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82-희망을 위한 찬가 - 희망을 위한 찬가(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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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로사카는 거울 앞에서 옷매무새를 가다듬는다. 그녀의 빼어난 유선을 정갈하게 감싼 교복은 막 다린 것처럼 주름 없이 깨끗했다. 마지막으로 쿠로사카는 왼손으로 오른쪽 어깨를 쓸듯이 털어내며 옷매무새 가다듬기를 끝마쳤다. 이어 그녀는 조각상처럼 침묵하고 거울 속의 자신을 들여다보았다. 거울 속의 자신과 시선이 마주쳤다. 마음이 외쳤다. ‘바보.’ 옳은 말이라고, 여겨졌다.
“......”
쿠로사카는 웃었다. 거울 속의 자신도 따라서 희게 웃었다. 아름답고, 강한 웃음이었다. 충분했다. 그녀는 몸을 돌렸다. 현관문 앞에서 신발을 신었다. “(다녀오거라.)” 늙은 그림자가 천천히 다가오며 말했다. 쿠로사카는 고개를 들지 않고 답했다.
“(예. 그리고 어제 말씀드린 것, 잊지 말아주세요.)”
미즈하라는 인상을 찌푸린다. 어제 그녀가 부탁한 용건은 오늘 오후부터 집을 비워달라는 것이다. 하지만 그는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내일 한국을 떠나기로 한 이상 오늘 몇몇 친구라도 초대해서 같이 시간을 보내고 싶은 것은 당연한 일이다 싶긴 했다. 그녀가 이 곳에서 친구와 같은 존재를 만드리라곤 상상하지 못했었지만, 거의 반년간 이곳에서 지내왔으니 몇몇 친한 이들이 생겨도 이상한 것은 아니었다.
“(그렇게 하마.)”
“(그럼 가보겠습니다.)”
그리고 쿠로사카는 문을 열고, 가을의 대기를 맞으며 집을 나섰다.
오전 수업을 마치고 은결은 쿠로사카와 교문 앞에서 헤어졌다가 조금 떨어진 버스 정류장에서 만났다. 주변의 시선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은결은 따로 시간을 지정해 옷을 새로 갖춰입고 약속 장소에서 만나는 게 어떻겠냐고 했지만, 쿠로사카는 시간이 아깝다며, 그리고 같은 학교 교복을 입고 가는 것도 나름 좋지 않으냐며 그냥 이대로 갈 것을 강권했다. 은결은 그녀의 강권을 거절하지 못했다. 곧 버스가 도착했고, 두 사람은 거기 올랐다.
버스를 타고 목적한 곳으로 가면서 은결은 평소와는 다른 쑥스러움을 느꼈다. 쿠로사카와 함께 보낸 시간은 많지만 모두 사무적인 것이었는데, 지금은 분명하게 ‘데이트’였기 때문이다. 주변의 여러 다른 사람들도 틀림없이 그렇게 바라보고 있을 터였다. 그는 코끝을 살짝 긁으며 어색한 간지러움을 넘어서려면 무슨 말이라고 해야 하겠다고 생각했다. 곧 그는 가벼운 최면을 섞어 주변에는 평범한 대화로 인식되게 하면서 입을 열었다.
“(저- 아버지가 완성한 진, 봤어?)”
“(응. 원리는 큰 맥락에서 이해하는 정도밖에 하지 못했지만, 어렵지 않다고 느꼈어. 아마 지금 당장이라도 할 수 있을 거야. 너는 어때? 듣기로는 네가 진의 핵심인 만큼 부담도 클 거라고 하던데. 만에 하나 네 숙련도가 충분하지 않으면 이 진을 중심으로 한 계획은 백지화 될 거라고도 들었어.)”
“(내게 부담이 크긴 하지만 대단한 것은, 아니야. 하루 이틀 정도면 필요한 만큼 능숙하게 다룰 수 있을 거야.)”
말하면서 은결은 편안함을 느꼈다. 역시 이런 대화가 좋았다. 재치 넘치는 농담이라던가, 로맨틱한 이야기 같은 것에 자신은 재능이 없는 것 같았다. 비록 약간 딱딱하고 사무적이지만 이것은 상대가 ‘쿠로사카’이기에만 가능한 이야기였기에 나름의 낭만이 있다고 느껴지기도 했고 말이다.
쿠로사카이기에 가능했다-- 잃어버린 것들이 피를 흘리며 다시 일어난다. 소통할 수 없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쭉 생각해 왔었는데. 이렇게 같은 세계를 공유하고, 자신의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이를 만나고 말았다. 그리고, 그 만남으로, 잃어버릴 것을 뻔히 알면서도 원하던 것을 손에 넣었고, 알고 있던 대로, 손에 넣었던 것을 잃어버렸다. 아픔을 향해 은결은 이야기한다. ‘괜찮아.’
이후로도 수행의 진에 대한 이야기를 두 사람은 계속 나누었다. 사무적인 것 같지만, 그 딱딱함 속에는 두 사람이기에 공유할 수 있는 것들이 다소곳이 자리 잡고 있었다. 그리고 이야기가 기호의 운영이 아니라 진의 에너지 운용에 대한 것으로 넘어가게 되었을 때, 쿠로사카가 우려 섞인 얼굴로 물었다.
“(그리고 네게 에너지 진을 형성하는데 필요한 에너지가 우선 네게 집중되는 구성이라고 알고 있어. 괜찮은 거야? 자칫하면-)”
“(수백명 이상의 술자들이 전력을 다해 방출하는 에너지니 물론 엄청나긴 해. 내가 다루어보았던 가장 거대한 에너지도 이 진을 형성하기 위해 내가 감당해야할 힘의 수준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닐 거야. 그래도 위험한 것은 아냐. 그것들을 내 몸속에 축적하는 것도 아니고, 나는 일종의 중계점 역할을 할 뿐이니까. 피뢰침 같은 거지.)”
“(그래...)”
쿠로사카는 납득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인다. 그리고 이어서 무언가 말하려 하지만 고운 그녀의 입술은 우물쭈물 희미한 움직임을 보였을 뿐, 말은 나오지 않는다. 그녀로서는 드문 일이라 느낀 은결은 고개를 갸웃거린다.
“(왜?)”
“(아무것도 아냐.)”
웃으면서 쿠로사카는 고개를 끄덕였다. 은결은 그녀의 되돌아온 답이 미진하다고 느꼈지만 그 느낌을 의문으로 쿠로사카에게 건낼 수는 없었다. 그가 막 입을 열어볼까 하던 차에, 버스 안으로는 방송이 흘렀고, 그 방송은 다음 정거장이 두 사람이 목표로 하는 곳임을 알려주었기 때문이다.
은결은 눈을 가늘게 했다. 가늘게 좁혀진 그의 두 눈으로 떠오른 느낌은 간명했다. ‘생경함’ 주변은 소란스러웠다. 무수한 사람과 사람이 교차했고, 그들의 대화와 웃음에 소란스레 연주되는 음악이 도리어 묻혔다. 균질적인 공간의 일부를 뚝 잘라 격리시킨 듯 이색적인 다채색으로 물든 곳이었다.
‘유원지라...’
때때로 미래와 함께 예전에 와 본적이 있긴 했지만 그것으로 끝이었다. 유원지의 놀이기구는 대게 속도감 같은 것으로 탑승자에게 흥미를 주지만 은결이 이런 종류의 기구로 속도감을 맛본다는 것은 힘든 일이었고, 귀신의 집 같은 것도 매일 싸우는 상대가 상대이다 보니 시시할 뿐이었다. 그나마 대관람차 정도가 차분하게 정경을 구경할 수 있어서 좋았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 개인적으로 즐기기엔 여러모로 부적격인 장소였다. 이런 곳을 여성과 함께 데이트 장소로 삼아 오게 될 날이 오리라고는. 은결은 쓰게 웃었다. 이곳에 온 것은 쿠로사카의 제안에 따른 것이었다.
“(후후, 뭘 보고 있어? 들어가자.)”
멍하니 서서 바라보고 있는 은결을 보면서 쿠로사카는 발랄하게 웃고는 그의 손을 잡아끌었다. 은결은 당황하면서 그녀의 손길을 피하지 않았다. 두 사람은 함께 자유이용권을 사고서 유원지 안으로 들어갔다.
“후.”
짤막하게 숨을 내밭고 은결은 벤치에 앉았다. 그는 쿠로사카와 함께 놀이기구를 몇개나 탔다. 이제 잠깐 쉬기로 결정하고 유원지 안에 마련된 다소 조용한 공원쪽 구역으로 위치를 옮긴 차였다. 시선을 돌려봤다. 소란은 여전했고, 멀리서 허공에 뜬 레일을 달리는 제트 코스트 소리가 탑승객들의 비명과 환희를 반반씩 섞은 외침과 함께 들려왔다. 둥실둥실 떠 있는 큰 캐릭터 풍선이 무기질한 웃음을 대지로 뿌리고 있었다.
“......”
쿠로사카는 간단한 음료와 간식거리를 사러 갔다. 은결이 가겠다고 했지만 그녀는 굳이 자신이 가겠다고 강하게 주장했기에 은결은 그녀의 의사를 받아들였다. 그러면서 은결은 오늘의 쿠로사카는 어딘가 평소와는 다르다고 느꼈지만 심각하게 문제삼지는 않았다. 이어서 그는 방금 전까지 탑승했던 놀이기구를 돌이켜봤다. 제트코스터, 자이로드롭, 회전목마, 범프카- 예상했던 대로 스릴감 같은 것은 역시 거의 느낄 수 없었다. 범프카 정도가 쿠로사카와 경쟁을 해야 했기에 나름 스릴이 있었을 뿐이었다. 그래도-
“후우-”
은결은 꽤 즐겁게 웃을 수 있었다. 바람을 타고 그려진 것 처럼 그의 얼굴로 그려진 웃음은 자연스러웠다. 시시한 놀이기구라기보다는 이 장소 자체에서 넘쳐흐르는 웃음 자체가 이 미소를 강요하고 있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하나 은결은 자신의 얼굴에 떠오른 미소가 그런 기만적인 것이 아님을 알고 있었다. 자신은 정말 꽤 즐겁다고 느끼고 있었다. 마음을 사로잡던 많은 문제들의 무게가 지금은 덜해진 것 같았다. 그것은- 은결은 쑥스러운 듯 코를 긁으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유리에 덕분인가...’
무엇을 해서 즐거운 것이 아니었다. 누군가와 함께 있기 때문에 즐거웠다. 무언가를 한다는 것과, 누군가와 함께 있는 다는 것은 그렇게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다르게 느껴지고 만다. 타자의 욕망을 욕망한다는 것은 이를 이야기하고 있을 뿐인지도 모른다. ‘----’ 마음의 한 곳이 끓어오르는 것 같은 죄임과 함께 세연의 얼굴이 불현듯 생각났다. ‘좋아하니까 모르게 되었다.’ 거기 자신이 잡아야 할 미약한 빛 같은 것이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그게 아니라면, 신이 아니라 사랑이 신을 만드는 ‘전도(轉倒)’그 자체가 실마리인지도 모른다.
“(기다렸지.)”
들려온 목소리에 생각을 끊고 은결은 고개를 들었다. 아이스크림과 군것질거리를 사온 쿠로사카의 모습이 보였다. 웃는 얼굴로 일어난 은결은 그녀가 사온 것들을 받았다. 그리고 함께 앉아 그것들을 먹으며 간단한 이야기를 나눴다. 주로 이제까지 탔던 기구들에 대한 감상의 교환이었다. 그리고 먼저 자리에서 일어선 것은 쿠로사카였다. 그녀는 이어서 은결을 손목을 잡으며 다른 쪽 손끝으로 큰 놀이기구 하나를 가리켰다.
“(그럼 마지막으로 저걸 타보자.)”
“(대관람차?)”
“(그래. 대미로 삼기에 괜찮지 않아?)”
“(확실히.)”
은결은 웃으며 긍정했다. 그리고 두 사람은 함께 대관람 차에 탔다. 관람석 안은 아늑하고 가벼운 분위기였다. 격리된 공간에는 둘 밖에 없었다. 창피함이 둘 사이로 가을바람을 대신해 흘러갔다. 쿠로사카가 쿡- 하고 웃으면서 말했다.
“(만화 같아.)”
“(만화?)”
“(그래. 만화에서 유원지에서 데이트를 하면 마지막에 대관람차를 타는 경우가 많았거든. 그런 때면 꽤 괜찮은 장면들이 많았던 것 같아. 어쩌면 굳이 너와 이곳에 온 것은 아마 그런 걸 한 번쯤 해 보고 싶었던 것 때문일지도.)”
“(하하, 그럴지도 모르겠는데.)”
그러면서 쿠로사카는 창밖을 본다. 천천히 올라가는 대관람차의 창밖으로 풍경은 멀어지고, 작아진다. 화려하게 채색된 대지로 많은 이들이 걸어가는 것이 보인다. 서성거리거나, 걷거나, 달리거나, 정지한 그들을 하나로 묶는 것은 모두들 즐겁게 웃고 있다는 것이다. 마치 여기서는 웃음 이외의 것을 허락하지 않듯이 많은 이들은 웃고 있었다. 그들을 보면서 쿠로사카는 문득 자신이 이 곳에 옴으로서 바랐던 것은 저러한 웃음이라는 것을 알았다. 저런 많은 웃음이 자신의 등을 떠밀어 자신의 얼굴이 웃음 외의 것을 비추질 않게 되길 원했다.
그때 은결은 웃으며 말했다.
“(그럼, 그런 좋은 장면이라는 걸 하나 쯤 연출해 보려고 하는데, 괜찮겠지?)”
“(에?)”
쿠로사카는 퍼뜩 놀란 표정을 보인다. ‘좋은 장면’ 이라니. 복잡한 상상이 떠오르는 것을 막을 수 없는 표현이었고, 그 복잡한 상상은 아무래도 심장을 두근두근 뛰도록 한다. 아무 것도 이룰 수 없는 기대임을 이미 알고 있음에도. 그녀의 표정을 보면서 은결은 얼마 전 쿠로사카에게 해 주기로 마음먹었던 이야기를 시작했다.
*추천 주신 진아님께 감사. 후후.
*유원지는 만화만이 아니고 에로게에서도 꽤 인기코스.(...)
*기계식 키보드를 쓰고 있었는데 망가졌습니다. 싸구려로 바꾸고 나니 키감이 안 좋아서 워드 치기가 무척 괴롭군요. 서글프다. 기계식 키보드는 키감이 중요하기 때문에 위에 비닐 같은 걸 씌우지 않습니다. 그러다 보니 고장나기 쉽죠. 특히 물을 쏟는다던가. 하지만 고장을 피하기 위해 커버를 씌우면 키를 치는 감촉이 매우 나빠집니다. 기계식 사는 보람이 없죠. 아, 심각한 딜레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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