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79-희망을 위한 찬가 - 희망을 위한 찬가(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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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교시간, 학교에서 조금 떨어진 주택지의 골목길을 두 학생이 지친 걸음으로 걷고 있었다. 맞은편의 태양이 두 사람의 그림자를 길게 늘렸다. 한 사람은 다소 작은 체구의 호리호리한 인상이었고, 다른 한 사람은 위압적인 느낌을 받을 정도로 거구였다. 큰 소년 쪽에서 작은 소년을 향해 물었다.
“그 녀석, 정말로 그렇게 모르는 척 하고 쭉 지낼 생각인 걸까?”
“글쎄...”
“늑대도 민성 그 녀석하고 같이 붙어선 눈도 잘 안 마주치려 들고.”
“그러게...”
“그러고보니, 은결 그 녀석 너 한테도 좀 어색하게 대하는 것 같던데, 무슨 일 있기라도 했냐? 너 까지 그럼 정말 곤란하다.”
움찔, 하고 여우는 잠깐 답변을 멈춘다. 여우는 은결의 자신을 대하는 태도가 약간 어색했던 것을 회상한다. 하지만 왜 그런지는 알 수 없었다. 약하게 유감 같은 것도 느낀다. 나는 네 편이 되겠다고 했었는데. 하지만 그 정도일 뿐이었다. 달리 생각해봐야 할 만한 것들은 없는 것 같았다.
“특별한 일은 없었던 것 같은데.”
“아- 젠장. 은결 그 녀석이 사실 천재였다는 게 뭐 어때서 이놈이고 저놈이고 그렇게 까칠하게 구는 건지 정말 모르겠네. 안 그러냐?”
“......”
여우는 답하지 않는다. ‘은결이 사실은 천재였다.’는 것은 ‘뭐 어때서’ 정도로 정리될 수 있는 사실이 아니었다. 그것이 지닌 의미는 크고 육중했다. ‘천재’라는 것을 몰랐을 때만, 은결을 ‘대단’이 아니라 ‘특이’한 사람으로 바라볼 수 있었다. 특이한 것을 향해 박수를 보내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특이한 것은 나와 어깨를 마주한 다른 것의 모습일 뿐이다. 그러나 그가 보여주는 것들이 ‘대단’하다고 인지되는 순간, 자신을 구성해 왔던 지지대는 위험하게 삐꺽인다.
대단한 것은 나와 어깨를 마주하지 않는다. 그건 고개를 바짝 들고 올려다보아야 하는 위압적인 것이다. 그때 자기를 구성해온 것들이 왜소하고 초라하게 보인다. 나는 왜 저렇지 못하지? 자기부정이 일어난다. 좀 더 노골적으로 말하면 나, 를 나로 유지하기 힘들어진다. ‘나’를 포기하고 ‘그’처럼 되고 싶어진다. 그렇게 되면 마음은 자연히 위압적인 그의 시선이 자신을 향해주길 원하게 된다. 문득, 의문이 느껴진다. 여우는 고릴라에게 시선을 돌린다.
“너는, 은결이 천재란 것 알아도 아무런 느낌도 없었어?”
“응? 나는 별로. 그 녀석 희한했던 건 하루이틀 일도 아니고.”
“니가 제일 대단할지도 몰라.”
가볍게 말을 흘려보내는 고릴라를 보며 여우는 피식 웃는다.
미래는 오른쪽을 본다. 검은 머리의 황색 피부를 한 남자가 보인다. 하지만 그의 외모에서는 어딘지 일질적인 냄새가 난다. 거의 틀림없이 중국인 같다. 미래는 왼쪽을 본다. 갈색 머리의 약간 짙은 피부색을 가진 코가 높은 남자가 보인다. 잘은 모르겠지만 인도쪽이라던가- 그런 쪽에 살던 사람인 것 같다. 어쨌거나 확실히 한국인은 아니었다.
“뭘 그렇게 두리번거려?”
카트를 끌고 물건을 담던 은결이 여기저기를 힐끗 바라보는 미래를 의아하게 생각하며 물었다. 매일까지는 아니더라도 보통 일주일에 한 번 정도는 오는데 뭐가 그렇게 신기하새 두리번거리는 것일까.
“오빠 우리 동네 근처에 무슨 큰 행사 같은 거라고 있어? 좀 국제적으로도 인지도가 있는?”
“이 근처에 행사라고 해 봐야 별거 없는 걸로 아는데... 만개산이 봄철 꽤 멋지니까 거기 맞춰 꽃놀이 하나 하는 정도? 그게 국제적으로 인지도가 있을 리는 없을 테고. 그런데 그게 왜?”
“요즘 우리 동네에 외국인들이 자주 좀 보이는 것 같아서. 여기도 좀 많은 것 같고. 그래서 뭐 무슨 행사라도 있나 싶었거든. 하지만 그런 것도 없는데 갑자기 외국인이 자주 보이다니, 이상한 일이네.”
미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은결은 그녀의 의문에 대한 답을 알고 있다. 저들의 태반은 그와 같은 세계에서 활동하는 이들이다. 일본, 중국, 중동, 유럽, 미국 등, 세계 각지에서 적지 않은 이들이 도천시에 몰려들었다. 적게 잡아도 수백은 된다고 들었다. 모두 수행이 소집한 이들이다. 숨어 살면서도 쇠락하지 않은 수행의 개인적인 위상도 그들을 모으는데 영향력을 발휘했겠지만, 그보다는 역시 대적 중의 대적 ‘그노시스트’의 등장이 이들이 기꺼이 모인 가장 중요한 이유였다. 개별적인 그들의 전투력은 그노시스트에 도무지 미칠 수 없지만 수행이 곧 완성하게 될 진에 따라 싸운다면 충분히 그노시스트와도 싸울 수 있을 터였다. 도천시에, 도천시 중에서도 은결네 동네에 그들이 많이 보이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물론 이런 사정을 미래에게 설명할 수 있을 리가 없다. 은결은 능청을 떨면서 미래에게 말했다.
“뭐, 어쩌면 서울에 그런 게 있는지도 모르지. 우리 시는 서울에 무척 가까우니까 관광기간 동안 베드 시티의 일종으로 삼고 있는 건지도 몰라.”
“음- 그럴지도 모르겠네. 아, 혹시 정말 서울이 지금 그런거 하고 있으면 이번 주말에 나랑 같이 보러 가는 게 어때? 요즘 통 같이 안 놀았잖아.”
“음, 미안. 이번 주에도 선약이 있어서.”
“쳇! 뭐야. 맨날 약속이고, 요즘은 주말에 얼굴 보기도 힘드네!”
미래는 심통을 터뜨렸다. 은결은 쓴 웃음을 지었다. “뭐, 곧 다시 놀아줄 수 있겠지.” 말하면서 은결은 다시 마음이 우울해 지는 것을 느낀다. 자신의 답변이 포함하고 있는 현실의 여러 층위를 스스로 느끼기 때문이다. 곧 세연과도 헤어질 지 모르며, 이미 학교에서의 교우관계는 파괴되어 두 번 다시 얼마 전처럼 웃으면서 지낼 자신이 없다. 고로-
갈망하는 마음을 억누르며 너와 나의 구분을 넘어서기 위해 ‘너’를 만들지 않던 그때와 같은 모습으로 머지않아 돌아가게 될 가능성은 낮지 않다. 그렇게 된다면 그때와 같이 주말은 언제나 공허한 혼자만의 시간으로 돌아가게 될 것이고, 그 시간을 쪼개 미래와 함께 하는 정도는, 얼마든지 가능해 지리라.
마음이 징- 하고 운다. 미래는 민감하게 은결의 표정을 눈치 채고 그에게 묻는다.
“그런데 오빠 요즘에 뭐 안 좋은 일이라도 있어? 한 두 번, 그랬던 건 아니지만, 요즘은 특히 표정이 안 좋아 보이는데. 지금도- 좀 그랬던 것 같고.”
“그런 일 없어.”
“음- 아닌 거 같은데!”
“아냐. 정말이야.”
가볍게 고개를 저으며 은결은 미래의 걱정을 떨친다. 그는 답을 하면서 자신의 마음을 향해 ‘사실이야.’라고 이야기한다. 설령 그렇게 된다고 하더라도, 어차피 처음과 같이 돌아가게 될 뿐이니까. 처음부터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었다. 이제와서 다시 빈손으로 돌아간다고 해서 무엇을 아쉬워한단 말인가. 도리어 그 갈망에 둘러싸여 자신을 무디게 해 왔던 것인지도 모른다. 은결은 자신을 향해 그렇게 이야기 해 준다. 마음 한 켠에서 팔짱을 끼고 선 자신이 그 위로를 향해 냉정하게 이야기 한다.
‘거짓말.’
은결은 이를 간다. 으드득- 하고 입안에서 성마른 마찰음이 울린다. 지독하게 냉정하게 사물을 판단하는 자신의 부분에게 분노한다. 속아주지 않는다. 자기를 향한 자신의 어떤 기만도 냉철하게 뚫어보며 ‘사실’을 말한다.
“오빠?”
미래가 걱정스런 얼굴로 은결을 불렀다. 은결은 퍼뜩 정신을 차린다. 이어서 그는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을 하고 자상한 웃는 얼굴로 미래를 본다.
“아, 잠깐 생각할 게 좀 있어서. 미안 가자.”
“응.”
웃으면서, 미래는 고개를 끄덕인다. 하지만 그녀는 초조감을 느낀다. 방금 은결이 보여준 표정은- 본지는 좀 오래 되었지만 익숙한 것이었고, 그녀가 무엇보다 싫어하는 오빠의 표정이다. 모든 습기를 빼앗고, 빼앗기며 조용히 전진하는 사막의 열풍처럼 메마른 표정.
미래의 초조한 마음은 모른 채 은결은 다시 카트를 민다. 드륵, 하는 가벼운 소리가 나며 큰 카트는 그의 손을 따라 길을 굴렀다. 푸른 이빨과 세연을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가에 대한 문제- 그노시스트, 민성과 늑대에 관련한 친구들 간의 문제, 얻어낸 정보의 소화, 유리에, 그리고 아버지.
많은 생각들이 뒤엉켜 한 치의 숨 쉴 틈도 만들어 주지 않고 마음을 구속했다. 결정함으로서 내버려야 할 것들. 실천함으로서 두려워해야 하는 것들. 판단함으로서 상처 입혀야 하는 것들. 전진함으로서 박살나야 하는 것들. 모든 것은 연결되어 있었고, 분절함으로서 이것은 이것, 저것은 저것이라 말할 수 없었다. 그래서 어느 것 하나 기호가 구축하는 관념 속의 질서처럼 간편하거나 틈 없이 완결되지 않았다. 어디도 도망갈 곳은 없었다. 심지어 자신의 마음조차 도피처는 될 수 없었다. 냉정한 자신의 마음은 자신의 거짓말에 속아주지 않았기에 한 점의 위안도 없이, 사실을 향해 마음은 차디차게 걸어간다.
문득, 손에 온기가 느껴진다. 조금 놀라며 바라보니 미래가 손을 잡고 있다. 그녀는 은결과 눈이 마주치자 “헤헤-” 하고 귀엽게 웃는다. 은결도 웃으며 그녀의 손을 잡았다. 역시, 이렇게 온기를 나눌 수 있는 이들이 가족들 이외에 많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아직까지 결정하지 못했느냐.)”
미즈하라가 답답한 인상으로 물었다. 그 앞에 정좌한 쿠로사카는 말이 없다.
“......”
“(어차피 네가 이 곳에 있음으로서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다. 이 일은 수행의 진을 중심으로 많은 이들이 연합함으로서 그노시스트에 대항하는 방식이 될 예정이다. 키리야미의 진실한 계승자가 된 너의 전투력은 특별한 것이지만, 계획대로라면 무의미한 것이 될 것이다. 그러나 언제 일어날지 모르는 전투 자체는 극히 위험하겠지. 그래서 네게 무슨 일이라도 일어난다면... 우리는 너무나 큰 것을 잃게 된다.)”
미즈하라는 일전 설명했던 것을 간략화 해서 다시 쿠로사카에게 말했다. 그는 쿠로사카 집안과 인척 관계에 있지만 키리야미를 중심으로 권력이 배분되는 그 집안과는 독립적으로 활동할 수 있었다. 그가 쿠로사카를 설득하기 위해 온 것은 그런 이유때문이다. 키리야미의 진실한 후계자가 된 그녀에 대해 쿠로사카 가문의 어떤 누구도 발언권을 가지지 못한다. 쿠로사카 집안의 상층부는 그에게 큰 기대를 하고 절실하게 부탁했다.
“(그게 아니라면 달리 네게 이곳에 남아 있어야 할 이유가 있느냐?)”
움찔, 하고 쿠로사카는 몸을 떨었다. 하지만 그녀는 여전히 답하지 않고 오래도록 앉아서 침묵했다. 미즈하라는 끈기있게 그녀의 이어질 말을 기다렸다. 문득, 수행의 아들이라던 소년이 떠올랐다. 이름은 ‘은결’ 이었다. 알려진 바를 종합하자면 살아서 전설이 되어 있는 아버지에 미치지는 못할지라도 그 소년이 대단히 뛰어난 천재일 것은 분명했다. ‘어쩌면...’ 이라는 생각이 든다. 미즈하라는 미간을 좁힌다. 만일 그렇다면 곤란하게 되었다는 낭패감이 든다.
마침내 쿠로사카는 입을 연다.
“(알겠습니다.)”
그녀의 답을 듣고 미즈하라는 크게 웃는다. 기우였던 것 같다.
*지난화 댓글이 적어서 매우 좌절. 댓글을 답시다!
*이글 완결내고 다시 처음부터 무언가를 쓴다고 생각하니 아득하고 무기력한 기분이 됐습니다. 역시 글쓰긴 꽤 좋아하지만 몇 년이나 한 가지에 취미를 집중시킨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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