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희망을 위한 찬가-287화 (287/300)

#   288-희망을 위한 찬가 - 희망을 위한 찬가(37)

#

“갑자기 왜 그래? ‘양’이라니.”

세연은 웃으며 말을 돌렸다. 평정과 즐거움을 가장하는 말의 이면에는, 숨기기 힘든 긴장과 초조가 음산하게 죽은 가을의 잔디처럼 황량하게 깔려있다. 은결은 그녀의 말이 품는 고통의 형태가 뚜렷하게 보일 것 같다고 느낀다. 그는 아픔을 느낀다. 그러나 흔들리지 않고 계속 말을 한다.

“실은 고백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세연은 은결을 바라본다. 그는 세연의 눈길을 정면으로 받으며 말한다.

“세연양은 과거 제게 자신이 모르는 사이 어떤 성격의 변화가 일어난 것 같다고 이야기 한 적이 있고, 그에 대한 대응책으로 저는 몇 가지 명상법을 알려드렸습니다. 하지만 정체성의 문제란 꽤나 민감한 것이기 때문에 변수가 작동할 가능성이 많고, 그 점을 생각하면 제가 알려드린 몇 가지 대응책은 사실 대증요법에 지나지 않을 가능성이 있었습니다. 실제로, 그 이후로도 세연양은 미묘하게 짧은 시간의 기억에 결락 같은 것들이 생기는 것을 경험했었을 것입니다.”

어느 정도의 거짓말을 섞은 진실이다. 푸른 이빨이 그녀의 몸속에 머물고 있다는 것은 여전히 극소수의 몇 명만이 아는 비밀이고, 그것이 알려질 경우 발생할 소란과 위험의 크기는 여전히 크다. 푸른 이빨을 제거하지 않기로 했다면 그가 세연의 몸속에 머물고 있다는 것은 설령 본인에게라도 알리길 피하는 게 좋은 종류의 정보다. 은결은 계속 설명한다.

“때문에 세연양의 상태를 확인하고 완전한 처리를 하기 위해 저는 가능한 오랜 시간 세연 양과 함께 있어야할 필요성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기억의 문제는 억압이라는 것과 함께 하기 마련이기 때문에 단순히 사정을 설명하고 함께 있는 것으로는 발견하기 힘든 부분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이는 가능한 세연양이 자연스럽게, 그리고 안정된 상태에 있으면서 저와 함께 시간을 보낼 수 있어야 하다는 말이기도 했지요.”

세연은 눈을 감았다가 뜬다. 이야기는 차분하게 정리되어 당연한 한 가지 지점을 향하고 있다. 뒷이야기는 듣지 않아도 좋았다. 세연은 사실에 마침표를 찍기 위해 입을 연다.

“그래서, 저와 사귀자고 하셨던 거군요.

이제 그녀의 말은 경어다. 유리라면 와장창. 돌이라면 쾅. 모래라면 퍽. 말로 형성되어 위태롭게 유지되던 다정한 공간은 소리대신 침묵을 내지르며 무너진다. 남은 것은 건조한 예절로 장식된 몇 겹의 벽을 사이에 둔 타인과 타인이다. 버석버석 무너지는 공기를 느끼며 은결은 말한다.

“죄송합니다.”

“아니요. 저를 위한 것이었으니 죄송할 필요는 없겠지요. 그런데 이제 이렇게 밝히신다고 하는 것은, 어떻게든 제 문제에 대한 결론이 났다는 이야기겠지요?”

세연의 목소리는 차분하다. 그녀는 마치 아프지 않은 것 같다. 때로는 기표 자체에서 기의를 읽어내는 것이 가장 어리석은 독해임을, 은결은 잘 안다. 가장된 평온이 심장을 찌른다. 은결은 세연이 그러하듯 고통을 그려내지 않고 고개를 끄덕인다.

“예. 걱정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아마 앞으로도 때대로 기억의 결락이 조금씩 생길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것들을 걱정하지 않아도 좋은 사소한 것들에 불과합니다. 오히려, 그런 결락이 완전히 사라진다면, 그게 더 아쉬운 일이 될 것 같습니다.”

아픔의 수풀을 헤치고 희미한 기쁨이 솟는다. 은결은 그것을 쥐고 작게 웃는다. 푸른 이빨에 대해 모르는 세연은 그의 미소를 해독할 길이 없지만, 그 미소에 담긴 아련함이 그의 말처럼 자신에게 더 이상 문제가 없음을 보증하는 표시라는 정도는 이해한다.

다시 은결이 입을 열었다.

“만일 원하신다면 저와 관계되었던 기억을 모두 지워드릴 수 있습니다.”

“의외의 말씀인걸요.”

세연은 쿡 웃으며 고개를 갸웃거린다. 꽃망울이 갑자기 확 펼쳐지듯 밝은 모습이다. 은결은 잠시 혼란을 느낀다. 그녀는- 드러내지 않는 것이 아니라 정말로 아프지 않은 것 같았다. 그녀가 내보이는 기표는 마치 그 자체로 기의와 밀착된 것처럼 여겨졌다. 그는 약간 망설인 다음, 이야기한다.

“기억은 소중하지만 모든 기억이 소중한 것은 아닙니다. 고통이 성장을 위한 발판이라고 모든 고통을 긍정하고 받아들일 수 또한 있는 것은 아닙니다. 저와의 기억이 세연 양에게 그런 종류의 기억이라고 한다면 굳이 유지할 이유 또한, 없습니다.”

“본래무일물(本來無一物)이군요.”

세연은 놀리듯이 눈을 좁히며 말한다. 본래 한 물건도 없거늘. 은결은 잠시 말이 막힌다. 확실히 자신의 말은 그 말과 닿아 있다. 본래 한 물건도 없거늘 그 자체로 소중한 기억이 있다고 말하는 것은 엉터리다. 만물에 자성이 어디 있단 말인가. 하지만 은결의 말문은 막은 것은 그녀의 여전히 발랄한 태도다. 은결은 묻는다.

“그렇습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괜찮아요. 이런 정도도 껴안고 있지 못해서야.”

라고, 간단하게 세연은 결정해 말한다. 은결은 섭섭함과 기쁨을 동시에 느낀다. 그녀가 쉽게 자신과의 관계를 받아들이고 일어선다는 것은 분명 기뻐해야할 일이고, 실제로 반갑지만, 치사하게도 그런 세연의 모습에 대해 유감을 느끼게 되는 마음도 있었다. 하지만 그녀가 생각했던 것 보다 덜 아파한다는 것, 그러면서 자신이 지니고 있는 것들을 모두 긍정하고 받아들인다는 것은 은결로서는 기대하지도 못했던 크나큰 성공이다. 은결은 마음 한 구석을 짊어지고 있던 무게가 그녀의 웃음과 함께 풀리는 것을 느꼈다.

이어 세연은 약간 입을 삐쭉이며 그에게 말한다.

“그런데, 이제 사귀는 사이가 아니게 되었다고 해서 굳이 경어를 할 필요는 없지 않아요? 앞으로도, 좋은 친구사이로 지낼 수 있을 거라 생각하는데.”

“그게-” 은결은 잠시 당혹해 하며 부드럽게 답을 이어나가지 못하지만 이내 결정한 듯 밝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인다. “응. 그럴지도 모르겠네.” 딱딱하던 말의 모서리가 뭉툭하게 깎인다. 마음이 같이 부드러워진다. 세연을 이성으로서 좋아하거나 사랑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성으로서 어쨌거나 그녀는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 무척 매력적이다. 그녀와 같은 친구를 얻게 된다는 것은 기쁜 일이었다.

“헤헤, 그럼 이걸로 다시 격추를 시도해 보면 되겠지.”

“어?”

은결은 당황한다. 세연은 웃어 보인다.

“그럼 내가 쉽게 물러날 거라고 생각한 거야?”

“그건-”

본의이든 본의가 아니든 은결은 그녀를 두 번 거절했다. 그러니까, 걷어찼다. 그런데도 그녀가 자신을 계속 이성으로서 좋아할 거라고는 은결은 상상하지 못했다. 세연은 볼을 부풀리며 심술궂게 되묻는다.

“뭐, 끈질겨서 싫어?”

“아, 아니...”

“싫어도 할 수 없어!”

흥! 하고 세연은 세게 콧방귀를 뀐다. 그리고 양손을 거만하게 허리에 둔다. 은결은 그녀의 이 모습에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당황한다. 이런 그녀의 모습은 상상한 적이 없었다. 하지만, 쿠로사카와는 다른 의미로 강인한 그녀의 이 태도가 아름답다고, 은결은 마음의 심부에서 느낀다. 그러나 여기 맞물려 안타까움이 마음으로 몰려들어온다. 그래. 쿠로사카. 그녀 역시 세연처럼 말했다. 자신의 향하는 이 두 마음에 대해 자신은 답을 주어야 한다. 최선의 경우라도 한 아름다움을 받아들이고, 한 아름다움을 거절해야 한다. ‘최선의 경우라도.’ 은결은 거기서 상상력의 한계 같은 것을 다시금 느낀다.

그때였다.

“--!!”

은결은 당황한 얼굴로 시선을 돌린다. 그의 시선은 창도 없이 벽으로 막힌 곳을 대각선으로 향하고 있었다. 시각적으로 막힌 벽을 넘어 먼 허공을 직접적으로 바라보고 있기라도 한 것 같은 태도다. 그는 굳은 얼굴로 세연을 바라보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난다.

“세연아, 미안. 볼일이 생겨서, 급히 가봐야 할 것 같아.”

“그래.”

세연은 무언가 급작한 일이 일어났음을 직감하고 다른 말을 더 하지 않는다. 은결은 세연 방의 창문을 열고 그대로 허공으로 날아오른다. 그가 사라진 방에서 세연은 발랄하던 표정을 죽이고, 허리에 걸쳐 놓았던 손을 풀어, 오른 손으로 얼굴을 가린다. 침묵이 길게 흐른다. 뚝, 소리가 희미하게 방안에서 난다. 세연은 겨우 손을 얼굴에서 떼어낸다. 그녀의 얼굴은 길고 뚜렷한 눈물의 길로 젖어있다.

“......”

지탱해 왔던 것들이 하나하나, 소리를 내며 무너진다. 전신이 떨리고, 심장이 쿵쿵 뛴다. 안간힘을 내며 버텨왔던 외면의 조각들이 해체되며 응축되었던 진실이 울음소리를 내며 드러난다. 전신이 떨린다. 흔들리던 무릎이 꺾어지며 그녀는 주저앉았고, 지친 고개를 아래로 떨구며 입술 사이로 신음을 닮은 억눌린 울음소리를 흘린다.

“끅, 흑-”

그와 보내왔던 많은 시간들에 자신이 담던 많은 의미들이 부정되고 무화(無化)되어 나간다. 의혹 가운데 떠올랐던 무수한 판단 들 중, 가장 무서운 것들만이 사실로서 밝혀진다. 양손의 고운 겉소매가 떠날 틈 없이 세연의 눈두덩을 훔친다. 본래무일물은 거짓말이다. 이렇게 아픈데, 이렇게 아픈 것이 어떻게 ‘없다’고 말할 수 있단 말인가. 없는 것이 이런 아픔을 가질 수는 없는 법이었다.

“끅, 씨발, 씨발...”

눈물이 마르지 않는다. 슬픔도 마르지 않는다. 그의 앞에서는 웃을 거야. 그러니까. 그가 없는 지금은 울어야지. 더 울 수 없을 때 까지 울어야지. 그래서 그늘 없는 웃음으로 선량한 그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덜 아프도록 해 주고 싶다. 그녀의 속에서 푸른 이빨도 맹렬한 증오심을 참혹함과 함께 느낀다.

*상상력, 상상력, 신좌파의 상상력~ 이왕 상업성과는 연을 끊은 글을 쓰니 가능하면 많은 이의 마음에 오래 남는 글이 되어 줬으면 합니다.

*제가 요즘 게임을 하지 않았습니다. 게임불감증인가~ 했는데, 지난 설 연휴동안 토먼트-발더스2-쓰론오브바알를 식음을 폐하고 했었죠. 그리고 지금은 다시 게임을 거의 하지 않습니다. 역시 핵심은 게임불감증이 아니라 재밌는 게임을 만나기 힘들다는 데 있는 것 같습니다. 바이어쇼크하고 싶다. 하악.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