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74-희망을 위한 찬가 - 희망을 위한 찬가(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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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결은 세연의 말에 조금 놀란다.
“좋아하니까, 모르게 되었다고?”
“응” 하고, 세연은 붉어진 얼굴로 고개를 끄덕인다. 그리고 그녀는 차마 은결의 얼굴을 볼 수 없다는 듯이 그의 시선을 피한다. 반대로, 은결은 무언가 근질근질 기어 올라오는 듯한 감각을 느끼면서 그녀를 쳐다본다.
“어째서, 좋아하니까 모르게 되었다는 거야?”
‘좋아하니까, 모르게 되었다.’ 거대한 명제처럼, 그것은 은결의 사고를 압박해 오고 있었다. 물음을 던지면서 은결은 입안의 침이 말라 있는 것을 느낀다. 그의 질문에 세연은 여전히 시선을 맞추지 못한 수줍음을 내보인 채, 저기, 그러니까- 하고, 어설픈 서두와 몸짓으로 말을 시작한다.
“음, 정확히 설명하긴 어렵지만, 원래 ‘이렇다’고 생각하고, 판단했던 것이 좋아하게 된 뒤로 바라보니까, 때때로 ‘과연 그럴까?’라는 생각이 들었거든.”
“과연 그럴까. 라고?”
“응. 예전에 네가 어떤 표정을 보여주면, 그 표정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이라고 알 수 있었어. 하지만 너를 더 ‘좋아’하게 될...”
말을 끝내지 못하고, 세연은 저절로 심호흡을 하게 된다. ‘좋아’한다. 는 말은 사실 너무 가볍다고, 그녀는 느낀다. ‘좋아’라는 표현은 은결에 대한 자신의 마음을 결코 다 담지 못한다고 여기는 탓이다. 그러나 창피함과 두려움에 ‘좋아’를 넘어서는 말은 감히 할 수가 없다. 이렇게 ‘좋아’라는 말을 반복해 보는 것만으로도 자신의 감정에 짓눌려 숨이 막힐 것 같다. 다시 숨을 쉬고, 세연은 말을 이어간다.
“...수록 정말 그런지 확신 할 수가... 없었거든. 혹시 네가 웃으면서도 그 웃음이 웃음이 아니라 실망의 다른 표현인 것은 아닐까, 실망이 아니더라도 지루함의 다른 표현이지는 않을까. 무미건조함의 다른 표현인 것은 아닐까, 그런 생각을 계속 하게 됐거든. 그러다 보니, 애시당초 이러니까 이렇다는 식으로 알고 있었다고 생각했던 너에 대한 나의 모든 ‘앎’들에 자신이 없어졌어. 더구나, 다른 방식으로 그런 것들을 판단한다고 해도, 그것들은 그러한 방식으로 얼마든지 그것들의 서사를... 구성할 수 있었거든.”
“...!”
시선을 들지 못하는 소녀의 말은 두려움에 슬픔에 젖어 촉촉하다. 그러나 연약하고 부드러운 그 말에서 은결은 큰 충격을 받는다. ‘좋아’하기에 모른다. 왜냐하면 ‘좋아’하게 됨으로서 자신이 가지고 있던 사태에 대한 기존의 지식에 대한 ‘확신’이 해체되었기 때문이다. 좋아 하게 됨으로서 좋아하게 된 그것을 더욱 정확히 알고 싶은데, 정확히 알기 위한 반성과 숙고는 도리어 이전 정확히 알고 있었다고 생각되었다는 것을 ‘해체’해 버린다. 지금까지 옳다고 믿어왔던 판단들이 사실은 틀린 것이 아닐까, 그래서 좋아하는 것에게서 자신이 거절당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이전의 ‘믿음’을 붕괴시키기 때문이다. 그것은- 좁은 구멍으로 거대한 것이 올라오려는 것 같은 답답함이 마음을 사로잡는 것을, 은결은 뚜렷하게 느낀다. 세연은 달아오른 자신의 얼굴을 느끼며 조심스럽게 묻는다.
“...은결은, 그런 적 없어?”
“나는, 그런 경우가-”
-마음의 어딘가에서 ‘있다.’고 차분하게 이야기한다. 그리고 아버지의 웃음이 떠오른다. 절망을 앞에 둔 웃음이었다. 그 절망은 거대하고 강력한 적에 대한 절망이 아니었다. 그런 것이 싸워야 할 적이었다면, 아버지를 넘어서겠다는 말은 얼마나 쉽고 간단한 것이었을까. 절망은 ‘상상력이 부족했습니다.’ 였다. 그 미소는 무슨 뜻이었을까. 은결은 여전히 자신이 그 미소의 의미를 파악하고 있다고 여기지 못한다. 은결은 가슴을 가르는 저림을 느끼며 말한다. 쌕- 하고 숨이 혼과 함께 토해지는 것 같이 답답하다.
“-있어.”
세연은 답을 듣고 안도한다. 하지만 그 ‘있다’는 답의 경우가 자신을 향한 것인지는 차마 묻지 못한다. 그걸 확인하는 것은 ‘무서운’ 일이었다. 그녀는 여기서 만족하기로 한다. 그리고 하던 말을 계속한다.
“참 이상하지? 좋아하게 되니까, 기표에 대한 기의가, 너무 많아 진 것 같아. 아니, 기표 자체가 굉장히 많이 늘었다고 해야 할까? 어느 쪽이든- 그래서 좋아하게 되니까, 너를 더욱 알 수가 없게 된 것 같았어. 그래서...”
“......”
“그래서, 그때 네가 사랑은 대답이 아니라고 잘라 말했을 때, 굉장히- 슬펐어.”
“어...”
무언가, 쾅, 하고 박살나는 것을, 은결은 느낀다.
나는 사랑이 대답이 될 수 있다고는 믿지 않는다. 왜냐고? 모든 해석은 권력이고, 권력은 폭력과 함께 하기에, 여전히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 가운데 돌아가는 무의미한 원이고- 무의미한 원의 동력이자 질료이기에, 그것은 대답이 될 수 없으며, 사랑은 신의 속성이 아니다.
그런데, 좋아하기 때문에 ‘모르게’ 되었다고? ‘좋아’하기 때문에 ‘해석’이 불가능하, 거나, 지극히 곤란하게- 된다고?
이것은-
퍼즐의 조각조각이, 달깍 소리를 내며 깨끗하게 맞춰 들어간다. 답답하게 막혀 있던 것이 거칠게 해방된다.
-‘폴 발레리를 기억하렴.’ 이라고
아버지는 말했다. 폴 발레리는 무어라고 이야기 했지? 창작자에서 완성된 작품으로까지의, 완성된 작품에서 감상자까지의 ‘불투명성’을 이야기했다. 그리고 ‘예술’은 그 불투명성 위에서 성립한다.
고로, 신이 사랑을 하는 것이 아니다.
고로, 완벽한 독자가 텍스트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다.
세계가 이지러진다.
“에? 왜 그래? 어디 아파?”
세연이 걱정 어린 얼굴로 은결을 바라본다. 그는 갑자기 창백한 얼굴로 고통을 참는 것처럼 벤치에 앉아 있다. 얼굴로는 식은땀이 흥건했다. 걱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은결은 고개를 들고 세연을 바라본다. 그리고 그녀에게 손을 내밀며 “괜찮아.” 하고 말했다. 세연이 따라 창백해진 얼굴로 초조하게 강권한다.
“전혀, 괜찮아 보이지 않는걸! 어서 일어나자!”
“아니야. 나는, 정말로, 정말로 괜찮아. 단지- 놀랐을 뿐이야. 나는-”
그리고 은결은 큭- 하고 입술을 무너뜨리고, 배를 잡고 웃기 시작한다. “아하하하하하-” 믿을 수 없이 우스운 것을, 기쁜 것을 만난 것 처럼 그는 웃기 시작한다. 이내 그는 벤치에서 굴러 떨어져 마른 잔디 위로 뒹굴며 웃는다. 지나가던 이들이 묘한 눈길로 두 사람을 바라본다. 세연은 한결 더 허둥지둥 하며 그의 옆으로 간다.
“가, 갑자기 왜 그러는 거야?”
“아, 아하하하, 나, 나는 왜 이렇게 바보 같을까. 미안, 정말 미안! 크, 크크큭, 아, 제기랄! 아하하하, 아하하하, 너, 너는 정말 대단해! 나와는 달라! 내가 판단할 수, 없어! 나는 규정할, 수 없어! 아, 제기랄! 몇 번이나 알아놓고도- 그런데도!”
눈물을 섞어 웃으면서, 은결은 정말로 기쁘게 웃는다. 그는 정말로 자신이 바보 같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자신의 멍청함이 이렇게 까지 기쁠 수 있을지는 몰랐다. 너무너무 기뻐서- 가슴이 부풀러 올라 떠오르는 것만 같다.
세연이 자신과 같다고? 비슷한 생각을 한다고? 그건 대체 얼마나 멍청한 오만이었단 말인가! 비슷한 것을 알고 있다는 게 어쨌다는 거지! 그녀에게는 그녀만의 엘랑비탈이 있고, 그 엘랑비탈은 그것을 통해 이런 놀라운 창발성을 보여주는데! 지루하다고! 그것은 타자 앞에서 무릎 꿇지 못했던 자신의 오만일 뿐이 아니었던가...!
은결은 기꺼워하며 자신을 반성한다. 눈물이 나고, 웃음이 멈추지 않도록 즐거운 자기 부정이었다. 하지만 전후맥락을 모르는 세연에게 지금 은결의 모습이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녀는 은결 옆에서 계속 어쩔줄 모른 채 당황한 얼굴을 하고 있을 뿐이었다.
“응. 그랬던 거구나! 사랑이, 신을 만드는 거야. 신이 사랑을 하는 게- 아냐. 사랑이 완벽한 독자를 만드는 거야. 완벽한 독자가, 텍스트를 사랑하는 게- 아냐. 아, 젠장. 이건 정말 유쾌한걸... 아하하하...”
은결은 중얼거린다. 그 중얼거림을 듣고, 세연은 그제서야 당황한 얼굴을 풀고 헤설피 웃어 보인다. 그신에게까지 올라가는 거창한 이야기가 될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지만, 자신이 사랑에 대해 이야기 하고 싶었던 것이 바로 지금 은결이 말한 부분인 것은 사실이었다. 은결이 이렇게까지 과격하게 반응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었지만. 그리고 점차 웃음이 죽었고, 은결은 얼굴을 덮던 손을 치우고 세연을 본다.
“지난 주에는 미안...”
“으응. 네 말도 틀린 것은 아니었는 걸. 내가 무슨 말을 하려 했던 건지 이제라도 알아 줬으니까 그걸로 괜찮아. 사실 그때는 나도 잘 몰랐었으니까... 헤헤.”
자상한 웃음과 함께 세연은 고개를 저었다. 은결은 느릿하게 몸을 일으켜 세웠다. 옷 여기저기에는 마른 풀잎이 묻어 있었다. 은결의 만류에도 세연은 조심스런 손길로 그것을 털어 줬다. 그러면서 물었다.
“그런데 갑자기 왜 그렇게 웃었던 거야?”
“네가 내가 생각하지 못했던 것을, 혹은 외면하던 것을, 일깨워 줬거든.”
“중요한 거야?”
세연은 기쁜 듯 미소를 떠올리며 묻는다. 은결은 애매한 얼굴로 “음-” 하고 한참 생각한다. '사랑'을 믿는가. 그는 자신에게 속으로 묻는다. '믿지 않는다.'차분한 대답은 주저없이 돌아온다. 그래도- 그리고 은결은 겨우 답한다.
“아마도.”
“뭐야 그게.”
세연은 불만스런 얼굴을 한다. 그녀의 불만은 당연하다. 그렇지만 은결에게는 ‘아마도’까지 건져 올릴 무엇이 자신에게 생겼다는 것만으로도 더할 나위 없는 보물을 발견한 기분이었다. 아버지는 말했다. ‘상상력이 부족했습니다.’ 그렇다면 각자의 에피스테메를 넘어설 추진력을 가진 고통스런 상상력은 어디서 얻어낸단 말인가. 은결은 마음이, 마음이, 마음이, 마음이 아우성치는 것을 느낀다.
“뭐 어때! 가자!”
그리고 은결은 유쾌하게 손을 내밀었다. 세연은 평소에 볼 수 없이 기뻐하는 은결의 모습을 보고 내심 같이 기뻐하며 그의 손을 “응.” 하고 잡는다. 기대에 마음이 두근두근 뛰었다. 은결은 그녀의 고운 손을 평소에 없이 세게 잡는다. 약간은 차갑고, 약간은 단단한 은결의 손에서 느껴지는 감촉에 세연은 놀라움과 포근함 같은 것을 같이 느낀다.
하지만 기꺼이 세연의 손을 이끌며 유쾌하게 걸음을 옮기면서도 은결은 그 기쁨에 수반하는 안타까움에 속이 타는 것 같은 고통을 느끼고 있었다. 이제 곧 세연의 기억은 푸른 이빨과 함께 지워져야만 하기 때문이다...
*추천해 주신 실버스푼님께 감사! 굽신굽신. 그리고 꼽사리로 추천해 주신 논리야놀자 님에게도 감사! 별거 있겠습니까. 이렇게 성원해 주시는 분들 보면서 연재하는 거지. 하하.
*저번 화에 별로 낚시할 생각은 없었는데 만선을 이루어 본의 아닌 강태공이 되었습니다. 다스림 없는 다스림이 최고의 정치인 것 처럼, 낚시 없는 낚시야 말로 낚시의 도라 할만 하겠습...(...)
*성원! 리플! 감상! 기타등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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