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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을 위한 찬가-284화 (284/300)

#   285-희망을 위한 찬가 - 희망을 위한 찬가(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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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 꺼진 아파트의 허리 윗부분에 검은 물체 하나가 떠 있었다. 희미한 빛이 검은 그 덩어리의 선을 드러냈다. 갸날프고, 유려하게- 잘 정리된 선이 주름진 옷의 나풀거림과 함께 드문드문 비쳤다. 풍선이 아니었다. 명백한 사람의 형상이었다. 사람의 형상을 한 풍선도 아니었다. 분명한 질감을 가진, 사람의 모습이었다.

“......”

우뚝 선 아파트를 맞은 대기의 대류가 신음하듯 꺽어지며 센 바람을 만들었다. 허공에 뜬 사람의 옷과 머리칼이 휘날렸다. 펄럭, 하고 이어지는 바람 소리가 말을 대신하는 것처럼 들려온다. 갑자기 아주 밝은 빛이 퍼져나간다. 눈부신 푸른 빛. 그림자의 왼쪽 손 부분에서 발생한 빛이었다. 단순히 밝은 빛은 아니었다. 그 빛의 중심에 모인 에너지는 세상에 존재하는 거의 모든 것을 간단히 찢어발길 수 있을 만큼 크고 격렬했다.

파직-

소망을 토하듯, 고운 손에 모여든 에너지가 신음했다. 그 파괴의 잠재태를 품은 빛의 일렁임에 밝게 드러난 사람의 모습은 한결 놀랍다. 아름다운 소녀의 모습이었다. 귀여운 잠옷을 입고서, 원래 자상해 보였을 소녀의 인상은, 그러나 지금 어딘가 쓰리게 일그러져 있다.

“...제기랄.”

파괴적인 에너지를 응축한 고운 손을 들어올리며, 푸른 이빨을 살짝 위를 올려다본다. 다른 여러 층의 다른 방들과 마찬가지로, 불거진 베란다는 검게 빛을 받아들이고 있다. 그곳은 쿠로사카의 집이다. 이어서 그는 다시 자신의 손을 바라본다. 거대한 힘이 모든 것을 찢어발길 준비를 끝마치고 유동한다.

“......”

푸른 이빨은 이를 악물며 눈을 감는다. 격한 감정의 크기만큼, 턱에 힘이 들어갔다. 으득, 하고 견디지 못한 어금니 안쪽의 이가 깨어진다. 그는 입안으로 조각난 이를 잡고 뿌리 채 뽑아낸다. 핏덩이와 함께 뽑혀 나온 것은 사랑니였다. 그는 이를 태워버리고 손을 내린다. 그의 손에 모여들었던 에너지가 해소된다. 다른 방법이, 필요하다. 고, 그는 속으로 중얼거린다. 고개를 돌리고, 푸른 이빨은 허공 저편, 왔던 곳으로 돌아간다.

-딩동.

정오가 되기 전, 약간 늦은 오전, 벨 소리를 듣고 은결은 문 밖으로 나갔다. 문을 열자 “택배입니다.” 하고 유니폼을 입은 남자가 소포를 들고 인사했다. 은결은 그가 건내는 소포를 받고 사람을 확인했다. 아버지 앞으로 온 물건이었다. 다음 은결은 택배원이 내미는 전표에 사인을 했다. 가지고 들어오니 수행이 기다리고 있었다.

“왔구나.”

“뭔가요?”

바닥에 소포를 내리며 은결이 물었다.

“전에 말하지 않았니. 연재하던 글을 소책자로 묶기로 이야기가 있었다고. 증정본으로 받은 거지.”

“아...”

은결은 고개를 끄덕이며 내려놓았던 소포에 시선을 내렸다. 크기에 비해 좀 무겁고 안이 꽉 들어차 있는 느낌이었더니 책이었던 모양이다. 그는 소포를 묶고 있는 테이프을 뜯고 안의 내용물을 개봉했다. 안에는 주머니에 들어갈듯 아담하고 얇은 책들이 빼곡하고 들어차 있었다. 그 책의 푸른색의 깔끔한 표지 위에는 ‘박수행 칼럼’이라 찍혀 있었다. 은결은 가슴 한 곳이 어딘가 아릿해 지는 것을 맛보며 그 가운데 한 권을 꺼내 들었다. 막 제본되어 나온 책의 깔끔한 감촉은 펼쳐지고 접혀지는 것을 거부하듯 꼿꼿했다. 이 안에 적혀 있는 내용은 암기할 수 있을 정도로 뚜렷하게 알고 있건만, 이렇게 보자니 전혀 모르는 새 글을 보는 것처럼 가슴이 두근거렸다.

“......”

“마음에 드느냐?”

은결은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

“신청한 분들은 많은가요?”

“적지 않다. 덕분에 다시 칼럼을 제안 받았단다. 잘 되어 준다면 어쩌면 앞으로는 잡문을 팔아 그럭저럭 벌어먹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구나. 하하하.”

“좋은 글이었으니까요. 사람들이 많이 읽어 줬으면 좋겠습니다.”

은결은 웃으며 말했다. 수행은 쓸쓸하게 웃으며 조심스럽게 아들을 향해 물었다.

“너는, 그 글의 마지막 이야기를 싫어하지 않았더냐?”

은결은 잠시 굳는다. 한글자 한글자를 씹어 토하듯, 뇌리에 이 책의 본문 마지막을 끄집어 떠올린다. ‘우리가 진정으로 대결해야 하는 것은 국가도 자본도 아닌 우리 자신일지도 모른다...’ 민성의 얼굴이 떠올랐다. 욕망이 극복되지 않기에, 타자는 극복되지 않는다. 마음이 시큰하다. 그것을 억누르고, 은결은 말한다.

“그것을 위해서라도, 많이 읽어 주었으면 좋겠습니다. 그것이야 말로, 제가 넘어서고 싶은 것이니까요.”

“...그렇구나.”

약간은 쓸쓸하게 웃으며 수행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표정을 금세 바꾸고 묻는다.

“그런데, 과자를 굽고 있는 것 같던데 무슨 일이지? 미래가 부탁하기라도 했니?”

“아, 점심 차려 놓고 곧 세연네에 들리려고요. 넉넉하게 만들어 뒀으니까 남은 건 미래하고 같이 드세요.”

수행은 표정을 진지하게 바꾼다.

“...용돈 줄까?”

“...괜찮습니다.”

은결은 약간의 유혹을 느끼면서 거부한다. 수행은 계속 말한다.

“오늘은 늦게 와도 괜찮다.”

“...일찍 올 겁니다.”

수행은 안타까운 표정을 짓는다.

미즈하라는 곤혹스런 표정으로 정좌한 쿠로사카를 바라본다. 이 당차고 강한 소녀는 비행기편을 끊어 돌아온 미즈하라에게 받아들이기 어려운 이야기를 막 한 참이었다.

“(...가지 않겠다고?)”

“(그렇습니다.)”

“(당혹스럽구나.)”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제 결심은 이미 확고합니다. 저는 이 곳에 계속 머물 생각입니다.)”

쿠로사카는 미안한 안색으로 얼굴을 숙인다. 그러나 그녀의 말에는 흔들림이 없다.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는 것과는 별개로, 지금의 판단은 강행하겠다는 의지가 노골적으로 드러나있다. 미즈하라는 불안을 마음에 품고 묻는다.

“(이유는 알려줄 수 있겠지?)”

“(도와야 할 사람이 있습니다.)”

약간 주저하다가, 쿠로사카가 답했다. 미즈하라는 불안의 성장을 느끼며 이맛살을 찌푸린다. 마음의 초조가 노골적으로 드러내며 서둘러 묻는다.

“(도와야 할? 그게 누구냐?)”

“(그건-)”

거기서는 쿠로사카가 쉽게 답하지 못한다. 쉽게 이어지지 못하는 말끝의 길이만큼, 미즈하라는 불안은 팽창한다. 그는 구체화된 불안을 쿠로사카에게 던진다.

“(설마, 전설의 아들이냐.)”

“(---그렇습니다.)”

쿠로사카는 처음에 답하지 못했다. 그녀는 놀라서 숨이 막힌 것처럼, 혹은 결심했지만 쉽게 행동에 옮기지 못하는 것처럼, 긴 침묵을 두고서야 겨우 답을 할 수 있었다. 그러나 물음과 답 사이의 팽팽히 당겨졌던 침묵이 이미 답을 대신하고 있었다. 미즈하라는 확인된 불안이 다른 불안으로서 커지는 것을 느끼며 쿠로사카에게 탄식하듯 중얼거린다.

“(왜, 그렇게 까지 그를 도우려 하는 것인지, 모르겠구나.)”

“(......)”

쿠로사카는 답하지 않는다. 혹은 ‘못’한다. 미즈하라의 얼굴이 구겨진다. 그는 이 당찬 소녀의 어울리지 않는 어색한 침묵에서 불길한 도화 빛을 읽어낸다. 도무지 용납하기 힘든 ‘설마‘가 크게 부풀어 떠오른다.

“(그 녀석을 좋아하는 것이냐?)”

“(예.)”

더는 숨길 수 없다는 듯, 붉은 얼굴로 쿠로사카는 고백했다. 불의의 기습이 모든 공격 가운데서 최고의 위력과 효율을 자랑하듯이, 본래 ‘설마’는 사람을 잘 잡는 법이다.

검으나 밝은 모순된 공간에서, 손길이 페이지를 훑는다. 글의 마지막에 닿은 손길이 페이지에서 떨어진다. 황색 위에 기분 좋게 펼쳐졌던 검은 기호의 나열이 덮여진다. 작고, 푸른 색의 책자였다. 박수행 칼럼이란 투박한 제목의 소책자다. 그는, 마스터 그노시스트는 시선을 돌린다. 바로 곁에 아름답다는 감각 외에 분명한 형태를 인지 할 수 없는 소녀가 다소곳한 모습으로 앉아있다. 호문클루스의 소녀 이리세다. 그는 다소 장난끼 어린 목소리로 속삭인다.

“(후후, 희망을 노래할 때가 되었다. 가자.)”

“(예. 마스터.)”

그리고 두 사람은 함께 그 자리에서 일어나서 천천히 걸었다. 밝은 어둠이 그들을 감싸며 어두워졌고, 선명한 어둠 가운데 떠올랐던 사물들이 묻히기 시작했다.

*사설은 손 좀 봐서 소책자로 만들어 보고 싶습니다. 부록 같은 성격으로.

*공산당선언도 이미 정식으로 여러 종 출간되었고 하니 ‘괜찮다’고 말하고 싶었는데, 백골단 다시 만든다고 하는 걸 보니 붉은비단님 말씀에 ‘괜찮다’고 웃으며 넘어가지 못하겠군요. 하기야 알튀세의 ‘맑스를 위하여’ 가지고 있다고 잡아갔던 게 얼마 전의 일이었으니...

*성원을 합시다 성원을 합시다 성원을 합시다 성원을 합시다 성원을 합시다 성원을 합시다 성원을 합시다 성원을 합시다 성원을 합시다 성원을 합시다 성원을 합시다 성원을 합시다 성원을 합시다 성원을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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