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희망을 위한 찬가-271화 (271/300)

#   272-희망을 위한 찬가 - 희망을 위한 찬가(21)

#

손끝이 기호에 가 닿는다.

응결된 에너지가 기호와 반응한다. 은결은 기호를 옮긴다. 마지막 맞물려진 조각이 빛났고, 완연히 다른 형태를 이룬다. 은결은 걸음을 뒤로 물린다. 한 발자국, 두 발자국. 걸음을 옮길 때 마다, 떠오른 기호의 조합은 시야에 복잡하게 머물렀다. 그리고 은결이 걸음을 멈추었을 때, 그의 시야 안에는 많은 기호의 연결이 이루고 있는 원형의 우주가 맴돌고 있었다. 은결은 눈을 감고, 눈앞에 있는 진의 모습을 마음속으로 음미한다. 푸르게 빛나는 달콤한 사탕을 핥듯이, 그의 이성은 텍스트의 구조와 의미를 이해해 나간다. 무척이나 아름다운 게슈탈트였다. 그는 다시 눈을 뜨고서 말한다.

“(끝났어.)”

그리고 은결은 시선은 돌려 옆을 본다. 소녀가 한 명 서 있다. 희미한 달빛을 받아 드러나는 선의 유려한 흐름이 지극히 매혹적이었다. 그녀의 아름다움에 감탄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건만, 은결은 새삼 그녀가 아름답다고 느낀다. 쿠로사카는 눈앞에 떠 있는 진법의 조화로운 통일성처럼 보기 좋았다. 은결은 ‘좋다’라는 관념에 마음이 답답했다. ‘좋다’는 그 앞을 허락하지 않는 막다른 골목인 것 같았다.

“(그런, 모양이군.)”

어딘가 당혹스런 목소리로 쿠로사카는 말했다. 잘 실감이 나지 않았다. 처음 시작할 때는 언제 끝날지 알지도 못하겠다고 초조하게 만들던 작업이었는데, 결국은 이렇게 끝났다. 복잡한 심경이었다. 어딘가 반갑기도 하고, 두렵기도 했다. 하지만 반복을 넘어 새로움으로 향하는 모든 것은 그런 복잡한 마음을 담는 것인지도 모른다. 은결은 다시 진법을 바라보며 담담한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이제 이 진을 가지고 아버지가 봉인한 상자를 열면 돼. 그러면 아마 원하는 정보를 찾을 수 있을 거야.)”

“(언제 할 거야?)”

“(내일. 가능하면 세연과 만나기 전에 보아둘 생각이야.)”

쿠로사카는 ‘음.’하고 말을 줄인다. ‘세연과’라는 말에 마음 한 곳이 불편해졌고, 그 불편해짐 자체가 다시 그녀를 불편하게 만들었다. 오늘 그런 꼴을 겪는 은결의 모습을 보고서도, 이런 못마땅한 마음의 반응은 없어지거나 억제되지 못한다. 겨우 없거나 억제된 척 할 수 있을 뿐이다. 세상에는 참으로 많은 것들이 마음대로 되지 않지만, ‘마음’이야 말로, 가장 마음대로 되지 않는 것 중의 하나인 것 같다.

‘(그러하기에, ‘마음’인가.)’

쿠로사카는 한 숨을 쉰다. 오늘 민성이 했던 이야기들이 떠오른다. 그는 은결이 괴로워하는 것을 보면서 기쁘다고 말했다. 그 기쁨이 자신의 마음에 다시 더한 비수가 되어 돌아올 것임을 알지만, 그래도 ‘기쁨’을 멈출 수는 없더라고, 말했다. 그러니까 이제 더는 아는 척 하지 말자고, 그는 은결에게 이야기했고, 이어서 늑대가 같은 이야기를 하며 은결에게서 떨어졌다. 마음은 어째서 그토록 비참해야만 하는 것일까. 거기까지 생각하고 쿠로사카는 이를 악문다.

그가 그렇게 말한 이유에는 틀림없이 자신이 포함되어 있을 거란 생각에 가 닿았기 때문이다. 직접적, 간접적, 모두 다.직접적으로는, 그에게 ‘은결’을 좋아하기 때문에 그의 마음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했었고, 간접적으로는 은결에게 그의 진실된 모습을 친구들에게 밝히라고 말했던 것이 다름 아닌 자기 자신이었으니까. 자신에 대한 회의감, 그리고 실망, 불안 혹은 무기력감 같은 것들이 이어서 찾아들었다. 나는 은결의 아버지에게 그가 이 일을 하는 것을 ‘견딜만’한 것에서 ‘보람된’ 것으로 까지 바꾸어 보겠다고 했지만, 이래서는, 과연 그것이 가능한 것일까? 오만이 아니었을까?

“(무슨 생각 하고 있는 거야?)”

생각은 단절되고, 쿠로사카는 살짝 놀라며 시선을 은결에게 준다. “(아, 무것도 아냐.)” 그녀는 붉어진 얼굴로 말을 얼버무린다. 은결은 희미하게 웃는다. “(고마워.)” 새벽녘 안개 너머 들려오는 먼 정적의 이야기 같은 말이었다. 쿠로사카는 눈을 크게 뜨고 은결을 본다. 은결은 설명을 덧붙인다.

“(네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 지 정도는 알고 있다는 말이야.)”

“(알고, 있다니?)”

“(민성이라던가, 내 일로 이것저것 생각하고 있는 거 아냐? 다른 것일 수도 있겠지만, 너는 착하고 책임감이 강하니까 그 일이 줄곧 마음에 걸렸겠지.)”

은결은 쿠로사카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물론 그는 그녀가 자신을 ‘좋아’하기 때문에 그렇게 고민하고 있는 것이기도 함을 알지만, 그 부분은 지적하지 않았다. 그녀의 마음에 아직 대답할 수 없다면, 필요하지 않게 그런 무거운 부분을 꺼내는 것은 옳지 않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은결의 지적이 옳았기 때문에 음, 하고 쿠로사카는 시선을 피했다. 자신의 마음을 그가 알아준다는 것은 기쁜 일이었지만, 동시에 밝히지 않은 속내를 뻔히 읽힌다는 건 유쾌하기 힘든 일이었다. 여전히 얼굴로 웃음을 띄우고 있는 은결은 쿠로사카에게 묻는다.

“(며칠 전에 네가 아버지와 대화한 거, 나에 대한 거였지?)”

“(그건...)”

쿠로사카는 대답을 망설인다. 하지만 은결의 표정을 보고 이내 고개를 끄덕인다. 그는 이미 다 알고 있다. 몇 가지 내밀한 진심에 대한 것들을 제외하면 특별히 비밀로 할 만한 내용이 아니기도 했기에 그녀의 대답은 별 망설임이 없었다.

“(어떻게 안 거야?)”

“(오늘 아버지가, 이 일을 그만두지 않겠느냐고 물었거든. 너와 아버지가 며칠 전에 갑자기 대화를 나눈거라던가, 그날 네가 나한테 했던 말들, 이런 걸 생각해 보면 뻔한 거지.)”

심장이 두근- 뛰었다. 쿠로사카는 현기증과 닮은 무언가를 느낀다. 그는 무어라 답했을까. 박수행. 입안에서 웅얼거리는 것 만으로도 무게를 느끼게 되는 이름이다. 비감 같기도 하고, 두려움 같기도 하고, 외경 같기도 하고, 경멸 같기도 하다. 외부인인 나에게 그러할진데, 아버지로서 그 거인을 두고 있는 은결에게, 그 이름은, 그리고 그 이름의 지시는 어떤 무게로 다가오게 되는 걸까? 더구나 그는 오늘 당장, 그렇게, 그렇게나 아픈 일을 겪어야 했고, 나한테는, 그 아픔에 대한 아무런 대답이나 위로도, 준비되어 있지 않은데. 그래도 은결이, 아버지의 그 이야기를 거절했으면, 하고 바라게 된다. 곧 혐오감 같은 것이 이어졌다. 이건 이기심이야. 자신에게 그의 아픔에 대한 아무런 위로나 대답도 없음을 알고 있으면서- 그러면서, 그가 아버지의 제안을 거절하길 바라다니. 그가 어떤 선택을 하든, 내게는 아무런 권리도 없는데. 쿠로사카는 입안이 마르는 것을 느낀다.

“(뭐라고, 답했어?)”

“(나는 ‘아버지 당신을 부정하겠습니다.’ 라고 말했지.)”

은결은 평범한 대화를 하는 것처럼 그녀의 물음에 답했다. 답에 깃든 희미하지만 지워질리 없는 쓴 맛은 분명했지만, 쿠로사카에게 그 쓴 맛보다 먼저 느껴진 것은 기쁨이었다. 하지만 기쁨이 옅어지기도 전에 그녀는 은결의 그 대답에서 기이함을 느낀다. 제안을 거절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를 부정한다니, 그것은 무언가 다른 의미를 품는 것 같았다. 쿠로사카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건, 단순히 제안을 거절한 것 처럼 들리진 않는 대답인걸.)”

“(맞아. 제안을 거절한 이상의... 대답이었지.)”

고개를 끄덕이고, 은결은 밤하늘을 본다. 쿠로사카는 조용하게 이어질 답을 기다린다. 기다음에 응해 은결은 계속 이야기 한다.

“(말 그대로야. 나는, 아버지를 부정한 거야. 아버지의 세계관이라던가, 그런 것들을... 말이지. 오해는 하지 마. 아버지를 싫어하게 되었다던가 하는 차원은 절대 아냐. 그냥, 이상적 존재로서의 아버지를... 부정한거야.)”

“......”

대답의 와중에 감정이 차오른 듯, 은결의 말에는 점차 물기가 섞여 들어간다. 쿠로사카는 어떤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안타깝다고, 쿠로사카는 느낀다.

“(하지만 이건 새삼스러운 거야. 단지, 이제까지 바라보지... 못하던 것 뿐이야. 8년 전에, 아마 나는 벌써 이 일을... 했었던... 거야. 원하던, 원하지, 않았던. 그렇지 않았다면, 만일 아버지를 지금에서야 부정하는 거라면... 이렇게 슬프기보다, 도리어 분하지 않았을까?)”

은결은 눈물을 머금은, 그러나 눈물을 흘리지 않는 얼굴로 말했다. 그의 얼굴을 보며 쿠로사카는 수행이 얼마 전에 해 줬던 이야기를 기억한다. 그는 은결에게 신이 없다고 말했고, 신이 없기에 이 일을 하는 것은 많이 괴로울 거라고 말했다. 그것은 그가 은결이 이 일에서 떠나야 한다고 생각했던 작지 않은 이유 가운데 하나였다. 그런데, 오늘 그는 아버지를 정면에서 부정했다고 한다. 그런 결여를 껴안고, 앞으로 쭉 이 일을 한다고? 쿠로사카는 숨이 막혔다. 그녀는 충동적으로 묻는다.

“(어떻게 아버지를, 부정할 수 있었던 거야?)”

그녀의 물음은 ‘어떻게’로 시작했다. 일본어로 'どうやっで' 였다. ‘어째서’(どうしで), 나 ‘왜’(なぜ)가 아니었다. 그녀가 그렇게 물었던 것은 ‘어째서’나 ‘왜’라는 방식으로 은결의 대답을 이해할 수 없다고 직감했기 때문이다. ‘어째서’나 ‘왜’는 그 질문에 대한 가능한 답변의 방식이 마치 외부에 이미 있었던 것인양 생각하게 한다. 하지만 은결에게는 그런 것이 불가능하다고 그녀는 느꼈다. 여기서 부정의 근거는 주어지거나 찾아낸 것이기 보다, 만들어낸 것에 가까운 것 같다는 감각이었다.

쿠로사카의 질문에 은결은 마음을 되짚었다. 혼곤스러웠다. 많은 이미지들이 마음을 떠돌았다. 그것은 언젠가 읽었던 텍스트의 한 줄인 것 같기도 했고, 언젠가 겪었던 고통의 모습인 것 같기도 했고, 언젠가 생각했던 마음의 조각인 것 같기도 했다. ‘그런 세계를 줄 수 있어.’ ‘나는 절벽에서 굴러 떨어지길 주저하지 않을 거야! 너는 어때!’ 이미지. 뒤섞이는 이미지. 마침내- ‘상상하도록 하게’ 물론! 이를 악물고, ‘상상하고 있어.’ 어지러움이 정신을 강타했다. 은결은 미간을 좁히며 한숨을 쉰다. 무수한 것들이 희미한 조각을 쥐고 떠돈다. 그러나 그것들이 종합되어 나타나야할 깨끗한 상은 도무지 추줄 되지 않았다.

“(나도... 잘 모르겠어.)”

그래서 은결이 겨우 토해낸 대답은 죽어가는 별빛 같았다. 다음에 그는 물었다.

“(나는 아버지를 부정했어. 그렇지만 그 부정은 아버지를 다시 세우고 싶었기 때문이야. 아버지 당신이 이제 다른 갈 곳이 없다고 인정하는 것을 인정할 수는 없었어... 하지만 그건, 가능한 일일까?)”

“(물론이야.)”

쿠로사카는 부드럽게 웃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며 은결을 위로한다. 그리고 고통 혹은 죄책감과 닮은 감정을 느낀다. ‘물론이야.’ 라니. 기만적인 대답이었다. 그의 ‘견딜 만’을 ‘보람된’것으로 바꾸어 내는 것에 대해서도 불안을 느끼고 있으면서, 자신의 이야기를 따라주었기에 더 힘든 지경에 처박힌 그를 보았으면서 그의 고민에 대해 아는 척 위로한다니.

“(고마워. 이야길 했더니 조금은... 속이 후련해진 기분이야.)”

은결은 웃으며 말했다. 쿠로사카는 복잡한 마음을 억지로 누르며 그에게 마주 미소를 보였다.

*리플을 답시다~

*알렉 같은 주인공이 아니라 알렉 같은 히로인도 괜찮겠죠. 이 경우는 주인공이 좀 불쌍하겠지만. 아니, 알렉은 원래 히로인이었던가.

#


0