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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을 위한 찬가-276화 (276/300)

#   277-희망을 위한 찬가 - 희망을 위한 찬가(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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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른 일요일 아침, 은결은 어제 아무 일도 없었던 마냥 평범한 얼굴로 빨래를 정리하고 집안 청소를 하고 있는 중이었다. 빗자루와 쓰레받기를 각각 한 손에 쥐고 작업에 열중하고 있는 모습은 무척 숙련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의 외면과 달리 내면은 혼돈스럽고 돌아가고 있었다. 그는 어제 얻은 정보를 정리하고 심화해야 했고, 그렇게 얻은 것들로 무엇을 할지도 결정해야 했다. ‘무엇을 할지’ 특히 그를 곤혹스럽게 하고 있는 것은 이 부분이었다. ‘그노시스트와 싸운다.’와 같이 명확한 것이 있는 반면, ‘세연과 푸른 이빨’처럼 그 처리를 명확히 결정하지 못하고 있는 것도 있기 때문이다.

푸른 이빨을 없애고, 세연의 기억을 지운다. 얼마 전에는 능력이 없을 뿐, 결단하기에는 간단하고 주저할 것 없어 보이는 목표였다. 푸른 이빨은 그냥 놓아두기엔 너무나 위험한, 또한 사악한 존재였고, 세연과 자신의 관계는 그로 인해 생겨난 ‘없어 마땅한 부산물’ 같은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능력을 얻을 수 있게 된 지금에 와서는 도리어 결단함이 어려워지고 말았다. 자신의 목숨을 구해준 데서 알 수 있듯 푸른 이빨은 단순히 사악한 존재가 아니었고, 세연은 그 없어 마땅했을 것 위에서 눈부신 꽃을 피워냈기에 ‘없어 마땅한’ 것들은 더 이상 ‘없어 마땅한’ 것들이 아니게 되었다.

“......”

은결은 빗자루로 이제까지 바닥에 그러모은 먼지를 쓰레받기에 담았다. 이어서 그는 허리를 펴고 쓰레기통에 조심스럽게 버렸다. 쓰레받기에서 흘러내리는 먼지와 모래와, 음식 부스러기와, 과자 봉지 조각 같은 것들을 침울한 눈으로 바라보면서 은결은 어제 푸른 이빨이 외친 말을 기억한다. ‘네게 알려줄 필요는 없다!’ 달아오른 분노의 새하얀 결정 같은 모습이었다. 그것은 위험하지만 슬프게 느껴졌다. ‘슬프’게 라니, 얼마나 허황된가. 하지만 은결은 푸른 이빨이 ‘슬퍼’한다고 외에는 느끼기 힘들었다. 은결은 그때의 화난 외침에서 얼마 전 자신을 구해주고 이를 갈며 사라질 때의 모습과 완전한 일치를 느꼈기 때문이다. 그를 지우는 것은 적어도 그 슬픔의 이유를 알고, 그리고 빚진 목숨 값을 갚고 난 뒤로, 하고 싶었다.

‘그리고 세연은-’

세연을 생각하고 은결은 기계적으로 반복하던 동작을 멈춘다. 그는 저절로 따듯한 얼굴로 웃는다. 아직도 가슴이 벅차다. 그녀는 놀라웠다. 그녀가 가지고 있는 것은 틀림없이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들이었고, 그녀가 알고 있는 것은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의 부분 밖에 되지 않을 텐데. 그것들을 가지고 그녀는 자신이 생각해내지 못했던 것을 이루어냈다. 비록 한숨이 날 정도로 연약하지만, 따스하고- 아름다운, 그래서 어쩌면 미래에는 꺾이지 않을 강인함으로 탈바꿈해 줄지도 모르는 그런 결론을.

그리고 그렇게 가슴이 벅차기에 그녀가 보여준 새로움과 놀라움을 생각하는 즐거움은 곧장 고통과 닮게 된다. 그녀의 기억을 지운다는 것을 연상하게 되기 때문이다. 은결은 타인의 기억을 조작한다는데 대해 큰 거부감을 가지고 있지 않다. 만일 타인의 기억을 조작하는데 대해 거부감을 느낀다면 이 일은 할 수 없다. 때로 그는 피해자의 기억을 조작해야 했고, 싸움터가 될 곳에 사람들의 막아야 하기 때문에 많은 이들의 인식능력에 간섭해야 했다.

특별히 엄청나게 긴 기간으로서 대상자의 정체성에 큰 영향을 끼치게 될 정도의 간섭이라면 재고해 보아야 하겠지만, 은결과 세연의 관계는 두 달이 정도 밖에 되지 않은 짧은 것이었고, 그런 정도의 기억을 제거하는 것이 정체성의 차원에서 큰 영향력을 가지리라 생각하긴 어려웠다. 그것이, 얼마 전까지의 판단이었다. 하지만 그 판단은 재고되어야 했다. 세연이 보여준 것은 새롭고 놀라웠으며, 그 새로움과 놀라움이 그녀가 자신을 좋아하기 때문에 가능했었다는-그럼으로 사랑이었다.- 것이 명백한 이상, 원래 계획한 대로 그녀의 기억을 지운다는 것은 그녀가 보여준 놀라움에도, 그리고 그녀라는 개인의 정체성에 관계해서도 아마 깊은 영향력을 발휘할 수밖에 없을 터였다.

마음이 복잡해진 은결은 청소도구를 한쪽 벽에 치워두고 소파에 앉았다. 그는 천정으로 시선을 옮겨 던지며 중얼거린다.

“...그녀에게 선택하도록 할까?”

아버지가 자신에게 그러했듯이, 사정과 판단을 설명하고, 그녀에게 선택하도록 하기. ‘미안합니다. 저는 세연양을 좋아했던 것이 아닙니다. 저는 세연 양을 보호하기 위해 이제껏 좋아하는 척 했던 것에 불과합니다. 그러니 이제 이 관계를 청산해야 합니다. 저는 당신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이제까지의 기억을 유지할지 지울지는 세연 양 본인의 뜻으로 결정하시길 바랍니다.’ 은결은 세연 앞에서 자신이 그렇게 이야기를 꺼내는 것을 상상해본다.

“으---”

숨 막힌 쓰라림을 담은 신음이 곧장 은결의 입에서 흘러나온다. 상상하는 것만으로 가슴이 아팠다. 그런 고통을, 자신이 그녀에게 부여해야 한다고? 어떻게 그런 잔인한 짓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이미 자신은 그녀에게 충분할 만큼 고통을 주지 않았던가. 그렇다면 이를 차라리 한때의 꿈처럼 없었던 일로 만드는 것이 그녀를 위해 좋은 일인 것이 아닐까? 이 세계에서도 정체성의 차원에까지 영향력을 끼치게 되는 기억의 간섭은 극력 피하지만, 예외는 있다. 바로 사념체에 습격당한 피해자의 기억이다. 그 사건은 틀림없이 피해자의 인생 전부를 뒤흔들만한 장신적인 사건이 되지만 그 방향은 반드시 부정적이다. 그런 기억은 주저 없는 제거의 대상이다. 거절당할 것이 분명한 이상 자신에 대한 세연의 마음 역시, 그런 것이 아닐까?

‘그것도 아니라면-’

-기억을 지우지 않고 계속 그녀와 사귀는 것은 어떨까? 라는 결론, 은 흐르는 물처럼 자연스럽게 도출된다. 그것은- 아마 나쁘지 않을 것 같다. 마음이 약간 편안해 지는 느낌이었다. 그녀의 사랑에 사랑으로 답해줄 자신은 없었다. 그녀의 사랑에 자신이 돌릴 수 있는 마음은 사랑이기 보다 우정에 가깝고, 우정보다 동정에 더 가까운 것이 될 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녀에게 또 다시 그런 고통을 부여하지 않을 수 있다면- 그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고, 지금 그녀에게 되돌려 줄 수 없는 마음은, 아마 장래에는 가능해 질 지도 모른다.

그러나-'私は貴方が好き。'(나는 너를 좋아해.) 라고, 다른 소녀가 그에게 말했다. 자신이 정말 세연을 좋아하는 것이 아니면서, 그 마음에 아무런 기회도 주지 않고 세연의 고통만을 생각한다는 것은, 다른 방식의 무척 비겁한 도피에 불과하다는 생각이 든다. 사실은 그녀야 말로 이제까지 진흙탕을 구르던 자신에게 손을 내밀어 준 은인이었는데. 가족을 제외하고 정말로 보답해야할 누군가가 있다면, 틀림없이 그 소녀인데. 그녀가 있었기에 고통을 이야기 할 수 있었고, 친구를 느낄 수 있었고, 실패했지만, 그것을 만들고자 걸어갈 수 있었는데---

은결은 이를 물고, 차라리 세연의 고통을 자신을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이어서 아- 하는 짤막한 흘러넘침이 이어진다. 며칠 전 쿠로사카가 자신에게 보여주었던 표정과 슬픔이 갑자기 이해되었다. 그녀는 곧장이라도 울 것 같이 자신을 향해 ‘그러지 말라.’ 고 이야기했다. 아마도, 아마도- 당시의 그녀는 지금의 자신과 흡사한 마음이었던 게 아닐까. 차라리 자신이 대신 아프고 싶은데, 상대는 건조한 얼굴로 ‘괜찮다.’ 따위를 말해온다. ‘내’가 선택했으니 ‘내’가 받아들여야 할 뿐이라고 말한다.

‘몹쓸 짓을, 했던 것 같구나...’

그는 한 숨을 쉰다. 눈을 감는다. 자신의 고통을 되새긴다. 민성에게서 ‘이제 더는 아는 척 하지 말자.’라는 말을 들었을 때의 기억은 뜨겁게 달군 화인에 찍힌 것 처럼 지금도 뚜렷하다. 그때 민성이 보여주었던 표정과 긴장과 눈동자와 숨결을, 은결은 하나 놓침 없이 뚜렷하게 기억한다. 쓰리다. “하아.” 하고 은결은 놀란 숨을 들이키고 내쉰다. 그리하여 이어진 위로가 여우의 ‘네 편일 테니까.’였다.

먼 곳이든 가까운 곳이든, 그렇게 갈구되는 것은 타자. 너와 나의, 더 나가 적과 아군의 구분. 간수와 죄수의 구분이 마련되는 순간, 선량했던 어떤 누군가는 언제든 악마로 변할 수 있다. 8년 전에 자신을 향해 쏟아지는 오줌줄기를 보면서, 그들의 함께 웃는 웃음을 보면서, 왜 저들은 저 곳에서 저런 일을 하며 웃을 수 있고, 왜 나는 이곳에서 오줌을 맞고 있어야 하는지 생각했는데, 지금도 그때의 마음에서 한 치도 벗어나진 못한 것 같다.

저들은 저들로서 저들을 규정하고, 우리는 우리로서 우리를 규정한다. 나는 네가 아니야. 너는 내가 아니지. 거기서 무얼 더 나갈 수 있을까. 욕망이 타자의 욕망이라는 것은, 언제나 알아 왔던 것이 아닌가. 새삼스럽다. 이곳에서 아버지는 ‘모두들 상상력이 부족했습니다.’ 라며 웃어야 하지 않았던가.

“------”

은결은 눈가를 훔친다. 소매가 흥건하다. 저절로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젖은 소매자락을 보면서 은결은 유리에를 만나서, 조금 더 솔직하게 이야기 하고 싶다고 느낀다. 그녀에게 사실은 ‘이렇게 아팠다’고 말해보고 싶다. 그것이 그녀를 원망한다는 뜻은 아니지만, 그래서 그 선택을 후회한다는 뜻인 것은 아니지만, 그때 그녀에게 해 주었던 말이 거짓이었던 것도 아니지만, ‘괜찮았다.’를 넘어서서, ‘이렇게 아팠지만 그래도 괜찮았다’고 솔직한 마음으로 이야기 해 주고 싶었다. 그것이 ‘좋아한다’고 말해준 굳건하고 아름다운 그 소녀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 같은 거라는, 생각이 든다.

막 점심을 다 먹은 쿠로사카는 상을 치우고 베란다로 나선다. 조용하고 살풍경한 방안과 달리 태양빛을 덮어쓴 거리의 모습은 다가오는 추위에 무관하게 활기차고 맑다. 그러나 그 밝은 풍경을 바라보는 그녀의 아름다운 얼굴은 우울하고 슬프다. 그녀는 난간을 잡았고, 그녀는 억제한다고 생각했지만, 무의식중에 난간의 스테인레스는 점차 그녀의 고운 손 모양대로 찌그러져 간다.

‘물론이야.’

쿠로사카는 머릿속에서 그 말을 되뇌인다. 소년을 향해 자신이 해 주었던 말이야. ‘물론이야.’ 네가 한 말이 옳아. 네가 뜻 한대로 될 거야. 서글픈 표정의 소년에게 웃으면서 말해주었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이 했던 말을 믿지 못했다. 사실 소년이 했던 말도 이해했다고 자신하지 못한다. 그런데 어떻게 그가 했던 말에 대해 옳다던가, 그르다던가, 실패한다던가, 성공 한다던가 따위의 말을 할 수 있을까. 그런 것은 최소한 그가 했던 말을 이해하고서나 가능한 것일텐데. 쿠로사카는 당시 자신의 말이 기만적이라고, 다시금 느낀다.

그렇지 않아도 이미 그를 한 번 지옥에 밀어넣은 주제에.

‘......’

둔통이 가슴을 쑤신다. 크고 날카로운 눈망울에 도시의 모습이 담긴다. 자신이 왜소했다. 그 앞에서 쿠로사카는 자신감을 잃는다. ‘견딜만한’ 것으로 바꾸었으니 ‘보람찬’ 것으로도 바꿀 수 있을 것이라고? 어떻게 그런 뻔뻔한 말이 가능했던 것일까. 그는 자신의 제안을 생각하고, 실천했기 때문에 도리어 구렁텅이에 빠졌다. 그의 친구들은 그의 진실한 모습에 침을 뱉고 떠나갔다.

그들이 나쁘기 때문이었던 것은 아니었다. 도리어 그나마 선량한 자신을 유지하기 위해서였다고, 떠나간 그의 친구들은 이야기했다. 은결이 괴로워하는 꼴을 보면서 즐거워하는 자신이 싫다고, 그런 자신을 발견하고 강화해 나가는 것을 견딜 수 없다고, 그러니까- 그와는 더 함께 있고 싶지 않다고 했다. 쿠로사카는 그들을 비난하거나 비판하기 어려웠다. 민성과 늑대의 모습은 어쩌면 자신의 것이었다.

-키익, 소리를 내며 난간은 완전히 짜부라진다.

들떠서 착각하고 말았다. 자신에게 가능하다고 다른 모든 이들에게 가능한 것이 아닌데. 은결의 아버지 수행은 지난번 이야기의 말미에 자신에게 했던 마지막으로 이야기했다. ‘은결을 알 지 못한다’고. 그 말이 가리키는 지점은 이곳과 연결되어 있는 것 같았다.

“(...어쩌면 좋을까.)”

쿠로사카는 우울하게 속으로 중얼거렸다. 은결을 좋아한다. 은결의 도움이 되고 싶다. 그러나 어떻게 하면 은결의 도움이 될 수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이렇게’ 하면 된다고 생각했던 것은 더 나빠질 수 없으리라 생각될 만큼 완벽하게 실패했다. 그리고 그는 자신에게 ‘괜찮다.’고 웃으며 말해 줬다.

-딩동.

벨이 울렸다. 쿠로사카는 우울한 마음을 접고 문으로 갔다. 찾아올 사람이 거의 없었기에 누구인지 의아했다. 혹시 은결일까? 하는 생각도 스치고 지나갔다. 그녀는 애써 부정했지만 지금과 같이 혼란한 마음 가운데서도 은결이 찾아왔다고 생각하는 일은 기쁘고 즐거웠다.

“누구-”

찰칵, 하고 문을 열며 밖으로 내다본 쿠로사카의 표정이 곧장 굳었다. 문 밖에는 한 명의 노인이 서 있었다. 그는 쿠로사카도 잘 아는 사람이다.

“(아저씨...)”

미즈하라였다. 그는 굳은 어조로 권했다.

“(돌아가자꾸나.)”

*추천해 주신 slglfslglf 님께 감사! 그래도 저는 클라우스 학원 이야기도 많이 좋아합니다. 꽤 좋은 글이라고 자부하죠. 특히 캐릭터들에게 애정이 많습니다. 하하하.

*일본 쪽 작품에는 도식화된 말투로 캐릭터 자체의 성격을 드러내는 일이 많습니다. 가령 여성 캐릭터가 もん。으로 말을 끝내면 좀 귀여운 스타일이기 쉽고, わ로 말이 끝나면 십중팔구 ‘야마토 나데시코’로 정의되는 캐릭터입니다.

그 외에 일인칭 사용법으로 이런 게 다시 결정되기도 합니다. わたし가 기본이고, あたし는 좀 귀여운 타입. わたしく는 또 양갓집 아가씨. ぼく는 남성용 일인칭 이지만 보이시한 스타일의 경우 쓰기도 합니다. 남자는 거의 대부분 俺를 쓰고 僕는 별로 쓰이지 않는다고 합니다. 남자가 僕를 쓰면 어리거나 기가 약해 보이는 타입이죠.

물론 만화나 소설, 게임 등의 이야기일 뿐이죠. あたし는 실제로도 좀 쓰인다고 들었지만. 아즈마 히로키 같은 사람은 엔테테이너 가운데 드러나는 이런 규격화된 개성의 틀을 일본 오타쿠 문화가 동물화하는 징후로 보기도 합니다. 쿠로사카 말 끝머리를 어떻게 처리할까~ 하다가 생각이 나서 끄적여 봤습니다.

*성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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