해야할 시기인 것 같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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