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73-희망을 위한 찬가 - 희망을 위한 찬가(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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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마치며.
역사는 수메르에서 시작되었다. 지금도 우리는 그들이 이루어낸 많은 것들을 품고 있다. 하지만 그들이 남긴 유산들 가운데서도 가장 놀라운 것은 그들이 남긴 한 편의 신화다. 점토판에 남아 우리에게 전해진 ‘길가메시 서사시’는 인간 삶이 품는 참혹함을 있는 그대로 드러낸 고통스러운 글이다.
힘 있는 길가메시는 마음에 들지 않는 자를 쳐 죽이고, 마음에 드는 여자를 강간하는 악당이었다. 그는 힘으로 지상에 빛나는 제국을 세웠고, 아무도 그것을 무너뜨리지 못했다. 그러나 지상의 모든 권세를 누리던 그도 결국 죽음을 피할 수 없었고, 죽음을 피하기 위해 노력하던 그의 여정은 시두리의 노래는 긍정하는 죽음으로서 귀결될 뿐이었다. 시두리의 노래는 이러하다.
‘길가메시여 어디로 급히 가려 하십니까?
당신은 생명을 찾을 수 없을 것입니다.
신들이 인간을 만들 때 인간에게 죽음도 함께 붙여 주었습니다.
그리고 생명만은 그들이 보살피도록 남겨두었습니다.
길가메시여 당신에게 충고를 드리죠.
좋은 음식으로 배를 채우십시오.
낮으로 밤으로 춤추며 즐기십시오.
잔치를 벌이고 기뻐하십시오.
깨끗한 옷을 입고, 물로 목욕하며 당신 손을 잡아줄 어린 자식을 낳고, 아내를 당신 품 안에 꼭 안아 주십시오.
왜냐하면 이것 또한 인간의 운명이니까요.’
수메르는 참혹한 환경 위에 성립한 문명이었다. 그들의 대지는 비옥했고, 그들의 사는 곳은 뚫려 있었기에 힘 있고 욕심 있는 자들은 그곳을 얻기 위해 언제나 쳐들어와 싸웠다. 피가 마르지 않는 대지였다. 그들의 신화가 허망함을 이야기 하는 것은 아마도 그들이 살아야 했던 시절과 환경에 무관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도 그들은 신화를 ‘적었’고, 신화를 ‘남겼’다.
21세기가 되었다. 20세기를 돌이켜 보며 많은 이들이 이제 ‘이념의 시대’는 끝났다고 말한다. 이념은 정말 끝난 것인가. 이념은 끝난 것이 아니라 그것을 드러내줄 ‘타자’를 잃어버렸을 뿐인 게 아닌가. 차이를 드러내줄 타자가 없어진 이념의 속에서 이념이 보이지 않기에 이념이 사라졌다고 말하고 있을 뿐은 아닌가.
이제까지 지면을 허락해준 편집부에 감사의 말을 전한다. 또한 이진경 군과 정교수님이 아니었다면 이 글을 쓰일 수 없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은결과 미래, 그리고 아버지에게 고마움을 전하고 싶다.
옷을 곱게 차려입은 소녀가 모니터에 떠오른 글을 읽고 있었다. 그녀는 마지막 문장을 눈으로 하나하나 읽은 다음 고개를 뒤로 물렸다. 소담한 어깨가, 자연스레 함께 뒤로 물렸다. 등이 뒤로 향했다. 삐꺽, 하며 의자의 등받이가 그녀의 몸을 받았다.
“......”
소녀는 그 글이 좋아하는 사람의 아버지가 쓴 글이기에, 그리고 얼마 전에 끝이 났다기에 시간을 내어 살펴보았다. 그리고 방금 모두 읽을 수 있었다. 감상은 ‘슬픈 글’이라는 것이다. 글 자체가 감정을 자극하는 산문인 것은 아니었다. 사실에 대한 많은 이야기가 담겨진 글이었다. 하지만 많은 사실로서 짜여져 결국 ‘우리가 대결해야 하는 것은 우리 자신’이라고 말하고 있기에 슬픈 산문보다 슬픈 글인 것 같았다.
“......”
잠시 그 슬픔에 대해 생각해 보았지만 막막함만이 앞으로 가로막을 뿐이었다. 그 슬픔에 대한 어떤 대답도 세상에는 준비되어 있지 않은 것 같았다. 헝클어지는 생각을 아예 깨끗하게 지워버리고, 소녀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늘은 은결과 만나는 날이고, 그러니까 좀 더 기뻐해 마땅한 날이다.
약속장소로 나가니, 한 남자애가 주변을 서성거리고 있는 것이 보였다. 소녀, 세연의 얼굴이 확 밝아졌다. 은결이었기 때문이다. 아무리 많은 사람들 가운데 있어도 은결의 모습은 확실하게 알아 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의 모습은 주변의 다른 사람들과는 확연히 다른 깊이와 색감으로 이해되었다. 이상한 일이었다. 정작 그의 모습을 보거나 생각할 때면 알 수 없다는 감각에 사로잡히면서도, 은결이라는 개인 자체는 다른 어떤 개인보다도 뚜렷하게 인식된다. 어쩌면 이것이 나오는 길에 읽어봤던 글의 말미에 나와 있던 차이와 타자와 인식의 문제인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서둘러 은결에게로 향했다.
“늦어서 미안.”
“아니. 내가 약간 먼저 나온 것 뿐이야.”
은결은 웃으면서 세연을 맞았다. 그녀의 아름다운 얼굴을 보면서 그는 약한 서글픔 같은 것을 느꼈다. 앞으로 얼마 있지 않아 이 소녀의 미소가 자신을 향하지 않게 될 거라고 생각하면 한 사람의 친구를(그녀가 ‘친구’였던가에 대한 반성을 은결은 의식적으로 괄호친다.) 잃게 된다는 데서 역시 안타까울 수 밖에 없었다. 어제 당장, 두 명의 친구를 잃었고, 오늘 학교에서 남은 친구들과도 기쁘게 웃을 수 없었기에, 상실에 대한 각오는 안타까움 같은 것을 담을 수밖에 없었다.
“그럼 갈까?”
-하고, 은결의 생각을 끊어내며 세연이 말했고, 은결은 웃는 얼굴로 “응” 하고 답했다. 이어서 두 사람은 함께 계획했던 장소로 발걸음을 옮겼다.
두 사람이 먼저 들렀던 곳은 근처의 역사박물관이었다. 조선 시대를 중심으로 이런저런 유물을 전시해 놓고 있는 곳이었는데, 사람이 많다고는 말할 수 없었지만 은결과 세연처럼 연인끼리 들리거나 학습을 목적으로 초등학생부터 폭넓은 학생층이 방문하는 덕분에 ‘역사’ 그 자체를 연상하게 하는 쓸쓸함을 담지는 않은 괜찮은 곳이었다. 두 사람은 한 동안 그러한 유물들을 구경하며 이야기를 나눴다. 누군가 견식이 있는 이들이 들었다면 놀랬을만한 깊이를 가진 대화였다. 세연은 그런 대화 틈틈이 이상하게 가슴 깊게 짓눌리는 느낌을 받았다. 그리고 두 사람은 박물관 건물을 나섰다. 박물관 앞에는 꽤 넓은 공원이 마련되어 있었고, 의례히 그러하듯 조각이 몇 작품 전시되어 정경에 풍취를 더하고 있었다.
두 사람은 쌀쌀한 가을바람을 느끼며 공원의 한 벤치에 앉았다. 자리를 잡고 나서 은결은 근처의 매점에서 간단한 먹거리를 사 돌아와 세연에게 하나를 건넸다. 세연은 양 손으로 은결이 건네는 음식을 받으면서 햇살처럼 “고마워.” 하고 웃었다. 은결이 다시 세연의 옆 자리에 앉았다. 가을에 물든 나뭇잎이 바람을 따라 두 사람의 위로 드문드문 떨어졌다.
이후로도 두 사람은 사온 것을 들며 이야기를 계속했다. 주로 박물관에서 보았던 유물에 대한 것들이었다. 그것은 당연히 역사에 대한 이야기로 화제를 옮겨가게 했다. 세연은 다시 가슴이 눌리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고, 그제서야 당혹스런 느낌의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수행의 사설 때문이었다. 그 글이 담고 있는 슬픔이 이곳의 유물과 역사에 대한 이야기 가운데 계속해서 공명하고 있다는 감각이었다. 세연은 그 느낌에 마음을 맡기고서 입을 열었다.
“저기 있잖아.”
“응?”
“전에 나하고 얘기했던 거 있잖아.”
“전에, 얘기했던 거?”
은결은 의아하게 고개를 갸웃거린다. 전에 얘기했던 거라. 세연과는 매일이라 할 만큼 자주 통화를 나누기 때문에 그만큼 나눈 이야기도 많았다. 그저 ‘전에 얘기했던’이라고 말한다면 어떤 대화를 말하는지 쉽게 알아채기는 어려웠다. 그렇게 알쏭달쏭한 얼굴을 하고 있는 은결을 보고 세연은 약간 심통이 난 듯 볼을 부풀렸다.
“저번에 시험 점수에 대해 얘기했던 거 말야. 점수 오른 것 같다고 처음 자랑했던 거.”
“아, 그거. 그런데 그게 왜?”
“그때 내가 바보가 되는 것 같다고, 이야기 했었잖아.”
“그랬지.”
은결은 당시의 대화를 뚜렷하게 기억하고 있다. 그녀는 무지에 대한 좌절감 같은 것을 토로한 다음 아무런 말도 잇지 못했다. 무엇에 대한 무지인지는 알 수 없지만 무지 자체에 대한 좌절감 같은 것은 은결 역시 드물지 않게 느끼는 것이기에 그녀의 심경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갑자기 그 이야기는 왜 꺼내는 것일까?
“내가 왜 그런 얘기를 꺼냈었냐 하면, 너 때문이야.”
“나, 때문이라고?”
은결은 깜짝 놀란다. 여러 가지 생각이 그의 뇌리를 스쳤다. 왜 내 이름이 여기서 나와야 하는 것일까. 혹시 자신의 지식이 그녀에게 주입된 것을 알아챈 것일까. 그것들이 아니라면 어떤 다른 이유가 달리 있는 것일까. 세연은 은결의 어느 생각에도 답하지 않는 투명하게 맑은 눈으로 그를 바라보며 이어서 말한다.
“그래.”
그녀의 대답은 은결과 연결된 어떤 사건이거나 기억을 지칭하는 것 보다 은결이라는 총체를 지칭하는 것 처럼 들리는 대답이었다. 그러나 여전히 은결은 그녀의 대답에서 그 의미를 충분히 이해할 수는 없었다. 세연은 계속 말했다.
“은결이 너를, 정말 알 수가 없다고, 느꼈었거든.”
“어, 그건-”
당혹감이 마음을 집어 삼켰다. 은결은 곤혹스러웠다. ‘너를 알 수가 없다.’ 요 일주일, 은결은 그 물음에 답하기 위해 노력했고, 그 결과로 파멸했다. 그런데 세연에게서 이런 말을 듣게 되다니. 하지만 은결이 진정으로 벽을 쌓았던 친밀한 타인이 있다면 그것은 틀림없이 세연이다. 세연이야 말로 은결을 갈구하지만 은결의 한 조각도 얻지 못했다. 어쩔 수 없었다. 그녀와 은결의 관계는 전략적인 것이었고, 반드시 해소되어야할 일시적인 것일 뿐이었다. 은결의 속내를 모르는 세연은 킥킥거리며 그의 당황하는 모습에 웃었다. 그리고 안심시키듯 설명한다.
“아마 네가 사과해야 할 일은 아닌 것 같아. 아마 내가 너에 대해 모르게 된 것은 너 때문이 아니라 나한테 원인이 있었던 것 같으니까.”
은결은 안도하지만, 그러나 어쩔 수 없는 쓴 맛을 느낀다.
“너 한테, 원인이 있다니?”
“곰곰이 생각해 봤는데, 내가 너를 모르게 된 것은, 아마 너를 좋아하게 되었기 때문인 것, 같거든.”
얼굴을 새빨갛게 물들이며, 세연은 고백하듯 말했다.
*진도 해체하고, 사설도 끝났고. 확실히 끝은 끝이군요.
*중반 이후로 언급된 것들은 대부분 전반에 언급되었던 것들을 다시 재언급하면서 그것들을 통일성 있게 엮어내는 작업을 하는 것이기 때문에 어려움을 느끼시는 분들은 다시 한 번 정도 더 읽어보는 정도로 어려움 없이 이해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이 글이 끝나고 나서 쓰는 글에서는 ‘근대’라는 문제와 완전히 단절된 채 글을 적어볼 생각입니다. 아마 많은 분들이 이미 알고 있겠습니다만, 근대의 문제는 클라우스 학원 이야기, 이글, 그리고 사실은 서브라임에도 굉장히 중요한 환경이자 동인으로 작동하고 있기 때문에 한 번쯤 철저하게 떨어뜨린 다음 글을 적어볼 필요가 있다고 느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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